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69
#68화
결국 승자는 진위경이었다. 촉촉한 눈망울로 ‘보름만. 아니 열흘만 같이 살면 안 될까?’ 하며 줄기차게 애원하는 통에 나와 진무경은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그래서 결국 이 상황까지 오게 된 거다.
진위경이 자리를 뜨고, 둘만 남은 지하 연무장은 고요하기만 했다.
먼저 침묵을 깨트린 건 진무경이었다.
“규칙을 알려 주마.”
“규칙? 남자들끼리 사는데 뭔 규칙?”
“첫 번째. 지금부터 나를 대할 때는 예의를 지켜서, 존댓말을 쓸 것.”
“싫다면?”
진무경이 옆에 서 있던 수련용 강철 인형을 후려쳤다.
펑! 콰직!
강철 인형이 훨훨 날아 연무장 벽에 처박혔다. 움푹 꺼진 가슴에 수인(手印)이 뚜렷하게 찍혀 있었다.
“첫 번째 규칙이 뭐라고?”
나는 진무경을 노려봤다. 산전수전 다 겪은 나다. 고작 이 정도로 내 기를 꺾을 생각이었다면 단단히 착각한 거지.
“존댓말을 쓰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성숙한 사회인은 불필요한 싸움을 피하는 법.
이게 바로 어른의 싸움이다. 후후.
‘그런데 왜 눈물이 나려고 하냐.’
아, 엄마 보고 싶다.
“좋아. 그럼 두 번째. 쥐 죽은 듯이 지낼 것. 만약 큰 소리를 내서 내 잠을 깨우거나 수련을 훼방 놓는다면…….”
펑! 콰직!
두 번째 강철 인형이 날아가는 모습에 나는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 세 번째. 연무장을 사용하는 것은 자유지만 내가 비키라면 군말 없이 비켜라. 알겠나?”
“네, 네.”
“이제야 정신을 차렸군.”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인 진무경이 출구를 가리켰다.
“이제 나가. 네 방은 3층이다.”
지하 연무장을 재빨리 빠져나가는 내 등 뒤로 기합 소리가 울려 퍼졌다. 거의 짐짝 취급 하는 모습에 오기가 솟구친다. 잠시 뒤를 돌아보며 다짐했다.
‘기다려라. 곧 따라잡을 테니까.’
쉬이익! 서걱!
검기가 세 번째 강철 인형을 갈랐다. 힘없이 떨어지는 인형의 목을 보며 나는 생각을 살짝 수정했다.
‘기다려라. 언젠가는 따라잡는다.’
* * *
방 안은 삭막했다. 화려하다 못해 호화스럽게 꾸며져 있던 예전 방과는 달리 꼭 필요한 가구 몇 개가 전부였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심한데.”
진무경답다고 해야 하나?
만난 지 하루밖에 되지 않았지만 진무경의 성향을 파악하는 데에는 충분했다. 거추장스러운 건 질색이고, 효율을 중시하는 타입.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는 노력파이기도 하다.
“…….”
뭐야, 생각하면 할수록 대단한 놈이잖아?
존댓말 안 썼다고 친동생을 개처럼 두들겨 패는 과격한 면모도 있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정당방위다.
역지사지(易地思之). 인간관계의 기본 아닌가.
‘나 같아도 이런 놈이 동생이면 두들겨 패고도 남았지.’
형들은 가문 일으켜 세워 보겠다고 으쌰으쌰 노력하는데 막냇동생이란 놈은 무공은 뒷전이요, 술과 여자에 미쳐 있다.
진위경이 보살이라 그렇지, 진무경처럼 주먹이 나가는 게 정상이다.
‘무공도 강하고.’
혹시 모르지. 개과천선한 동생의 모습을 보고 친히 무공을 가르쳐 줄지도.
‘이건…… 기회다.’
눈이 번쩍 뜨인다.
워낙 바쁜 탓에 가끔 얼굴만 구경하는 진위경, 위팽과는 달리 진무경은 연무장에만 틀어박혀 있다.
함께 사는 열흘 동안 절정 고수에게 일대일 과외를 받는다면 내 무공도 크게 진일보할 수 있지 않을까?
‘지금보다 더. 훨씬 더.’
마음 깊숙한 곳에서 욕심이 불쑥 고개를 쳐든다. 아니, 이건 허기다. 지금껏 가지지 못했던 모든 것에 대한 허기.
부와 명예? 탐난다. 하지만 그건 내가 얻고자 하는 것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강해지고 싶다.’
충분히 강해졌다고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내 사람을 지키기에는 아직 턱없이 모자라다. 일전에 조필을 상대하면서, 이번에 대장로를 보며 느꼈다.
압도적인 힘의 차이.
지금 수준으로는 내 사람이 아니라 내 목숨 하나 지키기에도 빠듯하다. 나는 이제 막 우물 밖으로 고개를 내민 개구리에 불과했다.
‘얼마나 걸릴지는 모르지만 금방 따라잡아 주지.’
삼류에서 초일류. F급에서 C급까지 오르는 데 걸린 시간은 고작 두 달. 지금의 각오는 결코 허언이 아니다.
전쟁도 끝났겠다, 이제 시간은 많다. 로그아웃 전까지 최대한 기량을 끌어 올릴 생각이었다.
‘돌아가자마자 재측정부터 해야 하나?’
공력만 받쳐 줘도 B급까지는 무난하게 나올 것 같은데.
꼬리를 무는 행복한 상상에 흐뭇하게 웃던 그 순간이었다.
“어?”
뭐지?
매우 중요한 걸 잊고 있는 느낌. 놓쳐서는 안 될 것을 놓친 기분. 어제 진무경과 만나기 전에도 느꼈던 위화감이다.
그리고 위화감의 정체를 깨닫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퀘, 퀘스트창 오픈.”
띠링.
– 현재 진행 중인 퀘스트가 없습니다.
진행 중인 퀘스트가 없다고?
시스템 메시지를 본 순간 눈앞이 아찔했다.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잘 알고 있으니까.
‘……로그아웃 퀘스트는?’
무림과 현실을 오고 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 로그아웃 퀘스트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멍하니 시스템 메시지를 바라보던 그때였다.
띠링.
맑은 종소리와 함께 새로운 창이 허공에 펼쳐졌다.
– 업적, [귀환]을 달성했습니다!
– 칭호, [귀환자]를 획득했습니다!
– 새로운 기능이 활성화되었습니다!
“귀환자? 새로운 기능?”
뭐야, 이거. 황급히 상태창을 열어 보니 아니나 다를까, 귀환자라는 세 글자가 반짝반짝 빛나고 있다.
“칭호 확인.”
띠링.
아이템창
[귀환자]설명 : 떠나는 것은 쉬워도 돌아오는 것은 어렵습니다. 당신이 보여 준 희생과 용기에 찬사를 보냅니다.
효과 : 모든 능력치 +10, [로그아웃], [로그인] 기능 활성화
그 순간.
퍼버펑.
머릿속에서 폭죽이 터졌다.
* * *
진무경은 호흡했다. 코와 입, 활짝 열린 전신을 이용한 호흡이었다. 단전의 공력과 천지의 기운이 섞여 들어간다.
솨아아.
단전의 다른 이름은 기해(氣海)다. 기의 바다, 기운이 모이고 흐르는 곳. 진무경은 전신 세맥을 타고 흐르는 기의 물결을 느꼈다. 그리고 환희했다.
‘이거야.’
다섯 살 때 처음 검을 잡았다. 진위경이 서투른 솜씨로 깎은 목검이었다. 까슬한 그 감촉이 좋았고, 휘두를 때마다 흩어지는 바람 소리도 좋았다. 그날 이후 단 하루도 수련을 쉬어 본 적이 없다.
‘천재야, 천재.’
‘저놈은 그냥 타고난 거라니까. 그게 아니고서야…….’
누군가는 감탄했고, 누군가는 시기했다. 의도는 달랐을지언정 하는 말은 같았다. 무공의 천재. 타고난 재능.
그들이 입을 모아 떠들 때도 진무경은 연무장에 틀어박혀 수련을 이어 갔다. 그에게 있어 수련은 고통이 아니라 강해지는 과정이었고, 기쁨이었다.
후우.
날숨과 함께 빠져나가는 것은 탁기(濁氣)만이 아니다. 진무경은 머릿속의 잡념을 탁기와 함께 내뱉었다.
지금부터는 오로지 운기조식에만 집중해야 했다.
‘오늘은 할 수 있을까?’
지난 삼 년간 하루도 빠짐없이 싸워 왔던 적을 만나러 갈 때다. 임독양맥이라는 이름의 적을.
지금까지는 번번이 물러서야 했지만…… 진무경은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 단 한 번만 이긴다면 임독양맥을 타통하고 새로운 영역에 발을 디딜 수 있다.
‘어디 해보자고.’
결의에 찬 진무경이 공력을 힘껏 끌어 올린 그 순간이었다.
“호오오오우우우우!”
뭐지? 심마(心魔)인가?
듣는 것만으로도 오싹한 괴성. 마귀가 기쁨에 차 내지르는 웃음 같기도 했다. 진무경이 황급히 공력을 가라앉히려던 그때, 다시 한번 마귀가 외쳤다.
“소리 벗고 속옷 질러! 호오오오우우우!”
마귀가 아니다. 출입을 금지한 전각에서 저런 개소리를 지껄일 수 있는 놈은 한 명밖에 없다.
“진태경 이 쳐 죽일…… 커헉!”
솟구친 울화에 공력이 산산이 흩어졌다.
* * *
“뭐? 태원진가?”
이제 막 자리에 누우려던 참이었다. 야심한 밤, 난데없는 총관의 보고에 송검문주는 잠이 확 달아나는 것을 느꼈다.
“화, 확실해?”
“저야 모르죠. 무림인도 아닌데.”
낙향 문사 출신인 총관의 말에 송검문주가 뒷목을 잡았다.
머리에 든 거라고는 먹물과 똥밖에 없는 놈한테 물어본 게 잘못이다.
“그럼 태원진가인 건 어떻게 알았어?”
“문 지키는 놈들이 헐레벌떡 달려와서 말하던데요. 지금 밖에 태원진가 사람들이 와 있다고. 그리고 그 누구냐. 위, 위 뭐시긴가 하는 작자가 문주를 만날 수 있겠냐고 물어봤답니다.”
위 뭐시기?
송검문주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자의 이름이 설마 위팽은 아니겠지?”
“아, 맞습니다. 위팽.”
송검문주는 목침으로 총관의 대가리를 깨 버릴 뻔했다.
‘귀검(鬼劍) 위팽이 직접 왔다고?’
소가주 진위경의 오른팔이자 태원진가의 핵심 고수.
이번 전쟁에도 혁혁한 공을 세웠다는 절정 고수의 방문에 혼백이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자고 있는 놈들 당장 다 깨워!”
비상사태다. 송검문주는 허겁지겁 뛰쳐나가는 와중에도 오만 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보복인가?’
송검문은 산서성 중부에 있는 중소 문파다. 문도라고 해 봐야 오십 명이 채 되지 않고 대부분이 이, 삼류에 머무르는 수준.
그간 태원진가와 가깝다는 이유로 이런저런 도움을 받았지만 막상 전쟁이 일어났을 땐 슬그머니 발을 뺐다.
어쩌면 오늘의 방문은 당연한 수순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그렇지. 귀검이 직접 오다니. 그것도 이 시간에.’
공명정대하기로 소문난 태원진가가 그럴 리는 없겠지만, 멸문지화가 목적이라면 막을 힘이 없다.
송검문의 최고수인 그조차 위팽의 삼초지적이나 될지 의문이니까.
“문주님!”
상관의 등장에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끙끙대던 수문위사들의 얼굴이 밝아졌다.
하지만 송검문주는 그들처럼 기뻐할 수 없었다.
그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불청객들을 향해 공손히 포권을 취해 보였다.
“송검문을 이끌고 있는 황 모입니다.”
동시에 죽립을 눌러쓴 서른 명의 불청객들이 좌우로 갈라섰다. 흐릿한 달빛 아래,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반갑소, 위팽이오.”
듣던 대로 젊었고, 생각보다 무례했다. 송검문이 제아무리 한미한 문파라지만 일문의 문주에게 저런 태도라니?
그러나 감히 불만을 표시할 수는 없었다. 저 무례한 젊은 놈은 귀검이고 뒤에는 태원진가라는 이름이 있다.
우방의 위기를 외면한 대가가 이 정도라면 싸게 먹힌 거다.
송검문주는 바짝 마른 입술을 핥았다.
“귀검의 위명은 익히 들었습니다. 미리 기별이라도 주셨다면 마중이라도 나갔을 터인데…….”
“문주께서는 괘념치 마시오. 어차피 소가주님의 서신만 전달하고 갈 생각이었으니.”
“서신, 말입니까?”
고개를 끄덕인 위팽이 밀봉된 서신을 건넸다. 수문위사가 들고 있는 횃불 아래로 뚜렷하게 찍힌 태원진가의 인장이 보인다.
“이건…….”
“초대장이오. 돌아오는 원단에 본가를 방문해 주십사 청하는.”
무림에서 살아온 세월이 짧지 않은 송검문주는 금방 속뜻을 알아차렸다.
‘초대는 무슨.’
이건 소집인 동시에 경고다. 이 초대에 응하지 않는다면 향후 산서 무림의 흐름에서 밀려날 거라는 경고.
원단은 전쟁에서 승리한 군주가 새로운 가신을 받아들이는 날이 될 것이다.
‘태원진가가 칼을 뽑았구나.’
잠깐의 침묵 끝에 송검문주가 입을 뗐다.
“전부터 소가주를 뵙고 싶었는데…… 이번이 좋은 기회가 되겠군요.”
“문주님께서 방문해 주신다니 영광입니다.”
위팽이 정중하게 포권을 취했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태도 변화에 송검문주는 입술을 깨물었다.
“오는 길이 고단하셨을 터인데. 이럴 게 아니라 들어가서 여독을 푸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호의는 감사하지만 이만 떠나야 할 것 같습니다. 잡아야 할 놈이 있어서 말입니다.”
“위 대협이 쫓고 있는 놈이라. 거 아주 악질인 모양입니다.”
“흉악한 살수지요. 감히 삼공자를 해치려 했으니 말입니다.”
“사, 삼공자를 말이오? 어떤 놈이 감히 산서잠룡을?”
“글쎄요. 본가를 적대시하는 누군가가 보낸 살수로 짐작하고 있습니다.”
“허어.”
“한데…….”
위팽의 눈빛이 순간 번쩍였다. 예리한 시선이 송검문 내부를 샅샅이 훑었다.
“쫓다 보니 송검문까지 왔지 뭡니까.”
“그, 그럴 리가. 무슨 오해가 있는 것 아니오?”
심장이 덜컥 내려앉은 송검문주가 황급히 변명을 시작하려던 그때였다. 위팽이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하하, 물론 착각이겠지요. 태원진가와 송검문의 우애가 두텁다는 것은 천하가 다 아는 사실인데 그럴 리 있겠습니까?”
“……!”
“환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원단에 다시 뵙지요. 이럇!”
위팽과 그 수하들이 어둠 속으로 사라진 후에도 송검문주는 오랫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