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684
#683화
퍼엉!
가슴을 통해 전해지는 열기는 뜨거웠고.
콰드드득득!
엄청난 충격이 파도처럼 전신을 휩쓸었다.
쿨럭.
실로 오랜만에 느끼는 격통.
또렷하던 시야가 아득해지고, 벌어진 입술 사이로는 검붉은 핏물이 터져 나온다.
하지만 거대한 만근거석(萬斤巨石)을 부수며 처박힌 대설귀를 더욱 괴롭게 하는 것은 고통도, 내상도 아니었다.
‘수가 읽혔다고? 저런 핏덩이에게?’
지금껏 수많은 강적들을 쓰러트리며 이 자리까지 온 자신의 심계(心計)가, 고작 약관 어림의 청년에게 밀렸다는 믿을 수 없는 현실이 대설귀의 머리를 어지럽히고 있었다.
‘분명 노부의 판단이 옳았을 텐데.’
멍하니 마음속으로 뇌까리던 그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니다.
옳았을 텐데, 가 아니라 분명 옳은 판단이었다.
이 미친 무림에서, 수많은 사선(死線)의 교차점에서 그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강대한 무공뿐만이 아니었으니까.
자신을 숨기고, 상대를 아는 것.
대설귀의 일신에 깃든 초절정의 무위가 날카로운 검이라면, 흔들리지 않는 평정심과 냉철한 판단력은 방패인 동시에 암기였다.
하지만…… 난생처음이다.
검으로 베어도 쓰러지지 않고, 방패로 막았음에도 막히지 않으며, 암기조차 통하지 않는 상대는.
자신의 모든 판단과 확신을 이토록 벗어난 존재는.
‘도대체 어떻게.’
해결되지 않는 한 줄기 의문과 함께, 대설귀는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을 들어 정면을 바라보았다.
화아아악.
세차게 휘몰아치던 설풍(雪風)이 가라앉는다. 서리에 뒤덮였던 땅이 녹아내리고, 새하얗게 뿜어져 나오던 입김에는 쓰디쓴 열기가 섞여들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의 중심에, 한 사람이 있었다.
저벅.
적막한 공간을 울리는 발걸음과 함께, 희뿌연 수증기 너머로 모습을 드러낸 인영이 대설귀의 눈동자에 비쳤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핏물에 젖은 혈인(血人)의 모습. 하지만 그에 반하여 맑고 또렷한 한 쌍의 눈동자.
서서히 가까워지는 청년의 모습에 대설귀가 몸을 일으켰다.
투두둑. 전신에서 떨어지는 돌조각과 함께 느껴지는 고통. 이를 악물며 내상을 억누른 그가 씹어뱉듯 한 사람의 이름을 토해 냈다.
“……진태경.”
어지러운 머릿속만큼이나 차갑게 식어 있는 목소리. 그러나 곧이어 돌아온 진태경의 대답은 담담하기 그지없었다.
“의외네. 이 정도면 못 움직일 줄 알았는데.”
“뭐?”
“늙은이가 기운도 좋지.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별로야. 더욱 고통스러워질 뿐이니까.”
순간, 뭔가를 깨달은 대설귀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네놈.”
“아. 별 의미가 있는 건 아니고, 아까 누가 나한테 비슷한 말을 했던 것 같아서 그대로 읊어 봤어. 얼추 보니까 한…… 일각도 안 지난 것 같은데. 어떤 병신이 아가리를 털었는지 생각이 안 나서.”
청년 치매인가, 하고 작게 중얼거린 진태경이 등 뒤를 곁눈질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 이거 모르면 오늘 밤에 잠 못 잘 것 같은데. 혹시 저기 누워 있는 늙은이가 알 수도 있으니까 한번 물어보고 와도 돼?”
“……!”
“빨리 다녀올게, 응?”
두말할 것도 없는 개소리다.
이미 심장이 으스러진 시신에 대고 뭔가를 묻는 것도, 시신이 대답하는 것도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
이건 명백한 조롱이었다. 귀 기울여 들을 가치도 없는.
그러나 대설귀는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평소였다면 일체의 반응조차 하지 않았을 헛소리였지만, 지금만큼은 동요하지 않을 수 없었다.
“네놈은…… 도대체 뭐지?”
순수한 의문이 담긴 한마디.
대설귀는 진심으로 궁금했다. 어떻게 진태경이 지금 이 순간 두 발로 서 있을 수 있는지. 어찌하여 흑수권마와 함께 쓰러지지 않았는지.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그건 결코 허상이나 어설픈 연기 따위가 아니었어. 한데 어떻게, 어떻게 그럴 수 있었단 말이냐?”
대설귀의 말은 한 치의 거짓도 보태지 않은 사실이었다.
틀림없다. 놈은 강대한 음한지기에 기혈이 뒤엉키고, 강기가 맺힌 쌍륜에 베이기까지 했다.
그렇기에 대설귀는 마지막 순간까지 확신할 수 있었다.
자신의 손에 들린 이 빙검으로, 상처 입은 맹수와 사냥개를 동시에 처치할 수 있다고.
대설귀가 굳이 흑수권마까지 죽이기로 마음먹은 것마저도, 노련한 사냥꾼이 품고 있던 한 줄기 경계심이었다.
벼랑 끝에 몰린 맹수가 무슨 짓을 할지 알 수 없었으니까.
하지만…… 틀렸다. 아니, 송두리째 뒤집혀 버렸다.
사냥꾼은 맹수를 죽이지 못했고, 사냥개의 목덜미에 이빨을 박아 넣은 맹수는 사냥꾼의 가슴을 할퀴었다.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그리고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한 대설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진태경은 혼잣말처럼 뇌까렸다.
“그래, 어쩌면 그랬을지도 모르지.”
그 중얼거림에 담긴 뜻은 대설귀가 이해할 수 없는 영역에 닿아 있었다.
그건 이 세상에서 오직 한 사람밖에 시도할 수 있는 도박이었으니까.
‘레벨 업.’
극도로 불리한 전세를 뒤집을 수 있는 한 수.
진태경은 오직 그 하나에 모든 것을 걸었다. 기꺼이 자신의 살을 내주어 적들의 방심을 유도했고, 마침내 적의 뼈를 취할 수 있었다.
‘흑수권마에게서 얻은 경험치로 레벨 업을 하지 못했다면…… 지금쯤 쓰러져 있는 건 나였겠지.’
하지만 목숨을 건 도박은 성공했다.
진태경은 애뇌산으로 오는 길에 십여 회의 전투를 치렀고, 독혈지를 돌파하며 수백 마리의 독물들을 처리했다.
그리고 그렇게 조금씩 쌓인 경험치 위에 흑수권마라는 이름을 얹었다.
‘거기에 더해, 뇌옥을 탈출하며 얻은 뒤 쓰지 않았던 10포인트와 화룡갑(火龍鉀)까지.’
생각지도 못한 대설귀의 한 수에 먼저 내상을 입어야 했지만, 그렇기에 가장 중요한 순간에 꺼내어 쓸 수 있었다.
실로 아슬아슬했지만,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온 힘을 다해 내뻗은 일권은 빙검보다 민첩하게 흑수권마의 생명을 빼앗았고, 대설귀의 빙검은 화룡갑을 완전히 관통하지 못했으니까.
진태경은 문득 오래전 누군가에게 들었던 말을 떠올렸다. 바둑을 참 좋아하던 한 사람. 매번 대국에서 질 때마다 쪽바리, 짱깨 아웃을 외쳤던 그가 해 주었던 말을.
‘아들, 바둑에는 대마불사(大馬不死)라는 말이 있단다.’
‘아빠. 불교였어?’
‘그게 아니고. 대마, 그러니까 큰 말은 쉽게 죽지 않는다는 뜻이야.’
‘그러쿠나. 근데 아빠, 이번 판은 왜 졌어?’
‘그건 대마가 죽어서…… 여보! 제발 태경이 좀 데려가라니까! 여보!’
피식 웃음이 나왔다. 아버지의 말이 맞았다. 대마는 쉽게 죽지 않는다.
악수 끝에 묘수를 찾아낸 대마는, 그 어떤 돌보다 거대해져 바둑판을 지배하게 된다.
바로 지금처럼.
“흑손이는 이미 먼저 갔고, 우리 산타 할아버지도 슬슬 부모님 뵈러 가야지. 참고로 난 투항 권고 같은 거 안 한다.”
스릉.
피에 젖은 손아귀에 들린 백염의 창날이 한 사람을 향해 겨누어진다.
대설귀는 실핏줄이 터진 눈동자로 진태경을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개소리하지 말거라. 네놈이 약간의 우세를 점했을 뿐. 아직 끝나지 않았다.”
진태경은 구태여 부정하지 않았다.
최소한 저 염병할 늙은이가 하는 말 중,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말만큼은 사실이었으니까.
육참골단(肉斬骨斷).
비록 뼈를 취하기 위해 내주었던 살이지만, 앞서 자신이 입은 내상과 쌍륜에 의한 부상은 단 한 번의 레벨업으로 회복시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반면 그가 선공을 당하고도 다시 한번 일어났듯, 대설귀에게도 충분한 기력이 남아 있었다.
“네놈이 죽고, 노부가 사는 것. 그것이 순리(順理)요, 하늘이 내린 천명(天命)이니라.”
스아아아.
차가운 음성과 함께 주위를 감싸는 냉기.
전력을 다한 멸염신권(滅炎神拳)에 격중당하고도 쓰러지지 않는 늙은 괴물의 모습에, 진태경은 다시금 하단전을 가득 채운 화룡을 일깨웠다.
“뭐. 늙은이가 노망나는 거야 그러려니 하는데…….”
화륵.
투명한 창날을 뒤덮으며 일어난 청백색의 화염이 냉기를 몰아낸다. 은은한 열기를 띤 한 쌍의 눈동자에, 불꽃이 피어올랐다.
“명색이 암천이라는 새끼가 천명 운운하면, 뒈져서도 부모님 못 보지.”
그 순간.
팟!
지워진 공간과 함께, 화염과 냉기가 격돌했다.
* * *
꽈앙!
세상이 뒤흔들렸다. 서로를 향해 맞닿은 화창(火槍)과 빙검(氷劍)이 커다란 굉음을 토해 냈다.
땅과 하늘을 진동시킬 충격파가 사방을 휩쓸었지만, 폭발과 함께 밀려 나간 두 신형은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서로를 향해 발을 뻗었다.
쉭!
한 걸음. 단 한 걸음이면 족했다. 찰나를 가르며 쏘아진 대설귀가 피에 젖은 소매를 떨쳤다.
퍼엉!
공기마저 얼어붙게 만드는 냉기가 땅속 깊이 박혀 있던 천근거석을 휩쓸었다.
‘바위?’
대설귀는 깨달음과 동시에 고개를 쳐들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계단이라도 있는 것처럼, 반 박자 앞서 텅 빈 허공을 밟고 뛰어오른 진태경이 창과 한 몸이 되어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화룡신창. 이 초식.
천격(天格).
콰아아!
생각할 겨를조차 없었다. 대설귀는 본능적으로 손에 들고 있던 빙검을 위로 쳐올렸다.
유성처럼 내리그어진 한 줄기 불꽃이 빙검과 부딪쳤다.
쾅!
아마 일각 전이었다면 어렵지 않게 막아 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공력을 모두 회복한 진태경의 공격은 처음보다 무겁고, 날카로웠다.
아니, 그만큼 대설귀가 얻은 내상 역시 만만치 않았다.
‘흡.’
울컥, 솟구치는 핏물을 신음과 함께 삼킨 대설귀가 빙검의 방향을 틀었다. 미끄러지듯 대지에 작렬한 화염이 폭발했다.
귀가 먹먹해지는 굉음과 함께 튕겨 나가는 신형.
대설귀는 뒤집히는 시야 너머로 보이는 신형을 향해 빙검을 던지듯 쏘아 보냈다.
쐐액! 쾅!
음속(音速)보다도 빠른 속도로 들이닥친 빙검을 걷어 낸 진태경은 망설이지 않았다. 음한지기에 의해 얼어붙은 바위를 밟은 발끝에 힘이 실렸다.
파스슥. 콰득.
얼음이 녹고, 단단한 바위 표면 위로 거미줄 같은 균열이 생겨났다.
이어 피어오르는 한 줄기 불꽃.
콰아아!
염화일로(炎火一路).
진태경은 청백색의 화염을 두른 채 쇄도했다.
대설귀를 향해. 감히 순리를 거스르면서, 천명을 입에 담은 늙은 괴물을 향해.
‘할 수 있다.’
확신이나 방심이 아니었다. 그저 스스로를 믿을 뿐.
호흡도 멈춘 채 공간을 가르며 나아간 진태경이 창대를 역수(逆手)로 말아쥐고, 그대로 쏘아 보냈다.
쐐애애액!
화염을 머금은 창날이 찰나의 순간을 스쳤다. 바람을 갈랐다. 공기를 불태웠다.
그리고 그 끝에…… 한 사람이 있었다.
“갈(喝)!”
너무나도 빠른 속도.
포효와도 같은 외침을 터트린 대설귀가 양손 가득 음한지기를 끌어모았다.
곧이어 세상마저 얼려 버릴 듯한 새하얀 강기가 창날을 향해 쏘아졌다.
아니, 반드시 그래야 했을 터였다.
쉭! 서걱!
등으로부터 전해지는 고통.
불에 덴 듯한 통증과 함께 흰 터럭을 흩날리는 무언가가 대설귀의 시야를 스쳤다.
판단력이 흐려진 노괴의 시야 너머에서 스쳐 지나간 그것은, 속도를 줄이지 않고 곧장 어딘가로 달려 나갔다.
‘빌어먹을. 백…….’
대설귀는 차오르는 욕설을 삼켰다. 눈앞을 가득 채운 청백색의 겁화를 향해, 온 힘을 다해 쌍장을 내질렀다.
꽈아아아앙!
구구구궁!
하늘이 쪼개지는 듯한 굉음이 세상을 뒤흔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