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656
#655화
남만은 중원과 분리된 소국(小國)과 같고, 남만야수궁은 한 나라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왕궁이다.
당연히 내궁 역시 그 규모가 거대할 수밖에 없었다.
전사, 숙수, 하인, 맹수들을 관리하는 사육사 등 내궁에 머무르는 이들의 머릿수를 모두 합하면 일천에 달하고, 지금처럼 부족 대회의가 열리는 상황에서는 몇 배로 불어난다.
하지만 그 수많은 사람 사이에서도 가장 중요한 이들은 따로 있었다.
바로 네 명의 대족장들이다.
남만에 존재하는 서른두 개 부족 중 가장 강성한 네 개의 부족을 이끌고 있으며, 차기 남만야수궁주가 될 수 있는 실력자들.
그런 만큼 대족장들이 가진 영향력은 막강했고, 궁주를 제외한 세 명의 대족장들은 대대로 특혜를 보장받았다.
쉬쉬쉭!
현재 옆에서 내달리는 야율목이 하는 말처럼.
“아버님을 제외한 모든 부족장은 각 부족의 본거지에 머무르며 사전에 통보를 해야만 내궁에 출입할 수 있지만, 대족장들만큼은 예외다. 그들에게는 자유로운 통행과 함께 내궁의 거처가 주어지지.”
동(東), 서(西), 남(南), 북(北).
북쪽은 대대로 남만야수궁주가 맡았고, 다른 대족장들은 각 방위에 저마다의 거처를 마련했다고 했다.
고위 인물에게 내리는 일종의 관저(官邸)인 동시에, 중원식으로 해석하자면 천자가 휘하 제후에게 왕부(王府)를 여는 것을 허락해 준 셈이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전력을 다해 달려온 나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흥건하게 고여 있는 핏물과 시신, 그리고 누군가에 의해 파괴된 건물의 잔해였다.
“이게 무슨…….”
귓가를 파고드는 남호의 침음성. 나는 전신의 피가 싸늘하게 식는 듯한 느낌을 받으며 고개를 들었다.
부서진 대문 위로 기울어져 있는 목판과 글씨가 보였다.
서요부(西瑤部).
이 장원이 누구의 소유인지 알려 주는 세 글자. 문득 고혹적인 눈웃음을 짓던 어느 여인의 모습이 눈앞을 스쳤다.
‘요족의 대족장. 요희.’
아름다움이라는 단어보다는 요사스럽다는 말이 더 어울리는 여인.
그녀가 정말 오늘 밤 벌어진 습격의 흉수인지는 모르겠지만, 두 가지 사실만은 확실하다.
요희의 취향이 듬뿍 들어간 이 화려한 장원은 더 이상 전처럼 아름답지 않다는 것.
그리고 씻은 듯이 자취를 감추었다는 것.
저벅.
반쯤 부서진 대문을 넘어 들어서자, 곳곳에 널브러진 시신과 맹수들의 사체가 보인다.
각자의 색을 지니고 있었을 형형색색의 꽃밭은 온통 붉은 핏물에 물들어 있었다.
“……시벌.”
참지 못하고 욕설을 중얼거린 그때, 나와 함께 나란히 걸어 들어오는 야율목을 발견한 전사 중 하나가 다가왔다.
“오셨습니까, 소궁주.”
야율목이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고생이 많다. 추가로 발견된 점은?”
“없습니다. 시신이 늘었다는 것을 빼면요.”
무거운 목소리로 대답한 전사의 등 뒤로, 나란히 누워 있는 시신들이 보인다. 몇 걸음 떨어지지 않은 우물에서는 서너 명의 전사가 물에 젖어 축 늘어진 호랑이를 끌어 올리는 중이었다.
“지금까지 확인된 숫자만 말씀드리자면, 요족 전사와 그들이 부리는 맹수들을 합쳐 족히 일백을 헤아립니다.”
“생존자는?”
야율목의 물음에 잠시 침묵하던 전사가 대답했다.
“……현재로서는 전무합니다.”
현재로서는?
글쎄. 내 생각에는 앞으로도 전무할 것 같은데.
내심 중얼거린 나는 누워 있는 시신들을 향해 다가갔다.
반사적으로 앞을 막아서려던 전사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움찔하며 물러났고, 나는 시신들의 몸에 난 상흔(傷痕)을 살폈다.
이들이 어떤 방식으로 의문의 습격자와 싸웠는지, 또 어떻게 죽음을 맞이했는지.
그리고 깨달음과 동시에 야율목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알아낸 것이 있나?
동시에 이쪽을 향해 쏠리는 수십여 쌍의 시선을 느끼며, 나는 짤막하게 대꾸했다.
“강기(罡氣).”
“……!”
“……!”
보이지 않는 동요가 퍼져 나간다. 나는 딱딱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상대는 틀림없이 초절정 고수야. 이들 중 대부분은 마지막 순간까지 기습을 눈치채지 못했겠지. 그만큼 무공의 격차가 컸을 테니까.”
초절정은 극소수의 선택받은 자들에게만 허락된 영역.
무수한 고난 끝에 벽을 넘어 위대한 경지로 발돋움한 초절정 고수들은 말 그대로 초인(超人)이 된다.
단 한 번 검을 휘둘러 일류 고수 수십을 죽일 수도 있고, 적수공권으로도 십여 명의 절정 고수를 피떡으로 만들 수 있는 이들.
오늘 밤, 이곳을 습격한 흉수가 바로 그랬다.
‘극히 빠르고 간결하며, 더할 나위 없이 치명적인 솜씨.’
시신들에 남아 있는 상흔을 보자마자 알아차렸다. 흉수는 닳고 닳은 살인자라는 것을.
놈은 결코 부족하지도, 그렇다고 과하지도 않은 힘으로 장원 안의 모든 생명체를 도륙했다.
일 촌(寸)의 깊이만으로도 목숨을 빼앗을 수 있다는 것은 천하 무림의 모두가 아는 사실이지만, 그렇게 일백을 헤아리는 전사와 맹수를 몰살시킬 수 있는 것은 초절정 고수뿐이다.
그리고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분명했다.
– 이 모든 것이, 백상의 소행이라는 거냐?
귓가를 파고드는 나직한 전음(傳音). 나는 충격에 휩싸인 사람들 사이로 딱딱하게 굳어 있는 야율목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 글쎄.
– 글쎄라니?
– 남만에서 이 정도의 경지에 다다른 고수는 둘밖에 없어. 한 명은 알다시피 백상이고. 다른 한 사람은……. 남만의 모두가 잘 아는 사람이지.
순간, 야율목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리는 것이 보였다. 소리라도 지를 듯이 입을 크게 벌린 녀석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 너는, 이 일의 흉수가 아버님이라고 말하고 싶은 건가?
– 그럴 리가.
– 그렇다면 왜…….
– 이대로면 너무 뻔하다는 얘기지. 최소한 암천이 직접 개입했다는 건 확실하고.
초절정 고수는 중원에서도 극히 드문 수준의 고수지만, 남만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개인적으로 백상에 대한 의심이 있다고는 해도 이 정도의 돌대가리는 아니다.
아마도 최소한 암천에 소속된 초절정 고수를 동원했겠지.
‘한 발자국 떨어져서 상황을 지켜보는 것 같더니, 드디어 직접 나선 건가?’
하지만 무엇을 노리고?
머릿속에 떠오른 의문을 내심 중얼거린 나는, 전음 대신 소리 내어 물었다.
“직접 확인해 보고 싶은 게 있는데. 잠깐 자리를 옮길까?”
내 말뜻을 알아들은 야율목이 눈짓하자 주위의 시선들이 떨어져 나간다.
나와 야율목, 그리고 남호까지. 우리 셋은 장원의 중심에 위치한 전각 내부로 들어갔다.
그리고 모두가 예상했던 대로 온갖 진귀한 집기로 가득했을 그곳은 한바탕 폭풍우라도 휩쓸고 지나간 것처럼 엉망이었다.
“한판 제대로 붙은 모양이군.”
남호의 중얼거림에 야율목이 굳은 얼굴로 대답했다.
“하지만 전투는 불과 촌각 만에 끝났소. 상대가 초절정 고수였으니 당연했겠지.”
“자네가 그걸 어찌 아나?”
“짧지만 분명한 굉음이 들렸으니까. 내가 보고를 듣고 도착했을 때는 이미 모든 것이 끝난 후였소. 요서부에 남아 있던 것은 피와 시체, 그리고…….”
드르륵.
커다란 미닫이문을 열어젖힌 야율목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저것들뿐이었지.”
야율목이 ‘저것들’이라 부른 것은 두 개의 물건이었다.
난장판이 된 방 안에 떨어져 있는 향낭(香囊). 그리고 쓰임새는 그보다 더 귀하고, 끔찍한 향을 풍기는 무언가.
“으음.”
남호는 침음성을 흘렸고, 나는 망설임 없이 걸음을 옮겨 ‘그것’에 손을 댔다. 차갑게 식은 촉감과 함께 끈적한 핏물이 내 손가락을 적신다.
‘이건.’
눈이 달린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알아볼 수 있는 물건이다.
‘그것’의 정체는 손목이었다. 깔끔하게 잘려 나간 누군가의 손목.
“누구의 것인지 알아볼 수 있겠나?”
못 알아볼 리가.
투실투실하게 살이 오른 손목을 말없이 응시하던 나는, 야율목의 물음에 나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마도 흑웅이겠지.”
“맞다. 호위 넷을 데리고 요희 대족장을 찾았다더군. 동이부(東夷部)에서 확인해 주었다.”
요족이 서쪽에 서요부를 세웠다면, 흑웅이 이끄는 이족은 동쪽에 자리 잡아 동이부를 세운 모양이었다. 나는 흑웅의 손목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그때 시각은?”
“반 시진은 넘지 않았고, 한 식경은 족히 지났다더군.”
대충 시간을 가늠해 보니 나와 헤어진 직후다. 우선 바로 동이부로 갔다가 요희를 찾아간 것이 틀림없었다.
‘……이 미친 사랑꾼 새끼. 그새를 못 참고.’
나는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욕설을 참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했다. 지금은 냉정해야 할 때다.
아직 흑웅이 요희를 찾아간 이유도 모를뿐더러, 죽음이 확인되지 않은 이상은 모두를 의심해 봐야 했으니까.
“흑웅이 데려왔다는 호위들은?”
“죽었다. 다른 요족 전사들과 함께.”
그럼 그렇지, 씨발.
혹시나 해서 물어본 건데, 역시는 역시다.
“후우.”
깊은 한숨을 내쉰 나는 방 안을 천천히 살폈다.
난장판이 된 내부에는 저항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었고, 아마도 강력한 장력(掌力)에 의해 무너졌을 벽면 너머에는 아직 화려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후원이 보였다.
그곳에 남아 있는 아주 희미한 족적(足跡)도 함께.
‘신속하게 두 사람을 제압하고, 후원을 통해 빠져나갔군.’
비록 흔적이 너무 희미한 탓에 주인을 알아볼 수는 없지만, 족적을 통해 한 가지만큼은 확실해졌다.
흑웅이나 요희, 두 사람 중 하나가 벌인 자작극이 아니라 제삼자가 개입했다는 것.
불과 한 식경 전, 이 자리에는 적어도 세 사람이 있었다.
‘그중 한 사람은 당연히 초절정 고수고.’
그렇다면 이 족적의 주인은 누구일까. 남천마후? 아니면 그녀가 거느리고 있는 암천의 고수?
잠시 생각해 보던 나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내가 잔뼈 굵은 노강호도 아니고, 이 정도 단서로 얻을 수 있는 정보에는 한계가 있었다.
내 옆에는 은영각 요원으로 활동하며 수많은 정보를 접한 남호가 있긴 하지만, 그건 마두의 용모파기나 외적인 특징에 한해서일 뿐이다.
‘결국 무공과 식견, 둘 다 높은 수준에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는 건데.’
당장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름은 두 개뿐이었고, 그중 하나는 도무지 믿지 못할 사람이다.
생각을 끝마친 나는 야율목을 향해 입을 열었다.
“야율 대협께서는 언제 오시는 거지?”
“이미 수하를 시켜 기별을 넣었다. 지금쯤이면 다른 족장들과 함께 오고 계시겠지.”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이다. 현장 보존을 위해 흑웅의 손목을 제자리에 놔둔 나는 요희가 남긴 행낭의 냄새를 맡았다.
비단 주머니의 옆구리가 터져서인지, 무취(無臭)에 가까운 희미한 향만이 감돌고 있었다.
‘밝혀 낸다. 반드시.’
그리고 내가 내심 중얼거리던 그 순간.
전각 밖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드디어 오신 모양이군. 아버님이시라면 흉수의 정체를 알 수도 있을 거다.”
하지만 전각을 나서기도 전, 나는 야율목의 말이 틀렸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가장 먼저 도착한 것은 야수묘왕이 아니었고, 그가 말한 흉수의 정체는 내가 예상치 못했던 누군가였다.
“죄인이 제 발로 나오는군.”
무미건조한 백상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나는 깨달았다.
지금 남만에서 이와 같은 일을 벌일 수 있는 초절정 고수는, 백상과 야수묘왕뿐만이 아니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