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700
#699화
구구구궁! 쿵!
거센 진동을 이기지 못한 내궁의 석벽이 힘없이 허물어지고, 둔중한 소음을 떨어져 나간 철문이 지면을 후려친다.
흡사 작은 동산이 무너지는 듯한 광경.
그러나 미끄러지듯 잔해를 피한 백상의 신형은 쾌속하게 쏘아졌다.
쉬이이익!
전신을 스치는 바람. 곤두선 오감으로부터 비릿한 혈향(血香)과 곳곳에서 울려 퍼지는 비명이 전해진다.
백상은 자신의 내부에서 요동치는 공력을 느끼며 심호흡했다.
‘휩쓸려서는 안 된다.’
마치 병풍처럼 내궁의 뒤에 우뚝 선 거대한 절벽.
이제는 ‘균열’이라 불려야 할 절벽의 틈새에서 흘러나오고 있는 마기(魔氣)는 백상으로서도 쉽게 생각할 수 없었다.
아니, 초절정 고수였기에 이렇게 내궁을 활보할 수 있다.
마도(魔道)를 걷는 자가 아니라면, 어지간한 내가고수(內家高手)조차 저 마기의 영역에 들어선 순간 공력이 진탕되고 평정심을 잃었을 것이다.
지금 이 순간, 비틀거리며 그를 막아선 한 중년인처럼.
“구, 궁주? 궁주님이십니까?”
모를 수 없는 얼굴이다.
아비를 닮아 탐욕스럽고, 별다른 능력도 없이 부족장의 자리를 물려받아 호의호식하던 자.
그렇기에 누구보다 열성적으로 백상을 지지했던 이였으니까.
그러나 언제나 기름 낀 얼굴로 백상에게 아부로 가득한 미소를 건네던 그는, 지금 칠공(七空)에서 피를 흘리며 부르짖고 있었다.
“제발, 제발 살려 주십시오! 전 아직 죽기 싫습……!”
허우적거리며 뻗은 손이 새하얀 옷깃을 스친다. 중심을 잃고 쓰러진 부족장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백상이 입을 열었다.
“내가 왜 그래야 하지?”
“구, 궁주?”
“이미 알고 있었을 텐데. 내가 하려는 일이 남만에 크나큰 해가 된다는 것을.”
“……!”
“서로의 목적을 위해 합당한 대가를 주고받았으니, 부디 억울해하지는 말게.”
나 역시 그러할 테니.
입 밖으로 흘러나오지 않은 뒷말과 함께, 백상의 손가락 끝에서 지풍(指風)이 쏘아졌다.
푸푹!
천령개(天靈蓋)를 관통당한 부족장의 신형이 그대로 허물어진다.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부릅뜬 그의 눈빛은 죽어서도 백상에게 질문을 던지는 것 같았다.
왜. 어째서.
이 지옥도 앞에서도 당신은 그리 당당할 수 있느냐고.
그리고 망자(亡者)의 물음에, 백상은 마음속으로 답했다.
‘이미 각오했으니까.’
그럼에도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숨결은 파르르 떨렸다.
설령 저자가 제 목숨이 아니라 부족민들을 살려 달라 애걸했다면 살려 주었을까?
아니, 어쩌면 편안한 죽음을 맞이했으니 형편없는 무공을 지닌 그에게는 오히려 자비였을지도 모른다.
일만.
무려 일만이다. 그 수많은 전사와 맹수가, 마기에 휩싸여 피를 흘리며 몸부림치고 있었다.
그들이 내지르는 비명이 심장을 쥐어짜고, 칼날처럼 머릿속을 후비는 듯했다.
하지만 백상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쐐애애액!
거침없이 쏘아진 신형이 비명이 깔린 드넓은 연무장을 가로질렀다.
어릴 적 야율척과 함께 사고를 칠 때마다 숨어들었던 마구간도, 과실주를 훔치려 드나들었던 곳간도 한 줄기 바람이 되어 스쳐 지나갔다.
복수심. 분노. 후회.
보보(步步)마다 켜켜이 쌓여 온 감정들이 휘몰아친다.
하나뿐인 아들을 전장으로 데려가지 않았더라면. 남천마후가 찾아온 그 날, 손을 맞잡는 대신 검을 뽑았더라면.
누구보다, 심지어 백상 자신보다 그를 믿었던 하나뿐인 의형(義兄)에게만큼은 모든 진실을 털어놨더라면.
혹은…….
‘차라리 나 홀로 모든 것을 안고 자결했더라면.’
저벅.
어느 순간 쉼 없이 나아가던 발걸음이 멈췄다. 굳게 닫힌 문을 응시하는 눈은 어느새 붉게 충혈된 지 오래다.
지금 백상의 뇌리에는 지난 밤 들었던 남천마후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정오. 내일 정오야. 궁에 있는 모든 전사를 내궁으로 소집해.’
‘내일…… 정오입니까.’
‘그래. 당신이 맡은 역할은 거기까지야. 그 후의 일은 우리가 알아서…….’
‘약조.’
‘응?’
‘약조를 지켜 주십시오. 오래전, 저와 했던 약조를.’
‘너, 제법 건방지구나? 감히 어른이 말씀하시는데 말도 끊을 줄 알고.’
남천마후는 웃었고, 백상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그녀는 남만야수궁의 새로운 주인이 바닥에 머리를 찧는 것을 한참이나 지켜본 후에야 그가 간절히 원했던 대답을 들려주었다.
‘예의 바른 아이에게는 상을 줘야겠지. 좋아, 대계가 시작되면 네 집무실로 돌아가.’
‘……집무실이라면.’
‘그래, 바로 이곳이지. 내가 한 약조는 그때 이루어질 거야.’
웃음기 섞인 목소리가 귓가에서 흩어진다. 천천히, 아주 느리게 문을 향해 뻗어지는 백상의 하나뿐인 손이 파르르 떨렸다.
‘어떻게?’라는 의문은 처음부터 들지 않았다.
남천마후가, 암천이 그렇다면 그런 것이다.
지금껏 그들이 보여 준 괴력난신(怪力亂神)과도 같은 일들을 생각하면 더더욱 그러했다.
제아무리 많은 이목이 내궁에 깔려 있다 해도 약조는 지켜질 것이다.
‘드디어.’
드디어 이곳까지 왔다. 지그시 눈을 감자 아득한 기억의 파도가 밀려와 몸과 마음을 잠식한다.
기나긴 인고(忍苦)의 세월.
하지만 이 쓸쓸한 이야기에도 마지막 장은 존재했다. 잠에서 깬 듯 눈을 뜬 백상은 힘주어 문을 열었다.
드륵.
활짝 열어젖힌 문.
그와 동시에 넓은 집무실이 백상의 시야에 들어왔다.
옛 주인의 온기가 남아 있는 간소하면서도 투박한 집기와 오랜 세월을 간직한 탁자.
더불어 이와 같은 집무실 풍경에 어울리지 않게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커다란 면경(面鏡).
그리고. 그리고…….
그것이 전부였다.
‘없다. 아무것도.’
믿을 수 없는 현실이 만근의 바위가 되어 한 사람을 짓눌렀다.
텅 빈 공허한 눈빛으로 집무실을 바라보던 백상이 문득 실소를 흘렸다.
“허. 허허. 허허허.”
울지 못해 웃었고, 웃지 않을 수 없어 웃었다.
남천마후는 약조를 지키지 않았다. 수십 년의 세월도. 그간 자신이 저지른 모든 일도 잿가루가 되어 흩날렸다.
그 모든 것이, 결국 이렇게 끝난 것이다.
“으하하하하!”
백상은 파안대소(破顔大笑)했다. 마치 소년 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배를 움켜잡고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고,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웃었다.
아니, 울었다.
“으하, 으하하! 으아아아아!”
웃음소리 대신 터져 나온 절규. 백상은 한 줌의 공력조차 실려있지 않은 주먹으로 바닥과 벽면을 후려쳤다.
쾅! 쾅! 콰아앙!
쉴 새 없이 쏘아지는 주먹.
굉음과 함께 박살 난 것은 집무실뿐만이 아니었다.
굳은살로 뒤덮인 손등이 터져 나가고, 주먹을 뒤덮은 핏물 사이로는 언뜻 새하얀 뼈가 내비쳤다.
아프다. 그 어느 때보다.
툭. 투두둑.
점점이 떨어진 핏물이 거미줄처럼 갈라진 바닥에 고인다.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난 백상은 창가로 다가갔다.
세상이 멈추었다고 생각한 그와는 달리, 활짝 열린 창밖 너머에서는 모든 것은 지금 이 순간에도 가파르게 돌아가고 있었다.
“크아아악!”
“제, 제발 죽여……!”
– 커륵, 크르륵!
몸과 마음을 잠식하는 마기에 저항하여 몸부림치는 인간과 짐승들.
그리고 끔찍한 비명을 토해 내는 그들을 향해 달려나가는 크고 작은 그림자들.
두두두두!
지축을 울리며 무너진 석벽을 타 넘은 수많은 맹수의 무리가 그들을 덮쳤지만, 그 목적은 살육이 아닌 구조다.
– 크아아앙!
선두에 선 낯익은 백호의 포효와 함께 일사불란하게 움직인 맹수들이 가장 가까운 이들의 팔과 다리, 혹은 목덜미를 물고 외궁을 향해 내달렸다.
이 끔찍한 마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한 걸음이라도 더, 이들을 빛으로 인도하기 위해.
꾸국.
한껏 말아쥔 주먹. 살갗 깊숙이 파고드는 손톱 끝에 핏방울이 비친다.
고개를 들어 먼 곳을 응시하는 백상의 시선 끝에는 쉼 없이 뒤섞이는 빛과 어둠이 있었다.
구구구궁!
느껴진다. 상상할 수도 없는 거대한 힘의 파동이.
그리고 격돌이 이어질 때마다 조금씩 사그라지는 빛과 계속해서 추락을 거듭하는 한 사람의 모습이.
콰앙! 드드득!
굉음과 함께 튕겨져 나온 신형이 유성처럼 지상으로 내리꽂힌다. 두 개의 전각이 무너지고 땅이 흔들린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푸른 화염은 허공을 딛고 짙은 어둠을 향해 쏘아졌다.
단 한 순간도 쉴 새 없이. 곧 다가올 죽음조차 불태워 버릴 것처럼.
‘진태경.’
왜 그렇게까지 하는 것이냐, 왜.
새어 나오지 않는 물음이 입안에 맴돈다.
가까운 과거, 어두컴컴한 뇌옥의 한 귀퉁이에서 들었던 한 마디는 백상의 귓가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얼마나 더 많은 피를 흘릴 셈이냐, 백상.’
백상은 넋 나간 눈빛으로 창밖을 바라보며 뒤늦은 대답을 건넸다.
“모르겠구나. 나도.”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비밀이다.
그는 아들을 잃은 뒤 복수를 꿈꾸었고, 남천마후를 만나 희망을 보았으며, 어느 순간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스스로를 발견하고 절망했다.
그리고…… 그렇게 걸어온 가시밭길의 끝에서 텅 빈 무(無)를 마주하게 되었다.
저벅.
백상은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창가에서 뒷걸음질 쳤다.
자신의 손으로 직접 그려 낸 지옥도(地獄道)를, 그 지옥도의 완성을 목숨을 바쳐 막으려는 젊은 이방인의 모습을 차마 더 이상 지켜볼 수 없었다.
‘그 모든 것은, 무엇을 위해서였나.’
영원히 답을 찾지 못할 의문과 함께, 창가에서 고개를 돌린 백상의 전신이 순간 석상처럼 굳었다.
“……!”
백상의 시선이 멈춘 곳에는 피와 먼지로 뒤덮인 한 사람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모든 것을 잃고 텅 빈 껍데기가 되어 버린. 그저 높은 무위로 세월을 억누르며 괴물로 연명해 온 어느 노인의 모습을, 집무실 한구석을 차지한 커다란 면경(面鏡)이 비추고 있었다.
하지만 백상이 본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아.”
휘(輝)아야.
닿지 않을 부름과 함께 그는 손을 뻗었다. 아니, 뻗으려 했다.
적어도 투명하고 매끄럽던 면경의 표면이, 물결처럼 일렁이기 전까지는.
스르르륵.
그 순간. 백상은 비로소 깨달았다.
이 면경을 자신에게 선물한 것이 누구인지.
남천마후가 왜 이곳에서 약조가 이루어질 것이라 했는지.
‘허언(虛言)이…… 아니었다.’
차갑게 식었던 마음속, 사라졌다고 생각한 희망의 불씨가 다시 타오르기 시작한다.
그리고 파르르 떨리는 백상의 눈동자에, 어느덧 혼탁한 어둠으로 물든 면경이 검게 물든 인영(人影)을 토해 냈다.
강기를 머금은 서늘한 검신도 함께.
푸욱!
* * *
팟.
남천마후가 발을 뻗었다. 소년의 손바닥보다도 작은 발.
그러나 창날의 옆면과 맞닿은 순간, 거인의 그것보다 강대한 힘이 전신으로 밀려든다.
드득, 쾅!
– 인간!
수호령의 외침을 들으며, 지상으로 추락한 나는 지면 깊숙이 처박혔다.
등을 통해 전해지는 충격에 저절로 입술이 벌어진다.
쿨럭.
입가를 타고 흐르는 붉은 선혈.
이미 적지 않은 내상(內傷)을 입었고, 금이 간 뼈는 움직일 때마다 삐걱거리며 통증을 호소한다.
‘괴물.’
남천마후는 희대의 썅년이지만, 희대의 괴물이기도 했다. 지금껏 상대한 누구보다, 심지어 서천마군 보다도 더한 무위를 지닌 괴물.
하지만…….
‘일어나야지. 몇 번이라도.’
설령 몇 번이 아니라 몇십 번이라 해도 마찬가지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은 없다. 단 한 번이라도 뒷걸음질 친다면 그곳이 바로 지옥이다.
나뿐만이 아니라 남만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 그리고 중원까지 불길에 휩싸일 것이 틀림없다.
‘막아야 해.’
나는 소매로 입가를 문지르며 일어섰다.
그리고 재차 공력을 일으키기도 전에, 지금 내가 처한 이 상황이 아직 최악이라 부르기에는 부족함이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구구구구궁!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린 나는 볼 수 있었다.
“……이런 시발.”
무너지는 내궁(內宮)의 위로, 짙게 드리워지는 어둠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