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688
#687화
서걱, 쿵!
순간, 세상이 정지한 것 같았다.
– 크르륵.
썩은 통나무처럼 쓰러져 숨을 헐떡이는 거대한 백호와 완전히 의식을 잃은 진태경.
그리고 그런 그를 품에 안고 담담하게 말을 이어 가는 한 사람의 모습이 요희의 눈동자에 비쳤다.
“말하지 않았소. 나 자신부터 숨겼어야 했다고.”
“……!”
섬전처럼 뇌리를 스치는 깨달음과 경악.
언제나 그윽한 빛을 띠고 있던 요희의 눈동자가 부릅떠졌다.
“흑웅, 당신!”
“이제는 오라버니라고 부르지 않는구려. 그래도 제법 듣기 좋았는데.”
분명 그랬었다. 불과 몇 시진 전까지는.
하지만 이제 오라버니라는 호칭은 두 번 다시 쓸 수 없을 것이다.
지금 요희가 바라보고 있는 후덕한 체격의 중년인은, 그녀가 알던 흑웅이 아니었으니까.
“어째서?”
의문으로 가득 찬 음성. 흑웅이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간단한 이야기요. 그대가 나를 이용했던 것처럼, 나도 그대를 이용한 것뿐이지.”
“……결국 백상과 한패였군요. 당신도.”
“말에 어폐가 있군. 우리 모두가 한패 아니었소?”
“……!”
덜컥 굳은 요희의 모습에, 흑웅이 피식 웃었다.
“부정하지는 마시오. 나는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그대와 백상을 지켜본 사람이니까.”
“그럼 갑작스럽게 요서부에 찾아온 것도?”
“전부 계획의 일환이었지. 그대도, 진태경도, 야수묘왕도, 심지어 백상도. 물론 내 정체에 대해서는 몰랐겠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우리가 한패였다고 말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오.”
흑웅의 대답에서 무언가를 깨달은 요희는 침음성을 삼켰다.
자신이 모르는 것은 이해할 수 있었다. 비록 백상의 뜻에 동조했다고는 하나, 어디까지나 묵인을 앞세운 간접적인 동조자에 불과했으니까.
하지만 백상에게조차 정체를 숨겼다는 것은…….
“그동안 감시했던 거군요. 나와 백상을.”
“축하하오. 답을 향해 한 걸음 나아갔군. 앞으로 두 걸음 남았소.”
“마후(魔后)의 명이었나요?”
“좋아. 마지막 한 걸음이오.”
“만일의 상황을 대비해서 마후가 숨겨 둔 소매 속의 칼, 그게 당신이었어요.”
짝. 짝.
느릿하게 두 손뼉을 마주친 흑웅이 빙긋 웃었다.
“과연 영민하군. 정답이오. 다만 나도 일이 이렇게까지 흘러갈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지.”
흑웅은 천천히 주위를 돌아보았다.
온통 폐허가 된 공간. 숨이 끊긴 채 쓰러진 두 노괴(老怪)을 스친 그의 시선이 마침내 한 사람에게 닿았다.
“열화신룡 진태경. 태원진가의 삼공자이자, 장차 열화문의 적통(嫡統)을 이을 화왕의 후인.”
나지막이 이어지는 목소리.
품 안에서 기절하듯 잠들어 있는 그를 응시하는 흑웅의 눈동자에 기광이 스쳤다.
“이곳에서 놈을 발견했을 때 일이 틀어졌다는 걸 깨달았지. 모든 것이 계획대로 진행되었다면 뇌옥에 처박혀 있거나, 이미 마후께서 놈을 거두어 가셨을 테니까. 하지만…….”
진태경은 추종향을 쫓아 독혈지에 당도했고, 마후가 안배해 둔 바에 따라 야수묘왕을 기다리던 두 초절정 고수를 죽이고 살아남았다.
“멍청한 놈들. 마후께서 그토록 주의하라 하셨거늘.”
작게 중얼거린 흑웅은 가래를 탁 뱉었다. 그리고 언제 그랬냐는 듯 사람 좋은 웃음과 함께 요희를 바라보았다.
“이 지경까지 와서 과연 놈을 생포하는 것이 옳은 선택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틀어진 일을 수습할 수 있어서 다행이오. 아, 물론 그전에 우리의 행선지가 바뀌었다는 사실을 알려 줘야겠구려.”
“……내궁. 내궁으로 향할 생각이군요.”
신음과도 같은 요희의 뇌까림에, 흑웅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내가 돌아간다면 꽤 재미있는 일이 벌어질 거요. 한족의 간악한 흉계에서 살아남은 대족장의 증언에 남만이 격동할 테고, 이 땅의 모든 전사와 맹수가 내궁에 결집하겠지. 중원과 일전을 치르기 위해서.”
“하지만 사람들은 바보가 아니에요. 고작해야 절정의 경지에 불과한 당신이, 어떻게 홀로 사지(死地)를 빠져나올 수 있었는지에 대해 모두가 의심하겠죠.”
“제법이구려. 하지만 내가 초절정 고수라면 어떻겠소?”
“그게 무슨…….”
“세간의 인식으로 진태경을 제압할 만큼 무위가 뛰어난 초절정 고수. 거기에 더해 인덕과 명망을 갖추었고, 백상에게 동조하지 않을 이들까지 포용할 수 있는 자. 그런 자라면 모두가 믿어 주지 않을까?”
그 순간, 요희의 신형이 덜컥 굳었다.
“당신, 설마……!”
“맞소.”
빙긋 웃은 흑웅이 공력을 일으켰다.
요서부에서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금제 된 적 없던 그의 공력이 뼈와 살을 움직이고 근육을 비틀었다.
뿌득. 뿌드득.
요희의 귓가를 파고드는 섬뜩한 파육음.
어느덧 먹구름 사이로 모습을 비춘 희미한 달빛 아래에서 흑웅의 그림자가 흔들렸다. 더욱 장대하고, 강건하게.
“크윽.”
그리고 고통에 찬 흑웅의 외마디 신음과 함께 모든 변화가 끝났을 때, 얼어붙어 있던 요희의 입술 사이로 짧은 두 글자가 흘러나왔다.
“……궁주?”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부릅떠진 요희의 눈동자에, 한 사람이 비쳤다.
흑웅이면서 야수묘왕. 야수묘왕이면서 흑웅임에 틀림없는 그는 거대해진 자신의 그림자를 바라보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사람들은 축골공(縮骨功)의 묘리가 단순히 체격을 줄이는 것에만 있다고 생각하지. 하지만 그 끝에 다다라 대성(大成)하게 된다면,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거듭날 수도 있소.”
“……!”
“자, 이렇게 합시다. 내가, 아니 야수묘왕이 이곳에 찾아와 진태경을 제압했고, 놈의 간악한 흉계로부터 목숨을 건진 그대는 내궁으로 돌아가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는 거요.”
넋 놓은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요희를 향해, 흑웅은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근래 일어난 모든 일은 남만을 집어삼키려는 진태경과 무림맹의 음모였다고.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이 땅의 모든 인간과 짐승을 동원하여 중원으로 쳐들어가야 한다고. 어떻소?”
요희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대답할 수 없었다. 전신을 옥죄이는 두려움과 분노로 숨이 막히고 눈앞이 어지러웠다.
“다, 당신이 어떻게…….”
“아. 한 가지를 말 해주는 걸 깜빡했구려. 만약 그대가 이 제안을 거절한다면 보산(保山)이 피로 물들 거요. 그리고 남만을 주름잡던 사대 부족은 삼대 부족이 되겠지.”
까드득.
분노를 참지 못한 요희의 붉은 입술 사이로, 한 줄기 핏물이 흘러나왔다.
타오르는 눈빛으로 흑웅을 노려보던 요희가 씹어뱉듯 입을 열었다.
“개새끼.”
“마음이 아프구려. 곧 지아비가 될 사람에게 그런 말을 하다니.”
“그 입 닥쳐라. 누가 네놈과 혼례를 치른다더냐?”
“아마 그렇게 될 거요. 오천이 넘는 요족이 눈앞에서 차례차례 목이 달아나는 걸 보게 된다면.”
“……!”
“그대는 고집이 센 여인이고, 나는 인내심이 강한 사내지. 그러니 기다리겠소. 오천 개의 수급이 전부 땅에 떨어질 때까지.”
느긋한 목소리로 대답한 흑웅이 요희를 향해 활짝 웃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지금껏 늘 그래 왔던 것처럼 환하게.
“사랑하오, 요희.”
전신의 털이 곤두서는 듯한 오한과 함께, 요희는 질끈 눈을 감았다.
믿을 수 없었다. 언제부터 진행되었는지 모를 이 계획과 모두가 무시하던 저 한량(閑良)의 진면목이.
그리고 자신의 머리 위로 드리워진 암천의 짙은 그림자가.
하아.
흩어지는 숨과 함께 뇌리를 스치는 수많은 생각들.
다음 순간, 천천히 눈을 뜬 요희가 허리춤의 연검(軟劍)을 뽑으며 입을 열었다.
“더러운 변절자.”
“더러운 변절자라니. 부디 자신을 그리 자책하지는 마시오.”
“부정하지는 않겠어. 결국 나도 변절자였으니까. 하지만 암천이, 남천마후가 널 살려 둘까? 네놈이 이끄는 이족은?”
날카로운 외침처럼 울려 퍼지는 목소리에, 잠시 눈을 깜빡이던 흑웅이 돌연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나와는 관련 없는 문제요.”
“뭐?”
“사십여 년 전. 이족의 전대 부족장이 정마대전에서 목숨을 잃었을 때 남만에 남아 있던 그의 유일한 적자(嫡子)는 여섯 살에 불과했지. 건장한 사내와 여인들은 전장으로 향했고, 어미는 자식의 얼굴을 보기도 전에 죽었으며, 곁에는 눈과 귀가 어두운 늙은 유모 하나뿐이었소.”
“……!”
“요희.”
흑웅은, 아니 어느덧 흑웅이 되어 버린 사내는 희미한 미소와 함께 말을 이었다.
“나는 변절자였던 적이 없소. 단 한 순간도.”
철컹.
요희의 손아귀에서 미끄러진 연검이 요란한 소리와 함께 지면에 떨어졌다.
그녀는 가쁜 숨을 내쉬며 검을 줍고자 했지만, 어째서인지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이건.’
요희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여러 가지 충격적인 사실들이 불러온 마음의 격동 때문에?
아니다. 그녀가 움직이지 못하는 것은, 이미 전신 구석구석 퍼져나간 음습하면서도 끈적한 기운 때문이었다.
“다, 당신…….”
힘없이 흐려지는 목소리와 시야.
그 너머에서 천천히 가까워지는 흑웅의 모습은 아지랑이처럼 일렁였고, 뒤이어 귓가를 파고드는 목소리는 멀게만 느껴졌다.
“이러니 내가 그대를 사랑할 수밖에 없지.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운 데다가 이토록 순진하기까지 하니.”
“해, 해약(解藥)이 아니었…….”
“아쉽게도 난 야수묘왕이 아니라, 당신과 검을 맞대는 것조차 부담스럽거든. 부디 이 못난 지아비를 이해하시오, 부인. 다시 깨어났을 때는 모두를 위한 선택을 하길 바라지.”
요희는 비명을 내지르고 싶었다. 누군가가 와서 이 끔찍한 사내를 죽여 달라고. 이 어두운 구렁텅이에서 자신들을 꺼내고, 남만을 집어삼킬 거대한 흉계를 막아 달라고 외치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의 간절한 바람과는 달리 목구멍을 비집고 솟구친 비명은 입 밖으로 새어 나가지 못했고, 수마(睡魔)라는 괴물에 사로잡힌 진태경은 마지막까지 눈을 뜨지 못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스륵. 툭.
실 끊어진 인형처럼 무너지는 요희의 신형을, 흑웅은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야수묘왕의 얼굴을 한 그의 입가에는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잠든 모습조차 아름답구려.”
흑웅은 진심으로 요희를 사랑했다. 그녀가 자신을 원하지 않는다는 건 중요하지 않았다.
요희는 결국 옳은 선택을 할 테고, 마침내 자신을 사랑하게 될 테니까.
암천은, 남천마후는 약속을 지킬 것이다.
오랜 세월 정체를 감추고 고생한 대가는 열 배, 스무 배로 돌아올 것이다.
물론 그 전에…….
‘이 일을 끝내야겠지.’
요희의 이마에 입맞춤한 흑웅은 천천히 돌아섰다.
그의 발걸음이 향하는 곳에는 감히 대계(大計)를 그르치려 한 원흉이 있었다.
‘진태경.’
놈은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변수였고, 이는 성공을 코앞에 둔 대계에 큰 타격을 입혔다. 존재 자체만으로도 전황(戰況)을 뒤바꿀 초절정 고수가 둘이나 희생당했으니까.
그러나 바뀌는 것은 없었다.
‘대계는 성공할 것이고, 저들을 대신할 손발도 남아 있다.’
진태경은 적어도 며칠간 정신을 차리지 못할 터.
흑웅이 요희와 진태경을 데리고 내궁으로 돌아간다면, 모든 것이 끝난다.
‘그래. 끝이지.’
만족스럽게 웃은 그는 숨을 헐떡이는 백호를 지나, 진태경의 뒷덜미를 잡고 들어 올렸다.
아니, 들어 올리려던 그때였다.
솨아아아아.
어디선가 불어온 스산한 바람에 흑웅은 문득 고개를 들었다.
희끄무레한 달빛 아래, 무언가의 형체가 그의 눈동자에 비치고 있었다.
“저게 뭐…….”
의문을 표하려던 그 순간.
슈화아악!
칼날로 화한 스산한 바람이 그의 전신을 덮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