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653
#652화
파스슥.
사마표는 알고 있었다. 지금 저 무성한 풀숲을 뒤흔드는 것은 그저 스쳐 지나가는 바람이 아니라는 것을.
족히 수십에 달하는 적들의 살기(殺氣)가 보이지 않는 칼날처럼 그를 향하고 있었다.
“청하지도 않았는데 찾아오고. 묻는데 대답도 안 하고…….”
불청객도 이런 불청객이 없다.
작게 혀를 찬 사마표는 자신의 독문병기인 흑룡도(黑龍刀)를 늘어트리며 입을 열었다.
“나와라. 얼굴이나 마주 보고 얘기하지.”
그리고 대답 대신 돌아온 것은 십여 자루의 비도였다.
쐐애액! 캉!
번개처럼 흑룡도를 휘둘러 비도를 쳐낸 사마표가 부드럽게 신형을 회전시킨다.
동시에 묵빛 도신을 휘감은 도기(刀氣)가 광풍이 되어 풀숲을 가르고 베었다.
쉬쉬쉬쉭! 서걱!
수백 개의 잎사귀가 조각조각으로 나뉘어 흩날렸고, 커다란 아름드리나무의 몸통에 희미한 실선이 그어졌다.
스륵, 쿠웅!
미끄러지듯 쓰러지는 거목. 사마표는 쓰러진 나무를 넘으며 공터로 다가오는 인영들을 응시했다.
동서남북. 전각을 중심으로 사방을 포위하듯 서서히 움직이는 삼십여 명의 적들은, 하나같이 검은 복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얼굴 한번 보는 것도 힘들군. 허락도 안 받고 찾아왔으면 복면이라도 걷고 사과하는 게 예의이긴 한데…… 아무래도 그럴 것 같지는 않고.”
사마표는 침착하게 상황을 받아들였다.
야심한 시각에 복면을 쓰고 온 불청객들. 비도로 인사를 대신하는 것을 보면 놈들의 목적은 터무니없을 정도로 명확하다.
더군다나…….
‘하필이면 그가 없을 때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삼류 왈패처럼 입이 지저분하고, 틈만 나면 누군가를 쥐어박아야 하는 손버릇을 가진 각주 놈이 문득 떠오른다.
‘진태경.’
도무지 종잡을 수 없어 사고만 치고 다니는 종자지만, 그래도 이런 상황에서는 누구보다 믿을 수 있는 인간이기도 했다.
고작 스물두 살의 나이로 천하 무림에 족적을 남긴 괴물이었으니까.
하지만 우연인지 필연인지. 지금 진태경은 자리를 비운 상태였고, 만약 남아 있었다면 큰 힘이 되었을 송일섬과 주화란. 비록 그들에게는 못 미쳐도 최소 일 인분 정도는 하는 혁무진도 없었다.
현재 남아 있는 것은 자신과 일찌감치 잠들어 버린 태산. 그리고 전력으로 칠 수도 없는 평범한 늙은이인 남호뿐.
반면 적들의 머릿수는 서른에 육박한다.
‘아니, 숫자가 문제가 아니지.’
내심 중얼거린 사마표는 빠르게 주위를 훑었다. 그물망처럼 서서히 옥죄어 오는 적들이 내뿜는 살기는, 어설픈 무림인의 그것이 아니었다.
‘중원으로 치자면 하나하나가 초일류에서 절정. 도대체 남만 어디에서 이런 놈들이 나타난 거지?’
중원 무림은 실로 광대하나, 백사장의 모래알처럼 수많은 무림인들 중에서도 절정 고수는 그리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런데 중원에 비할 수 없는 남만에서, 그것도 이 정도 수준의 전사들을 서른이나 동원해서 습격을 해 오다니.
다행히 그리 높은 수준은 아니었지만, 사마표가 적잖이 놀라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더군다나 이곳은 한참 떨어진 외곽이라고는 해도 분명 남만야수궁의 내궁(內宮)에 속한 영역이었으니까.
“누구냐, 너희는.”
쐐애애액! 콰득!
물음에 대한 답 대신, 아슬아슬하게 목을 스쳐 지나간 단창(短槍)이 전각의 문을 박살 냈다.
그리고 그것이 전투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파파팟!
희미한 달빛을 가리며 날아드는 암기와 화살. 그리고 빛살처럼 쇄도하는 그림자들.
동시에 사마표의 손에 들린 흑룡도가 바람을 가르며 움직였다.
쉬이이잉! 서걱!
강맹한 도기가 허공을 격하고 암기와 화살을 휩쓸었다. 단숨에 화망(火網)을 파훼한 사마표를 향해 좌우로 칼날이 짓쳐 들었다.
쉬익!
급소를 노림에 있어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손속.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는 합격술(合擊術).
아마 사마표가 별다를 것 없는 절정 고수였다면 이 공격으로 큰 상처를 입었거나, 혹은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하지만 사마표는 달랐다.
그는 실전 경험이 부족한 애송이 후기지수가 아니었고, 정파의 절정 고수처럼 고리타분하지도 않았다.
사마외도(邪魔外道)의 가장 큰 가치는, 바로 생존이다.
달칵, 퍼걱!
둔탁한 소음과 함께, 사마표의 좌우를 노리고 달려들던 두 명의 절정 고수가 썩은 고목처럼 허물어졌다.
복면 위로 드러난 눈은 크게 뜨여 있었고, 미간 사이에는 한 뼘 길이의 작은 화살이 깊숙이 틀어박혀 있었다.
‘성공이군.’
사마표가 이 무더운 날씨에도 단출한 무복 대신 얇은 장삼을 걸친 이유는 간단했다. 풍성한 소매 안에 암기를 숨길 수 있으니까.
정해진 각도로 손목을 비틀면 장전된 화살이 발사되는 이 기관장치의 원리는 간단했지만,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는 어떤 것보다 치명적이었다.
“병신들.”
씹어뱉듯 중얼거린 사마표는 쓰러지려는 두 시신을 끌어당겨 앞뒤로 세웠다.
푸푸푹!
부지불식 간에 날아온 암기가 조금 전만 하더라도 아군이었던 시신을 벌집으로 만들었고, 사마표는 방패로 삼은 시신의 옆구리 사이로 소매를 겨누었다.
달칵, 푸푹!
하지만 이제는 적들도 상황을 인지하고 있었다.
애당초 노렸던 미간 대신 팔뚝에 박힌 화살. 이미 두 번이나 보여 주었으니 다음부터는 통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투둑.
사마표의 판단은 신속했다.
소매에 숨겨 둔 기관장치를 해제한 그는 기합과 같은 외침을 내지르며 적들을 향해 쇄도했다.
“태산!”
쉬쉬쉭!
스물일곱으로 줄어든 복면인들이 이리처럼 사마표를 에워쌌다.
* * *
쾅!
한참을 뒤척이다가 겨우 잠에 들었던 남호는 눈을 뜨자마자 생각했다.
‘어떤 호로 새끼일까.’
늙어서 안 좋은 점은 헤아릴 수 없이 많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서러운 것은 밤잠이 줄어든다는 거다.
그런데 감히 팔순 노인의 단잠을 방해하다니. 관절이 삐걱거리는 몸을 일으키며 남호는 굳게 다짐했다.
‘만약에 태산, 그 아귀 같은 놈이 야식을 처먹느라 내 잠을 깨웠다면…… 내 이번에는 절대 쉽게 넘어가지 않으리라.’
이래 보여도 은영각 짬밥만 오십 년이다.
정마대전 때 몸과 마음을 갈아 가며 헌신했으니, 하남에 서신을 보내서 태산을 무림 공적으로 만들어도 천면호리가 한 번쯤은 눈감아 줄 것 같았다.
‘놈이 암천의 끄나풀이라고 하면 믿어 줄까?’
하지만 남호의 그런 고민은 얼마 지나지 않아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창밖에서 들려오는 요란한 소리 때문이었다.
“태산!”
쉬쉬쉭! 캉!
차차차창!
창가에서 멍하니 공터를 내려다보던 남호는, 잠시 헛것을 보나 싶어 눈을 비볐다.
하지만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은 꿈이 아니라 틀림없는 현실이었고, 사마표가 피해 낸 누군가의 검기는 남호가 서 있는 창가를 훑고 지나갔다.
서걱! 쿠궁!
그리고 남호는 마침내 상황을 깨달았다.
‘습격!’
그것도 철저히 계획된 습격이다. 그 미친놈, 아니 진태경이 자리를 비웠을 때 쳐들어온 것만 해도 알 수 있었다.
‘이런 개 같은 상황을 봤나. 도대체 누가……!’
이제 잠에서 깼다는 불쾌함은 남호에게 있어 아무런 문제도 되지 못했다. 잠시 후면 잠이 아니라 목이 달아날 판국이니까.
사마표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잘 싸우고 있었지만, 이대로라면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쓰러질 것이 분명했다.
게다가.
파파팟!
사마표를 놔둔 채 전각으로 접근하는 일부 복면인들을 확인하자 더 이상 망설일 틈조차 없었다.
“으헉!”
질겁한 남호는 팔순이라는 나이가 무색할 만큼 빠른 속도로 방을 벗어났다.
그리고 곧장 보이는 복도 끝을 가로질러 굳게 닫힌 문을 열어젖혔다.
벌컥!
“기습! 기습이다! 지금 밖에 네 주군이……!”
그리고 방의 주인, 태산이 우렁차게 대답했다.
“커어어어억. 쿠우우우우!”
“야, 이 개호로 같은 놈아!”
“쿠허어어어억!”
남호는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잠을 잘 수 있다니. 이놈이 진정 사람 새끼란 말인가!’
전각 곳곳이 부서지고, 병장기가 부딪치는 소리가 하남까지 들릴 지경이다.
그런데 정작 전각 안에서 코까지 골면서 잘 수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노옴! 어서 일어나지 못하겠느냐!”
퍽! 퍽퍽!
영혼을 쥐어 짜내는 외침과 함께 흐르는 세월에 힘을 잃은 주먹이 태산의 턱주가리를 후려쳤다.
그리고 그런 남호의 정성에 하늘이 감동한 듯, 태산이 마침내 몸을 뒤척이며 반응했다.
“으응. 태산이.”
“그래! 어서 일어나거라! 어서!”
“으으응. 모기 싫다. 저리 가라…….”
“이 개애새끼야!”
흡사 통곡과도 같은 외침.
이제 남호가 눈물마저 글썽이고 있던 그때, 활짝 열린 창으로 흘러든 달빛에 누군가의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
남호의 몸이 덜컥 굳었다.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어느새 전각으로 침투한 복면인 셋이 그의 회색빛 눈동자에 비쳤다.
‘저, 저놈들은.’
흡사 유령 같은 움직임.
동시에 복면인들의 손에 들린 병장기가 달빛을 받아 새하얗게 빛난 그 순간, 장장 팔십여 년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의 주마등을 겪은 남호는 태산을 깨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을 깨달았다.
“태산! 네 이놈!”
스윽.
외침과 함께 복면인들의 병장기가 들어 올려졌다. 죽음을 떠올린 남호가 질끈 눈을 감으며 외침을 이었다.
“이놈들이 네 고기 다 뺏어 먹는다!”
그리고 다음 순간.
“안 돼! 태산이 고기!”
마법처럼 눈을 부릅뜬 태산이 복면인들을 향해 일권(一拳)을 뻗었다.
뻐억! 콰과과광!
* * *
후우욱. 훅.
사마표는 거친 호흡을 가다듬었다. 상반신이 피에 흠뻑 젖은 그를 주시하는 복면인들의 시선은 처음과 달리 은은한 두려움이 배어 있었다.
그만큼 사마표의 분전은 그들이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거칠고, 치열했으며 잔혹했다.
전신에 숨겨 둔 온갖 암기와 독, 게다가 오직 살생을 위한 실전성을 기반으로 한 무공까지.
하지만 더욱 무서운 것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의 태도였다.
“누구든 와라. 맹세컨대 내 전부를 걸고 죽여 주마.”
거친 호흡을 내뱉으면서 피칠갑을 한 채 덤벼드는 사마표의 손에 복면인들은 하나둘씩 쓰러졌다.
어느덧 스물에 달하는 시신이 땅바닥에 널브러져 있었고, 그들 중 일곱은 중원 어디에서도 인정받을 수 있는 절정 고수였다.
‘이런 괴물 같은 놈.’
그리고 복면인들이 동시에 같은 생각을 떠올린 그 순간.
“안 돼! 태산이 고기!”
우지직! 콰과과광!
무너지는 전각 속에서 진짜 괴물이 나타났다. 팔 척에 달하는 미친 신장과 엄청난 떡대. 그리고…….
“태산이 고기! 고기 어디 있나!”
이 세상의 것이 아닌 것 같은 광기.
꿀꺽.
저놈은 또 뭐지?
복면인들이 마른침을 삼키던 그때, 괴물의 등 뒤에서 자그마한 노인이 고개를 쏙 내밀더니 손가락으로 그들을 가리켰다.
“저놈들 보이지?”
“태산이! 보인다!”
“내가 아까 다 봤는데, 저놈들이 네놈 고기를 다 훔쳐 먹었다.”
“태산이이이이! 용서할 수 없다!!”
도대체 고기는 뭐고, 훔쳐 먹은 건 뭐란 말인가.
당황한 복면인들이 주춤거리는 모습에 사마표가 피에 젖은 이빨을 드러내며 웃었다.
하지만 그가 바라보는 곳은 태산이 아닌, 공터를 훤히 내려다볼 수 있는 언덕 위였다.
아니, 정확히는 언덕을 털레털레 내려오는 누군가였다.
“잠깐 자리를 비우면서도 혹시나 했는데.”
저벅저벅.
느긋하게 걸어온 청년, 진태경이 사마표에게 물었다.
“혹시 네 친구들이냐?”
사마표는 크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