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678
#677화
철컥. 구구궁.
갑작스럽게 열린 석문(石門)과 함께 흘러나오는 빛.
어둠에 익숙해져 있던 흑웅과 요희가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리며 신음하던 그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그들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오호, 꼴이 제법 볼만한데.”
“……!”
“……!”
“그래, 남만의 야만족들이라면 응당 이래야지.”
취한 듯 흐느적거리는 목소리에, 두 사람의 신형이 파르르 떨렸다.
말에 담긴 조롱과 비웃음에 모멸감을 느껴서?
아니다. 그것은 두려움과 공포 때문이었다.
‘이 목소리는…….’
상대의 정체를 알아차린 요희는 전신의 피가 싸늘하게 식는 듯한 감각에 사로잡혔다.
어찌 잊겠는가. 마치 유령처럼 나타나 휘하의 전사들을 몰살시키고, 단 한 수만에 흑웅을 외팔이로 만들어 버린 악귀(惡鬼)의 목소리를.
요희의 머리가 새하얗게 물든 그때, 한껏 숨죽인 흑웅의 속삭임이 들려왔다.
“명심하시오. 절대 눈을 떠서는 안…….”
퍼엉!
“커헉!”
한 줄기 파공성과 함께 울려 퍼지는 비명.
비록 조언에 따라 질끈 눈을 감고 있던 요희는 볼 수 없었지만, 내상으로 검붉은 핏물을 쏟아 내고 있을 흑웅의 모습을 떠올리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만! 그만하세요!”
“쿠, 쿨럭. 요희, 가만히 있…….”
퍼엉! 털썩.
다시 한번 울려 퍼지는 파공성에, 요희는 참지 못하고 눈을 떴다.
전신이 결박된 채 쓰러져 있는 흑웅. 그리고 한 됫박은 될 법한 핏물을 토해 낸 그의 앞에 우뚝 선 악귀가 보였다.
“다, 당신.”
“제법 영악한 계집이라고 들었는데, 헛소문이었군.”
떨리는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요희의 음성에, 악귀가 누런 이를 드러내며 씩 웃었다.
산발이나 다름없는 흰 머리와 가늘게 찢어진 실눈. 요서부에서는 복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지만 분명 눈앞의 노인은 그 악귀가 맞았다.
“왜 저놈의 말을 듣지 않았느냐. 노부의 얼굴을 보지 않았다면 일각이라도 더 연명할 수 있었을 터인데.”
“……!”
“뭐, 이렇게 된 이상 별수 없지. 두 연놈 모두 사이좋게 저승길로 보내는 수밖에.”
어깨를 으쓱한 노인은 왜소하기 짝이 없는 체격에 비해 비정상적으로 긴 팔을 뻗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반점으로 가득한 손바닥이 가까워지는 만큼 짙어지는 죽음의 냄새.
마지막임을 직감한 요희가 몸부림치려던 그 순간이었다.
“그만하면 됐다, 흑수(黑手).”
반쯤 열린 석문 틈새로 흘러나온 한마디에, 흑수라 불린 노인이 손을 거두며 한숨을 내쉬었다.
“거, 이제는 눈치 보여서 장난도 못 치겠군.”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대답했다.
“그 말, 지금 내게 한 말이냐?”
만년설(萬年雪)처럼 냉막한 목소리에, 흑수가 입맛을 다셨다.
“그럴 리 있겠소. 혼잣말이오, 혼잣말.”
“천둥벌거숭이처럼 구는 것은 여기까지다. 설마 마후(魔后)께서 내리신 명을 잊은 것은 아니겠지.”
흑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천둥벌거숭이라. 이 나이에 그런 말을 들을 줄은 몰랐구려.”
“하면 나이에 맞는 언행을 보이면 될 터. 대계(大計)를 코앞에 두고 경거망동했다가는 내가 용서치 않을 것이다.”
“…….”
“대답한 것으로 알지.”
어떤 인기척도 느낄 수 없었지만, 요희는 석문 밖의 누군가가 사라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들려온 흑수의 중얼거림 때문이었다.
“빌어먹을 노괴(老怪) 같으니.”
흑수에게는 그저 사소한 불평이었을지 몰라도, 요희는 경악과 두려움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했다.
‘이자뿐만이 아니었다니.’
갑작스럽게 끼어든 냉막한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두 사람이 주고받는 대화만으로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는 눈앞의 악귀도 고분고분하게 만드는 연배와 무위의 소유자라는 것을.
그리고 거기에 더해…….
‘마후. 분명 마후라 했어.’
짧은 대화 도중에 등장한 두 글자. 마후.
그리고 그 단어가 누구를 지칭하는 것인지, 요희는 이미 알고 있었다.
‘남천마후(南天魔后).’
기이할 정도로 아름답고, 아름다운 것 이상으로 위험하다고 알려진 암천의 핵심 인물.
남천마후에 관한 모든 것은 극비리로 취급되는 정보였지만, 남만에서도 단 네 명뿐인 대족장인 요희는 예외였다.
무엇보다 그녀에게는 믿고 기댈 만한 백상이라는 거목이 있었다.
‘내 곁에 선다면, 그대가 원하는 것을 주지.’
그건 여인의 몸으로 대족장의 자리에 오른 직후, 처음으로 대면한 자리에서 백상이 했던 말이었다. 그에 요희는 이렇게 물었었다.
‘제게 무엇을 주실 생각이죠?’
‘막대한 재화와 영향력. 그리고 요족의 부흥.’
‘흥미롭네요. 하지만 거절하겠어요.’
‘이유는?’
‘백상 대족장님의 제안을 승낙한다 해도 제가 원하는 만큼의 대가를 얻지 못할 테니까요. 전 보기보다 야망이 크거든요. 지켜지지 않을 약속 때문에 야율 궁주를 적으로 돌릴 만큼 순진하지도 않고요.’
‘이번에 대족장의 자리에 오르면서 요서부를 물려받았겠군. 그곳에 믿을 만한 심복들이 있나?’
‘물론이죠. 그런데 갑자기 그건 왜…….’
‘늦었지만 축하하는 의미로 선물을 보낼까 싶어서. 우선은 황금 다섯 수레 정도면 충분하겠지.’
‘……!’
‘오늘은 이만 돌아가거라. 제안에 응할 생각이라면 내일 이 시간에 다시 만나도록 하지.’
황금 다섯 수레라니.
감히 상상도 못 했던 막대한 금액에 처음에는 반신반의하던 요희였지만,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누렇게 번쩍이는 황금 더미를 직접 확인한 뒤에는 확신할 수밖에 없었다.
백상은 반드시 약속을 지킨다는 것을.
만약 그의 곁에 선다면, 자신이 원하는 대가 이상을 얻을 수 있으리라는 것을.
그렇게 다음 날,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요희는 곧장 백상을 찾아갔고 자신의 판단이 옳았음을 깨달았다.
아니, 옳았다고 믿었다.
눈앞의 악귀가 찾아오기 전까지는.
“호오, 이 계집년 좀 보게.”
언제 기분이 상했냐는 듯, 흑수는 술에 취한 사람처럼 흐릿하게 웃었다.
“눈깔을 동그랗게 뜬 걸 보아하니, 이게 뭔가 감이 잡힌 모양이로구나. 응?”
“나, 나는…….”
“뭐, 대강의 이야기는 노부도 들어서 알고 있다. 덕분에 우리가 준비하는 일이 쉽게 풀렸다고 했지. 그 부분에 있어서만큼은 백상, 그놈이 야만족답지 않게 제법 일 처리를 잘했어.”
요희는 동공이 거세게 흔들렸다.
암천의 주구 노릇을 한 것으로도 모자라 죽을 위기에 처한 지금의 상황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없어. 나는 몰랐…….”
“몰랐던 것이냐. 아니면 모르는 척했던 것이냐.”
“……!”
“안 물어봐도 알겠군. 하긴, 십 년이 넘도록 백상 그놈을 따랐으니 대족장씩이나 되는 년이라면 응당 의구심을 품었겠지.”
낄낄 웃는 흑수의 모습을, 요희는 그저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눈앞의 악귀가 하는 말은 모두 사실이었으니까.
첫 시작은 미미했다. 일 년에 한 번 열리는 대회의에서 백상의 의견에 손을 들어 주었고, 그가 내리는 몇 가지 사소한 지시를 따르기만 하면 황금과 영향력이 넝쿨째 굴러 들어왔다.
그러나 세월이 흐를수록 의심은 짙어졌고, 불과 몇 달 전부터 자주 들려오기 시작한 암천이라는 두 글자에는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마음속에 자리 잡은 의심과 불안감을 애써 외면하고 억눌렀다.
모든 것을 밝히고 수습하기에는 지금까지 얻은 것들이 너무 많았으니까.
요족의 부족민들은 서서히 약화하던 부족을 다시 일으킨 요희를 우러러보고 있었고, 어린 계집 취급하던 부족장들은 먼저 고개를 숙였다.
그토록 강한 야수묘왕도, 백상도 결국은 언젠가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갈 터. 그때가 되면 공석이 된 권좌(權座)도 노려봄 직했다.
여인의 몸으로 궁주의 자리에 올라, 남만야수궁의 역사를 새로 쓰는 것이다.
그러나 요희가 매일 밤 되새기던 원대한 야망은, 바로 지금 송두리째 무너지고 있었다.
“그래도 네년은 노부에게 감사해야 할 것이다. 요족의 전대 대족장이 급사하지 않았다면, 너처럼 멍청한 계집이 어찌 지금까지 호사를 누리며 살았겠느냐.”
“그, 그 말은 설마.”
“여러모로 까다로운 늙은이였지. 무공은 형편없었지만, 대신 눈치가 빨랐거든. 때마침 요족에 역병이 돌아 손쉽게 처리할 수 있었지.”
씩 웃은 흑수가 말을 이었다.
“참으로 희한하지 않더냐? 늙을 대로 늙은 대족장은 그렇다 치더라도, 그 뒤를 이어야 할 세 아들이 죽고 대족장이 늘그막에 얻은 서녀(庶女)에게까지 차례가 돌아갔으니.”
“……!”
“그때 백상, 그놈의 표정이 참으로 볼만했지. 어떻게든 그 늙은이를 설득해 보겠다며 끝까지 시간을 끌더니…… 그래도 명줄 하나는 질긴 놈이라 그런지 달려들진 않더군. 아쉬운 일이야.”
요희는 공허한 눈동자로 흑수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더 이상 놀랄 만한 일도, 기력도 남아 있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역시 혼자만의 착각에 불과했다.
“그래도 계집치고는 제법이었다. 목숨이 위태로운 와중에도 추종향(追蹤香)이라, 그 조심성은 늙은 아비에게 물려받은 건가?”
추종향. 거무스름한 흑수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세 글자에 가녀린 신형이 덜컥 굳는다.
그리고 요희의 마지막 희망마저 산산조각 내 버린 흑수는 즐거움을 참지 못했다.
“왜, 노부가 모를 줄 알았더냐?”
흑수는 파르르 눈동자에 담긴 절망을 읽고 낄낄 웃었다.
그는 지금까지 수도 없이 이러한 감정을 마주했지만, 이러한 순간마다 솟구치는 희열은 조금도 무뎌지지 않았다.
“저런. 이 풋내나는 계집아. 어리석은 아해야.”
흑수라는 이름처럼, 검은 반점으로 뒤덮인 손바닥이 새하얀 뺨을 쓰다듬는다.
“참으로 아름답구나. 마후께서 탐내실 만해.”
노인은 먹잇감을 앞에 둔 맹수처럼 입을 벌렸다. 온통 썩거나 기괴하게 뒤틀린 이빨에서는 끔찍한 악취가 풍겼다.
“마음 같아서는 일장에 너희를 쳐 죽이고 싶지만…… 내 이번만큼은 참아 주마. 그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이 있거든.”
마치 거미줄에 걸린 벌레처럼 굳어 버린 요희를 남겨 둔 채, 흑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이미 의식을 잃고 쓰러진 흑웅을 힐끗 바라본 그가 석문으로 다가가던 그 순간.
구구구궁!
흑수는 들을 수 있었다.
사방을 울리는 굉음과 함께, 멀리서 들려오는 듯한 누군가의 외침을.
– 나와! 이 개새끼들아아!
크아아앙!
이제, 먼 길을 찾아온 손님을 맞이하러 갈 시간이었다.
* * *
적들을 부르는 내 방식은 간단했다.
깨고, 부수고, 박살 냈다.
독무? 독물? 어디 선가에 숨어 호시탐탐 지켜보고 있을 적들?
상관없다. 나는 핸들이 고장난 8톤 트럭처럼 미친 듯이 날뛰며 독혈지의 모든 것을 때려 부수기 시작했다.
적들이 나오지 않을 수 없도록.
그리고 이런 내 노력은 얼마 지나지 않아 결실을 맺었다.
“혈기왕성한 젊은이로군.”
“찾아온다면 야수묘왕일 줄 알았는데…… 네놈이 바로 그 진태경이냐?”
목소리를 따라 천천히 돌아선 나는 볼 수 있었다.
약이라도 한 것처럼 흐느적거리는 땅딸막한 늙은이와 고향이 남극 세종기지인지 한기를 풀풀 풍기는 장신의 노인을.
이토록 상반된 두 사람이었지만, 그들에게도 공통점은 있었다.
첫째. 초절정 고수라는 것.
둘째. 결코 살려서 보내지 않겠다는 의지가 엿보이는 살기를 뿜어낸다는 것.
그리고 두 노인을 보며 잠깐 고민하던 나는, 준엄하게 입을 열었다.
“한 놈은 빠져 있어라. 강호의 법도에 따라 차례대로 상대해 줄 테니.”
대답은 금방 돌아왔다.
쉬이잉, 콰광!
그래, 시발. 안 먹힐 줄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