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681
#680화
느릿하게 흘러가는 세상 속.
주먹을 휘감으며 솟구친 청백색의 화염이, 찰나의 순간 스쳐 지나가는 모든 광경을 장작 삼아 타오른다.
내가 흑수권마의 심장을 향해 포탄처럼 내뻗은 일권(一拳)도.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듯 부릅뜬 눈동자로 황급히 손을 뻗는 놈의 모습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힘없이 밀려 나가는 흑색 강기와 화염에 맞닿기 무섭게 산산이 흩어지는 호신강기도.
그리고…… 그 너머에서 공간을 가로지르며 다가온 눈부신 섬광까지도.
콰아아앙!
거대한 굉음과 진동.
모든 것이 한순간에 벌어지고, 한순간 만에 끝난 그곳에 뜨거운 열풍(熱風)이 불어닥쳤다.
아니, 반경 수십여 장이 마찬가지였다.
열양지기로 말미암은 열기와 수증기가 만들어 낸 안개가 곳곳을 잠식하고, 시야를 가로막았다.
솨아아아.
나는 제자리에 우뚝 선 채, 희뿌연 안개를 바라보았다. 그 너머에서 한 줄기 음성이 흘러나오기 전까지.
“실로 놀랍구나. 생각했던 것 이상이야.”
진심인 듯 미약한 탄성이 묻어 나오는 음성. 나는 허공섭물(虛空攝物)로 백염을 끌어당기며 담담하게 대꾸했다.
“내가 나이에 비해 좀 치는 편이긴 하지. 아마 천마(天魔)나 무신(武神)도 이 정도는 아니었을걸.”
“광오하군. 허나 인정하마. 네게는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자격이 충분하니.”
“자격 운운하고 자빠졌네. 쫄려서 훼방 놓은 주제에 그딴 말을 지껄여?”
입술 밖으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태연했지만, 나는 내심 속이 쓰렸다.
‘빌어먹을.’
마지막 순간 시야에 들어온 그 섬광.
호리호리한 노인이 날려 보낸 것이 분명한 쌍륜이 아니었다면, 흑수권마는 막대한 내상을 입거나 그 자리에서 절명했을지도 몰랐다.
‘이미 예상은 했지만…… 날아드는 타이밍이 너무 절묘했어.’
짧은 순간, 내게 주어진 선택지는 두 가지뿐이었다.
쌍륜에 목이 잘려 듀라한(Dullahan) 후보생이 되는 대신 흑수권마를 끝장내거나, 놈을 놓아주고 나도 살거나.
물론 내 선택은 당연하게도 후자였다.
허공에서 방향을 꺾은 일권으로 쌍륜을 후려쳤고, 흑수권마는 감히 그 틈을 노릴 생각도 하지 못하고 황급히 몸을 뺐다.
눈 깜짝할 사이에 시작되고 끝난 짧은 격돌.
언뜻 보면 서로 간에 팽팽한 동수를 이룬 것 같아도 이건 내게 있어 막심한 손해다.
한번 호된 맛을 본 흑수권마는 처음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조심스럽고, 철저하게 나를 상대할 테니까.
상대의 방심은 어떤 것보다 큰 약점이지만, 그 방심을 이용할 기회는 처음 한 번뿐이다.
‘이대로면…….’
쉽지 않다. 아니, 너무 어려운 싸움이 되어 버린다.
나는 안개 너머 숨어 있는 신형을 더듬으며 입을 열었다.
“우리 흑손이. 나보다 반백 년을 더 사는 동안 무공을 똥꾸멍으로 익힌 흑손이. 어디 숨어 있니?”
그냥 씹어 버리면 어쩌나 싶었는데, 흑수권마는 상대의 말에 성심성의껏 대답해 주는 훌륭한 인성의 소유자였다.
“……아가리 닥쳐라.”
“기분 탓인가. 처음보다 목소리가 훨씬 작아진 것 같은데. 불맛 좀 보니까 불알까지 쪼그라들었나?”
“……놈. 노부가 한 번 방심한 틈을 노렸다고 아주 기세가 등등하구나. 네놈에게 그런 기회가 또 올 성싶으냐?”
나는 피식 웃었다.
흑수권마의 무위를 생각하면 방심한 틈을 노렸다는 게 아주 틀린 말은 아니지만, 저건 후기지수나 할 소리다.
나이를 먹을 만큼 처먹은 노괴(老怪)가 아니라.
“말하면서도 스스로가 병신 같지? 응?”
“이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을……!”
“그만.”
이어지려던 흑수권마의 외침이 차가운 음성에 가로막힌다. 아직도 사방에 자욱한 안개 너머에서 호리호리한 신형이 드러났다.
사박.
끔찍한 열기로 바싹 익은 진흙이, 노인의 발끝에서 모래처럼 바스라진다.
양손에 톱니바퀴처럼 칼날이 돋아난 륜을 든 그가 가볍게 소매를 떨쳤다.
솨아아아.
한풍(寒風)이 뜨거운 열기 위에 내려앉고, 시야를 가리던 안개를 밀어 내자 온갖 독으로 들끓는 늪지대에서 사막으로 변모해 버린 주위의 광경이 드러났다.
“이게 말로만 듣던 열화신공(烈火神功)이군. 대단해. 이 정도면 몇 성의 경지인 거지?”
순수한 감탄을 실어 묻는 노인을 향해, 나는 창날을 늘어트리며 대꾸했다.
“삼천이십오 성.”
“터무니없는 숫자로 느껴지는 건 착각인가?”
“무학의 경지는 원래 끝도 없지.”
“우문현답(愚問賢答)이로군. 화왕이 제자를 잘 키웠어.”
“이 정도면 훌륭하게 키운 거 맞지. 그런데 당신 부모님은 왜 자식새끼를 이따위로 키웠대?”
몸 쪽 꽉 찬 회심의 패드립. 그러나 노인은 흔들리지 않았다.
“글쎄, 나중에 저승에 갈 일이 있으면 물어보도록 하지.”
사박.
마치 산보하듯 나아가는 걸음. 나는 거리를 재며 대답했다.
“말이 나온 김에 오늘 찾아뵙는 건 어때.”
“아쉽구나. 당분간은 그 근처에도 갈 일이 없을 듯해서.”
“그런 거 미루면 안 좋아. 부모님이 구천에서 얼마나 화가 나시겠어. 자식이랍시고 뭐 빠지게 키워 놨더니 찾아오지도 않고.”
“이번에는 잘못 짚었다. 노부는 천애 고아라 딱히 누군가의 보살핌을 받지 못했으니, 불효자 소리 들을 일도 없지.”
사박.
어느새 세 번째 걸음.
앞서 쌍륜에 털을 밀린 탓에 위엄 가득한 백호에서 애견 미용 실패한 뽀삐가 되어 버린 무야호가 낮은 울음소리를 토해 냈고, 나는 노인의 손안에서 천천히 돌아가기 시작하는 쌍륜을 응시하며 중얼거렸다.
“그럼 저승 가도 왜 이렇게 키웠냐고 물어보질 못하겠네. 어차피 얼굴을 몰라서.”
“듣고 보니 그렇군. 좋은 조언 고맙네.”
“그럼 지금 당신 뒤에서 살금살금 꽁무니나 따라오고 있는 저 병신은?”
흑수권마는 짤막한 욕설을 내뱉었고, 노인은 침착하게 대답했다.
“흑수(黑手), 저 친구도 비슷한 처지지.”
“진심으로 궁금해서 묻는 건데, 암천 필수 조건인가? 아니면 뭐 유행이야?”
노인은 대답 대신 다시 한번 걸음을 내디뎠다.
사박.
그리고 유난히도 선명한 그 소리가 귓가를 파고든 그 순간. 나는 볼 수 있었다. 노인의 양손에 들려 있던 쌍륜이 뿜어내는 푸른 광휘를.
츠츠츠! 쉬잉!
미세한 파공성과 함께 날아드는 두 갈래의 빛줄기.
마치 살아 있는 뱀처럼, 기괴망측한 움직임으로 날아드는 쌍륜의 아래로는 광기에 번들거리는 눈동자를 한 흑수권마가 쇄도하고 있었다.
쐐애애애액!
두 방향. 아니, 세 방향에서 동시에 시작된 공격.
– 크아아앙!
등 뒤에서 터져 나오는 백호의 포효와 함께, 나는 전력을 다해 백염의 창날을 내리그었다.
쾅!
굉음과 함께 전해지는 거센 반발력. 쌍륜 중 하나를 걷어 낸 나는 사각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느끼고 고개를 틀었다.
쉬익, 서걱!
그야말로 한 끗 차이.
강기에 의해 잘려 나간 머리카락이 허공에 흩날리던 그때. 어느덧 삼 장 앞까지 들이닥친 흑수권마가 너덜너덜한 양 소매를 떨쳤다.
“노오옴!”
구구구구궁!
활짝 펼쳐진 두 손에서 터져 나온 장력(掌力)이 공간을 뒤흔든다.
나는 파도처럼 덮쳐 오는 흑색 강기를 향해 부드럽게 창날을 밀어 넣었다.
화룡신창. 일 초식.
화룡일미(火龍一尾).
화륵, 쏴아아악!
청백색의 불꽃이 출렁인다. 흑색 장력을 가르고 거침없이 쏘아지는 화룡의 꼬리에, 대경한 흑수권마가 경호성을 토해 내며 신형을 틀었다.
서걱!
예리한 절삭음. 그러나 나와는 달리 흑수권마는 머리카락이 잘려 나가는 것 정도로 끝나지 않았다.
부지불식간에 잘려 나간 놈의 뭉툭한 코끝에서, 선혈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네, 네놈이 감히…….”
확실히 알았다. 흑수권마는 열 번을 더 싸운다 하더라도 나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저 늙은 괴물의 드높은 자존심과 그의 마음에 내재된 분노는 이성을 마비시키고, 그 미세한 균열은 내게 있어 곧 기회다.
‘지금.’
파팟!
단 일보(一步).
흑수권마와 나 사이에 놓인 수 장의 거리가 단숨에 지워지고, 십여 개가 넘는 움직임이 뇌리를 스친다.
그중 한 가지를 택하는 건 아주 손쉬운 일이다.
쉬익!
하늘로부터 땅까지. 미세한 파공음과 함께 내리그어지는 창날 위로 청백색의 화염이 피어오른다.
화룡신창. 이 초식.
‘천격(天挌).’
화륵. 콰아아아!
눈덩이는 구를수록 거대해지고, 물살은 더해지면 파도가 되는 법.
허공을 가로지르는 한 줄기의 화염을 올려다보던 흑수권마의 눈동자가 부릅떠진다.
“흡……!”
경호성과 함께 쳐올리는 쌍장(雙掌). 다급하게 끌어올린 장력이 화염과 부딪쳐 사그라진 그 짧은 순간, 푸른 섬광이 좌우에서 날아들었다.
쉬이이잉!
목. 그리고 가슴.
이건 움직임만으로는 피할 수 없는 공격이다. 나는 찰나의 판단과 함께 흑수권마를 향하던 창날을 비틀어 휘둘렀다.
쾅!
제아무리 나라 하더라도 불가항력(不可抗力)이라는 네 글자는 극복하지 못한다.
촤아악!
엄청난 반발력과 함께 중심을 잃은 몸이 속절없이 밀려 나간 그때, 누군가의 희끗한 신형이 유령처럼 들이닥쳤다.
쉬릭!
한마디 말도, 호흡도 없었다.
지금까지 후방에서 쌍륜만을 날려 보내던 노인은 냉정하면서도 담담하게, 그러나 정확한 속도와 흐름으로 자신만의 전투를 시작했다.
지금 이 순간처럼.
슈확! 푸푹!
뜨겁고, 서늘하다.
마지막 순간 신형을 비틀었음에도 결과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나뭇가지처럼 길고 말라비틀어진 손가락의 끝에서 터져 나온 지풍(指風)은 내 어깨를 꿰뚫었고, 노인을 향해 나아가던 백염의 창날은 방향을 잃고 흔들렸다.
그리고 힘을 잃은 창날을 피하는 것은, 노인에게 있어 너무나도 손쉬운 일이었다.
쉬익!
덧없이 허공을 가르는 창날.
이를 악문 나는 신형을 바로 세우며 남은 한 손을 펼쳤다. 동시에 열기와 함께 화염이 들끓는 그것을 노인의 가슴을 향해 내질렀다.
화륵. 후우우웅!
막아서는 모든 것을 불사르며 나아가는 화염신장(火焰神掌)이 노인의 눈동자에 비친다.
이루 말할 수 없이 뜨겁고, 쉼 없이 타오르는 열기.
하지만 여전히 차갑게 식은 노인의 눈동자를 본 나는, 알 수 없는 한기(寒氣)를 느꼈다.
‘이건.’
정체를 알 수 없는 불안감. 그리고 내 전신을 사로잡은 불길한 직감은, 곧 현실로 드러났다.
스윽.
찰나를 쪼개고 쪼갠 짧은 순간 속, 노인이 느릿느릿 손을 뻗는다.
아니, 느린 것은 그뿐만이 아니다.
그의 가슴을 향해 나아가는 내 일장도, 서로의 등 뒤에서 달려오는 흑수권마와 백호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주름진 노인의 손에서 흘러나온 냉기(冷氣)와 함께, 멈춰 있던 시간이 흐르기 시작했다.
콰득! 파츠츠츠측!
마침내 서로를 향해 맞닿은 두 개의 손바닥.
청백색의 불꽃과 새하얀 냉기가 부딪치고 섞여든다.
콰드드득!
모든 것이 온통 뜨겁고, 차가웠다.
각기 다른 색을 지닌 두 개의 빛이 눈앞에서 쉴 새 없이 명멸하고, 미증유(未曾有)의 공력이 사방을 부수고 뒤흔들었다.
구구구구궁!
천지가 갈라지는 듯한 굉음.
그리고 나는 보았다. 동시에 들을 수 있었다.
“소개가 늦었구나.”
서서히 꺼져 가는 불꽃을 짓누르는 강대한 음한지기와.
“노부는 대설귀(大雪鬼)라 한다.”
새하얀 입김 사이로 흘러나오는 차가운 음성을.
콰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