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661
#660화
“전부 제압했습니다. 수혈(睡穴)까지 짚었으니 족히 하루 동안은 의식을 회복하지 못할 겁니다.”
“……잘했다.”
휘하 전사의 보고를 들은 장 족장은 착잡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눈동자에는 미동도 하지 못한 채 쓰러져 있는 송일섬과 혁무진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잘 감시하도록. 두 시진 간 휴식 후 다시 이동한다.”
“혹시 그 말씀은…….”
“그래, 저들과 함께 이동할 것이다.”
“저어. 외람된 말씀이지만, 따로 전사 몇을 차출하여 죄인들을 내궁(內宮)으로 호송하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용기를 내어 질문한 전사는 이내 자신의 행동을 후회했다. 장 족장이 아무런 말 없이 그를 응시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분부를 받들겠습니다.”
황급히 대답한 뒤 떠나는 전사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장 족장은 문득 한숨을 내쉬었다. 전서응(傳書鷹)을 통해 전달받은 서신의 내용이 다시금 떠올라서였다.
‘흑웅과 요희, 두 대족장이 실종되고 요서부는 전멸. 게다가 그 흉수로 진태경이 지목되었다니.’
보면서도 믿기지 않아 몇 번이나 다시 읽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서에 적힌 글씨가 바뀌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고, 장 족장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하나뿐이었다.
‘미안하네, 모두.’
장 족장이 전해지지 않을 사과를 마음속으로 뇌까렸다. 하지만 곧 저들도 알게 될 것이다. 현재 상황에서는 이것이 최선이었다는 것을.
‘이건 철저히 준비된 흉계(凶計)다. 그는 그저 예기치 않게 휘말린 것뿐이야.’
장 족장은 전서의 내용을 믿지 않았다.
지금껏 진태경이 보여 준 모습은 중원의 한족들이 말하는 대협(大俠)과 같았고, 그가 독혈지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싸우지 않았다면 이백여 명의 전사들 역시 가족들에게 돌아오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 돌아온 이들 중에는 자신이 이끄는 장족의 전사들과 혈육 역시 포함되어 있었다.
‘또한 그에게 입은 은덕과는 별개로, 제대로 된 명분조차 없어.’
비록 남만과 중원이 정마대전 이후 사이가 틀어지긴 했으나, 그건 막대한 희생이 불러온 일방적인 적대감에 가까웠다.
그런데 무림맹의 대표로 남만에 파견된 진태경이 도대체 무슨 이유로 이런 참극을 벌인단 말인가.
‘암천으로도 모자라 남만까지 적으로 돌리겠다는 뜻이 아니고서야…….’
하지만 별수 없었다. 이번 사건의 흐름은 이미 백상과 그를 따르는 일파에게 넘어갔으니까.
다만 궁주인 야수묘왕은 전서응을 통해 자신의 뜻을 은밀히 전해 왔다.
[척후대 내의 한족들을 억류하되, 내궁으로 호송하지 말 것.]그리고 장 족장은 야수묘왕이 말하고자 화는 바를 정확히 알아들었다.
‘아마도 이들을 내궁으로 호송한다면 영락없이 인질 신세가 되겠지.’
다행히도 그와 함께 척후대를 이끄는 고 족장 역시 야수묘왕을 따르는 인물이었고, 생각이 일치한 그들은 휘하 전사들로 하여금 세 사람을 제압하게 했다.
인질이 아닌, 어떻게든 자신들의 손안에 두어 보호하기 위해서.
때마침 상황도 적절했다. 그들은 혈승(血僧)이라는 노괴를 경계하기 위해 이동하는 중이었으니까.
일종의 전시 상황이니 백상 일파가 이 사실을 안다 해도 약점 잡힐 만한 일은 없었다.
‘그러니 조금만 참게. 일이 잘 해결될 때까지만이라도.’
내심 중얼거린 장 족장은, 의식을 잃은 채 전사들에게 실려 가는 두 사람을 향해 걸음을 내디뎠다.
미안한 마음을 담아 포박이라도 좀 느슨하게 풀어줄 생각이었다.
“잠시 멈추거라. 포승줄이 너무 꽉 묶여 있지 않느냐.”
“부족장님! 안 됩니다!”
“안 되긴 무슨. 괜찮…….”
스윽.
전사들의 외침을 무시하고 혁무진의 등 뒤로 손을 가져간 장 족장이 문득 눈살을 찌푸렸다.
‘이게 뭐지?’
축축하고, 끈적한 감촉.
그리고 뒤이어 올라오는 악취와 함께 이어지는 전사의 목소리.
“어. 그. 등에 변이 묻어 있었습니다.”
“……!”
“그래서 다가오시지 말라고 한 건데…….”
흐려지는 말꼬리. 말없이 자신의 손과 혁무진을 번갈아보던 장 족장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죄인이 더 쌀, 아니 도망칠 수도 있으니, 포승줄을 더 꽉 조여라.”
“옙.”
* * *
현대에서의 나는 준법정신으로 무장한 모범 시민이었다.
중학교 때까지 신호등이 초록불로 바뀌면 손을 번쩍 들고 횡단보도를 건넜고, 헌터가 된 후에는 각종 보험료며, 세금도 연체나 탈세 없이 꼬박꼬박 다 냈다.
심지어는 늙어서 얼마 받지도 못할 국민연금에 관해서도 크게 불평하지 않았다.
‘한 마디로 감옥이랑은 연관이 없었지.’
하지만 어째서일까. 무림에서의 나는 죄를 짓지 않았음에도 뇌옥(牢獄)이라는 장소에 부쩍 익숙해지게 되었다.
무림 꿈나무 시절 태원진가에서도 그랬고, 사천당가에서는 적천강의 곁을 지키느라 내리 며칠을 머무른 적도 있다.
그리고 세 번째로 방문한 이번 뇌옥은 앞서 두 번의 수감 생활과 큰 차이가 있었다.
‘태원진가에서는 사실상 뇌옥이라기보다는 수련동 같은 공간이었고, 사천당가에서는 적천강의 치료를 위해서였지.’
하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자의가 아니라 타의에 의해서 갇혔다는 것도 그렇지만, 각각 천 근이 넘는 철구(鐵球)를 악세서리마냥 전신에 주렁주렁 매달고 있으면 누구든 나처럼 생각하게 될 거다.
철그럭.
“……시벌, 더럽게 무겁네.”
나는 욕설을 중얼거렸다. 사지를 구속한 거대한 쇠사슬과 철구는 그야말로 엄청난 무게를 지녔다.
이미 인간의 한계를 아득히 뛰어넘은 근력의 소유자인 나조차도 쉽게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공력이라도 사용할 수 있다면 무슨 방법이라도 생각해 볼 텐데…….’
마지막에 때리지 말 걸 그랬나?
아쉬움에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백상이 그 정도로 호락호락한 인간이었다면 지금쯤 나는 뇌옥이 아니라 처소에 있었을 거다.
더군다나 그는 면상에 일권을 처맞아 코가 부러졌음에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저항하지 않는 나를 손수 포박한 다음, 휘하 부족장들에게 이런 명령을 내렸다.
‘한족 진태경을 뇌옥에 가두고, 만근의 무게로 결박해 두어라.’
그 결과가 지금 이 상황이다.
나는 곧장 남만야수궁의 뇌옥에서도 가장 깊숙한 곳에 갇혔고, 특수한 단환을 복용하여 며칠간 공력을 쓸 수 없는 몸이 되었다.
‘그나마 점혈당하지 않은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하나.’
놈들이 내 혈도를 짚지 못한 이유는 간단했다.
자꾸 풀려서.
적천강을 비롯한 숱한 강자들에게 천무지체라고 인정받을 만큼 완벽한 신체가 제 기능을 십분 발휘한 셈이다.
물론 그렇다고 한들 공력을 다시 일으키려는 시도는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다.
“끄응.”
나는 전신에 잔뜩 힘을 불어넣고, 심호흡과 동시에 지금껏 수백, 수천 번이나 해 왔던 대로 하단전에 정신을 집중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지난 한나절 동안 반복해서 들어야 했던 시스템 알림이 또다시 귓가를 파고들었다.
삐빅.
– [금력단]의 기운이 단전을 봉쇄하고 있습니다!
– [공력]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아.”
이제는 이게 몇 번째 실패인지도 모르겠다.
한 오십 번이 넘어간 후에는 세는 걸 포기해서.
“……빌어먹을.”
내가 한숨 섞인 욕설과 함께 몸을 늘어트린 그때, 저 멀리서 누군가의 걸음 소리가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저벅, 저벅.
축축하고 어두운 공간을 울리는 소음.
금제로 인해 당장 공력을 사용할 수는 없지만, 신체의 감각만큼은 생생하게 살아 있다.
나는 고개를 들어 창살 너머의 어두컴컴한 공간을 바라보았다.
철벅.
쇠창살 앞에서 멈춘 발걸음. 동시에 함께 바닥에 고여 있던 구정물이 무릎에 튀었다.
불빛 하나 존재하지 않는 어둠 속이었으나, 몽골 사람 뺨칠 정도로 뛰어난 안력(眼力)은 상대를 구별해 내기에 충분했다.
“뭐야, 새로 온 간수야?”
“…….”
“기본적인 예의가 없네. 오자마자 사람한테 구정물이나 끼얹고. 물어도 대답도 안 하고.”
말없이 나를 내려다보던 불청객, 백상이 나직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죄인 주제에 엄살이 심하군.”
“뭐. 사실 이 정도면 애교긴 하지.”
어깨를 으쓱……하려다가 철구의 무게 때문에 움찔거린 내가 말을 이었다.
“누구는 코뼈가 주저앉았는데도 잘 버텼으니까. 안 그래?”
어둠 사이로 백상의 미간이 좁혀지는 것이 보인다. 시원시원하게 뻗은 콧날에 감긴 붕대도 함께.
“그거 상당히 아팠을 텐데. 생각보다 잘 참더라. 솔직히 나 뇌옥 보내고 나서 눈물 한 방울 찔끔 흘렸지?”
하지만 동요는 찰나뿐. 백상의 담담한 목소리가 돌아왔다.
“간지럽더군. 아마 네 일권에서 두려움을 읽었기 때문일지도 모르지.”
“뭐?”
“공력조차 실려 있지 않았고, 그렇다고 해서 온 힘을 다한 일격도 아니었다. 그건 그저 어린아이의 분풀이에 불과했어.”
“…….”
“이해한다. 두려웠겠지. 그때 전력을 다했다면 너나 네 수하들 역시 온전치 못했을 테니까.”
젠장. 딜교 씹손해네.
정확히 정곡을 찌르는 한 마디에, 뭐라 대꾸하려던 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그런 내 모습을 바라보는 백상의 눈동자는 여전히 흔들림 없이 가라앉아 있었다.
“왜 그 자리를 벗어나지 않았지? 네놈 혼자 도주했다면, 목숨만큼은 부지할 수 있었을 텐데.”
나는 어처구니없는 얼굴로 대답했다.
“천라지망 펼친다며, 개새끼야.”
“물론 틀림없이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충분한 가능성 역시 있었어. 적어도 궁주는 네놈을 쫓지 않았을 테니까. 아니, 훼방을 놓았을지도 모르지.”
백상의 추측은 허황한 것이 아니었다.
적어도 적천강으로부터 전해 들은, 내가 지금껏 보고 겪은 야수묘왕이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다.
최악의 상황에서 한 번쯤은 구원의 동아줄을 내밀어 줄 사람.
하지만 나는 곧이곧대로 고개를 끄덕이는 멍청한 짓은 하지 않았다.
어쩌면 이미 늦었을지도 모르지만, 백상의 앞에서 그 사실을 순순히 시인하면 야수묘왕에 대한 경계가 더욱 심해질 테니까.
“글쎄, 난 잘 모르겠던데. 사실 별로 친하지도 않고.”
“제법 머리를 굴리는군. 하지만 아직 한참 미숙해.”
“뭐 믿건 말건 그쪽 마음이고. 당장 노야가 없는 걸 다행으로 여겨라. 한 두세 달 후면 니 머리통이 여기 굴러다니고 있을걸.”
“확실히 치기를 벗어나지 못한 어린아이이기도 하고.”
나는 피식 웃었다.
“아가리에서 똥내가 풀풀 풍기네. 암천 뒷구멍이나 작작 빨아. 적어도 나는 내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여기 있는 거다.”
“…….”
“아무도 없으니까 솔직하게 말하자고. 당신도 알잖아. 지금 스스로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이번에 입을 다문 건 백상이었다.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가 암천과 협력한다는 건, 남만을 통째로 들어 천주에게 가져다 바치는 꼴이니까.
“수십 년을 함께한 의형도 배신하고. 서른 명이 넘는 부족장과 수많은 남만인들도 속였지. 어떤 변명을 해도 그게 정당화될 수는 없어.”
그 순간, 심유한 눈빛으로 나를 응시하던 백상이 불쑥 입을 열었다.
“이틀.”
“뭐?”
“이틀이다. 이틀 뒤 정오. 넌 모두가 보는 앞에서 사형당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