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666
#665화
툭. 투둑.
적막 사이로 나직하게 울려 퍼지는 물방울 소리. 갈라진 뇌옥 천장에서 떨어지는 액체를 슬쩍 피한 나는 허공을 바라보았다.
퀘스트
[남생크 탈출]당신은 결국 남만야수궁의 지하 뇌옥에 갇혔습니다. 어둡고, 축축하고, 적막한 이 공간은 마치 당신의 앞날을 닮아 있군요. 하지만 아직 생을 포기하기에는 이릅니다.
처형 집행까지 남은 시간은 이틀.
당신은 주어진 제한 시간 내에 뇌옥을 탈출해야 합니다.
홀로 살아남을지, 함께 살아남을지는 오롯이 당신의 선택이며, 만약 실패한다면 남아 있는 것은 죽음뿐입니다.
그러나 명심하십시오. 강한 의지(意志)와 한 줄기의 선의(善意)만 있다면, 생로는 열릴 것입니다.
등급 : 초절정
제한 : 진태경
임무 : 처형 집행 전까지 뇌옥 탈출 (미완료)
보상 : 연계 퀘스트
???
실패 : 사망
이미 몇 번이고 확인한 퀘스트 창.
나는 반투명한 홀로그램 창을 뚫어질 듯이 노려봤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지막 줄에 적힌 내용이 바뀌는 마법은 일어나지 않았다.
‘실패 시 사망.’
처음 있는 일은 아니다.
무림에 발을 디딘 이후부터 지금까지, 몇 번이나 이런 염병할 퀘스트를 받았다. 물론 처음에는 그야말로 망연자실했었다.
‘그땐 정말 개죽음당할 것 같았지.’
헌터로 활동하며 수없이 많은 전투를 치른 나지만, 죽음은 언제나 두려웠다.
정확히는 죽음 그 자체보다 내가 두고 떠나야 할 모든 것들이 두려웠다고 해야 옳겠다.
그나마 게이트에서 죽으면 가족들 앞으로 사망 보험금이라도 나올 텐데, 무림에서 죽으면 아무것도 없으니까.
물론 그 시절의 나와 지금의 나 사이에는 메울 수 없는 간극이 존재한다.
위기를 겪을 때마다 강제로 보톡스를 맞은 간덩이는 나날이 커졌고, 그에 비례해 몸과 마음은 굳건해졌다.
하지만…….
‘이런 상황은 처음인데.’
내가 생사의 기로에서 매번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간단하다.
함께 싸워 줄 누군가가 옆에 있었고, 홀로 대적해야 할 때는 목숨 걸고 싸울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끝까지 발악하며 몸부림친 끝에 살아남았다.
철그럭.
최소한, 지금처럼 엄청난 무게의 철구를 전신에 주렁주렁 매달고 공력마저 금제 당한 상황은 아니었다는 거지.
“……빌어먹을.”
작게 중얼거리며 눈을 감았다. 퀘스트 설명란에 적혀 있던 텍스트가 어둠 속에서 선명히 떠오르는 듯했다.
[강한 의지와 한 줄기의 선의만 있다면, 생로는 열릴 것입니다.]시스템은 간혹 내게 힌트인지, 헛소리인지 모를 메시지를 전하고는 했다.
그런 의미에서 저것은 단순한 격려일까. 아니면 뇌옥을 탈출할 방법을 알려주는 결정적인 단서일까.
그리고 곰곰이 눈을 감은 채 상념에 잠겨 있던 그때. 머리 위 허공에서 떨어진 액체가 바닥에 부딪혀 내 손등에 튀었다.
툭. 철벅.
단순히 지하수라고 하기에는 너무 끈적하고, 기분이 더러워질 만큼 따뜻한 온도.
동시에 눈을 뜬 나는 천장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입을 열었다.
“……미친놈아. 침 좀 작작 흘리랬지.”
츄릅, 하고 침 삼키는 소리와 함께 태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미안하다. 태산이. 너무 배고파서 그랬다.”
“그러니까 왜 배고픈 놈이 바닥에 뚫린 구멍에 입을 대고 있냐고. 가만히 앉아 있기나 하지.”
“그래도 핥다 보면 은근히 짭짤하다.”
“핥아? 뭘?”
“돌. 여기 돌 맛집이다.”
“아. 환장하겠네.”
“환장? 그건 무슨 양념장인가?”
이런 미친 새끼…….
나는 목구멍까지 차오른 욕설을 꿀꺽 삼켰다. 어차피 지금 녀석에게 화를 내 봤자 기운만 빠질 뿐. 달라지는 건 없다.
더군다나 지금 태산의 상황도 그리 좋지 못했다.
도무지 어떻게 만들어진 생물인지, 혈도가 너무 두꺼웠던 탓에 점혈은 통하지 않았으나 공력을 금제 당하고 전신이 속박된 상태니까.
제아무리 태산이 타고난 역사(力士)라고 하더라도 이런 상황에서는 답이 나오지 않는다.
“태산이. 배고프다. 얼른 나가고 싶다.”
조용히 울려 퍼지는 녀석의 칭얼거림을 듣고 있자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모든 것이 나 때문이라는. 죄책감이라고 부를 만한 생각이.
“……야, 태산아.”
“각주. 태산이 왜 불렀나.”
“미안하다.”
“응?”
“미안해. 진심으로.”
말과 함께 천장을 바라보자, 어린아이 주먹만 한 구멍 사이로 송아지처럼 맑고 커다란 눈동자가 보였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눈빛.
항상 생각하는 부분이지만, 녀석은 나이와 덩치에 안 맞는 순수한 심성의 소유자였다. 이를테면 깨끗한 백지(白紙)와 같은.
나는 한숨처럼 입을 열었다.
“내가 판단을 좀 더 잘했어야 했는데. 그러질 못했다. 실수였어.”
뼈아픈 오판(誤判)이었고, 바둑으로 치자면 악수(惡手)였다.
그 악수를 수습하기 위해 스스로 뇌옥에 갇혔지만…… 젠장. 그게 정말 좋은 선택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남는다.
그리고 그런 나를 신기하다는 듯이 쳐다보던 태산이 대답했다.
“태산이. 괜찮다.”
“괜찮다고?”
“응응. 태산이 정말 괜찮다.”
“…….”
나는 입을 다문 채 고개를 떨궜다. 아마 태산은 현재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는지조차 이해하지 못했을 거다.
당장 녀석에게 가장 중요한 사실은 지금 배가 고프다는 것이고, 두 번째로 중요한 것은 이 굶주림을 해결할 방법이 없다는 것일 테니까.
‘그래, 어쩌면 그게 녀석한테는 더 나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다음 순간, 이어지는 말을 들은 나는 깨달았다.
태산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영특한 녀석이라는 것을.
“각주. 태산이한테 미안해할 필요 없다.”
“……?”
깜짝 놀란 나는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보았다. 나와 눈이 마주친 태산이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안다. 태산이가 바보라는 거.”
“뭐?”
“아주 어렸을 때부터 사람들은 태산이를 바보라고 놀리고, 심심할 때마다 와서 때렸다. 아마 주군을 만나지 않았다면…… 지금도 매일 누군가에게 맞고 울고 있을지도 모른다. 태산이 많이 힘들었다.”
평소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와 말투. 낯선 태산의 모습에 눈을 크게 뜬 내 귓가에, 물 흐르듯 이어지는 목소리가 닿았다.
“하지만 주군은 달랐다. 주군은 태산이가 말을 잘못해도 모두 이해해 줬고, 밥을 많이 먹으면 오히려 등을 두드려 주면서 천천히 먹으라고 했다. 그래서 태산이는 다짐했다. 주군에게 목숨을 바치기로.”
“너…….”
“그런데 얼마 전에, 주군이 태산이한테 그랬다. 각주를 믿어 보자고. 각주는 다른 정파 사람들이랑은 다른 것 같다고. 지금 생각해 보면 주군의 판단이 맞았다. 며칠 전 멍청한 태산이 대신 주군을 구했던 건 바로 각주였으니까.”
“……!”
“태산이는 화룡각이 좋아졌다. 작고 귀여운 남호도, 가끔 귀찮게 구는 혁무진도, 사나운 송일섬과 꽃처럼 예쁜 주화란도 좋다. 그리고 각주를 주군 다음으로 좋아한다.”
말문이 막힌 나를 향한 구멍 너머의 눈동자가, 부드럽게 휘었다.
“태산이는 주군을 믿고, 주군은 각주를 믿는다. 그러니 각주는 각주를 믿어라. 각주라면 분명히 길을 찾아낼 거다. 언제나 그랬듯이.”
말을 끝마친 태산이가 히히 웃는 것을, 나는 한동안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누군가에게 몽둥이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태산이 이런 말을 건넬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리고 녀석의 한 마디가, 지금의 내게 있어 가장 큰 힘이 되리라는 것 역시도.
‘그래, 생각해 보면 길은 어디에나 있었지.’
무림에서의 나는, 죽음과 퍽 가까운 삶을 살았던 것 같다.
조필. 대장로. 노호검객과 혈주. 서천마군…….
내가 걸음을 내딛는 곳마다 위기가 깔려 있었고, 그럴 때마다 마음속에 감춰 둔 죽음이라는 단어를 꺼내 만지작거리며 다짐했다.
절대 죽지 않겠다고. 절대 이 자리에서 죽을 수 없다고.
‘강한 의지.’
퀘스트 창에 적혀 있던 내용의 일부가, 바로 이런 마음을 뜻하는 것이었을까? 아니면…….
‘강한 의지와 일맥상통하는, 또 다른 무언가.’
바로 그 순간이었다. 불과 몇 달 전 호북에서 살성이 내게 해 주었던 어떤 말이 번개처럼 뇌리를 스친 것은.
‘허. 이런 괴물 같은 놈. 기어코 중단전(中丹田)을 열었으니, 네놈도 기운을 제대로 다룰 수 있게 되었구나.’
그리고 나는 이렇게 되물었었지.
‘지금도 다룰 줄 아는데요. 저 공력 얼마나 있는지 모르세요?’
내 말을 들은 살성은 별다른 대답 없이 피식 웃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사라져 버렸다.
지금은 말해 줘 봤자 모를 거라는 한 마디와 함께.
하지만 이제는 어렴풋이 알 것 같기도 하다.
당시의 살성이 왜 그런 말과 행동을 보였었는지.
몇 갑자의 공력을 지녔다고 기운을 다룰 줄 안다며 큰소리치던 애송이가 그의 눈에는 얼마나 우스워 보였을지.
‘삼단전(三丹田).’
인체에서 가장 크고 중요한 세 개의 통로.
그러나 그중 하단전(下丹田)은 계속해서 공력을 채우고 비워 내는 그릇일 뿐이다.
나는 지금까지 중단전의 효능과 묘리를 반의반조차 깨우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다르다. 아니, 조금은 안다.
중단전을 움직이는 것은…… 공력이 아닌 의지라는 것을.
‘흔들리지 않는, 강한 의지.’
중단전은 처음부터 공력이 아닌, 깨달음의 영역이었다.
더 이상 공력의 크기에 좌우되지 않는 선택받은 자들의 땅에서도 반 발자국 앞서 나간 미지의 영역 어딘가.
인간으로 태어나 신의 경지로 발돋움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성역(聖域).
이 세상에 무공이라는 것이 생겨난 이래, 수없이 많은 강자들은 이 길에서 저마다의 실패와 성공을 겪었을 것이다.
메마른 나뭇잎처럼 바스라지거나, 혹은 이 아득한 무(武)의 역사에 족적을 남긴 거인이 되거나.
그리고 오늘의 나는…… 거인들을 향해 반걸음 가까워졌다.
스아아악.
홀린 듯 뻗은 손끝을 따라, 대기에 뒤섞여 숨어 있던 세상의 기운이 출렁거렸다.
* * *
백상은 처소로 들어가려던 순간, 초대받지 않은 불청객이 자신보다 앞서 도착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건.’
미세하지만 분명 익숙한 기운이다. 백상이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 더욱 이상한.
어쩌면 그를 기다리고 있던 불청객도 그것을 바랐을지도 몰랐다.
“너희는 이만 돌아가거라.”
한발 앞서 문을 열려던 호위 전사들이 백상의 말에 멈칫한다. 벌써 삼십여 년간 그의 곁을 지킨 반백의 호위장이 입을 열었다.
“주군. 그래도…….”
“되었다. 주위만 잘 지키면 그만이다.”
냉정한 목소리에 잠시 백상을 응시하던 호위장이 수하들과 함께 장원 곳곳으로 흩어졌다.
그 모습을 힐끗 바라본 백상은 힘주어 문고리를 잡고 밀었다.
스륵.
밖은 이미 어두운 밤이었지만 처소 내부는 환했다.
대족장이 머무르는 거처답게 넓고, 그에 반해 단출하기 그지없는 그곳에는 한 사람이 백상을 기다리고 있었다.
“늦었구나. 어디에 다녀오는 길이냐?”
백상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이미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궁주.”
불청객, 야수묘왕의 입가에 씁쓸한 웃음이 맺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