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685
#684화
구구구궁!
굉음과 함께 대지가 흔들린다.
나이를 짐작할 수 없을 만큼 오랜 세월 뿌리내린 거목도, 만근의 무게를 지닌 바위도.
그리고 어딘가에 숨어서 이 싸움을 숨죽여 지켜보고 있었을 독혈지의 괴이한 생물체들도.
모든 것이 파도처럼 출렁이고 뒤집히는 대지에 파묻혔다.
콰드드득!
뜨겁다.
나는 파동의 중심에서 휘몰아치는 열풍(熱風)을 느꼈다.
후텁지근한 바람에서는 한 줄기의 서늘함도 찾아볼 수 없었고, 반경 수십 장을 뒤덮은 짙은 먼지구름은 조금의 시야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코앞까지 들이닥친 창날을 향해 엄청난 음한지기가 담긴 쌍장(雙掌)을 쏟아 내던 노인의 모습만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의 몸에서 솟구치던 붉은 핏물과, 새하얀 털을 휘날리며 저 멀리 사라지던 백호의 신형도.
‘……저 녀석.’
마지막 순간, 대설귀를 향한 무야호의 갑작스러운 기습은 사전에 약속된 것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녀석에게 전투를 피해 이곳 어딘가에 감금되어 있을 요희를 찾으라 했다.
만약 오늘 이 자리에서 내가 죽는다 해도, 저 영민한 맹수만큼은 살아서 독혈지를 빠져나가길 바랐으니까.
두 대족장과 함께 남만야수궁으로 향한다면, 향후 일어날 재앙을 막을 수 있다는 희망은 사라지지 않을 테니까.
그러나 무야호는 내 조언을 듣지 않았고, 무모하리만치 위험한 기습은 끝내 성공했다.
‘미세한 차이지만 분명해. 예상치 못한 공격 때문에 대설귀의 반응이 늦었다.’
분신이나 다름없는 백염을 쏘아 보낸 보람이 있었다.
평정심을 잃고 상처까지 입은 사냥꾼은 이제 사냥꾼이 아닌, 사냥감에 불과하다.
‘어디냐.’
팟.
나는 작은 뇌까림과 함께 쏘아졌다.
사방을 휘감은 짙은 먼지구름과 곳곳에서 쏟아지는 흙과 돌들. 시야과 기척을 가로막은 그것들을 향해 일권(一拳)을 뻗었다.
퍼엉!
공력을 실을 필요도 없었다. 음속을 돌파한 속도와 바람을 부수는 힘에 압축된 공기가 터져 나간다.
거대한 먼지구름이 반으로 찢겨 나가고 그 너머에 감춰져 있던 것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화아아악!
주위를 휩쓰는 열풍. 먼지구름 너머에서 피에 젖은 누군가의 옷자락이 언뜻 스쳐 지나간 순간, 나는 망설임 없이 손을 뻗었다.
악전고투 끝에 얻어 낸 승기(勝機).
승부의 저울추가 조금씩 기울기 시작한 지금을 놓쳐서는 안 된다.
설사 아직 대설귀에게 보여 주지 않은 능력 중 일부가 드러난다 해도 마찬가지다.
‘인벤토리 오픈. 소환.’
나는 머릿속에 떠올린 명령어와 함께 손아귀에 잡힌 창을, 온 힘을 다해 흩뿌렸다.
쐐애애액! 쾅!
강렬한 파공성에 이어 울려 퍼지는 굉음. 하지만 그 모든 것이 끝나기도 전에 내 손에는 또 다른 창이 붙잡혀 있었다.
쐐액!
다시.
콰앙!
또 다시.
‘더. 더. 더, 더.’
생각과 동시에 몸이 움직인다. 허리를 비틀고, 어깨를 젖히고, 전신의 무게를 실어 쏘아 보낸 창들은 마치 폭격하듯 사방을 초토화시켰다.
구구구궁!
잠시 흩어지나 싶던 먼지구름이 다시 피어오르는 것도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그보다 더한 공격들을 쏟아붓고 있었으니까.
하나하나가 백염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싸구려 철창들이지만, 내 손을 떠나 섬광처럼 쏘아지는 그것들에 한 번이라도 격중당한다면 누구도 무사할 수 없다.
‘그것이 설령 초절정 고수. 아니…….’
대설귀라 해도.
쾅! 콰앙! 콰아아앙!
쉴 새 없이 이어지는 폭발과 굉음. 그리고 찰나에 십여 개가 넘는 창을 벼락처럼 대지에 내리꽂은 나는 마침내 볼 수 있었다.
퍼걱! 푸화악!
짙은 먼지구름 너머, 섬뜩한 파육음과 함께 허공으로 흩뿌려지는 붉은 선혈을.
거기 있었구나.
확신과 동시에 발을 뻗었다. 천근의 무게를 실어 내디딘 발끝이 뒤집힌 대지를 깊숙이 파고들었다.
콰드득. 쾅!
공력의 압축과 동시에 이루어진 폭발. 십여 장의 공간을 단숨에 지우며 쇄도한 나는 먼지구름 사이로 파고들었다.
이미 전부터 사방에서 들려오는 소음과 쏟아지는 파편들로 인해 앞뒤조차 분간하기 힘든 상황.
하지만 공간을 헤쳐 나가는 내 움직임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이미 봤으니까.’
날 선 감각은 비릿한 혈향을 감지해 냈고, 뛰어난 안력(眼力)은 또다시 먼지구름 사이로 누군가의 등을 발견했다.
백염을 막으며 부상을 입었을 대설귀는 나보다 빠를 수 없다.
나는 인벤토리에서 소환한 창을 비스듬히 내리그었다.
쉬잉.
나직한 파공성과 함께, 창날을 휘감으며 솟구친 청백색의 화염이 천천히 바람을 갈랐다.
아니, 느려진 것은 창날뿐만이 아니다. 극도의 집중력이 뇌를 마비시키고, 세상을 정지시켰다.
그리고 그 정지된 시간 속에서, 느릿하게 먼지구름을 베어 가른 화염이 마침내 옷자락에 닿은 그 순간. 한 줄기 확신이 뇌리를 스쳤다.
‘끝났……!’
하지만 도대체 어째서일까.
지금 느껴지는 이 알 수 없는 한기(寒氣)와 묘한 기시감은.
단 일 촌(寸)만 더 나아가면 모든 것을 끝낼 수 있는 상황에서, 머리에서 내려온 명령을 무시한 채 물러서고자 하는 몸뚱어리는.
동시에 나는 깨달았다.
그건 이성인 동시에 본능이었고, 이성보다 앞선 본능이었다.
‘대설귀.’
까마득한 과거의 구렁텅이에서 기어 올라온 노괴(老怪).
그러나 놈이 위험한 이유는 중단전을 개방한 초절정 고수이기 때문이 아니다.
압도적인 무위를 지닌 혈주와 서천마군이 갖지 못했던 것.
아니, 압도적이기에 가질 필요조차 느끼지 못했던 조심성과 철저함이 저 노괴가 지닌 가장 날카로운 무기다.
‘그런 대설귀가, 이렇게 쉽게?’
아니다. 적어도 지금껏 내가 상대해 온 대설귀라면 그럴 리 없다.
찰나를 쪼개고 쪼갠 짧은 순간, 나는 온 힘을 다해 몸을 비틀었다.
갑작스럽게 제동이 걸린 몸과 격랑(激浪)처럼 몰아치던 공력이 역류한다.
울컥, 뜨거운 핏물이 목구멍에 차오름과 동시에 허공에서 꺾여 나간 창날이 옷자락을 가른다.
그리고 다음 순간. 나는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서걱.
느리게 흐르는 시간 속, 창날에 의해 두부처럼 베어져 나가는 살점과 뼈를.
더불어 마치 무중력 상태인 것처럼 천천히 허공으로 떠오르는 핏물 너머로 흩날리는 산발의 머리카락과 이미 숨이 끊긴 시신의 어깨너머에서 빛나고 있는 한 쌍의 차가운 눈동자를.
다시 돌려주마. 네가 했던 방식 그대로.
들리지 않는 목소리가 그렇게 말을 건넸다고 느낀 순간. 뻥 뚫려 있던 흑수권마의 가슴에서 시리도록 차가운 섬광이 터져 나왔다.
슈화악!
나는 직감했다.
이 공격은 피할 수 없다고.
그러나 치명상만큼은 피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내 상반신에 걸쳐져 있는 것은 서천마군을 죽이고 얻은 희대의 신병이기, 바로 화룡갑(火龍鉀)이니까.
그러나…….
콰득! 푸푹!
차갑고, 동시에 뜨거웠다.
몸 안으로 스며드는 음한지기가.
그리고 화룡갑을 부수고 가슴에 틀어박힌 또 다른 신병이기, 백염(白炎)의 창날이.
삐빅. 삐빅. 삐비빅!
– [화룡갑]의 일부가 강력한 기운에 의해 파괴되었습니다!
– [화룡갑]의 자동 수복까지 남은 시간 : 3일
– [음한지기]가 내부를 진탕시킵니다!
– 상태 이상, [출혈]에 걸렸습니다!
– 상태 이상, [막대한 내상]을 입었습니다!
– [주화입마]의 위험이 있습니다! 한시라도 빨리 기운을 진정시키십시오!
– 신체의 내, 외부가 크게 손상되었습니다!
.
.
.
끔찍한 고통으로 아득해진 시야 속, 나는 쉴 새 없이 귓가를 파고드는 경고음을 들으며 생각했다.
정말이지, 운수 한 번 끝내주는 날이라고.
* * *
모든 것이 순식간에 스쳐 지나간 짧은 순간, 세상이 멈췄다고 느낀 것은 진태경뿐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먼지구름 사이에 숨어 마지막 기회를 노리던 대설귀 역시 마찬가지였고, 백여 년에 가까운 인생에서 가장 길고 힘든 기다림의 시간을 보내던 그는 마침내 참았던 숨을 토해 낼 수 있었다.
콰득. 푸푹!
한 사람의 가슴에 박힌 창날과 파르르 떨리는 신형. 그리고 고통과 절망에 물든 눈동자.
“쿠에에엑!”
촤악.
내장 조각이 섞인 검붉은 핏물이 대설귀의 얼굴을 적신다.
그러나 코를 파고드는 역한 비린내와 악취에도 그는 아무렇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아직까지도 살아 있는 저 어린놈의 모습에 기가 질렸다.
‘이런 미친놈.’
대설귀의 설계는 모든 것이 완벽했다.
마지막 순간, 진태경이 몸을 비틀어 피하지 않았다면 그랬을 것이다.
정확히 심장을 관통했어야 할 창날이 가슴 어림에 박힌 것은 바로 그 이유에서였다.
‘심지어 노부가 그에 따라 창날의 방향을 바꾸지 않았다면…… 고작 옆구리로 그쳤겠지.’
대설귀는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전투가 막 시작될 무렵 그가 진태경에게 내렸던 평가는 이미 정정된 지 오래다.
‘향후 오십 년이 아니라 삼십 년. 아니, 어쩌면 이십 년 안에 무신(武神)과 천마(天魔)에 필적할 놈이다.’
괴물이라고 칭할 수밖에 없는 재능과 불꽃보다도 맹렬한 집념.
이건 무공의 문제가 아니다. 사람 그 자체에서 오는 강력함. 위험을 넘어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기세.
대설귀의 눈에 비친 진태경은 이미 강자였다.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주인들. 아니, 십왕(十王)과 비견해도 결코 부족함이 없는.
하지만.
‘그런 네놈도 여기까지다.’
으득.
이를 악문 대설귀는 창대를 쥔 손에 힘을 가했다.
무언가에 뜯겨 나간 듯 텅 빈 오른쪽 소매는 촌각 전, 백호의 기습에 이어 내리꽂힌 창날에 바쳐야 했지만 후회는 없다.
목숨이나 다름없는 팔을 잃었다지만 신묘하기 짝이 없는 암천의 술사(術士)들이라면 그리 어렵지 않게 방법을 찾아낼 터.
지금 그에게 중요한 것은…… 진태경, 저 두려울 만큼 지긋지긋한 괴물을 끝장낼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말하지 않았더냐. 네놈이 죽고, 노부는 살아남는 것. 그것이 순리(順理)이자 천명(天命)이라고.’
두려움과 환희가 뒤섞인 얼굴로, 대설귀는 한 줌밖에 되지 않는 힘을 끌어모았다.
그와 동시에 만년한철로 이루어진 서늘한 창대가 진태경의 가슴을 더욱 깊숙이 파고들었다.
콰득!
화염 대신 냉기가 서린 창날이 주인의 가슴을 파고든다. 살을 가르고 뼈를 부수는 섬뜩한 소리와 함께 진태경의 신형이 퍼득 떨렸다.
푸슛. 촤아악!
분수처럼 솟구치는 핏물과 서서히 흐릿해지는 눈동자. 수많은 죽음을 지켜본 대설귀는 그 어느 때보다 확신했다.
‘이제 그 누구도 놈을 살릴 수 없다. 신의(神醫)가 아닌 대라신선(大羅神仙)이 온다 해도.’
그러나 대설귀는 잠시 잊고 있었다.
눈앞에서 죽어 가고 있는 젊은 청년은, 그의 판단으로는 예측할 수 없는 괴력난신(怪力亂神)과도 같은 존재라는 것을.
덥석. 푸우욱!
대설귀에게는 대처할 시간도, 대처할 힘도 주어지지 않았다.
한기 대신 경악이 서린 그의 눈동자에는 한 사람의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온 힘을 다해 창대를 붙잡아 자신의 가슴에 더욱 깊숙이 박아넣은 채, 스스로 앞으로 나아간 진태경의 모습이.
그리고, 피에 젖은 그의 손에서 타오르고 있는 마지막 불꽃이.
“……!”
부릅떠진 대설귀의 눈동자에, 청백색 광염(光焰)이 번졌다.
화륵, 콰아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