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662
#661화
이틀 뒤 정오. 그리고 처형.
백상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그 짧은 두 개의 단어가, 총알처럼 쏘아져 뇌리를 관통한다.
‘이틀 뒤 처형? 내가?’
목구멍을 비집고 솟구치는 물음을 참았다. 적어도 이 자리에서, 그것도 백상에게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 줄 수는 없었으니까.
나는 절망하는 대신,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이미 몇 번이나 가로막힌 탈출구를 두드렸다.
‘로그아웃.’
삐빅!
– [로그아웃]에 실패했습니다!
– 특정 상황에서는 [로그아웃]이 불가능합니다!
좆 됐다. 아직도 안 되네.
나는 애써 담담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틀이라. 생각보다 빠른데.”
“선친께서는 항상 말씀하셨지. 한번 뜻을 정했다면, 망설임 없이 검을 뽑으라고.”
“그 검, 혼자 뽑는 건 아니고?”
“가장 먼저 검파를 쥔 것은 나지만, 네 목을 휘두를 때는 혼자가 아닐 것이다. 설령 궁주라 해도 막을 수 없어.”
검을 휘두르는 것은 혼자가 아니다…….
조용히 그 말의 의미를 되새긴 나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어지간히 바쁘게도 돌아다닌 모양이군. 그새 여기저기 손을 뻗은 걸 보면.”
백상이 건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미 나를 포함한 스무 명의 부족장들이 뜻을 모았다. 그리고 대회의 마지막 날의 안건은…….”
“태원진가의 진태경. 아니, 이제 천인공노할 죄인이 되어 버린 내 처형에 관한 거겠지.”
“잘 아는군.”
“일이 여기까지 왔는데도 모르면 병신 아닐까. 어쨌든 그러기 위해서 나를 우선 뇌옥에 처넣었던 건가?”
“물론, 가장 손쉬운 방법이었지. 네놈이 이렇게 쉽게 투항할 줄은 몰랐지만.”
백상은 부정하지 않았다. 그리고 마치 사냥감을 포획한 엽사(獵師)처럼, 만근에 달하는 철구로 속박된 나를 내려다보며 나직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호랑이를 잡기 위해서는 산으로 가서 위험을 감수해야 하지만, 철창 안에 갇혀 있는 호랑이라면 이야기가 다르지 않겠느냐.”
“그렇겠지. 게다가 사냥꾼이 혼자도 아니고 스물이라면.”
백상을 따르는 부족장의 숫자는 본래에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스물이라니.
이는 흑웅과 요희가 실종된 이후 서른 명으로 줄어든 인원의 과반수를 뛰어넘는 숫자였고, 야수묘왕의 편에 서 있던 부족장 중 일부가 말을 바꿔 탔음을 뜻했다.
“도대체 그들에게 얼마나 대단한 걸 약속한 거지?”
“일족의 부흥. 더욱 큰 영향력과 막대한 재화.”
“그것참. 예상은 했는데 빌어먹게 간단하네.”
“하지만 무엇보다 효과적이지.”
단둘만이라는 확신이 있어서일까.
오늘 백상의 대답은 그 어느 때보다 솔직했고, 한편으로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안타깝지만 놈의 말이 맞다. 남만야수궁은 엄연한 부족 연합체고, 각자 나름대로 현재 돌아가는 판세를 파악한 부족장들은 가장 승산 있는 쪽에 배팅했을 것이다.
자신이 다스리는 부족의 미래. 자신들이 얻을 부귀영화를 위해서.
그리고…….
“그중에서도 가장 큰 대가를 받을 사람이 지금 내 눈앞에 있네. 남만 전체를 손에 넣을 테니까. 안 그래?”
내 물음에 백상은 대답 대신 입을 다물었고, 나는 헛웃음을 흘렸다.
“재미있네. 아주 뿌리부터 썩을 대로 썩은 게.”
바로 그 순간이었다. 마음을 꿰뚫어 보는 듯한 시선으로 나를 응시하던 백상이 불쑥 한마디를 내뱉은 것은.
“전란을 겪은 적이 있느냐?”
“뭐?”
“전란을 겪은 적이 있느냐 물었다.”
왜 갑자기 이런 이야기를 시작하는 걸까.
하지만 백상의 의도를 알건 모르건, 창살에 갇힌 호랑이 신세가 된 내게는 듣는 것 외에 별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나는 그 모든 것을 직접 겪어 보았다. 오십여 년 전, 궁주와 함께 일만의 전사들을 이끌고 중원에 도착한 내가 처음 목격한 것은, 인세에 도래한 지옥이었지.”
백상은 천천히, 또 담담하게 말을 이어갔다.
“논밭은 짓밟혔고 푸른 강은 핏물와 시체로 잠겼다. 매일. 혹은 매 순간 사람들이 천하 곳곳에서 죽어 나갔고, 전쟁으로 부모를 잃고 굶주림에 사로잡힌 아이들은 제 이빨이 뽑히는 것도 모르는 채 나무껍질을 뜯어 먹었지.”
전쟁은 언제나 참혹하다. 끝내 누군가는 승리할지라도 그 과정에는 숱한 비명과 죽음이 쌓여 있다.
승자도, 패자도 피해 갈 수 없는 하나뿐인 길이다.
“그것은 나도, 궁주로서도 처음 보는 지옥도(地獄道)였다. 하지만 우리는 싸워야 할 이유가 있었기에 그 누구도 물러서지 않았다. 만일 마교가 중원을 지배한다면, 그다음은 남만이 될 테니까. 내 가족과 벗이 머무르고 있는 고향을 지키기 위해 우리는 그곳에 있었다.”
백상의 목소리가 어두컴컴한 뇌옥을 울렸다.
“헤아릴 수도 없을 만큼 많은 목숨이 사라졌다. 전장에서 적과 싸우다 목숨을 잃고, 전투가 끝난 뒤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다가 스스로 자결하고, 고통에 몸부림치는 전우를 대신해 그의 사혈(死穴)을 짚어 주기도 했지.”
“…….”
“수 없이 반복되는 전투에 누군가는 죽고 누군가는 지쳐 갔지만, 전세가 유리해질수록 마음 한구석에 품은 희망은 커져만 갔다. 이제 곧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고. 사랑하는 여인과 연로한 부모. 혹은 부쩍 장성했을 아이들을 만날 수 있을 거라고.”
겪지 않았어도 느껴진다.
보지 못했어도 눈앞에 그려진다.
밀림을 지나 장강을 건너고, 평야와 산을 넘어 머나먼 중원에 막 도착한 그들의 모습이. 그리고 매일 같이 사방에서 몰려드는 마교의 십만마도(十萬魔徒)에 맞서 싸우는 전장의 광경이.
“문득 숫자를 헤아려 보니 일만의 전사 중 살아남은 이는 일 할도 채 되지 않더군. 서서히 유리해지던 전황마저 어느 순간 고착 상태에 빠졌고, 궁주와 나는 생각했다. 왜 우리가 이곳에 있어야 하는지.”
세월은 누구도 대적할 수 없는 법칙이다. 산을 움직이고 강물을 마르게 만드는 그 절대적인 법칙 앞에서는, 초절정의 경지에 다다른 고수도 어찌할 수 없었다.
‘마음이 마모됐겠지. 천천히. 이 이상은 버틸 수 없을 만큼.’
내심 중얼거린 그때, 백상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렇게 십여 년이 지난 어느 날이었다. 무신(武神)이 천마(天魔)를 쓰러트린 것은.”
두 절대자의 격돌.
이 경천동지할 생사결(生死決)의 결과는 무신의 승리였고, 한때 천하의 절반을 집어삼켰던 마교는 천마라는 구심점을 잃자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렸다.
“마교의 잔당들은 서쪽으로 퇴각했고, 무림맹은 놈들을 끝까지 추격하여 섬멸하고자 했다. 이제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는 무신을 필두로 삼성(三星)과 십왕(十王). 그리고 무림맹에 속한 수많은 정파 무림인들이 사방에서 진격했지. 우리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그렇지 않아도 서서히 정파 무림으로 기울던 저울추는 천마의 죽음으로 인하여 존재 의미를 상실했다.
이제 남은 것은 패잔병으로 전락한 십만 마도를 추격, 섬멸하여 중원 땅에서 뿌리 뽑는 것뿐이었다.
“전쟁은 이미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아니, 반드시 그랬어야 했어.”
불현듯 말을 멈춘 백상은 공허한 눈빛으로 허공 어딘가를 응시했다.
미세하게 갈라진 천장 틈새로 흘러나온 물방울이 차가운 바닥 위로 떨어진다.
툭. 투둑.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기다려도 입을 열지 않는 백상을 가만히 바라보던 나는, 이내 불쑥 입을 열었다.
“백휘(白輝). 맞지?”
“……!”
덜컥 굳은 신형과 요동치는 눈동자. 그 어느 때보다 동요하는 백상의 모습에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나 보네. 혹시 이름을 헷갈렸나 했는데.”
으득.
다물어져 있던 입술 사이로 뭔가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린다. 백상이 차갑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그 이름, 누구에게 들었지?”
내게 그 이름을 말해 준 사람은 야율목이었지만, 굳이 그 사실을 알려 줄 필요는 없다.
나는 담담하게 대꾸했다.
“그게 그렇게 중요한가? 지금까지도 백휘라는 이름을 기억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게 중요한 거지.”
“……감히 네놈 따위가 입에 담을 수 있는 이름이 아니다.”
화아아악!
백상의 전신에서 일어난 칼날 같은 살기가 쇠창살 틈새로 쏘아진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이상하게도 두려움은 들지 않았다.
그리고 아마도 그건…… 오래전에 어린 핏줄을 먼저 떠나보내야 했던 아비를 향한 한 줄기 연민일지도 모르겠다.
모든 것을 떠나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랬다.
‘백휘.’
흰 백. 빛날 휘.
그건 한 사람의 이름이었다. 백상이 끔찍하게 아끼던 하나뿐인 자식이자, 살아 있었다면 야수묘왕의 사위가 되었을 누군가의 이름.
‘그래. 살아 있었다면, 말이지.’
마음속으로 작게 뇌까린 나는, 백상이 뿜어내는 살기를 무시하며 물었다.
“마교를 추격하던 도중에 목숨을 잃었나? 아니면…….”
쾅! 구구궁!
이어지려는 목소리를 굉음이 집어삼킨다. 그와 동시에 엄청난 충격파에 의해 거세게 뒤흔들리는 뇌옥.
일권으로 뇌옥의 벽면을 가루로 만들어 버린 백상이 서릿발 같은 눈으로 나를 응시했다.
“당장 이 자리에서 죽고 싶으냐?”
현재의 내 처지를 생각한다면 제법 위협적인 한 마디다. 아마 혁무진이었다면 오줌을 지리고 묵언 수행에 들어갔겠지.
하지만 어디에나 예외는 있는 법이다.
죽는 것조차 처음이라며 살짝 설레할지도 모르는 청풍도 있고…….
뭐, 하도 여기저기에서 구르다 보니 간 비대증에 걸린 나도 마찬가지다.
“그것도 나쁘진 않지. 어차피 당장은 죽이지도 못하겠지만.”
“뭐라?”
“내 처형을 굳이 이틀 뒤로 미룬 이유가 있을 거 아냐. 물론 그것 역시 당신 혼자서 내린 결정은 아니겠지. 남천마후의 명령인가? 내가 듣기로는 매달 초하루마다 전서를 주고받는다던데.”
“……!”
“그러니까 허세 그만 부리고 썰이나 풀어 봐. 뇌옥에 혼자 갇혀 있으니까 외롭고 심심하더라. 그나마 사천당가에는 다른 죄수들이라도 있어서 괜찮았는데.”
“놈!”
쩌렁쩌렁한 외침이 메아리처럼 울려 퍼진다. 분노로 파르르 몸을 떤 백상이 손을 뻗어 쇠창살을 움켜쥐었다.
그그그극!
어른 팔뚝만 한 강철이 엿가락처럼 휘어진다. 그 사이로 성큼 걸어들어온 백상의 눈동자가 시리도록 차갑게 빛났다.
“휘. 그 아이의 죽음이 네게는 그리 재미있고 궁금하더냐?”
당장이라도 검을 뽑아 베어 버릴 것만 같은 흉흉한 기세. 하지만 나는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놈은 남천마후가 두려워서라도 당장 이 자리에서 나를 죽이지 못할 것이고, 나는 알아야 할 사실이 있었다.
“재미있는 건 모르겠고. 궁금한 부분은 있지.”
“네놈이 정녕…….”
“말해.”
무덤덤한 목소리로 백상의 말을 자른 내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당신의 하나뿐인 자식이 어떻게 죽었는지가 아니라, 어떤 미친놈들이 당신 같은 미친놈을 만들었는지.”
“……!”
“그걸 말하라고.”
그리고 일 초가 일각처럼 느껴질 만큼 무거운 침묵 끝에, 마침내 백상의 입술이 열렸다.
“감숙(甘肅). 대설산(大雪山).”
후우.
파르르 떨리는 호흡. 얼음장처럼 차가운 뇌옥에 새하얀 입김이 쏟아진다. 마치 그날에 내렸을 함박눈처럼.
“그때의 우리는, 종남파와 함께 남군(南軍)을 이끌고 있었다.”
귓가를 파고드는 한 마디에, 나는 본능적으로 튀어나오려는 목소리를 삼켰다.
아, 시발 종남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