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673
#672화
쉬쉬쉬쉭!
세차게 몰아치는 바람에 새하얀 터럭이 출렁인다. 나는 백호의 목덜미를 움켜쥔 채, 스쳐 지나가는 주위 풍경을 바라보았다.
사방을 무성하게 채운 수풀과 거인처럼 우뚝 서 있는 나무들.
이끼 낀 바위틈 사이에 숨어 있던 뱀은 샛노란 눈으로 우리를 노려보고, 풀숲 사이에 납작 엎드린 채 사냥감을 물색하던 표범은 백호를 발견하고 슬그머니 뒷걸음질 쳤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의 위에, 서서히 밝아 오는 하늘이 있었다.
‘벌써?’
내심 중얼거린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상당한 시간이 흘렀음을 깨달았다.
뇌옥을 탈출했을 때가 자정이 넘은 직후였으니, 얼추 계산해 보면 못해도 세 시진 정도의 시간을 정신없이 달려온 셈이다.
그르릉.
그래서일까. 지금 나를 등에 태우고 있는 백호, 무야호의 숨결은 처음보다 훨씬 거칠었고 내딛는 발걸음에서는 피로가 느껴졌다.
‘그럴 만도 하겠지.’
지금까지의 무림 짬밥으로 장담하는데, 경신법 좀 익혔다는 절정 고수라 해도 이 지랄 맞은 동네에서 세 시진이나 전력으로 달리면 하지정맥류에 걸릴 거다.
하물며 무야호는 평범한 호랑이보다도 더 커다란 체구를 지닌 대호(大虎).
김정호도 지도 제작을 때려치울 만한 험지를 오가느라 체력도, 근육도 빠르게 소모되었을 것이다.
거기에 더해 등에는 나름 한 덩치 하는 나까지.
비록 내가 수의사는 아니지만 지금 무야호의 상태는 눈 감고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그나마 이 녀석 정도 되는 영물이라 지금까지 버틴 거지.’
남만에서도 내로라하는 영물답게 기본적인 운동 능력이 훌륭한 것은 사실이지만, 지금처럼 이동한다면 정작 중요할 때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나는 녀석의 목덜미를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근처에서 잠시 쉬었다가 가자.”
– 그르릉.
어렵지 않게 내 말을 알아들은 녀석이 작게 고개를 끄덕인다.
때마침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고, 걸음을 늦춘 우리는 잠시 후 작은 개울가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일찍 일어나 물을 마시러 온 산짐승 몇 마리도 함께.
꾸이익?
멧돼지라. 좋지.
나는 지체하지 않고 순간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을 즉각 실행에 옮겼다.
‘인벤토리 오픈. 소환.’
살기 위해서 닥치는 대로 이것저것 인벤토리에 쑤셔 넣다 보니, 이제는 걸어 다니는 무기 창고나 다름없다.
언제 보관해 두었는지 모를 싸구려 철창을 꺼내어 던지자, 커다란 덩치의 멧돼지 두 마리가 비명도 못 지르고 쓰러진다.
쉭, 푸푹!
꾸이이익!
방금 쓰러진 것이 저 녀석들의 부모였던 모양이다.
울음소리와 함께 쏜살같이 도망치는 멧돼지 새끼들의 모습을 보니 마음이 무거워졌다.
“후우.”
– 크르르.
무야호가 숙연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인 그때, 내가 슬픈 얼굴로 말을 이었다.
“새끼가 살이 더 연한데. 쟤들부터 잡을걸.”
– ……크릉?
뭐, 인마.
저게 진짜 사람 새끼인가, 하는 눈빛으로 바라보는 무야호를 무시하고 멧돼지 가죽을 벗겨 철창에 끼웠다.
화륵. 타다닥.
거기에 더해 열양지기를 이용해 모닥불까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연기와 함께 익어 가는 멧돼지 고기를 보자 피식 실소가 흘러나왔다.
이유는 별거 없다. 그냥, 지금 이 행동이 스스로 생각해도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온 거다.
‘남만 전체를 적으로 돌렸는데, 그 와중에 버젓이 바비큐 파티라.’
나도 안다. 이게 미친 짓이라는 걸.
아니, 애초에 남만의 중심부로 향하는 남동쪽 길을 따라 왔던 길을 되돌아온 것부터가 정신 나간 짓이었다.
하지만 몇 번을 다시 생각해 봐도 결론은 늘 같았다.
요희의 추종향을 따라 움직이기로 마음먹은 이상, 이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라는 것.
굳이 외궁(外宮)에서 백 리 남짓 떨어진 이곳에서 불을 피우는 미친 짓을 벌이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이쪽에서 이목을 끌수록, 다른 사람들이 살아남을 확률이 높아질 테니까.’
나는 떠나기 전, 태산에게 신신당부했다.
뒤도 돌아보지 말고 달리라고. 야율목을 통해 척후대의 부족장들을 설득하고, 수룡채의 쾌조선을 이용해 남만을 빠져나가라고.
그러자 태산은 평소와 달리 한참 침묵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각주.’
‘왜.’
‘태산이도 함께 가겠다. 각주 혼자 보낼 수는 없다.’
새벽이라 그랬는지, 아니면 예상치 못했던 말이라 그랬는지. 그 순간만큼은 나도 퍽 감성적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뭉클해진 마음과는 달리 차갑게 식은 머리는 알고 있었다.
이들 중 누구 하나라도 나와 함께 한다면, 양쪽 다 무사할 수 없음을.
‘다른 사람들이랑 같이 기다리고 있어. 금방 돌아올 테니까.’
‘언제? 태산이 몇 밤이나 기다려야 하나?’
‘글쎄다. 한 열 밤 정도?’
‘태산이 싫다. 열 밤은 너무 길다.’
‘그럼 다섯 밤.’
‘좋다. 약속이다.’
‘그래, 약속.’
그렇게 나는 떠났다. 스스로도 확신할 수 없는 약속을 남긴 채.
다섯 밤이라.
내가 그 안에 돌아갈 수 있을까. 아니, 돌아갈 수 있기는 한 걸까. 사실 나도 잘 모르겠다.
뇌옥을 탈출한 뒤에도 로그아웃 기능은 여전히 막혀 있고, 적이 되어 버린 수많은 남만인들은 지금쯤 나를 찾기 위해 사방을 조여 오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바스락.
그래, 지금 이 순간조차도.
– 크르릉.
노릇노릇 익어 가는 멧돼지 고기를 보며 침을 흘리던 무야호가 문득 낮은 울음소리를 흘린다.
하지만 나는 적의를 드러내는 녀석을 진정시키는 한편, 감각을 더욱 끌어올렸다.
동시에 더욱 예리해진 오감(五感)을 통해 속속들이 전해지는 새로운 정보들.
‘머릿수는 오십 남짓. 아직 부족은 모르겠지만 모두 전사고…… 함께하는 맹수는 없군. 발각될 우려가 있어서 뒤에 남겨 두고 왔나?’
설령 맹수를 한 트럭 끌고 왔다 해도 달라질 건 없지만, 덕분에 일이 더 편해진 건 사실이다.
대강의 상황 파악을 끝낸 나는 멧돼지를 꿴 철창을 천천히 돌리기 시작했다.
치이이익.
노릇노릇 익어 가는 먹음직스러운 소리 너머, 한껏 숨죽인 불청객들의 대화가 희미하게 귓가를 간지럽혔다.
– 저놈이다. 야율목, 그놈이 아끼던 백호를 곁에 두고 있는 것으로 보면 확실해.
– 그게,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여기서는 뒷모습밖에 안 보여요. 이러지 말고 차라리 이쯤에서 돌아가서 지원을 요청하는 것이…….
– 한심한 놈. 하늘이 우리에게 기회를 주었거늘 다른 부족에게 전공(戰功)을 넘기자니. 여기까지 왔는데도 그따위 나약한 소리를 지껄일 셈이더냐.
– 하, 하지만 형님. 만약 저자의 정체가 우리가 아는 그 한족이 맞다 해도, 당장 저희가 어찌 저런 괴물을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 그래 봤자 저놈도 결국 한낱 피륙으로 이루어진 인간. 이런 상황에서 거지꼴로 고기를 굽는 걸 보아하니 홀로 떨어져 정신이 나간 모양인데, 우리가 이 자리에서 놈을 잡는다면 만금(萬金)은 물론 아버님께서 새로운 대족장이 될 수도 있다.
음. 그렇단 말이지.
귓가로 흘러 들어오는 대화를 유심히 듣고 있던 나는 엉덩이를 툭툭 털며 일어났다. 그리고 돌아섬과 동시에 불쑥 물었다.
“그래? 지금 내 꼴이 그렇게 별로야?”
“……!”
“……!”
삼십여 장이나 떨어져 있음에도 느낄 수 있었다. 파르르 떨리는 공기와 최대한 은밀히 접근해 오던 적들을 휘감은 여러 감정을.
충격. 경악. 그리고…….
“쳐라!”
멍청함과 헛된 공명심(功名心)이 낳은 섣부른 결단.
하지만 놈들은 몰랐다. 엉망이 된 의복과 달리 지금의 내 몸 상태는 최상이며, 이미 그들을 향해 쏘아지고 있었음을.
쐐애애애액!
빛살 같은 속도로 쇄도하는 신형. 돌풍과도 같이 휘몰아친 바람에 무성한 풀숲이 터져 나간다.
산산이 부서져 흩날리는 나뭇잎 사이, 경악으로 가득 찬 눈동자들이 보인다.
“다들 뭐 하냐. 마저 안 뽑고.”
내 친절한 조언에도, 채 반도 뽑지도 못한 병장기를 쥔 손들은 얼어붙은 듯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은 이들을 이끄는 선두의 사내 역시 마찬가지였다.
“네, 네놈…….”
이 얼굴 어디서 본 것 같은데.
뭐, 지금 당장은 별 상관없지만.
“넌 왜 안 치냐.”
“뭐, 뭐라고?”
“치라며. 여기까지 와 줬는데 안 쳐?”
“그, 그것이…….”
“안 해? 그럼 내가 하고.”
나는 조용하게 한마디를 툭 내뱉었다.
“쳐라.”
그리고 다음 순간. 땅에 드리워지는 커다란 그림자.
– 크아아아아앙!
포효와 함께 내 머리 위를 뛰어넘은 거대한 동체가, 사내를 덮쳤다.
우득, 콰드드득!
* * *
누가 그랬다. 무력과 억압은 대화의 수단이 될 수 없다고. 닫힌 입을 열게 하는 것은 온화한 표정과 친절한 말투라고.
사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닫힌 입을 열게 하기 위해서는 그냥 무력과 억압이 아니라, 존나 무자비한 무력과 억압이 필요한 법이니까.
그리고 새삼 느끼는 사실이지만, 나는 이 분야에 제법 탁월한 소질이 있었다.
“지금 남만야수궁의 내부 사정은?”
“놈! 차라리 날 죽여라!”
“좋아. 무야호?”
콰득!
“끄아아아악!”
“잘했어. 이제 뱉어.”
퉤.
“끄흑. 끄흐흐흑.”
“뭘 청승맞게 질질 짜고 있어, 사내새끼가.”
“끄흐흐흡.”
“이번엔 다리였지만, 계속 울면 다음은 불알이다. 알아들었니. 이 씨부랄 새끼야?”
“끕. 끄으으읍……!”
“좋아. 그럼 다시 묻는다. 현재 남만야수궁의 내부 사정은?”
심문은 빠르고 순조롭게 진행됐다.
물론 심문을 위한 사전 작업도 완벽했다.
뒤늦게 덤벼들었던 놈들은 양팔을 부러트리고, 도망치던 놈들은 다리를 부러트렸으니까.
한 이십 명 정도를 병신으로 만든 다음 무야호의 한입만 찬스를 사용했더니 하나같이 골든 리트리버처럼 유순해졌다.
‘이 정도면 얼추 끝났나.’
이 와중에 놈들이 거짓말을 쳤을 가능성도 있지만, 일단은 충분한 근거와 신빙성이 있기에 사실로 치부해도 괜찮을 듯싶었다.
더군다나 죽음 앞에서는 모두가 솔직해지는 법이다. 특히 불알 앞에서는 더더욱.
그리고 모든 심문을 끝낸 나는, 가장 먼저 무야호에게 당했던 사내를 힐끗 바라보았다.
전신이 으스러진 그는 간신히 숨만 붙은 채 거친 호흡을 내쉬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신음을 흘렸다.
‘어디서 봤나 했더니.’
핏줄은 못 속인다고, 부족장인 아비의 얼굴을 그대로 빼다 박았다.
물론 이 녀석의 아비가 되는 그자도 내게는 그리 중요한 인물은 아니었다.
대회의 첫날과 요서부의 참극이 있던 날. 그저 어떻게든 백상의 뒤에 서고 싶어 안달 난 아부꾼에 불과했으니까.
하지만 그것이 내가 놈을 포함한 다른 이들을 살려 주는 이유이기도 했다.
“돌아가서 전해.”
내 나직한 한 마디에, 놈이 두려움 가득한 눈빛으로 입술을 달싹였다.
“무, 무엇을?”
“내가 여기 있다고. 멀리 떨어지지 않은 어딘가에서, 너희를 지켜보고 있다고.”
“……!”
“오늘 들은 모든 것을 잊지 마라. 나 역시 잊지 않을 테니.”
놈은 물론이고, 주위에서 내 일거수일투족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던 남만인들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마 그들은 오늘 일을 죽을 때까지 기억할 것이다.
내 표정과 말투. 목소리와 행동.
그리고 앞서 심문하는 과정에서, 전날 밤 뇌옥을 습격한 묘족 전사들이 아직 살아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내가 남긴 경고를.
‘만약 그들을 건드리면, 너희도 모조리 죽는다. 당장 오늘이 아니더라도 내일. 혹은 내년. 어쩌면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하여 안심하던 그때에.’
사람이 누군가의 협박에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그 협박이 정말 현실로 이루어진다는 불안에 기반한다.
그리고 그들의 눈에 비친 나는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위인이었다.
열화문의 명맥을 이은 계승자. 화왕 적천강의 후인이자. 불과 약관 어림의 나이에 천하를 격동시킨 전대미문(前代未聞)의 괴물.
그것으로 충분하다.
오늘 나는 이들의 뼛속 깊이 지워지지 않을 두려움을 새겨넣었고, 이제 이들이 품은 두려움은 백상의 편에 선 남만인들 사이로 퍼져나갈 것이다.
빠르게. 더 멀리.
감히 어느 부족도 그들을 해할 수 없을 만큼.
아직 백상이 있기에 완벽한 안전을 논하기에는 부족하지만, 이것이 지금의 내가 그들에게 해 줄 수 있는 최선이다.
“당장 떠나라. 이 자리에서 죽고 싶지 않다면.”
“……!”
“……!”
잠시 후, 나는 어느 거목의 가지에 앉아 하얗게 질린 얼굴로 숲을 빠져나가는 오십여 명의 인영을 확인했다.
그리고 마치 귀신에 홀린 듯, 혼비백산하여 도망치는 그들의 뒷모습을 끝까지 바라본 뒤 천천히 삼 갑자의 열양지기를 끌어올렸다.
화아악.
양손에 깃든 화염.
이제, 천라지망이라는 거대한 그물을 내게로 끌어당길 봉화(烽火)를 피울 차례다. 한 숲을 장작으로 삼아 타오르는 선명한 봉화를.
화륵. 콰아아아!
사방으로 번지며 숲을 집어삼키는 끔찍한 열기와 불길을 보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노야가 보면 쌍욕 좀 하시겠는데.’
피식 웃은 나는 활활 타오르는 숲을 뒤로하고 걸음을 옮겼다.
앞에는 이미 반쯤 탄 멧돼지 고기를 입에 문 무야호가 힘차게 달려가는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