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691
#690화
남만인들은 기본적으로 무(武)를 숭상한다.
중원의 한족들처럼 농사를 짓고, 가축을 키우고, 강과 산에서 금은을 캐지만 결국 그들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무력이었다.
재물이 있으면 무얼 하나. 그해 농사가 풍년이 되고 울타리에 가축이 가득해도 결국 그것들을 지키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했다.
전사. 그리고 전사와 함께 싸움에 임할 수 있는 맹수.
이는 적의 가슴에 꽂아 넣을 수 있는 검인 동시에, 이 땅을 지킬 방패였다.
오랜 투쟁의 역사를 겪은 남만인들은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오독문이 멸문하고 남만야수궁이 설립된 이후에도 전사와 맹수 양성에 상당한 힘을 기울였다.
거대 부족이든, 중소 부족이든 마찬가지였다. 결국 힘이 없으면 도태되고 몰락하는 법.
이런 생각은 사대 부족으로 꼽히는 요족의 대족장인 요희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야망이 컸던 만큼 다른 부족장들보다 더한 열의를 보였다.
그녀는 백상의 행동을 묵인하는 대가로 받은 금은보화를 군사력에 투자했다.
젊고 재능 있는 청년들을 모집하여 전사로 육성했고 맹수들의 각 종류와 장단점을 파악, 교배를 통해 개량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스윽.
그늘 속에서 몸을 일으킨 ‘그것’을 마주한 순간, 지금껏 수많은 맹수를 마주했던 요희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
벼락이 정수리를 관통한다면 이런 기분일까.
사실 크기와 힘이라면 그 어떤 맹수도 상(象:코끼리)을 따라올 수 없다.
마치 작은 동산과도 같은 크기에 길고 두꺼운 코는 나무마저 부러트릴 만큼 강하고, 날카로운 엄니는 갑옷마저도 관통해 버리니까.
그러나 ‘그것’은, 저 흑호(黑虎)는 달랐다.
요희는 느낄 수 있었다. 지금껏 본 적 없는 검은 호랑이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거대하고, 압도적인 기세를.
‘이, 이건…….’
단순히 크기나 외형의 문제가 아니었다.
상이 작은 동산이라면. 저 흑호는 태산이다.
비록 상과 같이 길고 두꺼운 코도, 날카로운 엄니도 없었지만, 그저 우뚝 서 있는 그 자체만으로도 모든 것을 베고 짓누를 만큼 강대한 힘이 느껴졌다.
맹수라는 단어로는 표현할 수 없다. 영물(靈物)? 그것 역시 마찬가지다.
지금 그녀의 눈에 비친 저 흑호는 영물보다도 훨씬 깊고, 압도적인 기운을 발산하고 있었다.
‘저건 도대체…….’
요희가 침음성을 삼킨 그때, 흑호를 중심으로 흘러나온 한 줄기 서늘한 바람이 주위를 덮쳤다.
솨아아아.
사방을 가득 메운 풀과 꽃이 허리를 굽히고, 작은 연못을 채운 맑은 물이 출렁인다.
전신을 휩쓸며 지나가는 바람에 불현듯 떠오른 어떤 기억이 요희의 뇌리를 스쳤다.
‘이 바람, 느껴 본 적 있어. 그것도 두 번이나.’
당시에는 아무런 의미도 두지 않았지만, 이제는 알 것 같았다.
흑웅이 준 단환에 정신을 완전히 잃기 직전, 그리고 알 수 없는 거대한 공간에서 처음 눈을 떴을 때도 이와 같은 바람이 불었다는 것을.
‘그럼 혹시 흑웅으로부터 우리를 구한 것이…….’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요희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그러나 그녀가 채 입을 열기도 전에, 무야호를 닮은 청백색 눈동자로 낯선 불청객을 말없이 응시하던 흑호는 문득 몸을 돌려 거대한 나무 뒤로 모습을 감췄다.
솨아아.
그와 동시에 천천히 잦아드는 바람.
뒤늦게나마 요희가 조심스럽게 나무로 다가갔지만, 어찌 된 일인지 넓은 그늘 어디에도 흑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사라진 것이다.
마치 유령처럼. 그 어떤 기척이나 흔적도 없이.
“……!”
어떻게?
마치 귀신에 홀린 것 같은 기분이다. 다음 순간 들려온 무야호의 울음소리가 아니었다면, 아마 그녀는 한참이나 넋 나간 얼굴로 제자리에 서 있었을지도 몰랐다.
– 그릉.
툭.
울음소리와 함께 축축한 코가 팔꿈치에 닿는다.
잠에서 깬 사람처럼 퍼뜩 고개를 든 요희는 잠시 잊고 있던 한 사람의 존재를 떠올렸다.
‘진태경.’
머릿속은 아직 해결되지 않은 생각들로 복잡했지만, 지금은 그보다 중요한 것이 남아 있었다.
황급히 연못으로 달려간 요희는 우선 진태경의 상태부터 살폈다.
코와 입을 통해 흘러나오는 옅은 숨결. 다행히 피로 누적으로 깊은 잠에 빠졌을 뿐, 그의 상태는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요희가 마지막에 봤던 것보다 훨씬 나아진 듯했다.
‘기분 탓인가?’
고개를 갸웃거린 요희는 진태경의 양팔을 붙잡았다.
아무리 맑은 물이라도 상처에 스며든다면 상태가 호전되기 힘든 법. 이미 연못에 반쯤 잠겨 있던 그를 뭍으로 끌어올리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요희가 힘주어 그의 몸을 일으키려던 그때.
턱.
새하얀 털로 뒤덮인 앞발이 요희의 손등을 덮었다. 그 행동에 담긴 뜻을 얼핏 알아차린 그녀가 물었다.
“가만히 놔두라고?”
– 크릉.
“미안하지만 그럴 수는 없…….”
– 크르릉!
서걱, 첨벙!
그야말로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고통을 느끼며 연못으로 쓰러진 요희는 놀란 눈으로 백호를 바라보았다.
손등에서 느껴지는 아릿한 고통.
맹수의 예리한 발톱이 스쳐 지나간 피부에서 흐른 핏물이 수면 위를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도대체 왜?’
그러나 예기치 못한 상황에 당황한 것도 잠시뿐. 얼마 지나지 않아 요희는 저 영특하기 짝이 없는 백호가 왜 이런 행동을 했는지 깨달았다.
스아아.
“상처가…… 아물고 있어?”
말 그대로다. 그녀는 맑은 수면 속에서 아물어 가고 있는 자신의 손등을 바라보며 눈을 부릅떴다.
베어졌던 살이 조금씩 이어 붙고, 흘러나오던 핏물이 멎어 간다.
느린 속도로, 그러나 확실하게.
아무는 과정에서 느껴지는 통증 따위는 잊힐 만큼 놀라운 현상.
요희가 그 경이로운 광경을 더 자세히 지켜보기 위해 손을 들어 올리자, 아물어 가던 살이 회복을 멈추고 다시 희미한 핏물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연못. 연못에서 손을 뺐기 때문이야.’
이번에 떠올린 짐작은 정확했다. 다시 연못에 손을 담그기 무섭게 아물기 시작하는 상처를 확인한 요희가 중얼거렸다.
“……상처를 회복시켜 주는 연못이라니.”
단 한 방울만으로 일 갑자의 공력을 얻는다는 전설의 영약, 공청석유(空淸石乳)보다도 허무맹랑한 이야기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놀랍지도 않았다.
모든 것을 자신의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느꼈으니까.
기문진법(機門陳法)이라는 네 글자로도 설명할 수 없는 이 기이한 공간. 정체 모를 흑호의 존재와 어느새 상처 하나 없이 완전히 아문 손등의 상처까지.
이제야 목덜미에 검상(劍傷)을 입었던 무야호가 멀쩡히 살아남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이래서 날 막았던 거구나. 그가 연못에 있어야 더 빨리 회복될 테니까.”
– 그릉.
희미한 울음소리를 흘린 무야호가 천천히 손등을 핥았다.
나름대로 미안함을 전하는 영물의 모습을 바라보던 요희가 입을 열었다.
“그럼 조금 전 사라진 그 흑호가 우리를 구한 거니? 너와 진태경을 치료한 것도?”
크게 끄덕여지는 고개. 자신의 짐작이 맞았음을 확인한 요희가 연이어 질문을 쏟아 냈다.
“이유가 뭐야? 저 흑호가 어떤 존재인지, 주인이 누구인지는 알고 있어? 이곳이 어디인지는?”
잠시 머뭇거리던 무야호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불과 칠 주야 전. 야수묘왕과 진태경을 따라 애뇌산으로 향했던 무야호는 이미 흑호와 한 차례 마주친 적이 있었지만, 타고난 영물인 녀석에게도 흑호의 존재는 이해할 수 없는 불가해(不可解)의 영역이었다.
“후우. 너도 잘 모르는구나.”
– 끄으응.
“괜찮아.”
요희는 시무룩해진 무야호의 목덜미를 쓸어 주면서도 머릿속이 복잡했다. 무언가를 생각하기에는 정보가 너무나도 부족한 상황.
이곳이 어디인지.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그리고…… 진태경은 언제쯤 의식을 회복할 수 있을지.
이 와중에도 한 가지 다행인 점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저 흑호가 자신들에게 호의를 베풀었다는 점이었다.
‘최소한 암천과는 아무런 연관도 없어. 그랬다면 모두 죽은 목숨이었겠지.’
내심 중얼거린 요희의 시선이 문득 한 사람에게 닿았다.
반쯤 물에 잠긴 채 마치 죽은 사람처럼 미동도 하지 않는 그.
진태경은 주위에서 벌어지는 일을 아는지 모르는지, 평온하기 그지없는 표정으로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만약 쓰러진 사람이 그가 아니라 나였다면…… 진태경이 깨어 있었다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을 텐데.’
막막함에서 비롯된 어설픈 생각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요희는 어느새 진태경을 마음 깊이 믿고 있었다.
두 명의 초절정 고수를 단신으로 처치할 만큼 뛰어난 무위와 인의(人意)를 갖춘 진태경이다.
대족장이라는 가죽을 뒤집어썼을 뿐. 사실상 변절자나 다름없는 자신과 달리, 남만을 위험에서 구하기 위해 누구보다 동분서주한 그를 믿지 않는다면 누굴 믿어야 한단 말인가.
‘백상과 암천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면, 야율 궁주 혼자만의 힘으로는 대적할 수 없을 터. 시간이 부족해.’
요희가 품은 불안감은 대부분 현실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녀가 알 수 없던 시간의 흐름 속 배반자로 낙인찍힌 야수묘왕은 적지(敵地)로 돌변한 남만야수궁을 벗어나 종적을 감추었고, 남만 전체가 숯불 위 무쇠솥처럼 끓어오르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그것은 무쇠솥마저 녹여 버릴 용암일지도 몰랐다.
총동원령에 응한 각 부족의 전사들은 줄지어 외궁을 향해 움직였고, 모든 수뇌부가 투옥당한 묘족은 혼란에 빠진 채 숨을 죽였으며, 아무도 모르는 비처에서 대계(大計)의 완성을 목전에 둔 남천마후는 환하게 웃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요희는 그 사실을 알지 못했고, 알 수도 없었다. 정체 모를 기묘한 공간에 갇혀 기도할 뿐이었다.
‘하늘이 있다면 부디.’
부디 그를 한시라도 빨리 깨워 주기를. 자신이 죽어도 좋으니, 한 사람만큼은 깊은 잠에서 일으켜 세워 주기를.
하지만 간절한 바람과 함께 눈을 질끈 감은 요희는 보지 못했다. 그녀의 코앞에서 일어난 아주 작지만 선명한 변화를.
툭.
미세하게 움직이는 누군가의 손가락. 수면 위로 퍼져 나간 동심원(同心圓)이 조금씩, 그리고 멀리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 * *
꿈을 꿨다.
이 모든 게 꿈이라는 걸 알아차릴 수 있었던 이유는 간단했다.
눈을 뜨자마자 한없이 낯익은 누군가의 얼굴이 보였기 때문이다. 시간 속에서 천천히 잊혀 가던 목소리도 함께.
“오, 웬일로 이 시간에 일어났어? 더 자지 않고.”
그 순간, 목이 꽉 막히고 가슴이 먹먹해졌다.
나는 왈칵 솟구치는 눈물을 참으며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이네요. 아버지.
하지만 내 의지와는 달리, 저절로 움직인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목소리는 졸음에 잔뜩 취해 있었다.
“몰라. 그냥 깼어.”
그제야 알았다.
이 꿈속에서 내게 주어진 역할은, 그저 옛 기억을 지켜보는 관찰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리고 그 사실을 알 리 없는 아버지는 그저 씩 웃어 보였다.
“짜식, 감동인데. 아빠 출근하는 건 어떻게 알고 이 잠꾸러기가 저절로 눈을 떴을까? 응?”
거친 손이 볼을 쿡쿡 찌른다. 사소한 장난에 과거의 내가 투덜거렸다.
“아, 하지 마아. 더 잘 거야.”
“인마. 뭘 또 자. 해가 중천인데.”
“몇 신데?”
“여섯 시. 하루를 시작하기에 딱 알맞은 시각 아니냐?”
“응. 진짜 아닌 것 같아.”
과거의 나는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고, 껄껄 웃은 아버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라, 아들. 아빠는 회사 간다.”
“엥. 아직 여섯 신데 벌써?”
“일찍 지방 갈 일이 있어서. 오늘은 좀 늦게 올지도 모르겠네.”
나는 속으로 끊임없이 되뇌었다.
이대로 보내면 안 돼. 아버지, 제발 가지 마세요. 제발.
하지만 과거의 나는 달랐다. 어렸고, 철이 없었다.
지금 이 순간이, 아버지와의 마지막 기억이 되리라는 것 역시도.
“예에. 안녕히 다녀오세요.”
잠에 취한 목소리로 내뱉은 한 마디.
그런 내 모습을 보며 씩 웃은 아버지는, 애정 어린 손길로 머리를 헝클어트렸다.
“그래. 이따 보자.”
그게 전부였다. 아버지는 돌아설 테고, 곧이어 문이 닫힌다. 그리고 몇 시간 뒤 나는 담임 선생님께 불려갈 것이다.
내 기억대로라면, 분명 그럴 터였다.
하지만…….
“그런데 아들.”
“……!”
갑작스럽게 귓가를 파고드는 목소리에 나는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것은 과거의 내가 아닌, 어느덧 이십 대 후반에 접어든 나 자신의 의지로 벌어진 일이었고, 아버지는 손목에 찬 시계를 툭툭 두드리며 웃음 섞인 한 마디를 건넸다.
“이제 슬슬 일어나야 하는 거 아니냐?”
그 순간.
쩌적.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이 무너지고 깨져 나갔다.
익숙한 천장과 방. 아버지의 얼굴. 그 모든 것들이. 그리고 동시에 차가운 무언가가 전신을 덮쳤다.
촤아아악!
사방으로 비산 하는 물보라 속, 한 여자의 부릅뜬 눈동자가 보인다. 곧이어 파르르 떨리는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어떻게.”
글쎄.
나는 마음속으로 뇌까렸다. 아직도 선명하게 느껴지는 꿈속, 어리고 철없던 소년처럼.
몰라. 그냥 깼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