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668
#667화
잠입. 습격. 마무리까지.
전광석화(電光石火)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일련의 과정은 불과 촌각 동안 이어졌고, 뇌옥 주위를 지키던 스무 명의 전사들은 이 예기치 못한 기습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다.
“치, 침입……!”
쉭, 투둑!
누군가의 입술 사이로 다급히 튀어나온 목소리가 외침이 되기도 전에 사그라졌다.
빛살과도 같은 속도로 상대의 아혈(啞穴)과 훈혈(暈穴)을 연달아 짚은 야율목은, 허물어지는 백족 전사의 신형을 붙잡아 조용히 땅에 눕혔다.
스윽.
실로 간발의 차. 하마터면 일이 크게 어긋날 뻔했다.
“후우.”
참았던 숨을 토해 낸 야율목은 빠르게 주위를 훑었다.
제각각 다른 가면을 쓴 흑의인 이십여 명이 사방을 경계하며 점혈 당한 이들을 풀숲 사이에 숨기는 중이었다.
– 상황 보고하게.
– 전원 제압했습니다.
야율목이 날린 전음에 원숭이 가면을 쓴 이가 대답했다.
그를 비롯한 흑의인 중 일곱 명이 묘족 내에서도 가장 뛰어난 전사들인 칠묘호(七苗虎)라는 사실은, 야수묘왕과 그들만이 아는 비밀이다.
– 어쩐지 한 명이 안 보인다 싶었는데, 숫자를 헤아려 보니 조금 전 소궁주께서 제압한 자가 마지막이었습니다. 아마 근처에서 소피라도 보고 온 모양이죠.
– 우리 측 피해는?
– 전무 합니다.
– 다행이군. 처음부터 일을 그르칠 뻔했어.
– 많이 곤란해졌겠죠.
사실 지금 그들이 하는 일을 생각한다면, 곤란하다는 표현으로도 부족했다.
표면적으로 봤을 때 현재의 진태경은 용서받을 수 없는 중죄를 저지르고 뇌옥에 갇힌 죄인이다.
그런 그를 탈출시키려 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면, 남만야수궁의 소궁주인 야율목이라 해도 무사하지 못한다.
‘하지만 반드시 해내야 해.’
야율목은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훔치며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비록 아직 어린 나이였지만 그도 알고 있었다. 이것이 얼마나 대범하면서도 위험한 일인지.
그러나 동시에 옳다고 믿었다.
‘진태경은 아군이다. 우리를 돕기 위해 왔고, 애뇌산에서는 위험에 빠진 전사들을 구하기까지 했어.’
야율목은 여느 남만인이 그렇듯 어릴 때부터 한족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다.
적어도 진태경과 화룡각 대원들을 만나기 전까지는 그랬다.
물론 진태경을 좋게 생각한다고 해서 한족 전체를 믿게 된 것은 아니었다. 개인은 개인이고, 단체는 단체니까.
하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 무엇이 옳고 그른가에 대해서는 확신할 수 있었다.
존경해 마지않는 자신의 아버지. 야수묘왕처럼.
– 뇌옥을 여는 열쇠는 확보했나?
– 물론입니다.
고개를 끄덕인 원숭이 가면이 손에 든 열쇠 꾸러미를 건넸다.
뇌옥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다섯 개의 열쇠를 오차 없이 차례대로 꽂아 기관(機關)을 작동시켜야 했고, 그들은 이미 그 방법을 알고 있었다.
철컥. 구구궁.
둔중한 소음과 함께 움직이는 거대한 철문.
마침내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드러나자, 야율목과 칠묘호를 포함한 모두가 신속하게 옷을 뒤집었다.
스르륵. 펄럭.
바람에 흔들리는 횃불이 새하얀 옷자락을 비춘다. 순식간에 백족 전사로 탈바꿈한 그들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뇌옥 주위를 경계했다.
적어도 다음 교대가 있을 한 식경 동안, 그들이 이곳을 지킬 것이다.
‘그사이에 아무 일도 없기를 바랄 수밖에.’
사전에 모든 동선과 위치 등을 파악했다고는 해도, 일이 어떻게 흘러갈지는 아무도 모른다.
마음속으로 작게 뇌까린 야율목은 오늘따라 유난히도 낯설게 느껴지는 백의를 입은 채, 칠묘호와 함께 계단을 타고 지하로 향했다.
‘진태경이 갇혀 있는 곳은 사 층.’
장소는 이미 알고 있다. 그리고 일부 간수와 경비 병력이 뇌옥 내부를 지키고 있다는 것 역시도.
그들이 발소리마저 한껏 죽인 채 이동하던 그때. 저 멀리서 희미한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빌어먹을. 자네 혹시 속임수 쓴 거 아냐?”
“말도 안 되는 헛소리 좀 하지 말게. 그냥 겸허하게 패배를 인정해.”
“젠장. 이해가 안 되니까 그렇지. 다섯 판 연속으로 진다는 게 말이 되나? 벌써 두 냥이나 잃었어.”
간수들이 심심풀이 삼아 도박을 하는 것은 흔한 일이었고, 이러한 그들의 방심은 침입자들에게 있어 반가운 것이었다.
“염병. 손바닥 뒤집어 봐.”
“어허. 구질구질하긴. 그만 억울해하고 목소리나 좀 줄이게. 안 그래도 저 한족 놈 때문에 윗분들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와중에 농땡이 피우는 걸 알게 되면…….”
쉬쉭, 투둑!
흐릿한 어둠 속에서 들려오던 목소리가 뚝 끊겼다.
묘족 내에서 손꼽히는 전사들인 칠묘호는 중원에서도 인정받는 절정 고수들.
간수들은 은밀한 접근을 알아차리지 못했고, 순식간에 점혈 당한 그들은 열쇠를 빼앗긴 채 비어 있던 철창 속에 갇혔다.
– 기산. 도곡. 이곳에 남아라.
– 존명.
– 개미 새끼 한 마리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겠습니다.
자리를 비우면 의심을 사기 마련이다.
칠묘호 중 두 사람을 남긴 야율목은 이동 속도를 높였다. 평소의 걸음보다는 빠르게. 그러나 의심을 사지 않을 만큼.
저벅. 저벅.
거대한 미로처럼 얽혀 있는 뇌옥을 가로지르는 여섯 개의 신형.
그러나 야율목의 바람과는 달리, 모든 것이 예상대로 흘러갈 수는 없었다.
“음? 저자들은 누구지?”
진태경이 갇혀 있는 사 층의 경계는 평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삼엄했고, 간수 외에도 뇌옥 내부를 지키는 전사들의 숫자는 결코 적지 않았다.
“거기 자네들. 멈추게.”
순순히 걸음을 멈춘 야율목은, 호흡을 가다듬으며 길을 막고 있는 이들의 숫자를 헤아렸다.
‘도합 스물.’
심지어 그중 다섯은 절정 고수다.
상대가 백족의 정예 전사라는 것을 알아차린 야율목은 태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쓰고 있던 가면은 이미 벗은 후였고, 개수가 적은 횃불 덕분에 어두컴컴한 뇌옥의 환경은 정체를 숨기기에 안성맞춤이었다.
“대족장님의 지시를 받고 왔소.”
“대족장님?”
조장 격으로 보이는 백족 전사가 짐짓 눈살을 찌푸렸다.
“나가신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무슨 일인가?”
“크게 중요한 것은 아니오. 혹시 모르니 죄인에게 다시 금력단(禁力丹)을 복용케 하라 하시더군.”
“흠, 그래?”
“아마 탈옥을 우려하신 모양이오. 나 역시 소문으로만 듣긴 했지만, 워낙 괴물 같은 놈이니.”
야율목의 대답을 들은 백족 전사가 피식 웃었다.
“그렇다고 하긴 하더군. 그래 봤자 이제는 죽을 날만 기다리는 놈이지만.”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하지만, 세상일이라는 게 어찌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 아니겠소?”
“뭐, 그렇긴 하지. 그나저나 목소리를 들어 보니 젊은 친구 같은데, 교대해 줄 거 아니면 얼른 다녀오게. 반 각 주지.”
“그럴 생각이오.”
아무렇지 않게 어깨를 으쓱해 보인 야율목은, 얼굴을 드러내지 않으려 살짝 고개를 숙인 채 그들을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 다음 순간, 검갑을 힘주어 붙잡고 있는 어느 전사의 손을 보고 깨달았다.
‘이미 눈치챘……!’
쉬잉! 서걱!
깨달음과 동시에 섬광이 어깨를 스쳤다.
미약한 통증과 함께 솟구치는 몇 방울의 핏물. 야율목이 몸을 비틀며 두 개의 검을 피해 낸 그때, 벽력과도 같은 외침이 뇌옥 전체를 뒤흔들었다.
“침입자! 침입자다!”
삐이이익!
외침과 함께 터져 나온 날카로운 호각 소리. 곳곳에 대기 중이던 전사들의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적막을 깨트린다.
수많은 기척을 느낀 야율목은 입술을 질끈 깨물며 외쳤다.
“쳐라!”
그와 동시에.
쉬쉬쉬쉭!
야율목의 등 뒤에서 눈부신 검광(劍光)이 쏟아져 내렸다. 어두컴컴한 불빛 속에서 얽혀든 병장기가 위태롭게 흔들렸다.
캉! 차차창!
서걱!
“크악!”
순식간에 십여 개의 병장기가 부딪치고, 핏물과 비명이 터져 나왔다.
곧이어 앞서 간수로 위장시킨 두 사람까지 상황의 위급함을 알아차리고 가세하자, 불과 찰나의 시간 동안 스물에 달하던 백족 전사들의 절반이 부상을 입고 쓰러졌다.
하지만…….
삐익! 삐이익-!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아! 놈들의 목표는 진태경이다!”
“숫자가 적다! 될 수 있으면 사로잡아라!”
경계는 그들이 입수했던 정보보다 훨씬 더 삼엄했다.
하나가 쓰러지면 다섯이, 다섯을 쓰러트리면 열이 늘어나는 상황.
더군다나 진태경을 탈옥시키는 과정에서 같은 남만인을 죽이지 않기로 맹세한 야율목 일행에게는 첩첩산중이나 다름없었다.
쉬쉬쉬쉭!
“계속해서 밀어붙여라!”
사방에서 짓쳐 드는 백족 전사들과 예리하게 날 선 병장기.
순식간에 오십여 명이 넘는 적들에게 둘러싸인 야율목과 칠묘호는 이를 악물고 맞섰다.
차차차창!
서걱!
그러나 그들의 바람과 현실의 차이는 명백했다.
끊임없이 몰려드는 적들은 중과부적(衆寡不敵)이라는 네 글자를 떠올리게 했고, 그 사이사이에 섞여 있는 절정 고수들이 쏘아 보내는 한 수, 한 수는 위협적이기 그지없었다.
쉬쉭, 푹!
“큭!”
갈수록 늘어나는 자잘한 상처와 계속되는 출혈.
야율목과 칠묘호가 쓰러트린 백족 전사의 숫자는 결코 적지 않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적들의 머릿수는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었다.
마침내 다른 층에서 대기하고 있던 경비 병력까지 합세한 것이다.
‘빌어먹을.’
어느새 야율목의 등허리는 식은땀으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생각처럼 일이 쉽게 풀리지 않을 거라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나 너무 일찍 발각되었을뿐더러, 뇌옥의 경계는 그가 입수한 정보보다 훨씬 더 삼엄했다.
‘만약 이곳에서 사로잡히기라도 한다면…….’
그때는 모든 상황이 최악으로 치닫는다.
남만야수궁의 소궁주인만큼 목숨을 잃지는 않겠지만, 아버지인 야수묘왕의 정치적 입지는 물론 애당초 목표였던 진태경과 화룡각 대원들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전쟁이 시작되겠지.’
과거 마교에 맞서 참가했던 정마대전이 아닌, 중원 무림과의 전쟁.
진태경이 죽는다면 그때는 그 무엇도 돌이킬 수 없다.
더불어 그것이야말로 두 부자(父子)가 위험을 무릅쓰고 진태경을 구출하고자 하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였다.
‘어쩔 수 없다.’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문 야율목이 입술을 달싹였다.
– 원후(猿猴). 부탁한다.
짧은 전음이었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칠묘호의 맏형이자, 원숭이 가면을 쓰고 있던 중년인이 검을 흩뿌리며 외쳤다.
“길을 열어라!”
이렇게 된 이상 답은 하나뿐이었다.
목숨을 도외시한 돌파(突破). 그리고 진태경의 구출.
그것이 이 자리의 모두가 위험을 감수하고 이곳에 온 이유였고, 야율목이 생각한 이 상황을 타개할 하나뿐인 방책이었다.
‘진태경. 그가 뇌옥을 빠져나온다면 모두 해결할 수 있다.’
야율목은 품 안에 들어있는 단단한 목갑(木匣)을 더듬었다.
전투가 벌어지기 직전, 진태경에게 금력단을 복용시키고자 왔다고 했던 그의 말은 완전히 틀린 것이 아니었다.
단지 그것이 금력단이 아닌, 공력의 금제를 푸는 해약(解藥)이었을 뿐이다.
차차차창!
푸푹! 서걱!
“크악!”
패색이 짙은 상황 속에서, 뇌옥의 복도가 그리 넓지 않다는 것은 그들에게 있어 유일한 장점이었다.
사방에서 쏟아지는 공격을 무시하며 일점을 파고든 야율목과 칠묘호의 눈앞에, 마침내 어둑한 복도가 기다리고 있었다.
“가시오! 어서!”
충복의 다급한 외침을 뒤로 한 채, 야율목은 온 힘을 끌어올려 신형을 날렸다.
아니, 날리려고 했다.
쉬쉬쉭! 덥석!
다음 순간. 어둠 속에서 뻗어 나온 누군가의 손이 그의 어깨를 붙잡지 않았다면 그랬을 것이다.
“어디 가냐. 바쁜 일 있어?”
“……!”
아주 잠깐, 주위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든 상황을 떠나 침묵하던 야율목이 입을 열었다.
“……네가 왜 거기서 나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