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677
#676화
화염신장으로부터 시작된 화염은, 애뇌산의 초입에서 시작되어 삽시간에 사방으로 번졌다.
화륵. 콰아아아!
불교에서 말하는 초열지옥(焦熱地獄)이 있다면 이런 광경이 아닐까 싶다.
쉴 새 없이 흩날리는 잿가루와 매캐한 연기. 그리고 파도처럼 넘실거리며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화마(火魔).
투둑, 구구구궁!
줄지어 쓰러지는 거목에 지축이 흔들리고 산새들이 일제히 날아오른다.
산림 보호 협회 명예 회장인 적천강이 봤다면 눈을 까뒤집을 만한 광경이었지만, 다행히도 인근에 눈에 띄는 짐승들이 없는 것으로 보아 동물 보호 협회까지 더해질 일은 없을 것 같았다.
‘야생동물이라 그런지 눈치가 빠르네. 벌써 다 도망친건가?’
사실 지금은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다.
굳이 불쌍한 노루 일가족의 터전과 목숨을 빼앗고 싶지는 않지만, 그보다는 암천의 흉계를 저지하는 것과 다른 이들의 목숨이 더 중요하니까.
‘만약 내가 느낀 불길함이 사실이라면…….’
더 이상 머뭇거릴 여유 따위는 없다.
신속하게 달려가던 나는 십여 장 앞을 가로막은 화염의 벽을 확인하고 허공을 향해 손을 뻗었다.
‘인벤토리 오픈. 소환.’
요서부에서 투항할 당시에 백염(白炎)을 꺼내지 않았던 건 옳은 선택이었다.
압수당했다면 가장 중요한 지금 같은 순간에 사용할 수 없었을 테니까.
슥.
손아귀를 가득 채우는 서늘한 감촉. 투명하리만치 새하얀 창날에 사방에서 일렁이는 불꽃이 비친다.
‘지금.’
이미 사방이 불바다로 변해 가는 지금, 열양지기를 실어 쏘아 보내는 멍청한 짓 따위는 하지 않았다.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은 강한 힘과 속도. 더불어 간결하면서도 완벽한 동작과 흐름뿐이다.
쉭!
짧은 파공성과 함께, 비스듬히 내리그은 창날의 끝에서 뛰쳐나간 광풍(狂風)이 화염을 찢어발겼다.
화륵, 퍼어어엉!
폭발음과 함께 열린 길.
새하얀 터럭 위로 바짝 엎드린 나는, 불길에 가로막혀 잠시 주춤하고 있던 무야호의 귓가에 속삭였다.
“가자.”
– 크릉.
낮은 울음소리로 대답을 대신한 백호가 빛살처럼 신형을 날렸다.
파도처럼 넘실거리는 화염이 그런 우리의 뒤를 바짝 추격했지만, 이런 혼란 속에서도 녀석은 자신의 목적지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파파파팟!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풍경. 하늘 높이 뜬 달은 구름에 가려져 있고, 그 아래에서 불길을 등진 채 쉼 없이 나아가던 나는 왠지 모를 익숙함에 중얼거렸다.
“설마…….”
그리고 다음 순간, 뇌리를 스친 어떤 생각에 나는 문득 입을 다물었다.
아니, 어쩌면 설마가 아닐 것이다.
분명 낯설어야 할 이 길과 주위 풍경이 익숙하게 느껴진다는 것은, 단 한 가지 사실만을 의미하니까.
‘독혈지(毒血地).’
과거 남만 전체를 공포로 몰아넣었던 오독문의 멸문 이후, 남만의 금지(禁地)로 불리게 된 애뇌산.
그리고 애뇌산에서도 가장 깊고 은밀한 곳에 위치한 독혈지.
만일 내 짐작이 맞다면…… 우리는 지금 바로 그 독혈지로 향하고 있다. 어쩌면 남만에서 가장 위험할지도 모르는 그 장소로.
‘하지만 지금쯤 그곳은 적지 않은 병력들이 지키고 있을 텐데.’
남만야수궁은 어중이떠중이만 모여 있는 촌구석 문파가 아니다.
극히 드문 독물인 천년지주가 다섯 마리씩이나 나타나고, 오랜 시간 동안 그 누구도 발견하지 못했던 독혈지가 모습을 드러내자 남만야수궁은 적지 않은 숫자의 병력을 파견했다.
혹시 남아 있을지도 모를 오독문의 잔재와 위험을 뿌리 뽑기 위함이었다.
‘아무리 등하불명(燈下不明)을 노렸다고는 해도, 그런 곳으로 숨어들었다고?’
그리고 내가 떠올린 의문이 해결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 크르르…….
어느 순간 서서히 느려지는 발걸음.
무언가를 느끼고 이빨을 드러낸 무야호의 모습에 나는 일이 생겼음을 직감했고, 이내 매캐한 연기 사이로 스며드는 비릿한 냄새가 인간의 혈향(血香)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내심 중얼거린 나는 독혈지의 입구를 바라보았다. 거대한 괴수의 아가리처럼 벌려져 있는 그곳은, 처음 왔던 그때처럼 알 수 없는 위험으로 가득해 보였다.
아니, 어쩌면 그때 이상으로.
‘하긴, 쉬웠으면 초절정 등급 퀘스트가 아니지.’
어쩐지 일이 생각보다 쉽게 풀린다 싶었다. 하지만 백상과는 다른 의미로, 지금의 나는 돌아가기에는 너무 멀리 왔다.
당장 눈앞의 위험을 피해 간다면, 그 뒤에는 더 큰 위험이 들이닥칠 것이다.
지금 이 순간조차 산림을 휩쓸며 다가오는 등 뒤의 화염처럼.
스윽.
무야호의 등에서 내린 나는, 평소 녀석이 좋아하던 턱밑을 살살 긁어 주며 말을 건넸다.
“아무래도 우리가 함께하는 건 여기까지인 모양이다. 지난번과 다른 건, 이번에는 돌아오지 않아도 된다는 거야.”
– 크릉?
“더 늦기 전에 돌아가. 너라면 불길을 뚫고 빠져나갈 수 있을 거다.”
– 크르릉…….
무야호는 작은 울음소리와 함께 내 눈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나는 이 영민한 백호의 청백색의 눈동자에 떠오른 갈등과 두려움을 느낄 수 있었다.
뛰어난 본능을 지닌 존재답게, 녀석도 이미 짐작하고 있는 듯했다.
들어가기는 쉬워도 나가는 것은 어렵다는 걸.
어쩌면 두 번 다시 야율목을 보지 못할 수도 있다는 걸.
그럼에도 지난번처럼 쉽게 발길을 돌리지 못하는 것은, 그간 나름대로 우리 사이에 정이 쌓였기 때문일 것이다.
“나도 죽으러 가는 거 아니다. 그러니 걱정하지 말고 먼저 떠나. 네 주인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
안심시키는 말과 함께 부드럽게 목덜미를 쓸어 주자, 그제야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 무야호가 잠시 멈춰 있던 신형을 날렸다.
– 크아아앙!
쉬이익!
아직 불길이 미치지 않은 언덕이 아닌, 독혈지의 입구를 향해서.
“야! 야 인마!”
당황 섞인 외침을 토해 냈지만 이미 붙잡기에는 늦은 상황.
이 예기치 못한 일에 잠깐 몸이 굳은 그때, 우렁찬 포효와 함께 희뿌연 독무(毒霧) 사이로 닥돌했던 백호가 비틀비틀 걸어 나왔다.
– 크륵. 쿨럭.
“……피독주 줄까?”
멈칫하며 내 시선을 피한 백호가, 슬그머니 고개를 끄덕였다.
* * *
무야호는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독혈지에 빠르게 적응했다.
피독주를 물다 못해 꿀꺽 삼켜 버린 녀석은 기민한 반사신경으로 곳곳에서 밀려오는 독물들을 처리했고, 경신법 좀 익혔다는 절정 고수들도 주저할 만큼 큰 폭을 가진 늪을 단 한 번의 도약으로 뛰어넘었다.
그러나 점점 더 깊숙한 곳으로 향할수록, 녀석의 움직임과 호흡 역시 조심스러워졌다.
솨아아아.
독혈지 내부를 잠식한 독무로 인해 쉽사리 분간할 수 없는 시야. 알 수 없는 무언가가 풀을 스치는 소리와 물 떨어지는 소리만 드문드문 들려올 뿐, 사방은 소름이 끼칠 만큼 적막했다.
‘지난번에 야수묘왕과 함께 왔을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입구에서 혈향을 맡았을 때부터 느꼈지만, 이건 결코 좋은 징조가 아니다.
아마도…… 아니, 상당히 높은 확률로 며칠 전 남만야수궁이 독혈지에 파견한 이들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문득 뇌리를 스쳤다.
‘만약 그렇다면, 분명 그놈 짓이겠지.’
이름과 별호도, 얼굴도 드러나지 않은 초절정 고수.
촌각도 걸리지 않은 짧은 시간 동안 요서부를 피로 물들이고 흑웅과 요희를 납치해 간 그놈이라면 충분히 벌일 수 있는 일이다.
어쩌면 놈이 아니라, ‘놈들’일 가능성도 농후했다.
암천(暗天).
마교의 뒤를 이어 등장한 놈들의 전력은, 지금까지 드러난 것만으로도 무시무시한 수준이다.
특히 내가 직접 부딪혀 보기까지 한 혈주와 서천마군의 무위는…… 시스템을 바탕삼아 수많은 단련과 사선을 넘나드는 전투로 급성장한 지금의 나조차 감히 승리를 장담할 수 없을 정도다.
‘비록 겪어 본 적은 없지만, 남천마후 역시 놈들과 비교해도 떨어지지 않을 만한 실력자일 테고.’
그렇기에 홀로 적지로 향하고 있는 나로서는 더욱 긴장될 수밖에 없었다.
혈주와 맞닥트렸을 때는 검성(劍星) 매종학이 있었고, 그 어느 때보다 죽음에 가까웠던 서천마군과의 결전에서는 적천강의 도움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곳에 남천마후가 있다면…….’
내가 살아서 동료들을, 가족들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툭.
그리고 인지하지도 못한 사이에 맺힌 식은땀 한 방울이, 목덜미를 타고 미끄러지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할짝.
쓰라릴 만큼 까슬까슬한 감촉.
혓바닥으로 목덜미를 핥아 준 백호가 천연덕스럽게 모른 척하는 모습을 보니, 나도 모르게 피식 실소가 흘러나왔다.
“긴장하지 말라고?”
– 그르릉.
별것 아닌 일이지만 이상하게 마음이 편안해진다.
생각해 보면 지금까지 죽을 위기를 수두룩하게 겪었는데, 여기까지 와 놓고 새삼 식은땀을 흘리다니.
이렇게 긴장했다간 오히려 몸이 굳어 제대로 싸우기조차 힘들다.
‘그래, 시발. 어차피 한두 번이냐.’
열화문의 계승자이자 화왕의 후인이 갖춰야 할 필수 덕목, 노빠꾸 정신을 몸과 마음에 되새긴 나는 독무를 향해 일장(一掌)을 뻗었다.
퍼엉!
적막함을 깨트리는 파공성.
독과는 극상성인 열양지기. 그중에서도 강맹하기 이루 말할 수 없는 화염신장(火焰神掌)의 열기가 뻗어 나가자, 짙은 독무가 산산이 부서져 흩어지고 어두웠던 독혈지가 붉게 물든다.
스스스슥!
황급히 빛과 열기를 피해 움직이는 희한한 형태의 독물들.
마침내 환하게 드러난 미로처럼 얽힌 길을 노려보던 나는, 공력을 실어 포효하듯 내질렀다.
“나와! 이 개새끼들아!”
– 크아아아앙!
* * *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어느 순간, 불현듯 정신을 차린 요희(妖姬)는 한 치 앞도 분간할 수 없는 어둠 속에서 눈을 깜빡였다.
“아.”
언제나 고혹적이던 목소리는 반쯤 쉬어 있었고,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았던 탓인지 전신 곳곳이 욱신거렸다.
그리고 그제야 서서히 떠오르기 시작하는 기억의 파편들.
“……!”
자신도 모르게 심장이 덜컥 내려앉고, 잠시 풀어졌던 몸이 다시 석상처럼 굳었다.
말없이 파르르 떨리는 요희의 눈동자에는 믿을 수 없는 기억들이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비명. 시체. 피.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만들어 낸 한 사람의 얼굴.
요희가 반사적으로 비명을 내지르려던 그때, 어둠 속에서 한껏 숨죽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진정하시오, 요희.”
“흡……!”
“놀랄 것 없소. 나요, 나.”
간신히 비명을 삼킨 요희는 두방망이질 치는 가슴을 진정시켰다.
서서히 어둠에 익숙해진 그녀의 눈동자에 익숙한 인영이 잡혔다.
“흐, 흑웅? 정말 흑웅 오라버니예요?”
“맞소. 기억나지 않으시오?”
기억이 순차적으로 돌아오는 데에는 약간의 시간이 걸렸다.
요희는 ‘그’에게 마지막까지 저항하던 흑웅의 모습을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저도 모르게 잠시 잊고 있었어요. 그런데 말투가 왜 평소랑…….”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어둠 속, 요희가 깨어나는 것을 기다리고 있던 흑웅이 쓴웃음을 머금었다.
“여러 가지 사정이 있었소. 그대에게도 쉽사리 말할 수 없었던 사정이.”
정중한 어조와 말투.
요희는 언제나 헤실헤실 웃으며 누이라 부르던 흑웅의 이와 같은 모습이 낯설게 느껴졌지만, 지금 당장은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이곳은 어디죠? 그, 그자는 어디 있고요?”
“나도 모르오. 눈을 떠 보니 이곳이더군.”
쇠사슬로 결박된 몸과 옴짝달싹도 하지 않는 공력.
요희가 절망에 빠진 눈으로 사방을 더듬던 바로 그때. 둔중한 소음과 함께 희미한 빛이 쏟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