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67
#66화
저벅저벅.
청년이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사람들이 분분히 물러섰다.
조각처럼 수려한 외모도 외모지만, 그에게서 흘러나오는 강렬한 분위기에 압도된 탓이었다.
그는 멀리서도 단연 눈에 띄는 존재였다.
“와아, 잘생겼다.”
작년에 들어온 시녀의 철없는 말에 늙은 하인이 피식 웃었다.
“꿈 깨라.”
“누가 뭐래요? 그냥 처음 보는 얼굴이니까 그렇지.”
“아까 못 봤어? 삼공자님 전각 무너졌을 때.”
“그 난리 통에 본 사람이 한둘인가. 그래도 저 남자는 전쟁 통에 봤어도 못 잊을 것 같은데, 헤헤.”
“하긴, 그때는 행색이 말이 아니었으니까.”
곰곰이 생각하던 시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 설마?”
“그래. 바로 그 이공자님이시다. 그러니까 헛꿈 꾸지 말고 가서 일이나 해.”
진무경은 주위의 수군거림을 무심한 얼굴로 흘려보내며 걸음을 옮겼다.
고풍스러운 전각에 도착하자 입구를 지키던 무인들이 문을 열어 주었다. 경외 어린 시선은 덤이다.
“소가주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고맙네.”
소가주 집무실에 들어선 그를 반긴 것은 짙은 다향(茶香)과 쿵쿵, 커다란 소리를 내며 달려오는 형, 진위경이었다.
“아우야!”
활짝 벌린 두 팔이 진무경을 꽉 끌어안았다.
순간 피할까 생각도 해 봤지만 그랬다가는 저 덩치가 어린애처럼 칭얼대는 꼴을 봐야 한다.
“숨 막힙니다.”
목각 인형처럼 딱딱한 말투였다.
“그게 삼 년 만에 만난 형한테 할 말이냐?”
진무경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삼십 년 만에 만나도 마찬가집니다.”
“차가워졌구나. 많이 변했어.”
“예, 저는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이니까요.”
“괜찮아. 난 체질상 몸에 열이 많아.”
“……놓으십시오.”
잠시 후, 마주 앉은 두 사람이 대화를 시작했다.
“위 대협이 안 보이는군요.”
소가주의 곁에 늘 그림자처럼 붙어 있어야 할 위팽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차를 한 모금 마신 진위경이 대답했다.
“추격대 맡겨서 보냈다. 삼문협(三問峽)까지 다녀오려면 보름은 걸리겠지.”
“그렇게 멀리 말입니까?”
가문이 위치한 태원이 산서의 중심이라면 삼문협은 초입이자 끝자락이나 마찬가지다. 섬서(陝西)와 하남(河南)으로 이어지는 길목이기도 했으니 보름이라는 시간도 빡빡했다.
“어차피 요식 행위인데 너무 고생시키는 거 아닙니까?”
“왜, 미안해서?”
“일이 이렇게 커질 줄 몰랐죠.”
“나도 몰랐다. 네가 오자마자 그런 사고를 칠 줄은.”
“그건!”
“무경아.”
지금까지와는 달리 가벼운 질책이 담긴 눈빛에 진무경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처음에는 단순히 몇 수 겨뤄 보려고 했을 뿐이에요.”
“그런데?”
“제법이더군요. 열이 받아서 힘이 과해졌습니다.”
“그랬겠지. 네가 알던 막내가 아니었을 테니까.”
진무경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불과 한두 시진 전에 직접 손을 섞어 보기까지 했으니 이젠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막내?”
“전부 다. 제가 받은 서신에는 항산검문 놈들이 쳐들어온다고만 적혀 있었습니다.”
항산검문이 선전포고를 한 직후 전서응을 날렸으니 그로서는 자세한 내막을 알 방법이 없었다.
기껏해야 태원진가로 오는 도중에 들었던 소문이 전부다.
“대장로가 배신했다는 말, 사실입니까?”
“그래. 말하자면 길다.”
“어느 정도로요?”
“사십 년 전, 정마대전까지 거슬러 올라가지.”
진위경이 굳은 표정으로 입을 연 순간이었다.
“그럼 됐습니다.”
“당시 대장로가…… 뭐라고?”
“어차피 끝난 얘기, 제가 들어 봤자 뭐 하겠습니까.”
대수롭지 않게 찻물을 한입에 털어 넣는 동생의 모습에 진위경의 얼굴이 황당함으로 물들었다.
“야, 인마!”
명색이 가문의 비사(秘史) 아닌가. 평소에도 무공밖에 모르는 녀석이긴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넌 알아야지! 본가의 직계…….”
“대장로가 배신했다. 그리고 죽었다. 그 과정에서 항산검문도 박살 났다. 태원진가가 최종 승자다. 제가 이해한 게 틀립니까?”
“아니, 맞긴 한데…….”
이제는 누가 비정상인지 헷갈린다. 혼란스러워하던 그는 불현듯 한 가지 사실을 떠올렸다.
“네가 전부 말해 달라며!”
“아, 그거 취소하겠습니다. 태어나기도 전에 있었던 일까지 듣는다면 이 자리에서 늙어 죽을 테니까요. 그 시간에 검이나 한 번 더 휘두르는 게 낫습니다.”
“…….”
“그럼 갑니다.”
“간다고? 어딜?”
“당연히 수련이죠.”
“수, 수련? 지금?”
“오랜만에 위 대협하고 비무나 하려고 온 건데, 없으니 혼자서라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진위경은 말문이 막혔다. 저게 삼 년 만에 형을 만난 동생의 태도란 말인가. 배신감에 가슴이 미어졌다.
“무경아!”
절절한 음성에 진무경이 차갑게 대꾸했다.
“차 잘 마셨습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무실을 떠나는 둘째 동생의 뒷모습에, 진위경은 충격에 휩싸였다.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
둘째도, 막내도 너무 훌쩍 커 버렸다. 각기 훌륭하게 장성한 동생들이 기특하면서도 가끔은 이렇게 서운하다.
‘그래, 이게 순리겠지.’
진위경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고는 집무용 탁자 앞에 앉았다. 그리고 아까 찢긴 비운의 걸작, ‘영웅의 탄생’을 신중하게 이어 붙이기 시작했다.
* * *
“흔적을 찾을 수 없습니다.”
“목격자도, 족적도 남기지 않았습니다. 신출귀몰한 놈입니다.”
수하의 말에 위팽은 쓴웃음을 삼켰다. 살수는 애초부터 없었으니 발견될 흔적도 없는 게 당연하다.
‘팔자에도 없는 연기를 해야 한다니.’
위팽의 머릿속에 한 시진 전, 진위경과 나눴던 대화가 스쳤다.
‘살수라니. 일을 너무 키우신 것 아닙니까?’
‘기회가 왔으니 이용해야지.’
‘그 기회가 삼공자 전각을 더 화려하게 새로 지을 기회는 아니겠지요.’
‘오, 그거 좋네. 추진해 봐.’
‘주공!’
‘장난일세, 장난.’
‘그럼 도대체 어떤 기회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주군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진 것도 그때였다.
‘본가가 산서성 전역을 아우를 기회.’
‘……!’
‘지난 닷새 동안 가문의 모든 기록을 뒤져 봤네. 찾아야 하는 이름이 있었거든. 그게 무엇인지는 자네도 알겠지.’
‘암천(暗天).’
‘그 결과가 궁금하지 않나?’
‘못 찾으셨군요.’
‘구름이 몰려오고 있네. 지금까지 모습을 드러낸 적 없는 구름이. 그 전에 대비해야 해.’
‘하명하십시오.’
‘정예 서른을 붙여 줄 테니 곧장 남하하게. 공식적인 목표는 살수의 생포, 혹은 처단이지만 진짜 임무는 따로 있네.’
위팽은 저도 모르게 가슴을 더듬었다. 진위경에게 건네받았던 두툼한 종이 뭉치가 만져졌다.
‘이것은?’
‘곧 다가오는 새해 원단(元旦)에 산서성의 모든 문파를 본가로 소집할 생각이네.’
초청도, 초대도 아니다. 소집이다.
위팽은 그 뜻을 모를 정도로 멍청하지 않았다.
‘맹주(盟主)가 되려 하십니까?’
‘필요하다면.’
불과 얼마 전까지 세인들의 눈에 비친 산서 무림은 태원진가와 항산검문이라는 양대 산맥으로 나뉘어 있었다.
그러나 실상은 달랐다. 산서 무림은 세 발 달린 솥과 같은 형국이었다.
‘태원진가, 항산검문. 그리고 중소 문파.’
태원진가는 중부, 항산검문은 북부. 그리고 남부는 이십여 개 중소 문파들의 영역이었다. 이번 전쟁으로 사라진 산서오문은 그중에서도 특히 강성했던 다섯 개 문파를 칭하는 이름이었을 뿐이다.
‘그들의 연대는 끈끈합니다. 응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전쟁이 일어나기 전이었다면 그랬겠지.’
세 발 달린 솥이 기울기 시작했다. 그리고 태원진가는 산서 무림이라는 솥을 홀로 지탱할 만한 힘과 명분이 있었다.
‘할 수 있겠나?’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위팽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받들겠습니다.”
그 시각, 진위경은 ‘영웅의 탄생’을 이어 붙이며 위팽을 욕하고 있었다.
* * *
상태창
[Lv.50 진태경]직업 : 일류 무인
명성 : 1180 (+150)
칭호 : 4개 (칭호 효과 적용 중)
– 산서잠룡 (모든 능력치 +10, 명성 +100)
– 명가의 자제 (모든 능력치 +5, 명성 +50)
– 초보 수련자 (수련 속도 +10%)
– 승부사 (일대일 전투 시 전투 관련 능력치 +10%)
근력 : 135 (+15)체력 : 142(+15)
민첩 : 180 (+15)지력 : 25(+15)
매력 : 25(+15)공력 : 15년
잔여 포인트 : 50
– 잔여 포인트를 분배하십시오.
나는 상태창을 보며 후회했다.
‘젠장. 포인트를 너무 많이 썼어.’
진무경을 상대하면서 자그마치 50포인트나 민첩에 꼴아박았다. 애써 유지해 온 능력치 균형이 무너졌으니 나로서는 속이 쓰릴 수밖에 없다.
‘기껏해야 2, 30포인트면 충분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절정 고수의 벽은 높았다. 아니, 어쩌면 진무경이 생각 이상으로 강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천재라는 꼬리표가 쉽게 붙는 게 아니니까.
“내가 오십 합을 버티자 살수도 낭패한 기색이 역력하더군. 얼마 전까지 수련에만 매진한 나는 아직 산서에 알려지지 않은 미지의 고수…….”
빡!
“컥!”
뒤통수를 얻어맞은 혁무진이 비명을 질렀다.
“뭡니까!”
“애들한테 헛소리 좀 그만해. 뒤지기 싫으면.”
하지만 소천은 반짝거리는 눈으로 뒷이야기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전 괜찮습니다.”
“뒤지는 게 모야? 소율이도 뒤질래!”
“……넌 아직 한참 남았어.”
나는 소매를 잡아당기며 보채는 소율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 꼬마 남매와의 인연도 제법 깊다. 가만히 보고 있으니 문득 생각나는 사람이 있었다.
“공 대협은 요즘 어떠시냐?”
공야청. 소천과 소율이 숙부라고 부르는 중년인.
여전히 무림의 용어가 어색한 나도 공야청을 부를 때는 꼬박꼬박 대협을 붙인다. 그는 그럴 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이니까.
“순조롭게 회복 중이십니다. 아직 거동이 불편하시긴 하지만요.”
“그래? 다행이네.”
“안 그래도 떠나기 전에 한번 뵈었으면 하시더군요.”
무심코 고개를 끄덕이려다가 멈칫했다.
“떠난다고?”
“예, 이번에 재건되는 삭주지부를 맡게 되실 겁니다.”
“그럼…….”
“저희도 따라가기로 했습니다.”
전쟁은 많은 것들을 앗아 간다. 소천과 소율은 항산검문의 습격으로 터전과 부모를 모두 잃었다. 지나간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겠지만 모든 것이 정리되었으니 이젠 소중한 추억이 서린 곳으로 돌아갈 것이다.
“감사했습니다, 은인.”
진심이 느껴지는 인사에 가슴 한구석이 간질거렸다. 어린 남매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잔인한 현실이 아직 남아 있었다.
더군다나 소율은 아직 부모의 죽음조차 모른다.
‘다섯 살이라…….’
현재를 인지하고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나도 어린 나이다.
문득 22년 전의 기억을 떠올려 봤다. 흐릿하다.
“……너도 그랬으면 좋겠구나.”
소율이는 뜻을 모를 말에도 배시시 웃었다.
나는 소천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종종 보러 가도 되냐?”
내 말에 소천이 기다렸다는 듯 환하게 웃었다.
“은인이라면 언제나 환영입니다.”
우리 사이에 훈훈하게 흐르는 공기를 뚫고 가만히 듣고 있던 혁무진이 끼어들었다.
“그럼 언제쯤 떠나는 거야?”
“반년 후요.”
“…….”
내 감동. 아껴 둘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