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66
#65화
진무경은 생각했다.
‘지난 삼 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그건 오랜만에 느껴 보는 당혹감이었다. 그리고 이 순간에도 당혹감은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었다.
쉬쉬쉭!
펑! 콰광!
공기가 터져 나가고 침실 안의 가구는 물론 벽까지 산산조각 난다.
하지만 그뿐이다. 진태경은 아슬아슬하게 자신의 공격을 피해 내고 있었다.
‘이걸 피한다고? 저놈이?’
보면서도 믿을 수 없는 광경.
그는 진태경이라는 인간을 잘 알았다. 명색이 무가의 자제면서 정신도, 육체도 나약하기 짝이 없는 놈.
코흘리개 시절에야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지만 진태경의 행보는 해가 지날수록 점입가경이었다.
‘어떻게 저런 놈이 내 동생인가 싶었지.’
열다섯 살 때였나? 저놈이 수련장에 의자를 가져온 그 날은 아직도 또렷하게 기억난다.
‘동생아, 그건 뭐니?’
‘의자.’
‘뒤에 한 글자 빼먹었다.’
‘의자요…….’
‘왜 가져 왔어.’
‘마보(馬步) 수련할 때 쓰려고요.’
‘아하, 마보 수련할 때 힘들어서?’
그 획기적인 발상에 진무경은 이마를 탁 쳤더랬다.
동시에 깨달음을 얻었다. 아, 이놈은 말로 하면 안 되는 놈이구나.
‘엎드려.’
갱생권의 탄생이었다.
‘그랬던 놈이, 뭐? 산서잠룡?’
처음 객잔에서 그 얘기를 들었을 때, 어이가 없어서 코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매담자가 이십 년만 젊었어도 늘씬하게 두들겨 패 주었을 것이다.
가문에 도착하자마자 태경의 방을 찾은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이제 하다 하다 소문까지 조작해?’
안 봐도 삼재검법이다. 대충 그림이 그려졌다.
할 줄 아는 거라고는 계집질밖에 없는 놈이 유명세 좀 타 보겠답시고 절정 고수 행세를 하는 거겠지.
너 오늘 잘 걸렸다. 딱 그런 마음으로 쳐들어왔다.
그런데…….
‘달라.’
처음 본 순간 알아차렸다. 크고 단단해진 근골. 삼류 파락호 같은 눈빛 깊숙이 숨어 있는 날카로운 기도.
이어 맞잡은 손은 거칠었고 힘이 있었다.
‘절정? 아니, 아니다. 아직은 초일류야.’
자신도 한 번 지나온 길이기에 알 수 있었다. 진태경은 아직 정제되지 않았다. 절정의 벽 앞에 서 있을 뿐이다.
그래서 더 놀라웠다.
‘도대체 어떻게?’
물과 햇빛이 있다고 모두가 자라는 건 아니다. 봄이 와야 싹이 트는 것처럼, 무공을 익히는 것에도 때가 있다.
진태경은 태원진가의 핏줄답게 괜찮은 근골을 타고났지만, 허송세월로 그 시기를 놓쳤다.
그랬던 놈이 삼 년 만에 이렇게까지 성장하다니.
‘환골탈태가 아니고서야…….’
쐐애액!
날카로운 파공성이 진무경의 상념을 깨트렸다. 아슬아슬하게 진태경의 주먹을 피해 낸 그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었다.
‘갈수록 빨라지고 있다.’
착각이 아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녀석은 빨라지고 있었다.
쉭!
지금조차도.
퍽!
팔을 들어 공격을 막아 낸 진무경의 심정은 당혹, 그 자체였다. 그런 그를 보며 진태경이 낄낄 웃었다.
“못 피할 것 같았지? 그래서 막은 거지?”
“……너.”
“내가 말했잖아. 따라잡는다고.”
“어떻게 된 거지? 공청석유라도 마셨나?”
“석유를 왜 마셔. 이거 완전히 미친놈이네.”
“……!”
난생처음 듣는 폭언에 진무경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그가 누군가. 홍안의 절정 고수, 무공의 천재! 진무경을 시기하는 중원 명문 세가의 자제들도 감히 이런 막말을 퍼붓지 못했다.
그런데 세 살 터울의 친동생에게 미친놈 소리를 듣다니.
“넌 죽었어.”
흉흉한 기세에 잠시 움찔했던 진태경이 피식 웃었다.
“말이 짧다?”
“뭐?”
“일각 버티면 내가 네 형이라면서? 일각 지났다. 그렇지, 무진아?”
숨도 제대로 못 쉬고 구석에 찌그러져 있던 혁무진이 눈치를 살피며 대답했다.
“예에, 아마도 그런 것 같은데요.”
하지만 이내 저를 죽일 듯이 노려보는 진무경의 시선에 거의 울먹이며 다시 답했다.
“아닌 것 같기도 하고요…… 저 그냥 나가 있으면 안 될까요?”
“안 돼.”
음산한 목소리로 중얼거린 진무경이 공력을 끌어올렸다.
절정 고수의 기파가 대기를 짓누른다. 바닥이 쩍쩍 갈라지고 공기가 터질 듯이 팽창했다.
그그극.
진태경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형님. 그건 좀 아닌 것 같습니다.”
반대로 형의 얼굴은 만면에 활짝 웃음을 머금었다.
“그냥 하던 대로 해, 이 새끼야.”
쾅! 콰과광!
굉음. 그리고 붕괴.
뒤늦게 도착한 진위경이 무너진 전각 앞에서 털썩 주저앉았다.
“막내야아-!”
스르륵, 쿵!
그때 건물의 잔해를 해치며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피풍의를 입은 그는 살았는지 죽었는지 분간이 안 가는 덩어리 하나를 짐짝처럼 내던졌다.
“아직 안 죽었어.”
그리고 잠깐 생각하다가 말을 이었다.
“한 명은 죽었을지도 모르겠군.”
그에 응답하듯 잔해 더미 속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끄어어어어.”
“수문조장이다!”
“구해! 약왕당으로 옮겨!”
진무경은 산뜻한 얼굴로 하늘을 바라보았다.
“아, 날씨 좋다.”
싸가지 없는 동생은 매가 약이다.
* * *
약재 특유의 냄새가 코끝을 찌른다. 나는 슬며시 눈을 떴다.
깨끗하게 치워진 방. 문밖에선 십여 명의 인기척이 바쁘게 오가고 옆자리에는 붕대를 칭칭 감은 채 잠들어 있는 혁무진이 보인다.
‘약왕당이군.’
이 정도면 거의 제2의 고향이다. 생각해 보면 전각에서 깨어난 날보다 약왕당에서 깨어난 날이 더 많은 것 같다.
아, 전각도 무너졌지. 참.
“시벌.”
진무경 이 무식한 새끼. 이제 잠은 어디서 자냐.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는데 이불 속에서 뭔가가 꼬물꼬물 움직인다.
‘뭐여, 이건.’
이불을 들추자 옆구리에 찰싹 달라붙어 있던 하얗고 동글동글한 생명체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잠깐의 침묵이 흐르고 내가 입을 열었다.
“너 여기서 뭐 하니?”
“합. 조용해! 조용!”
소천의 동생인 소율이다. 다섯 살 꼬마가 세상에서 가장 간절한 눈망울로 나를 바라본다.
“뭐 하는데?”
“조용히 해!”
“네 목소리가 제일 크거든?”
“합!”
뭘 하는지는 몰라도 인생 참 재미있게 사는구나.
나는 한숨을 내쉬며 이불을 덮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꼬물꼬물.
“푸하!”
얼굴을 쏙 내민 소율이 씩씩거리며 말했다.
“숨 막혀!”
여기 약왕당 맞아? 환자가 안정을 취해야 할 병실에 아무나 막 들락거려도 되는 거야?
“잘못했서, 안 했서!”
조막만 한 손으로 내 가슴을 탁탁 두드리는데, 그 표정이 제법 엄하기까지 하다.
“그래, 여기서 뭐 하고 있었는데?”
“숨바꼭질.”
“누구랑?”
“오라버니랑!”
소율이 배시시 웃었다.
“소율이가 여기 숨은 줄은 꿈에도 모를걸?”
“글쎄다.”
나는 닫혀 있는 문을 흘끗 바라봤다. 아까부터 문 앞을 서성이는 인기척이 느껴져서다. 보나 마나 뻔하지, 뭐.
“들어와.”
“…….”
“괜찮으니까 들어와.”
그제야 방문이 조심스럽게 열렸다. 소천이 황송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은인.”
오빠의 등장에 소율이 충격받은 얼굴로 날 바라봤다.
“날 배신했서!”
나는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인생은 배신의 연속이란다.”
“이건 무효야! 추잡한 음모야!”
“……그런 말은 어디서 배웠니?”
다섯 살치고는 제법 음험한 어휘력을 뽐내는 동생의 모습에 소천의 얼굴이 붉어졌다.
“율이, 그런 말 하면 못써!”
“오라버니도 한 무더기야!”
“한패겠지.”
이렇게 된 이상 쉬는 건 물 건너갔다.
내심 한숨을 내쉬며 일단 상반신을 일으켰다.
“끙.”
“은인, 괜찮으십니까? 아직 몸도 성치 않으신데…….”
“그 정도는 아냐. 멍 좀 든 거지.”
조금, 아니 조금 많이 두들겨 맞긴 했지만 뼈가 욱신거리고 전신이 멍투성이가 되었을 뿐이다.
그래도 하나밖에 없는 동생이니까 봐준 거겠지. 나도 그걸 감안하고 막 나간 거였고.
“아아, 그렇군요. 다행입니다.”
“그런데 그건 어떻게 알았냐? 소문이 벌써 퍼졌어?”
“가문에 이 소식을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하긴 이른 아침부터 이 층 전각이 무너졌으니 당연한 결과다.
나는 한번 들어나 보자는 심정으로 물었다.
“그래, 다들 뭐라던?”
산서잠룡이 진천검한테 개처럼 두들겨 맞았다더라. 알고 보니 그놈 그거 순 거품이더라. 뭐 그런 소문이 쫙 퍼졌겠지.
안 봐도 비디오…….
“모두가 분노하고 있습니다. 이런 간악한 흉계라니요!”
“응?”
간악한 흉계라니.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나도 모르는 사이에 진무경이 독을 썼나? 나 중독됐었던 거야?
내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기억을 더듬고 있는데, 소천이 분노에 찬 얼굴로 이를 갈았다.
“제 눈에 띄었다면 동귀어진을 해서라도 놈을 찢어 죽였을 겁니다.”
“……생각해 주는 마음은 고마운데, 너무 과한 거 아니냐? 진정해, 진정.”
진무경이 이 말을 들으면 마냥 허허 웃고 넘어가 주지는 않을 텐데.
그러나 내 만류에도 소천의 분노는 사그라지지 않았다.
“어찌 그럴 수 있겠습니까? 소가주님께서도 즉결 처단을 천명하셨습니다.”
“…….”
뭐야, 그거. 무서워.
둘째 형이 막냇동생 때리면 사형당하는 동네였어, 여기?
‘이게 무림인가.’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죽인 거야?”
소천이 안타깝다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도주했습니다. 지금쯤 추격대가 흔적을 쫓고 있을 겁니다.”
“미친.”
추격대까지 편성했단다. 나는 진위경과 소천의 머리를 쪼개서 뇌를 확인해 보고 싶은 충동을 애써 억눌렀다.
“그, 굳이 그럴 필요까지 있을까?”
“예?”
“아니, 그 양반이 나한테 좀 험하게 굴긴 했어도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아서.”
“은인을 해치려 한 놈입니다!”
“그럴 수도 있지. 난 이해해.”
나도 동생이 있는 몸이라 잘 안다. 가끔은 하연이가 남동생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가끔 한다. 시커먼 사내놈이라면 사회적 비판이나 양심의 가책 없이 뒤지게 팰 수 있을 테니까.
“봐라. 별로 다치지도 않았잖아. 이런 건 침 바르고 하루 이틀 쉬면 싹 나아.”
내 말에 소천의 눈빛이 격렬하게 요동쳤다.
“은인께서는…… 그야말로 군자(君子)십니다. 이 소천, 진심으로 감복했습니다.”
쿵.
미치겠네.
대뜸 큰절을 올리는 소천의 모습에 이마를 짚었다.
“됐고, 가서 추격대 물리라고 해. 아니다. 그냥 내가 가는 게 빠르겠다. 큰형 지금 어디 있어?”
소천이 즉시 대답했다.
“지금 이공자님과 집무실에 계실 겁니다.”
“응?”
“예?”
“아니, 뭐라고?”
“소가주님은 이공자님과 집무실에 계십니다.”
머릿속이 복잡하다. 나는 간신히 입을 열었다.
“그럼 추격대가 쫓는 건 누군데.”
소천이 고개를 갸웃하더니 대답했다.
“그야 당연히 살수지요.”
“살수?”
“뭔 살수?”
또 다른 목소리가 불쑥 끼어들었다. 어느새 잠에서 깬 혁무진이 이게 무슨 개소리냐는 말투로 말했다.
“쟤 무슨 소리 하는 겁니까?”
나는 혁무진을 무시하고 소천에게 계속 말하라는 손짓을 보냈다.
“일단은 대장로의 숨겨 둔 제자가 아닐까 추측 중입니다. 무공이 워낙 고강해 때마침 이공자님이 도착하지 않으셨다면 은인께서도 큰 변고를 당하셨을 거라고…… 아닙니까?”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이야기에 혁무진이 입을 딱 벌렸다.
“너 미쳤니? 내가 왜 이 꼴이 됐는지 알려 줘?”
고래 싸움에 등 터진 새우가 진실을 말하려던 그때였다.
“아, 혁 무사님을 빠트렸군요. 살수에 맞서 용맹하게 싸우셨다고 들었습니다.”
순간 혁무진의 귀가 쫑긋 섰다.
“내가? 누가 그래?”
“소가주님께서요. 이번에 세운 전공도 있고, 은인을 보호하려다 큰 부상까지 입으셨으니 포상이 엄청날 거라고 다들 부러워하더군요. 차기 수문각주는 따 놓은 당상이라던데.”
“수, 수문각주!”
“그런데 알려 주신다는 건 뭡니까?”
“그건…….”
순간 움찔한 혁무진이 결연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살수에 관해서다.”
“오오오!”
“강한 놈이었지. 차기 수문각주인 내가 백여 합을 겨뤘지만 승부를 보지 못할 정도로…….”
지랄이 풍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