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703
#702화
슈화악!
곧게 편 수도(手刀)가 바람을 가르며 내리꽂힌다.
가늘면서도 새하얀, 살면서 물 한 방울이나 묻혀 봤을까 싶은 손.
그러나 진태경은 안다. 저 손에 얼마나 많은 핏물이 흘렀는지.
눈이 부시도록 환하게 웃는 남천마후의 아름다운 얼굴 뒤에, 어떤 어둠이 도사리고 있는지.
‘괴물.’
새삼 뇌리에 떠오른 두 글자.
유성처럼 떨어져 내린 핏빛 강기가 진태경의 정수리를 파고들려는 그 순간, 못 박힌 듯 굳어 있던 두 다리가 움직였다.
서걱!
지면이 두부처럼 갈라진다. 한 끗 차이로 강기를 피해 낸 진태경이 섬전처럼 창을 뻗었다.
슈확!
가공할 만한 속도와 힘. 더불어 무서우리만치 정확하게 일점(一點)을 향해 쏘아지는 창날.
그것은 일평생 권각을 연마하여 초절정의 경지에 오른 권사(拳士)라 할지라도 감히 맞받아치지 못할 일격이었지만, 남천마후는 달랐다.
아니.
적어도 오늘의 남천마후에게는 충분히 그럴 만한 힘과 자격이 있었다.
콰드드득!
공수납백인(空手納白刃).
합장(合掌)하듯 마주한 남천마후의 양손 사이로, 겁화가 일렁이는 창날이 파르르 떨린다.
진즉 잿가루가 되고도 남았을 새하얀 손에는 강대한 기운이 집약되어 있었다.
주름 하나 없이 팽팽한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고작 이 정도로…….”
비웃음 가득한 목소리가 흘러나온 그 순간.
툭. 투둑.
점점이 떨어지는 핏물의 존재를 확인한 남천마후가 입을 다물었다.
반 박자 늦게 느껴지는 통증과 함께 쑥스럽다는 듯 웃는 한 사람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온다.
“어, 내가 깜빡하고 말 안 했구나. 이거 만년한철이야.”
“……!”
“근데 뭐라고?”
고운 미간이 일그러진 그때, 진태경이 손에 쥐고 있던 창대를 놓으며 양팔을 뻗었다.
‘장력(掌力)?’
하지만 남천마후의 짐작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쉬쉭!
난데없이 목과 가슴을 향해 쏘아지는 두 자루의 비수. 당장 피하기에는 너무나도 가까운 거리다.
어쩔 수 없이 붙잡고 있던 창날을 놓은 남천마후가 크게 소매를 떨쳤다.
콰아아!
풍성한 옷소매에서 터져 나온 바람이 비수를 날려 보낸 순간. 진태경의 발끝이 느릿하게 기울어지던 백염(白炎)의 창대 끝을 잡았다.
아니, 걷어찼다.
‘……뭐?’
걷어차?
그것도 지금 같은 상황에서 가장 큰 도움이 될 신병이기를?
충격과도 같은 의문과 함께, 섬광이 남천마후의 얼굴을 향해 날아들었다.
쐐애액! 촤악!
그야말로 찰나에 벌어진 일이었고, 그 이상으로 변칙적인 공격이었기에 완전히 피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본능적인 움직임으로 고개를 틀었던 남천마후는 귓불에서 전해지는 통증을 느끼며 눈을 부릅떴다.
“감히!”
귀걸이만 깨졌다면 이토록 분노하진 않았을 것이다. 제법 마음에 든 물건이긴 했어도 얼마든지 다시 구할 수 있으니까.
그러나 귓불이 찢어진 것으로도 모자라 머리카락도 잘렸다.
언제나 그녀의 자랑거리였던 풍성하고 윤기 나는 머리카락이, 무려 절반이나 잘려 나간 것이다.
“죽엇!”
콰아아아아!
잠시 주춤했던 미증유의 기운이 가녀린 전신을 타고 솟구쳤다.
거대한 바위도 단번에 으스러트릴 것만 같은 압력. 그러나 남천마후는 미처 알지 못했다.
젊다 못해 새파란 눈앞의 적이, 한때 천근이 훌쩍 넘는 철구를 매달고 절벽을 올랐음을.
콰직. 우드득!
반경 십여 장을 짓누르는 압력에 지면이 꺼지고, 몸부림치던 인간과 맹수들의 사지가 꺾여 나간다.
– 크륵, 크르륵!
“끄아아아악!”
핏물과 단말마(斷末摩)가 흘러넘치는 공간 속, 압력을 견뎌 낸 진태경이 발을 굴렀다.
쾅!
발끝을 따라 피어오른 한 줄기 화염과 함께 나아가는 신형.
그와 동시에 맹렬하게 휘둘러진 손끝에서, 언제 쥐었는지 모를 한 자루의 창이 벼락처럼 공간을 갈랐다.
쐐애애애액! 꽈앙!
굉음과 함께 터져 나온 기파(氣波)가 세상을 뒤흔든다. 창날의 옆면을 정확히 잡아챈 남천마후의 손에서 거대한 기운이 일렁였다.
콰직!
창날을 감싸던 열양지기도, 솜씨 좋은 대장장이가 백 번도 넘게 담금질한 강철도 두부처럼 으스러진다.
남천마후의 입가에 살기 어린 미소가 맺혔다.
‘멍청한 녀석.’
진태경의 실수는 만년한철(萬年寒鐵)로 이루어진 희대의 신병이기를 스스로 포기했다는 것이다.
지금부터 남천마후는 감히 자신의 아름다운 몸에 상처를 입힌 것으로도 모자라, 귀중한 머리카락마저 자른 저 어린놈에게 그에 마땅한 대가를 치르게 할 생각이었다.
‘최대한 몸 성히 데려가려 했는데. 아무래도 안 되겠어.’
처음에는 지엄하신 천주께서 진태경에게 흥미를 보이신다기에, 그분의 충실한 종복으로서 저 어린놈을 잡아 바치려 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생각이 바뀌었다.
지금 남천마후의 눈에 비친 진태경은 앙칼진 고양이가 아니라 한 마리의 당당한 맹수였다.
비록 나이는 어려도 대호(大虎) 못지않은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을 지닌.
그건 자칫하면 이 아름다운 육신에 더 큰 상처를 입힐 수도 있는 무기다.
남천마후의 붉은 안광(眼光)에 섬전처럼 들이닥치는 진태경의 모습이 비쳤다.
‘팔다리 한두 개 날아가는 것 정도는 감수하렴. 어차피 나중에 붙여 줄 테니.’
마음속으로 뇌까린 남천마후가 양 소매를 떨쳤다.
파파팟!
으스러진 창날의 파편이 수십, 수백으로 나뉘어 공간을 뒤덮었다.
하나하나가 강기를 머금은 암기의 파도 앞에서, 진태경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힘껏 그러쥔 주먹을 내질렀다.
콰아아아!
멸염신권(滅炎神拳). 굳은살로 가득한 주먹의 끝에서 튀어나온 화룡이 수백 개의 파편을 집어삼킨다.
초고온의 열기에 벌겋게 달아오른 파편들이 쇳물이 되어 지면을 적셨다.
치이이익.
하지만 소나기처럼 쏟아져 내리는 쇳물 아래, 공간을 격하며 쏘아진 진태경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남천마후의 섬섬옥수였다.
후웅!
바람을 지우며 다가오는 다섯 개의 손가락.
마치 갈퀴처럼 휘어진 그것이 오른팔을 노리며 휘둘려진 순간, 진태경은 처음부터 예상이라도 했던 것처럼 몸을 비틀었다.
이대로면 뜯겨 나갈 오른팔을 지키기 위한 회피가 아닌, 스스로 적에게 목을 들이대는 자살 행위.
그러나 동시에, 상대의 의표(意表)를 찌르는 치명적인 한 수이기도 했다.
‘이런 미친……!’
남천마후의 마음속에서 비명이 울려 퍼졌다.
존엄하신 천주께서 흥미를 보이신 이상, 그녀에게 있어 진태경은 절대 죽어서는 안 되는 존재다.
애당초 그를 생포하고자 하는 이유 역시 천주에 대한 충성심의 표출일 뿐.
아직 별다른 명령도 내려지지 않았는데 진태경이 자신의 손에 죽는다면 천주의 분노를 홀로 감당해야 할지도 몰랐다.
‘안 돼!’
입 안에서만 감도는 외침과 함께, 남천마후는 황급히 용솟음치던 공력을 끌어당겼다.
동시에 오직 한 가지 목적을 위해 움직인 전신의 근육과 기혈이 뒤틀리고, 역류(逆流)의 파도가 그녀를 덮쳤다.
울컥!
“쿠에에엑!”
몸속 깊숙한 곳으로부터 솟구친 피 화살이 남천마후의 입술 사이로 뿜어진다.
마지막 순간, 가까스로 방향을 뒤튼 손끝의 강기가 진태경의 목을 비껴 나갔다.
쉭! 피핏!
칼날 같은 바람에 베어 나가는 살갗.
그러나 진태경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아니, 처음부터 동요할 이유가 없었다.
‘이 순간만을 기다렸으니까.’
차갑게 식은 머릿속은 이미 모든 계산을 끝마쳤다.
진태경이 판단한 남천마후의 무위는 낮게 잡아도 십왕(十王). 어쩌면 삼성(三星)에 버금간다.
그녀가 사용하는 무공의 수준은 서천마군과 비등하거나 오히려 못할 수도 있지만, 그 간극을 메우고도 남을 만큼의 압도적인 공력을 지녔다.
그리고 이런 수준의 고수를 상대할 때에는 오직 한 가지 방법밖에 없었다.
단 하나의 틈.
진태경은 스스로의 목숨을 판 돈 삼아 도박을 걸었고,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기회를 얻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목숨을 건다.’
인벤토리 오픈. 소환.
뇌리에 울려 퍼지는 명령어와 함께 섬전처럼 손을 뻗는다.
서걱!
이토록 강대한 괴물의 것이라고는 믿겨 지지 않는, 가느다란 팔목이 깨끗이 잘려 나감과 동시에 비명이 터져 나왔다.
“아아아아악!!”
마기에 휩싸여 몸부림치는 남만야수궁의 어떤 생명체보다, 아니 진태경이 들어본 모든 것을 통틀어 가장 크고 고통에 찬 비명소리.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사람은 타고나길 망각의 동물이며, 고통을 주는 것에 익숙해진 강자는 자신의 고통을 잊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대는 남천마후였다.
“진태경-!”
쉬쉭!
찢어지는 듯한 외침과 함께 쏘아지는 신형.
혼탁한 어둠이 뒤섞인 남천마후의 핏빛 안광을 마주한 진태경은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이번만큼은 완전히 피할 수도, 막을 수도 없다는 것을.
막대한 내상을 입은 탓인지 자세는 흐트러져 있었고, 피를 토해 내면서까지 억지로 끌어올린 공력은 거칠기 짝이 없었지만…… 그렇기에 더 위험하다.
아니, 진정으로 위험한 것은 지금 남천마후에게서 느껴지는 살심(殺心)이었다.
“감히! 감히 네놈 따위가!”
애당초 행운은 한 번뿐이었다.
분노와 고통에 사로잡혀, 주인에 대한 충심(忠心)마저 잊은 괴물이 강력한 기운에 휩싸인 일장을 뻗는다.
세상이 느려지고 어둠과 핏빛 강기가 혼탁하게 뒤섞인 장력이 공간을 지우며 달려든다.
콰아아아아!
바다가, 태산이 일어나 덮치는 듯한 압도적인 힘.
전신의 털이 바짝 곤두서는 듯한 두려움이 전신을 사로잡았지만, 진태경은 알고 있었다.
이곳에서 단 한 걸음이라도 물러나면 모든 것이 끝장이라는 것을.
목숨을 내던져서라도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와라.’
무엇을 향한 부름인지 모를 마음속 뇌까림과 함께, 진태경의 발끝이 피에 젖은 흙을 밟는다.
콰득.
목숨만큼이나 무거운 공력이 실린 한걸음에 지면이 움푹 주저앉고, 이내 열기를 머금고 폭발했다.
쾅!
지면을 스치듯 낮게 숙여진 신형이 포탄처럼 쏘아진다.
인간의 것이라고는 믿겨 지지 않는, 미증유의 기운이 실린 새하얀 손바닥이 시야를 가득 메운다.
핏빛 섬광 사이로 악귀처럼 일그러진 한 사람의 얼굴도 함께.
“죽엇!”
바로 그때.
‘인벤토리 오픈. 소환.’
당장이라도 장력을 쏟아낼 것처럼 한껏 펼쳐져 있던 진태경의 손이 오므려졌다.
텅 비어 있던 손아귀에 서늘한 창대가 잡히고, 길게 뻗어 나간 창날이 두 사람 사이의 공간을 지웠다.
그리고…….
쐐애애액! 쉭!
거친 파공성과 함께 목덜미를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가는 창날. 그와 동시에 남천마후의 눈동자에 희미한 환희가 떠올랐다.
‘읽었다. 완벽하게.’
진태경이 사용하는 저 기예(技藝)는 분명 놀랍고 위협적이지만, 남천마후는 혼잡한 전투의 흐름 속에서 모든 것을 정확히 예측해냈다.
아니, 그렇다고 믿었다.
곧장 진태경의 목을 날려 버리려던 그 순간. 문득 등 뒤에서 불어온 서늘한 바람을 느끼기 전까지는.
쉭.
“……!”
귓가를 파고드는 미세한 파공성.
본능적으로 몸을 회전시킨 남천마후의 옆구리를, 얼음처럼 차갑고 극도로 예리한 무언가가 할퀴고 지나간다.
서걱!
분수처럼 터져나오는 핏물과 함께 근육과 핏줄이 잘리고 기혈(氣血)이 뒤엉키는 것이 느껴졌다.
‘이, 이건.’
역류다.
앞서 입은 내상을 가라앉히기도 전에 찾아온 두 번째 역류인 동시에, 지금껏 입은 어떤 상처보다 치명적인.
‘처음부터…… 이걸 노린 거야.’
하얗게 물든 시야 속을 스친 한 줄기 깨달음.
울컥. 솟구치는 핏물을 삼키며 돌아선 남천마후는 마침내 볼 수 있었다.
고오오오옹.
주인의 부름에 응한, 투명한 창날의 끝에서 휘몰아치는 청백색의 화염을.
깊숙이 가라앉은 한 사람의 눈동자 아래, 소리 없이 달싹이는 입술이 완성시킨 두 글자를.
일섬(一殲).
남천마후의 눈이 부릅떠진 그 순간.
– 인간!
갑작스럽게 울려 퍼진 누군가의 다급한 의념(疑念)과 함께, 남만의 그 누구도 본 적 없는 거대한 와류(渦流)가 터져 나왔다.
콰아아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