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697
#696화
드드드득!
건물이 흔들리고, 땅이 울린다.
남만야수궁을 감싸 안은 적막함은 이미 깨져 나간 지 오래.
문을 걸어 잠근 채 집 안에 숨어 있던 외궁의 부족민들은 어린 자식들을 품으로 끌어당겼고, 곳곳에 설치된 망루(望樓) 위에서 하릴없이 근무 시간을 보내다 무심코 고개를 돌린 전사들은 눈을 부릅떴다.
“저, 저게 뭐…….”
크아아앙!
천지를 울리는 거대한 포효가, 누군가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넋 나간 목소리를 집어삼킨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전사 중 하나가 비명처럼 외쳤다.
“저, 적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전사들은 그 말에도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움직일 수 없었다.
어찌 그럴 수 있겠는가.
그들은 그저 멍하니 입을 벌린 채 외궁에 나 있는 십여 개의 대로(大路)를 가로지르는 맹수의 대군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이, 이럴 수가.’
그것은 두려울 만큼 경이로운 광경이었다.
수천, 수만에 달하는 숫자의 맹수가 한 몸이 되어 내달리고 있다.
이 자리의 누구도 이러한 광경을 본 적이 없다.
이 땅에서 가장 나이 든 노인조차, 심지어 그의 조부조차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야말로 재앙(災殃). 혹은 이적(異蹟).
이해할 수 없는 불가해(不可解)의 영역 앞에서, 평범한 전사에 불과한 그들 모두는 석상처럼 굳어 버렸다.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상관의 외침 역시 먼 곳에서 들려오는 메아리처럼 귓가에서 흩어질 뿐이었다.
“경종! 경종(警鐘)을 울려라! 당장 내궁에 알려야 한다!”
“아, 아아…….”
“이런 멍청한!”
벌컥 성을 낸 상관이 넋 나간 수하를 밀쳐 냈다. 그리고 경종과 연결된 밧줄을 잡으려던 그때.
그는 문득 조금 전까지만 해도 뜨겁게 내리쬐던 햇볕이 사라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솨아아아아.
먹구름?
아니다. 적어도 그가 아는 먹구름은 이처럼 빠르게 움직이지도 않고, 낮게 깔리지도 않는다.
마침내 귓가로 전해지는 기이한 소리와 함께 가까워지는 먹구름의 정체를 확인한 그가, 자신도 모르게 경악에 가득 찬 욕설을 내뱉었다.
“……빌어먹을.”
그 순간.
먹구름이, 아니 광활한 하늘의 한 조각을 검게 물들이며 날아든 수많은 날짐승이 그를 덮쳤다.
솨아아아악!
푸드드득!
종류도, 숫자도 파악할 수 없었다. 날카로운 울음소리와 번쩍이는 부리. 그리고 흩날리는 깃털만이 온 사방에 가득했다.
하나의 거대한 괴물로 화한 날짐승들은 그렇게 폭풍처럼 다섯 개의 망루를 휩쓸었다. 아니, 부수었다.
콰직, 우지끈!
“마, 망루가 무너진다!”
“으아아악!”
하나로 뭉쳐 들이닥치는 날짐승들은, 그야말로 살아 있는 공성추(攻城鎚)나 다름없다.
서서히 기울어지는 세상과 붕 뜨는 듯한 부유감 속, 그들은 산산이 부서진 망루의 잔해와 함께 지상으로 추락했다.
쿠구구궁! 대애앵!
어지간한 장정만큼이나 큰 경종이 가장 먼저 지면을 뒹굴었고, 뒤이어 허공에서 몸을 비튼 전사들이 비틀거리며 땅에 착지했다.
그리고 숨을 헐떡이며 고개를 든 그들의 머리 위로,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백상은 어디 있지?”
“……!”
귓가를 파고드는 나직한 목소리. 하지만 그 자리의 모두는 심장이 얼어붙는 듯한 한기를 느꼈다.
보는 것만으로도 오금이 저릴 만큼 거대한 백호 때문에?
그것이 아니라면 그 뒤로 보이는 수많은 맹수 때문에?
아니다. 오히려 백호에게서 전해지는 느낌은 이상하리만치 따뜻하면서 신비로웠고, 가까이에서 마주한 맹수들의 눈동자는 온순했다.
그들을 얼어붙게 만든 것은 백호의 등에 올라탄 채, 그들을 굽어보는 한 사람의 안광(眼光)이었다.
장대하면서도 완벽하게 균형 잡힌 체구. 아무렇게나 헝클어진 머리카락과 여타 남만인과는 달리 시원시원하게 뻗은 이국적인 이목구비.
그리고…… 그의 손에 들린 한 자루의 새하얀 창.
“진태경!”
비명처럼 부르짖은 누군가의 외침과 함께, 전사들의 손이 본능적으로 허리춤에 찬 병장기를 뽑아 들었다. 정확히는, 뽑으려 했다.
적어도 진태경이 입을 열기 전까지는.
“그거 뽑으면, 좋은 꼴 못 본다.”
“……!”
“그리고 눈깔이 달려 있으면 주위를 둘러봐. 이 자리에 나 말고 누가 있는지.”
남만 땅 전체를 발칵 뒤집어 놓은 흉수. 진태경이 엄청난 숫자의 맹수들과 나타난 이상, 더 놀랄 일도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또 다른 한 사람의 얼굴을 확인한 전사들은 눈을 부릅뜰 수밖에 없었다.
저벅.
비교적 작은 덩치를 지닌 또 다른 백호가 그들을 향해 걸음을 내디딘다.
지친 행색으로도 미모를 감출 수 없는 아름다운 여인을 등에 태운 채.
“서, 설마…….”
“요희 대족장님?”
요희. 그녀의 붉은 입술 사이로 낭랑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를 알아보겠느냐?”
어찌 모르겠는가. 일 년에 한 번 대회의가 열릴 때마다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그녀를 보기 위해 거리가 인산인해를 이루는데.
하지만 무엇보다 그들을 혼란스럽게 만든 것은, 며칠 전 있었던 요서부의 일 이후 죽었다는 소문이 암암리에 퍼진 그녀가 아무런 두려움이나 포박도 없이 진태경과 나란히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아득한 숫자의 맹수들을 이끄는 선두에서.
“대, 대족장님. 어찌하여 이런 흉수와 함께…….”
“흉수라.”
작게 중얼거린 요희가 고개를 돌려 진태경을 응시했지만, 진태경의 시선은 그녀를 향하고 있지 않았다.
어느덧 불길함이 감도는 대로의 끝, 외궁과 내궁을 가로막은 거대한 철문을 응시하고 있던 그가 문득 입을 열었다.
“저기 오네, 흉수.”
그리고 다음 순간.
구구구구궁.
무거운 마찰음을 내며 철문이 열리기 시작한다. 높게 쌓아 올린 내궁의 석벽 위로 모습을 드러낸 수많은 화살촉과 함께.
처처처척!
햇빛을 받은 화살촉이 번쩍인다.
한껏 당겨진 활시위와 긴장된 호흡. 일천에 달하는 궁수들이 석벽 위에서 그들을 겨누는 가운데, 철문 뒤에 가려져 있던 한 사람의 인영(人影)이 비로소 모습을 드러냈다.
저벅.
유난히도 크게 울려 퍼지는 발소리.
잡티 하나 묻지 않은 새하얀 옷자락이 땅을 스치고, 담담한 눈빛이 공간을 가로질러 한 사람과 맞닿는다.
“왔구나. 기어코.”
백상. 웅혼한 공력이 실린 그의 목소리에, 진태경은 창날을 늘어트리며 대답했다.
“그래, 왔다.”
이 개새끼야.
* * *
백상.
놈의 얼굴을 마주한 순간, 나는 전신의 공력이 용암처럼 들끓는 것을 느꼈다.
당장이라도 뛰쳐나가고 싶다.
수호령의 등을 박차고 바람처럼 달려가,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빠르고 강한 일격으로 놈의 목숨을 끊고 싶었다.
하지만…….
스륵.
소매를 붙잡는 가느다란 손가락. 파르르 떨리는 요희의 목소리가 귓가에 전해진다.
“안 돼. 아직은.”
그래, 나도 알고 있다.
지금 백상의 목을 쳐 날린다면, 그건 한 마디도 남지 않은 폭탄의 심지에 불을 붙이는 것이 된다.
백상은, 놈은 그렇게 죽어서는 안 된다. 남만야수궁의 궁주가 아닌, 남만인 모두를 속이고 암천과 붙어먹은 배반자이자 찬탈자로 죽어야 한다.
궁주가 죽는다면 참혹한 전투가 기다리고 있겠지만, 배반자를 위해 싸울 전사는 어디에도 없으니까.
그것이 조금이라도 헛된 희생을 줄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고, 내 옆에 선 요희는 모든 진실을 밝히고 코앞까지 들이닥친 전투를 막을 수 있는 결정적인 한 수다.
“가자.”
내 속삭임에 고개를 끄덕인 수호령과 무야호가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걸음과 함께 나아가는 우리를 따라 일천 개의 화살촉이 움직인다.
명령이 떨어지는 즉시 화살비를 쏘아 보낼 것처럼.
그러나 서서히 좁혀지는 거리만큼, 번쩍이던 화살촉이 흔들리고 팽팽하던 시위가 느슨해진다.
요희를 알아본 이들을 시작으로 작은 동요가 내궁의 석벽 위로 번져 나가고 있었다.
물론 예외는 있었다.
백상. 흔들림 없는 놈의 면상을 바라보며 나는 입을 열었다.
“아무리 그래도 한솥밥 먹던 대족장이 살아 돌아왔는데, 안부 인사 정도는 해야지. 안 그래?”
공력을 실어 내뱉은 목소리가 사방으로 퍼져 나간다.
한층 더 몸집을 불린 동요 속에서, 백상이 굳게 다물려 있던 입술을 뗐다.
“무슨 정이 있어 인사가 필요하겠느냐. 모두 각자의 목적에 의해 맺어진 관계인 것을.”
“……!”
“……!”
나도 모르게 얼굴이 굳는 것이 느껴졌다. 아마 그것은 요희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우리는 지금, 같은 생각을 공유하고 있었다.
‘어째서?’
내가 아는 백상은 이런 사람이 아니었다. 놈은 교활하고, 간교하다. 남만이 지금과 같은 혼란에 빠진 가장 큰 원인 중 하나는 무공보다 더욱 무서운 놈의 심계(心計)였다.
그런데 인정했다. 요희의 존재를. 그것도 자신을 따르는 모든 이들 앞에서.
꾸국.
창대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간다. 이를 악문 나는 타오르는 듯한 눈빛으로 백상을 노려보았다.
“이게 무슨…… 개수작이냐.”
“내가 부정할 거라 생각했더냐?”
내게 되물은 백상이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활짝 열린 거대한 철문 너머, 도산검림(刀山劍林)을 이루고 있는 수많은 남만 전사들과 석벽 위의 궁수들이 크게 뜬 눈으로 그를 바라보는 중이었다.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느냐. 너희가 알고 있고, 곧 저들도 깨닫게 모든 것들이 전부 진실인 것을.”
“……!”
“그래. 맞다.”
자신을 따르는 전사들에게서 시선을 뗀 백상이 하늘을 바라보았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날씨. 뜨거운 햇볕이 그의 얼굴에 내려앉는다.
“난 모두를 배신했다.”
공력이 실린 나직한 목소리가 어느샌가 내려앉은 숨 막히는 적막을 깨트린다. 공기를 타고, 바람을 뚫고, 외궁을 가로지른 대로와 내궁의 석벽을 넘어 모두에게 전해진다.
“하루를 십 년처럼 살았다. 오직 한 가지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용서받지 못할 변절자가 되었고, 마침내 이곳까지 왔다.”
불현듯 숨이 막혔다. 이건 자신이 저지른 죄에 대해 고백하고, 용서를 청하는 고해성사가 아니다.
아니, 오히려…….
‘모든 것이 끝났을 때 나타나는 후련함. 그리고 절망.’
자포자기와는 근본부터 다른 감정.
지금의 백상은, 그저 토해 낼 뿐이다. 수십여 년의 세월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꾹꾹 눌러 왔던 감정을.
그리고 그토록 바라던 목적을 이루었음에도 절망하는 자신의 모습을 숨김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설마.’
순간 번개처럼 뇌리를 스치는 어떤 생각과 함께, 전신의 털이 곤두서는 듯한 감각이 전신을 덮친다.
뒤이어 비명과도 같은 외침이 내 입술을 비집고 뛰쳐나왔다.
“모두 물러……!”
그리고 다음 순간.
구구구궁! 번쩍!
천지를 떨어 울리는 천둥소리가 들리며, 모두의 머리 위로 먹구름이 드리워졌다.
이제는 한 줄기의 햇빛도 찾아볼 수 없는 세상 속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어쩌나. 이미 늦어 버렸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