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651
#650화
그날 부족 대회의와 함께 내궁에서 열린 연회는, 축시(丑時) 무렵이 다 되어서야 파장 분위기에 접어들었다.
나로서는 매우 안도할 만한 일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사방에서 느껴지는 시선과 수군거림을 밤새 들어야 했을 테니까.
“저 한족 친구 말인데, 아랫도리를 벗은 채로 전각 위에 올라가 있었다면서?”
“예? 그게 무슨 소립니까?”
“내 처조카가 내궁 경비 소속이잖나. 한 시진 전에 잠깐 비상이 걸린 게 저 친구 때문이었다는군.”
“그러고 보니 호각소리를 듣긴 했는데…… 아니, 그보다 한 시진 전이라면 소피 보러 간다고 사라진 것 아니었습니까?”
“소피 보러 간 게 아니라 다른 걸 보여 주고 싶었나 보지. 사람 취향이라는 게 그렇잖나. 뭐 중원의 풍습일 수도 있고.”
“저런. 중원에 그토록 미개한 풍습이 있었다니.”
“미개하기 짝이 없지.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대단한 것 같긴 해.”
“뭐가 말입니까?”
“그, 왜. 있잖나.”
“아…….”
“처조카 말로는 무기를 들고 있는 줄 알고 공격할 뻔했다더군. 횃불로 비춰 보기 전까지는 그게 창인 줄 알았다던데.”
“예? 아무리 그래도 창과 헷갈리다니. 그게 말이 됩니까?”
“어허. 이 사람. 별호에 괜히 용이 붙었겠나? 역시는 역시인 거지.”
“허어어어어!”
띠링.
– 당신에 관한 소문이 일파만파 퍼져나갑니다!
– 상당수의 유력 인사들이 소문에 반응합니다!
– 명성치가 소량 상승했습니다!
– 명성치가 소량 상승했습니다!
“…….”
제발 그만해. 그리고 명성치는 왜 또 오르는 건데.
‘인생 씨바 거…….’
나는 주위에서 들려오는 수군거림을 애써 무시하며 얼마 남지 않은 술잔을 기울였다. 그런 내 모습에 야수묘왕이 껄껄 웃으며 어깨를 두드렸다.
“너무 개의치 말게. 사내가 살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 뭘.”
“아니, 그렇게 말씀하시면 진짜 일부러 그런 것 같지 않습니까. 그냥 실수였다니까요. 워낙 급하게 나오느라 바지춤을 고정하는 걸 깜빡…….”
“응? 급하게 나올 일이 뭐가 있다고.”
“아, 그게.”
젠장. 말이 실수로 헛나왔네. 정체불명의 인물이 보낸 전서(傳書)에 관한 사실은 아직 야수묘왕에게도 알리지 않은 상태다.
잠시 침묵하던 나는 자포자기한 마음으로 입을 열었다.
“사실 일부러 한 거 맞습니다.”
“저런.”
“어릴 때부터 그랬어요. 지금도 종종 합니다.”
“어이구.”
“취미고 특기입니다. 제가 창 한 자루만 쓰시는 줄 알죠? 사실 두 자룹니다.”
“허어어.”
만약 내가 남만에서 죽는다면, 어떤 방식으로 죽건 간에 사인은 무조건 수치사다.
하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었다. 상대가 이런 방식으로 비밀리에 접선했다는 것은, 다른 이들에게는 알리지 말아야 한다는 뜻도 포함되어 있으니까.
‘최소한 남만야수궁 내의 그 누구도 알아서는 안 된다는 뜻이겠지.’
나는 분명 야수묘왕을 신뢰하고 있지만, 무림만큼 신뢰와 믿음이라는 단어가 싸구려 취급받는 곳도 없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아무도 모르니까.
그리고 이런 결정을 내린 데에는 야수묘왕이 이 사실을 알게 되면 다른 누군가가 눈치를 챌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한몫했다.
예를 들자면…….
‘저 인간이라든지.’
나는 무감정한 눈동자로 이곳을 응시하고 있던 백상과 눈이 마주쳤다. 보면 볼수록 도무지 생각을 읽을 수 없는 눈빛이다.
연회가 진행되는 내내 술과 음식에는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앉아 있던 그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새하얀 옷자락을 정돈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입을 열었다.
“궁주, 이미 밤이 깊었습니다. 이쯤에서 파하시지요.”
“흠. 그러지.”
야수묘왕은 별다른 고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도 대회의가 이어진다는 점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다들 무공을 익힌 절정 고수인 만큼 숙취는 없겠지만, 과한 분위기 속에서 마시는 술은 정신을 흐트러트리기 마련이다.
툭. 투둑.
손가락 끝으로 주독(酒毒)을 배출해 낸 야수묘왕이 멀쩡해진 얼굴로 연회의 끝을 알리자, 곳곳에서 아쉬움이 섞인 목소리들이 흘러나온다.
‘일단 저 사람들은 아니겠네. 곧 약속했던 시각이 다가오는데 연회가 끝나는 걸 아쉬워하는 걸 보면.’
아쉬워하는 이들의 면면을 빠르게 확인한 나는 야수묘왕을 향해 말을 건넸다.
“야율 대협, 저도 이제 들어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물론 그래야지. 한데 이번에는 어느 전각으로 갈 생각이냐?”
“…….”
거, 진짜.
내 표정을 본 야수묘왕은 무릎을 두드리며 웃었고, 한숨을 내쉰 나는 남호를 비롯한 사파 잡졸들과 함께 자리를 떴다.
어느새 밤은 깊었고, 시간은 인시(寅時)에 접어들고 있었다.
이제 전서의 주인을 만날 시간이다.
* * *
“혼자 가도 괜찮겠느냐? 함정일 수도 있다.”
화룡각에게 배정된 처소로 향하는 길. 나는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내는 남호를 안심시켰다.
“괜찮습니다. 그리고 어차피 남 노인은 같이 가 봤자 짐만 돼요.”
“…….”
“설마 따라오실 생각이었습니까?”
“이 정도면 제법 오래 살긴 했지만, 개죽음 당하긴 싫다.”
“그럼 처소에 계세요. 다른 짐덩이 둘이랑 같이.”
태산은 언제나처럼 별생각이 없었고, 사마표는 나름 사파 제일의 후기지수인 자신이 짐덩이 취급받는다는 것에 약간의 불만을 표했지만 내 한마디를 듣고 입을 다물었다.
“아. 억울하면 초절정 찍든가.”
“……”
“난 어떻게든 살아남을 수 있지만, 너희는 아니지. 돌아올 때까지 처소 주변이나 잘 경계하고 있어. 그사이에 검이라도 한 번 더 휘두르고.”
우리는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함께 처소로 들어갔고, 나는 일각을 기다린 뒤 은밀하게 빠져나와 곧장 어둠 속으로 녹아들었다.
‘인시 무렵. 서문이라고 했지.’
화살에 매달려 있던 전서의 내용이 함정인지, 제보를 위한 접선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저 직접 가 보는 수밖에.
쉬쉬쉭!
순찰을 돌고 있는 전사들의 이목을 속이며 이동하길 얼마나 되었을까.
저 멀리에서 메아리처럼 들려오던 환호와 온갖 소음이 가까워졌다.
쉬이이익! 퍼벙!
– 와아아아!
내궁에서 벌어진 연회는 이미 끝났지만, 외궁의 밤은 지금까지도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었다. 비단 오늘뿐만이 아니라 내일도, 모레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대회의에 참석하는 부족장도, 경계를 서는 전사들도 아닌 평범한 부족민들은 축제 분위기에 흠뻑 젖어 있었다.
‘이래서 외궁 쪽으로 장소를 정한 거군. 일 년 중 어느 때보다 사람이 많을 시기니까.’
내심 중얼거린 나는 자연스럽게 사람들 사이로 녹아들었다.
거리는 분위기에 알맞게 동물 가면을 쓴 이들로 인산인해였고, 지난번에도 사용했던 호랑이 가면을 착용한 나를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서문이면…… 저쪽인가?’
외궁은 축제 분위기로 한창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경계가 흐트러진 것은 아니었다.
곳곳에 배치된 전사들의 눈을 속이며 이동한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서문에 도착할 수 있었다.
사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역시 사람들이 우글거리는 서문 언저리 어딘가다.
‘일단 전서에 적힌 그대로 오긴 왔는데…….’
주위에 사람이 너무 많을뿐더러, 서문 근처라 그런지 배치된 전사들의 머릿수도 적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 천하대장군마냥 우뚝 서 있기만 하면 눈에 띌 것이 뻔했다.
‘이다음에는 어떻게 되는 거지?’
의문을 느낀 내가 주변을 둘러보던 그때였다.
“거기, 호랑이 가면 쓴 형씨. 할 거 없으면 와서 소면이나 한 그릇 하고 가지?”
호랑이 가면이라는 말에 고개를 돌린 나는, 근처 좌판에 앉아 있던 중년인과 눈이 마주쳤다.
눈빛과 인상은 평범하고, 비쩍 마른 체형의 그는 내 시선에 씩 웃으며 자신의 앞에 놓인 그릇을 들어 보였다.
“내가 원래 모르는 사람한테 말 거는 성격은 아닌데, 여기 국물이 기가 막혀.”
“……음.”
글쎄. 기가 막힌 건 국물뿐만이 아닌 것 같은데.
찰나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 짧은 순간, 말없이 중년인을 응시하던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마침내 마주하게 된 뜻밖의 접선자를 향해 한 줄기의 전음(傳音)을 흘려보냈다.
– 참 희한하게도, 잠깐 사이에 살이 많이 빠지셨네. 연회장에서는 이것저것 많이 드시는 것 같던데.
“……!”
툭!
비쩍 마른 몸이 동요로 움찔. 떨리는 것이 느껴진다.
나는 몰라보게 달라진 그가 떨어트린 젓가락을 주워 주며 전음을 이었다.
– 그래서, 이족의 대족장씩이나 되시는 분께서 어쩐 일로?
귓가를 파고든 전음에, 흑웅(黑熊)의 눈동자가 크게 뜨였다.
* * *
단번에 정체를 알아차린 것이 충격이었는지 흑웅은 놀란 기색이 다분했지만, 나 역시 그에 못지않게 놀랐다.
‘전서를 보낸 게 이 사람이라고?’
만난 시간도, 횟수도 적지만 흑웅이라는 사람에 대해서는 이미 나름대로 판단을 내렸다.
요희의 미모에 홀딱 반해서 간이고 쓸개고 내주는 한심한 인간. 줏대 없이 백상의 뜻에 따라 움직이는 허수아비.
그래서 더욱 놀라웠을지도 모른다.
지금 마주하는 그의 모습과 행동은 지금까지 내가 알고 있던 것과는 완전히 딴판이었고, 성지 순례를 가도 될 것 같던 풍만한 배둘레햄은 눈을 씻고도 찾아볼 수 없었으니까.
‘시스템이 아니었으면 꼼짝없이 속을 뻔했네.’
내심 혀를 내두른 나는 그의 손에 다시 젓가락을 쥐여 주었다. 주위의 이목을 신경 쓴 자연스러운 대사와 함께.
“이 양반 이거, 갑자기 젓가락은 왜 떨어트려? 아무리 몸에 힘이 없어도 그렇지.”
내 말에 정신을 차린 흑웅이 황급히 표정을 수습했다.
“아, 고맙소.”
하지만 그런 대화 속에서, 서로 간에 들리지 않는 전음이 오가고 있다는 것은 나와 흑웅만이 아는 사실이었다.
“어르신. 여기 소면 하나 주십시오.”
나는 주문과 함께 입술을 달싹였다.
– 화살에 묶여 있던 전서, 당신이 보낸 거 맞습니까?
허리 굽은 주인이 꿈쩍도 하지 않자 흑웅이 좌판을 쾅쾅 내리쳤다.
“주인장! 소면 하나!”
그러고는 나를 향해 씩 웃으며 말했다.
“이해하시오. 여기 주인장 연배가 구순이 넘어서 귀가 어둡거든.”
– ……맞네. 그나저나 축골공(縮骨功)으로 모습을 바꾸었는데. 어떻게 한눈에 알아봤지?
아하, 축골공.
흑웅의 깜짝 변신에 대한 의문이 하나 풀린다.
과거 적천강이 말해 준 바에 의하면 축골공은 뼈와 살을 고무줄처럼 늘이고 줄일 수 있는 무공인데, 익히는 과정이 까다롭고 고통스러운 탓에 중원에서는 익히는 이가 거의 없다고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한들 남만에서도 흔한 무공은 아닐 텐데.’
아직 해결되지 않은 의문이 많다. 나는 소면이 나오는 것을 기다리며 중얼거렸다.
“따끈한 국물이 좀 땡기긴 했는데, 잘됐네.”
– 알아본 건 중요한 게 아니니까 넘어가고. 그런 전서를 보낸 이유는?
흑웅이 젓가락을 챙겨 주며 대답했다.
“다른 건 몰라도 국물 하나는 죽여주지. 나이만큼이나 장사한 지 오래됐거든.”
– 반드시 알려야 하는 정보가 있었네.
“아, 그래요? 그럼 기대해 볼 만하지.”
– 죽이려고 한 겁니까, 아니면 알리려고 한 겁니까? 하마터면 머리통에 화살 구멍 날 뻔했는데.
– 자네라면 피할 거라고 생각했네. 백상 대족장도 자네에게 낭패를 면하지 못했는데, 화살 하나 피하지 못하겠나.
“…….”
그거 때문에 노출신룡이 된 건 아는지 모르겠다.
이참에 흑웅의 머리통을 한 대 때려 줄까 고민하던 나는, 관대한 마음으로 참아내며 물었다.
– 그래서. 그 반드시 알려야 하는 정보가 뭡니까?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그릇을 빤히 바라보던 흑웅이 힘겹게 입술을 달싹였다.
– 백상 대족장이…… 암천과 결탁했네.
“……!”
우둑.
순간 나도 모르게 힘이 들어간 손아귀에서, 젓가락이 힘없이 부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