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659
#658화
띠링.
– 돌발 퀘스트, [양자택일(兩者擇一)]이 생성되었습니다!
갑작스럽게 울리는 시스템 알림. 동시에 반투명한 홀로그램 창이 허공으로부터 불쑥 솟구쳤다.
퀘스트
[양자택일(兩者擇一)]이제 당신에게 남은 선택지는 오직 두 가지뿐입니다.
전력을 다해 저항하여 이 자리를 벗어날지. 혹은 순순히 투항하여 저들에게 사로잡힐지.
선택은 오롯이 당신의 몫이며, 모든 선택에는 그에 상응하는 결과가 뒤따를 것입니다.
등급 : 無
제한 : 진태경
임무 : [투항] or [저항] (미완료)
보상 : ???
실패 : ???
– 해당 퀘스트에는 두 가지 선택지가 존재하며, 반드시 이 중 하나만을 선택해야 합니다.
– 선택에 따라 주위의 여러 가지 요소가 변화합니다. 그 과정에서 특정 인물이 사망할 수도 있습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투항하기 / 저항하기
시스템 창을 확인한 뒤 드는 생각은 하나뿐이었다.
‘상황 참 거지 같네.’
양자택일.
갑작스럽게 발동한 퀘스트는 제목 그대로의 내용을 품고 있었다.
투항할 것인가. 저항할 것인가.
선택지는 오직 두 가지뿐이고 나는 반드시 무언가를 택해야만 한다.
현재의 상황이, 그리고 곳곳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의 주인들이 그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백상 대족장의 말씀에 찬성합니다.”
“옳소! 궁주께서 독단이라 생각하신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 대회의를 열겠소!”
“죄가 없다면 순순히 투항하여 조사에 임하면 될 터. 무엇이 문제란 말입니까?”
친(親) 백상파에 속한 부족장들의 외침을 듣고 있자니 실소가 흘러나왔다.
뭐가 문제냐고?
여기가 현대가 아니라 무림이라는 게 가장 큰 문제다.
21세기에서도 온갖 사법 비리가 벌어지는 마당에, 백상의 주도하에 구금된 내가 어떤 취급을 받을지는 안 봐도 뻔했다.
‘시작부터 죄인으로 낙인찍고, 그 방식 그대로 끝까지 몰아가겠지.’
그 과정에서 공명정대(公明正大)라는 단어는 찾아볼 수 없을 거다. 내가 얕은 생각으로 한 거짓말은 이미 들통났고, 백상은 증인과 명백한 정황을 내놓은 상황이니까.
이건 치밀하게 파 놓은 함정이다. 한번 발을 디딘 이상 추락할 수밖에 없는.
물론 이런 와중에도 내게 손을 내밀어 주는 이들 역시 있었다.
“미쳤군. 다들 정신이 나간 게야. 진태경을 척살하겠다고? 중원 무림 전체와 전쟁이라도 벌일 심산인가!”
“심지어 아직 그가 정말 흉수인지에 대한 여부도 확실하지 않소. 무림맹의 각주이자 화왕의 제자가 도대체 무슨 이유로 이런 짓을 벌인단 말이오?”
“그가 애뇌산에서 구출한 전사가 자그마치 이백여 명이다. 한데 그가 흉수라고? 아무리 한족이 싫어도 그렇지, 어찌 은혜도 모르는 금수(禽獸)와 같이 행동한단 말이냐!”
이번에는 야수묘왕을 따르는 부족장들의 외침이 울려 퍼졌다.
하지만 그 십수 명 중 정작 앞으로 나서는 이들은 소수였고, 적지 않은 부족장들은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상황을 지켜보거나 입을 굳게 다무는 것을 택했다.
‘그렇겠지. 어차피 나는 결국 외인(外人)이니까.’
애초에 남만인들은 한족에 대한 감정이 좋지 못했다.
한족인 내가 파격적으로 대회의에 참석할 수 있었던 건 애뇌산에서의 활약 덕분이었고, 그들이 허락할 수 있는 부분은 딱 거기까지였던 거다.
탓할 생각은 없다. 저들은 대세(大勢)를 읽었을 뿐이니까.
백상의 말처럼 당장 이 자리에서 대회의가 열린다고 해도 이 상황을 뒤집을 수는 없었다.
설령 야수묘왕이라 하더라도.
– 저, 아무래도 좆 된 것 같은데요.
내가 흘려보낸 전음(傳音)을 들은 야수묘왕의 미간에 깊은 골이 파였다.
– ……미친놈.
– 왜요?
– 지금 같은 상황에서도 농이 나오느냐?
– 사실대로 말한 건데요, 뭐. 그렇다고 어린애처럼 엉엉 울고 있을 수는 없잖습니까. 상황이 나아질 것도 아닌데.
담담하게 현실을 직시하는 내 전음에, 아수묘왕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 미안하다. 만약 백상의 말대로 대회의가 열린다면…… 나로서도 어쩔 수 없구나.
– 그래도 다행이네요. 야율 대협은 제 말을 믿어 주시는 것 같아서.
– 당연히 믿는다. 그래서 더 미안한 거고.
– 그럼 미안해하지만 말고 저 새끼들 아가리 한 대씩 때려 주시면 안 됩니까? 정 껄끄러우시면 제가 때리고요.
– …….
– 아니면 화염신장.
– 허, 이 정도면 적 노의 제자가 아니라 혈육이라 해도 되겠군.
적천강이라.
이름 석 자와 함께 문득 눈앞을 스치는 익숙한 얼굴에 입맛이 씁쓸해진다. 만약 이 상황에서 적천강이었다면 어떻게 대처했을까.
‘아니, 노야였다면 이 상황까지 오지도 않았겠지.’
나는 아직 적천강만큼 강하지도 않고, 무림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던 것이 무색할 만큼 미숙했으며, 적들은 생각 이상으로 철저하고 교활했다.
‘바둑으로 치면…… 내 행동은 악수(惡手)쯤 되려나.’
나는 바둑을 모른다. 하지만 내가 어렸을 적, 생전 아버지는 가끔 컴퓨터 앞에 앉아 인터넷 바둑을 두시고는 했다.
닉네임은 진세돌이었지만 승률은 형편없었고, 중국 국적의 유저에게 질 때면 ‘짱깨 새끼 바둑 좆같이 두네…… 타이완 넘버원.’이라고 중얼거리시다가 엄마한테 등짝을 얻어맞기 일쑤였다. 애 듣는 앞에서 욕하지 말라고.
전부 케케묵은 과거의 일이다.
아버지는 몇 해 뒤 몬스터 웨이브로 인해 갑작스럽게 돌아가셨고, 패배로 점철되긴 했어도 꾸준했던 아버지의 바둑 계정은 휴면 계정이 되었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어느 날 바둑에서 지고 있던 아버지를 지켜보던 그 날의 기억이 문득 떠올랐다.
‘아빠. 또 지고 있어?’
‘또 지다니. 아빠 이번 판만 진 거야. 아니, 아직 끝나지도 않았어.’
‘하지만 어제도, 그제도 지고. 아까도 지는 거 봤는걸!’
‘……귀여운 내 새끼. 벌써 이렇게 커서 애비 가슴에 대못을 박는구나.’
‘근데 왜 아빠는 맨날 져?’
‘음. 아빠가 악수를 뒀거든.’
‘악수?’
‘그 악수 말고. 나쁜 수라는 뜻이야. 어제 태경이가 체육대회에서 축구 했을 때, 실수로 공이 아니라 민준이 다리를 걷어차는 바람에 경기에서 진 거랑 비슷한 거란다. 나쁜 선택. 이해되니?’
‘웅웅. 이해됐어. 그럼 악수 두면 바둑 지는 거야?’
‘꼭 그런 건 아니지.’
‘왜?’
‘악수 한 번 뒀다고 승부가 끝나는 건 아니거든. 단지 악수를 반복해서 두다 보니까 지는 거지. 흠, 그러지 말아야 했는데.’
‘하지만 난 어제 바로 퇴장당했는데?’
‘아들. 그건 민준이 다리에 금이 가서 그런 게 아닐까?’
‘아항.’
‘……아항은 무슨. 민준이 부모님한테 사과하느라 아빠는 허리가 부러질 뻔했는데. 어쨌든 중요한 건 악수를 반복해서 두지 않는 거란다.’
‘악수를 반복해서 두면 어떻게 되는데?’
‘바둑으로 치자면, 소중한 돌들을 잃고 결국 지게 되겠지. 나쁜 선택을 한 대가로.’
‘나 알았어! 그래서 아빠가 맨날 지는 거구나!’
‘……여보! 태경이 좀 데려가! 여보!’
갑자기 왜 이런 기억이 떠오르는지 모르겠다. 아니, 사실은 알 것 같기도 하다.
덕분에 마음의 결정을 내릴 수 있었으니까.
– 하나만 약속해 주실 수 있습니까?
– 갑자기 왜 말이 없…… 약속?
– 네. 약속.
나는 야수묘왕을 똑바로 직시하며 전음을 흘려 보냈다.
– 만약 앞으로의 일이 어떻게 되더라도, 다른 사람들은 멀쩡하게 중원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해 주겠다는 약속이요.
– ……!
– 그거 하나면 됩니다.
– 네 녀석. 설마…….
– 약속했다는 뜻으로 이해하겠습니다.
무언가를 짐작한 듯, 눈을 크게 뜬 채 나를 바라보던 야수묘왕이 이내 착잡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다.
– 약속하마.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힘을 다해 네 수하들을 지킬 것이다. 네가 뒤집어쓴 누명 역시 밝혀 주마.
그래, 그럼 된 거지.
내심 중얼거린 나는 백상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아니, 옮기려고 했다.
덥석.
그 순간 등 뒤에서 뻗어 나온 두 개의 손이 내 옷자락을 움켜잡지 않았다면 그랬을 거다.
“진태경. 도대체 어쩔 셈이지?”
굳은 얼굴로 묻는 야율목. 그리고 이미 내 마음을 읽은 남호의 한 마디가 이어졌다.
“멍청한 놈 같으니. 스스로 범 아가리에 들어갈 셈이냐?”
“범 아가리인지, 개새끼 아가리인지는 잘 모르겠고.”
내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을 이었다.
“이렇게 된 이상, 뭐 어쩌겠습니까.”
그런 나를 바라보는 남호의 눈빛이 그 어느 때보다 깊숙하게 가라앉았다.
“나와 다른 대원들 때문이냐? 네 녀석이 이 자리를 피하면 우리가 해를 입을까 봐?”
“음. 글쎄요.”
“그런 생각이라면 썩 집어치워라. 그건 우리 중 누구도 바라지 않는…….”
“저도 압니다. 다들 그럴 거라는 걸.”
부드러운 어조로 남호의 말을 끊어낸 내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 반대였어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다른 대원들이 제 입장이었다면. 남 노인이 지금의 저였다면, 혼자 도망치진 않았을 거예요.”
“……!”
“나중에 보자고요.”
대답 대신 흔들리는 눈동자. 옷자락을 붙잡은 손을 떼어 낸 나는, 두 사람에게 눈인사를 건네고 걸음을 옮겼다.
저벅. 저벅.
어느새 주위에 내려앉은 침묵.
홀로 움직이는 내 발걸음 소리는 천둥처럼 울리는 듯했고, 그런 나를 응시하는 백상은 흔들림 없는 호수처럼 잔잔했다.
“드디어 현실을 깨달았나?”
“아주 오래전에 누가 그러더라고. 바둑에서 악수를 여러 번 두면 소중한 돌을 잃고 질 수밖에 없다고.”
차라리 이게 대국이었다면, 나는 악수고 나발이고 내키는 대로 나갔을 거다.
설령 지더라도 뭐 어떤가. 어느 유명 프로 기사는 그래 봤자 바둑, 결국 바둑이라는 명언을 남겼지만, 내게는 그래 봤자 바둑일 뿐이니까.
지고 난 후에는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짱깨 새끼 바둑 좆같이 두네.’ 하면서 바둑판으로 백상 뚝배기를 깨 버리면 된다.
하지만 이건 단순한 놀이가 아니고, 악수를 두면 돌 대신 내 사람을 잃게 된다.
‘주화란. 혁무진. 송일섬. 사마표. 태산. 남호…….’
만약 이 자리를 벗어난다 해도 그들 모두와 함께 남만야수궁의 천라지망(天羅蜘網)을 뚫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나를 믿고 지금껏 따라와 준 이들이니, 반드시 살려야 한다.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악수를 계속해서 두게 되면 소중한 돌을 잃고 패배한다……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현명한 자로군.”
“좋은 분이셨지. 최소한 너처럼 좆 같은 새끼는 아니었어.”
차차창!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사방에서 뽑혀 나오는 병장기. 그와 동시에 좁혀지는 포위망을 힐끗 바라본 백상이 소매를 내저었다.
“이번만큼은 악수를 두지 않은 것을 칭찬해 주마. 제아무리 화왕의 제자라 해도 어쩔 수 없었겠지.”
“너 같은 새끼 칭찬 듣자고 이러는 거 아니다.”
“뭐든 상관없다. 넌 이 길로 뇌옥(牢獄)에 갇힐 테니.”
“뇌옥이라. 그리 반가운 말은 아닌데.”
“수천 근의 철구도 준비되어 있을 테니, 기대해도 좋다.”
“그래. 기대감 때문에 벌써부터 불알이 다 떨린다.”
어느 정도는 예상했던 일. 담담하게 대답한 나는, 천천히 검을 거두는 백상을 향해 말을 이었다.
“그런데 넌 왜 기대 안 해?”
“뭐?”
“아까 그러지 않았나? 만약 도망치면 내 사람들도 전부 죽이겠다고.”
“갑자기 그게 왜…….”
이어지는 뒷말은 들을 이유도, 들을 필요도 없었다.
‘나한테 그딴 개소리를 했으면, 한 대 처맞을 것 정도는 알았어야지.’
들리지 않을 한 마디와 함께, 나는 빛살처럼 일권(一拳)을 뻗었다.
콰직!
그리고 결과를 확인하지도 않은 채, 재빨리 외쳤다.
“아, 항복! 항보옥!”
어쩔 건데, 시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