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660
#659화
파슥.
털로 뒤덮인 커다란 발이 바싹 마른 잎사귀를 밟았다.
벌어진 입가 사이로 언뜻 모습을 드러내는 커다란 송곳니. 풀숲 사이에 한껏 웅크린 날렵한 몸뚱어리는 이미 만반의 준비를 끝마친 상태였다.
오늘은 어떤 고기를 먹게 될까.
눈에 띄는 사냥감을 발견하면, 빠르게 달려가서 목덜미에 송곳니를 박아넣으면 그걸로 끝이다.
눈치 없이 나타나는 독물(毒物)만 조심한다면 남만에서 사냥감을 구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적어도 치열한 먹이사슬의 상층부에 위치하는 흑표(黑豹)에게는 그랬다.
그르릉…….
샛노란 눈동자로 주위를 살피던 흑표가 문득 낮은 울음소리를 토해 냈다.
저 멀리에서부터 느껴지는 수많은 기척과 바람을 타고 흘러든 냄새를 맡았기 때문이었다.
킁킁.
흑표는 맹수답게 날카로운 감각의 소유자. 생각보다 일찍 걸려든 사냥감의 정체를 파악하는 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인간.
정확히는 인간들이라고 해야 옳다. 어림잡아 일백을 헤아리는 인간의 무리가 이곳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크릉.
흑표는 저도 모르게 언짢은 울음소리를 흘렸다.
그도 그럴 것이, 흑표에게 있어 인간은 그리 썩 달갑지 않은 존재였다.
몸집도 작은 주제에 훨씬 덩치가 큰 맹수를 역으로 사냥하기도 하고, 머릿수가 많을수록 더 강한 힘을 발휘했으니까.
바로 지금처럼.
스윽.
흑표는 한껏 웅크렸던 몸뚱어리를 일으켰다.
홀로 인간들을 사냥하는 건 멍청한 놈들이나 하는 짓이다. 이럴 때는 자리를 바꿔 다른 사냥감을 찾는 것이 훨씬 영리한 행동이었다.
그렇게 나름대로의 결론을 내린 흑표가 걸음을 옮기려던 찰나였다.
“어후. 어후우.”
돌아서려던 흑표는 움직임을 멈춘 채 풀숲 너머를 주시했다.
이상한 소리를 내며 헐레벌떡 달려온 인간 하나가 잡초 사이에 쭈그려 앉는 것이 보였다.
“아흐으. 죽을 뻔했네.”
동시에 맹수들도 학을 뗄 만한 소리와 냄새가 이어지자, 세로로 쭉 찢어진 흑표의 동공에 기광이 스쳤다.
확실하다. 저 인간은 배변 활동을 위해 무리에서 떨어져 나온 것이다.
이곳이 자신의 무덤이 될 줄도 모르고.
크릉.
표적은 하나. 그것도 멍청해 보이는 인간.
흑표의 판단과 움직임은 신속했다. 네 개의 다리를 잇는 근육이 한껏 수축되었고, 곧이어 검게 물든 몸뚱어리가 화살과도 같은 속도로 쏘아졌다.
탁, 쉬이이익!
수 장의 거리에 단숨에 지워지고, 그제야 뭔가를 알아차린 인간의 고개가 이쪽을 향해 움직인다.
하지만 반응은 한 박자 늦었고, 쩍 벌어진 흑표의 아가리에서 날카로운 송곳니가 번쩍 빛났다.
– 크아아앙!
푸푹! 콰득!
우렁찬 포효와 함께 울려 퍼지는 파육음. 서로를 향해 뒤섞인 크고 작은 동체가 땅을 나뒹굴었다.
그리고 잠시 후, 이 짧지만 치열했던 전투의 생존자가 살아 있음을 알렸다.
“푸하!”
검은 털들 사이로 얼굴을 내민 사내의 얼굴은 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바로 흑표의 피였다.
마지막 순간, 이 근방을 호령하던 맹수의 머리통에 검을 꽂아 넣은 사내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후욱. 훅. 시발. 싸다가 죽을 뻔했네.”
볼일 보는 와중에 기습이라니. 다시 생각해도 정말 아슬아슬했다.
만약 일이 년 전의 자신이었다면 꼼짝없이 흑표의 한 끼 식사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씨앗이 싹을 틔우듯, 사내도 과거에 비해 부쩍 성장한 상태였다.
“하도 처맞다 보니까 반사 신경이 늘었…… 그런데 어떻게 빠져나가지?”
사내가 육중하기 짝이 없는 흑표의 사체에 짓눌린 채, 계속해서 낑낑거리고 있던 그때였다.
“희한하군. 잠깐 보러 간다는 볼일이 혹시 이런 거였나?”
귓가를 파고드는 익숙한 목소리에, 사내의 안색이 환하게 밝아졌다.
“오! 송 대협!”
목소리의 주인, 송일섬이 한숨을 내쉬었다.
“대협이라고 부르지 말라니까.”
“왜요.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도와주면 그게 대협 아닙니까.”
“상관을 닮아서 그런지, 말은 아주 청산유수군.”
“저야 기분 좋은 말이긴 한데, 조장님 앞에서는 그런 말 하지 마세요. 아무리 송 대협이라고 해도 청산유수처럼 처맞는 수가 있습니다.”
사내, 아니 혁무진의 영혼에서 우러나오는 충고를 들은 송일섬이 고개를 끄덕였다.
“……음. 참고하지.”
“잘 생각하셨습니다. 그런데 저 이것 좀 치워 주실래요? 슬슬 숨넘어갈 것 같은데. 눈앞에 자꾸 아버지 얼굴이 보여요.”
“그래? 언제 돌아가셨나?”
“무슨 소리세요. 아직 멀쩡하게 살아 계신데.”
“……?”
미친놈인가.
잠깐 진지하게 고민하던 송일섬은 이내 생각을 포기하고 흑표의 시체를 붙잡았다.
어쩌다가 그가 몸담게 된 화룡각에는 제정신인 사람이 드물었다. 물론 그중에서도 각주가 가장 미친놈이다.
스륵. 쿵.
가까스로 압사(壓死)의 위기에서 빠져나온 혁무진이 흙투성이가 된 옷을 털어내며 물었다.
“후우, 죽을 뻔했네. 다른 사람들은요?”
“야영 준비 중이다. 소국주도 그곳에 남아 있고. 벌써 쉬지 않고 열 시진 가까이 달렸으니 휴식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모양이야. 네 녀석이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에 때마침 전서(傳書)도 도착했고.”
“전서요?”
“그래. 남만야수궁에서 전서응을 보낸 것 같더군. 추가적으로 지시할 게 있었나 보지.”
“어쨌든 반가운 소식이네요. 안 그래도 맹수들 움직임이 너무 거칠어서 엉덩이가 박살 날 뻔했는데.”
“그 녀석들도 쉬어야지. 그래도 남만인들이 평소에도 조련을 잘해 두었는지 체력 하나는 좋더군. 초원마 못지않아.”
지금으로부터 약 하루 전, 척후대와 함께 외궁을 빠져나온 그들은 강행군을 이어 가고 있었다.
혈승(血僧)이라는, 지금까지 듣도 보도 못한 노괴가 언제 광서 땅을 넘어 남하할 줄 모르니 당연한 선택이었다.
“언제쯤 도착한답니까?”
“두 부족장의 말에 의하면 빠르면 이틀. 늦어도 사흘 내에는 도착할 듯싶다. 아마 소국주도 비슷하게 생각하는 것 같고.”
“무슨 일이 있어도 이틀 안에 가야 한다는 소리로 들리는데, 이거 기분 탓입니까?”
“제대로 들었다. 혈승을 막기 위해서는 최대한 빨리 이동해야겠지.”
“지금처럼요?”
“어쩌면 지금보다 더 급하게 움직일 수도.”
“……지금보다 더는 좀.”
떨떠름한 표정을 짓던 혁무진이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젠장. 뭐 어쩔 수 없죠.”
“생각보다 포기가 빠르군.”
“송 대협도 한 이 년쯤 조장님 따라다녀 보세요. 그 후에는 뭐든 자포자기하게 될 테니까. 물론 목숨도 포함해서요.”
“안타깝지만 그럴 일은 없다.”
“왜요?”
“소국주가 아니었다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을 테니까. 그게 내가 이 지긋지긋한 남만에 있는 단 하나의 이유다.”
칼 같은 대답에 혁무진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음. 그럼 앞으로도 자주 보겠네요.”
“뭐?”
“방금 그 입으로 직접 말씀하셨잖아요. 여기까지 따라온 이유가 주 소저 때문이라고. 그런데 주 소저께서는 앞으로도 조장님과 함께하실 걸요?”
“……!”
“송 대협, 생각보다 머리가 나쁘신 것 같은데요.”
잠시 굳어 있던 송일섬이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
“죽고 싶나?”
“아뇨. 죄송합니다.”
냉큼 대답한 혁무진이 슬금슬금 눈치를 살피며 흑표의 머리에 박혀 있던 검을 뽑았다.
푸확.
쩍 벌어진 단면에서 솟구치는 핏물. 대충 검신을 닦아 납검(納劍)한 혁무진이 문득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
“벌써 밤이네.”
분명 밤에 출발했던 것 같은데, 정신없이 이동하는 사이 두 번째 밤이 찾아왔다.
그리고 앞으로도 몇 번의 밤이 지나야 다시 남만야수궁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래도 가급적이면 혈승은 안 만났으면 좋겠는데. 조장님도 안 계셔서 영 불안하고. 송 대협도 그렇게 생각하시죠?”
하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리고 잠시 후. 짧은 침묵 끝에 들려온 것은, 송일섬의 목소리가 아닌 날붙이의 서늘한 마찰음이었다.
스릉.
등 뒤에서 울려 퍼지는 소리의 정체를 알아차린 혁무진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어, 그. 머리 나쁘다고 해서 죄송합니다. 화 많이 나셨어요?”
차갑게 식은 목소리가 돌아왔다.
“……입 닥치고 돌아서.”
“송 대협. 제발. 부탁드릴게요.”
“나야말로 부탁하지. 제발 입 닥치고 돌아서라. 검도 다시 뽑고.”
이 인간이 진짜 눈깔이 뒤집혔구나.
혁무진은 눈물을 머금은 채, 후들거리는 다리로 돌아섰다.
그리고 그 순간 깨달았다. 왜 송일섬의 목소리가 그토록 차가웠는지. 자신에게 검을 뽑으라고 한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분명히 아군이라고 생각했는데…… 내 착각이었나?”
스스슥.
어둠에 잠긴 풀숲이 흔들렸다.
지금껏 함께 이동했던 백여 명의 척후대. 그 선두에서 모습을 드러낸 두 명의 부족장이 착잡한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네만의 착각이 아니었네. 다만 일이 이렇게 되어 유감이야.”
“전서(傳書)를 받았네. 궁의 직인이 찍힌. 우리로서는 결코 거부할 수 없는 명령이지.”
전서.
그 두 글자를 들은 송일섬은 어렴풋이 직감했다. 그들이 떠난 내궁(內宮)에서 무언가 큰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하지만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단 한 사람의 존재였다.
“소국주는 어디 있느냐.”
진득한 살기가 스며든 물음.
친(親) 궁주파이자 대회의 때부터 진태경에게 호의를 품고 있던 장 족장이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생각 이상으로 검이 매섭더군. 눈치도 빠르고.”
“마지막으로 다시 묻는다. 그녀는 어디 있지?”
화아아악!
송일섬의 전신에서 광폭한 살기가 흘러넘쳤다. 척후대에 포함된 맹수들마저 뒷걸음질 칠 정도의 흉포한 기파.
그의 분노를 느낀 또 다른 부족장이 황급히 입을 열었다.
“그, 그녀는 무사하네. 점혈(點穴)로 제압해 두었을 뿐이야.”
송일섬은 자신도 모르게 이를 악물었다. 안도감과 동시에 후회가 물밀듯이 밀려들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곁을 지켰어야 했는데.’
아군에서 적으로 돌변한 척후대의 규모를 생각한다면, 설령 송일섬이 남아 있었더라도 결과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홀로 분투했을 주화란의 모습이 자꾸만 눈앞에 그려지는 듯했다.
“……빌어먹을.”
씹어뱉는 듯한 욕설과 함께, 송일섬은 손아귀에 쥐고 있던 애병을 천천히 늘어트렸다.
그리고 그것은 그보다 늦게 상황을 알아차린 혁무진 역시 마찬가지였다.
스륵, 푸푹.
공들여 벼려 낸 검신이 지면을 파고든다.
착잡한 눈빛으로 그 광경을 바라보던 장 족장이 손짓하자, 그의 명령을 따르는 척후대의 전사들이 달려와 무기를 회수하고 두 사람을 포박했다.
“……송 대협. 저희 아무래도 좆 된 것 같은데요.”
혁무진의 중얼거림에, 이번에도 송일섬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대답할 수 없었다.
투두둑.
전신 곳곳을 두드리는 누군가의 손길. 점혈과 함께 뻣뻣해지는 몸뚱어리를 느끼며, 송일섬은 마음속으로 뇌까렸다.
‘도대체 무슨 짓을 벌인 거냐, 진태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