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705
#704화
남천마후는 확신하고 있었다.
앞으로 일다경(一茶頃). 고작해야 차 한잔 마실 시간만 있으면 이 지긋지긋한 전투를 끝낼 수 있다고.
그것이 저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을 애새끼와 짐승이 살아 숨쉴 수 있는 마지막 시간이 될 것이라고.
하지만 그토록 굳건하던 확신은, 일장(一掌)을 발출하려던 그 순간 균열을 일으켰다.
구웅-!
어디선가 시작된 거대한 울림.
그와 동시에 공기가 출렁이고 바람이 멈춘다. 짙은 어둠 너머에서 전해지는 강대한 기파(氣波)를 느낀 남천마후가 이를 악물었다.
‘이건……!’
강자다. 그것도 마기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정도의 강자!
뇌리를 스치는 생각도, 그에 따른 대응도 찰나였다.
일이 틀어졌음을 깨달은 남천마후는 하나뿐인 손에 실린 공력을 발출하며 외쳤다.
기파가 느껴지는 방향이 아닌, 더 늦기 전에 숨통을 끊어야 할 누군가를 향하여.
“놈을 죽여!”
콰아아아아!
그 순간, 공간을 가르며 쏘아진 것은 혼탁한 빛을 띤 막대한 장력(掌力)만이 아니었다.
무려 일천에 달하는 인간과 짐승. 마기에 의해 더욱 악하고 강해진 변이체들이 일제히 괴성을 토해 내며 신형을 날렸다.
파팟. 쉬쉬쉬쉭!
– 크륵, 크아아아!
강철보다 단단하고 날카로운 이빨이 어둠 속에서 빛난다.
본래 지녔던 신체능력을 훌쩍 웃도는 힘과 속도로 달려드는 그들의 머리 위로, 거대한 기운을 품은 장력이 유성처럼 쏘아졌다.
짙은 어둠 속, 흐릿한 빛무리를 받으며 서 있는 두 존재를 향해.
아니, 남천마후에게 씻을 수 없는 모욕을 안겨 준 한 인간을 산산조각 내기 위해.
그러나 자신을 향해 덮쳐 오는 그 모든 것들을 바라보며, 진태경은 피곤에 젖은 입꼬리를 비틀었다.
“어쩌나. 이미 늦었는데.”
“……!”
불과 한 시진 전, 남천마후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던 그 짤막한 한 마디가 비웃음 가득한 목소리로 돌아온 그 순간.
퍼엉! 화아악!
사방에 드리워진 짙은 어둠이, 마기가 폭발하듯 양옆으로 터져 나갔다.
동시에 그 사이로 뛰쳐 나온, 숲과 초목(草木)을 닮은 녹색 강기가 가로막는 모든 것을 부수었다.
아니, 맹렬하게 물어뜯고 집어삼켰다.
마치…… 한 마리의 맹수처럼.
콰드드드득!
지축이 흔들린다. 압축된 공기가 터져 나가고, 쓰디쓴 마기가 뒤섞인 바람이 지워진다.
사방에서 달려들던 변이체의 사지를 찢어발긴 녹색 강기가 거대한 장력를 향해 아가리를 벌렸다.
꽈앙! 구구궁!
격돌과 함께 뒤섞이는 빛.
하늘이 갈라지는 듯한 굉음에 이어 무시무시한 충격파가 공간을 뒤흔들었다.
그 너머에서 힘없이 사그라지는 자신의 장력을 바라본 남천마후가 실핏줄이 터져 나간 눈동자를 부릅떴다.
‘공멸(共滅)?’
자신이 누구인가.
하늘과 땅을 통틀어 가장 위대하며 존귀한 존재. 천주의 명을 받드는 가장 충실한 종복 중 한 사람이자, 그중에서도 남천(南天)을 위임받을 만큼 신뢰받는 강자다.
제아무리 진태경에 의해 상당한 힘을 잃은 상태라 해도, 어지간한 초절정 고수 정도는 촌각 안에 찢어발길 수 있다.
한데 공멸이라니.
믿을 수 없고 믿고 싶지도 않은 결과였지만, 남천마후는 눈앞에서 벌어진 현실을 부정할 만큼 멍청하지 않았다.
더불어 갑작스럽게 나타난 상대의 정체를 유추할 만큼의 판단력도 지니고 있었다.
‘틀림없다.’
이 정도의 권강(拳罡). 그리고 서서히 가라앉고 있는 먼지구름 사이로 보이는 저 커다란 인영.
남천마후의 입술 사이로 차갑게 식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야수묘왕(野獸苗王) 야율척.”
퍼엉!
남천마후가 내저은 소매 끝에서 터져 나간 바람이 시야를 밝힌다.
흩어지는 먼지구름 사이, 늙은 대호처럼 반백(半白)의 수염을 갈기처럼 늘어트린 거한의 얼굴이 드러났다.
철탑처럼 우뚝 선 그의 등 뒤로, 거대한 백호의 몸뚱어리에 몸을 기대고 있는 어느 청년의 모습도 함께.
“늦으셨네요. 많이.”
흐릿한 진태경의 목소리에, 야수묘왕이 담담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미안하구나. 늦어서.”
“하마터면 객사(客死)할 뻔했습니다.”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나직하게 대답한 야수묘왕이 섬전처럼 손을 뻗었다.
펑.
북이 터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진태경의 신형이 들썩인다.
무너지려는 그의 신형을 황급히 감싸 안은 수호령이 본능적으로 이빨을 드러낸 그때, 고개를 내저은 진태경이 입을 벌렸다.
“우욱. 우에에엑!”
촤아아악.
넓은 등허리를 적시는 검붉은 핏물. 마치 토사물처럼 쏟아지는 사혈(死血)의 뜨끈한 감촉을 느낀 수호령이 중얼거렸다.
– 기분 한번 끝내주는군.
“……!”
– 그런 눈으로 쳐다볼 것 없다. 몸집 큰 인간이여. 나는…….
눈을 크게 뜬 야수묘왕을 향해 수호령이 말을 이으려던 그때, 죽은 피를 토해 낸 진태경이 몸을 일으키며 입을 열었다. 전보다 훨씬 생기 있는 목소리로.
“통성명을 나누기에는 썩 좋은 분위기는 아닌데, 우선 인사하세요. 이쪽은 흰둥이. 제가 새로 입양했어요.”
– 입양이라니, 감히!
“오. 그럼 흰둥이는 인정?”
– 노옴!
상황도 잊고 털을 바짝 세우며 화를 내는 수호령을 보며 진태경이 씩 웃은 그 순간. 야수묘왕이 불현듯 양손을 떨쳤다.
퍼엉!
녹색 권강과 혼탁한 장력이 허공에서 부딪친다. 동시에 힘없이 축 늘어져 있던 투명한 창날이 움직였다.
서걱!
틈을 노려 달려들었던 변이체 십여 마리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쪼개진다.
그리고 순간 비틀거리는 진태경의 등 뒤를 향해 쇄도하던 또 다른 변이체들은, 자신들은 기다리고 있던 거대한 앞발을 볼 수 있었다.
후웅, 콰득!
핏물이 분수처럼 솟구치고, 몸뚱어리에서 분리된 사지가 나뒹굴었다.
크르릉. 낮은 울음소리를 흘린 수호령과 등을 맞댄 진태경이 백염(白炎)의 창날을 들어 한 방향을 가리켰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말하는 와중에 끼어든 저 썅년은…… 아시죠?”
야수묘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깊게 가라앉은 눈동자에는 추악한 모습을 한 노파가 비치고 있었다.
“그래, 남천마후.”
끓어오르는 듯한 목소리에는 숨길 수 없는 분노가 담겨 있었다.
아직도 주위를 둘러싼 수많은 변이체. 마기에 잠식당하여 본래의 모습을 잃어버린 그들은, 한때 야수묘왕이 누구보다 아끼고 사랑하던 이 땅의 부족민들이었다.
아니, 그 사실은 지금도 변하지 않는다.
변이체들을 본 그 순간부터 욱신거리기 시작한 가슴 한구석이 바로 그 증거였다.
‘늦지 않길 바랐는데.’
숨이 턱에 차도록 달렸다. 온 힘을 쥐어 짜내어 이곳까지 왔다.
그리고 저 멀리에서 어둠과 불길에 휩싸인 남만야수궁의 전경을 확인한 순간, 깨달았다.
이미 늦어 버렸음을.
야수묘왕이 지금 이 자리에 오기까지 지나쳐야 했던 것은 산과 들. 강과 계곡뿐만이 아니었다.
지옥도(地獄道).
그는 지옥도를 보았다. 수십여 년 전, 정마대전이라 명명된 그 끔찍했던 기억의 파편이 떠올라 마음을 난도질했다.
미처 피신하지 못한 부족민들의 시신 위에는 무너진 건물의 잔해가 짓누르고 있었고,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풍악과 웃음소리가 가득하던 거리는 넘실거리는 어둠과 화마(火魔)가 차지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이 지옥도를 만들어 낸 가장 큰 원흉이 야수묘왕의 시선 끝에 서 있었다.
“남만야수궁의 궁주로서 맹세하건대.”
붉어진 두 눈동자에서 화염이 줄기줄기 쏟아진다.
술과 사람을 좋아하고, 거나하게 취하여 껄껄 웃던 평소의 모습은 이제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과거 일만의 전사를 이끌고 북상. 마교의 십만마도(十萬魔徒)에 맞서 십왕(十王)이라는 위명을 얻은 거인이 서늘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네년의 사지를 갈기갈기 찢어 주마.”
야수묘왕의 커다란 등 뒤에서 고개를 쏙 내민 진태경이 덧붙였다.
“혹시 힘에 부치실까 봐, 팔 하나는 이미 제가 잘랐습니다.”
여전히 창백하지만, 빠르게 돌아오고 있는 혈색. 애병을 움켜쥔 손은 더 이상 떨리지 않는다.
크게 심호흡한 진태경은 앞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저벅.
단 한 걸음.
그러나 아직도 사방을 가득 메우고 있는 변이체들은 몸을 움찔거리기만 할 뿐, 섣불리 달려들지 못했다.
비록 이성은 마비되었지만, 변이와 함께 더욱 극대화된 본능이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공기의 흐름이 바뀌었다는 것을. 또 자신들에게 명령을 내려야 할 주인이 무슨 이유에선지 침묵하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이러한 변이체들의 본능은 진실에 가까웠다.
남천마후는 남만에 온 이래, 두 번째로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좋지 않아.’
평소라면 코웃음을 쳤을 것이다. 제아무리 십왕 중 한 자리를 차지한 야수묘왕이라 해도, 자신과의 간극을 메우기에는 역부족일 테니까.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진태경의 일격은 찰나의 순간 남천마후마저 공포에 얼어붙게 할 만큼 강력했고, 그로 인해 한쪽 팔과 함께 상당한 힘을 잃어버렸다.
이런 상황에서 나타난 야수묘왕은 충분히 위협적이다.
야수묘왕의 도움으로 약간의 힘을 회복한 진태경과 상당한 기운을 품은 수호령 역시 변이체 따위가 어찌할 수준은 되지 못한다.
그러나 마음속 불안감이 조금씩 커져만 가는 이유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왜. 왜 나타나지 않는 거지?’
몇 달 전 사천에서 죽음을 맞이한 서천마군이 그러했듯, 남천마후 역시 적지 않은 수하들을 휘하에 거느리고 있었다.
머릿수는 약 오백.
일군(一群)이라 칭하기에는 부족한 숫자일지는 모르나, 남만인들의 눈을 피해 은거하며,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하기에는 충분한 정예들이다.
그런데…….
‘오지 않았어. 아직도.’
균열이 열린 지 어언 반 시진이 넘은 시점. 하지만 때맞춰 모습을 드러낸 것은 복면인 하나뿐이었다.
본래대로라면 백상에게 선물한 거울에 새겨진 이동진(異動陣)을 타고 절반이 넘어오고, 남은 절반은 외부에서 외궁의 성문을 봉쇄해야 했다.
‘설령 이동진에 문제가 생겼더라도, 지금쯤이면 어떤 식으로든 나타나야 인지상정이거늘.’
남천마후가 지그시 입술을 깨문 그때, 그녀가 딛고 선 지면이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드득. 드드드득.
뒤늦게나마 수하들이 도착했음을 깨달은 남천마후는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지금 오고 있는 오백의 병력은 그녀가 직접 가려 뽑은 이들이다.
마공(魔功)을 익힌 그들은 마기의 영향으로 평소보다 더욱 강해질 테니, 아무리 많은 맹수가 외궁에 남아 있다 한들 앞길을 막아설 수는 없다.
“사지를 갈기갈기 찢어 죽여? 너 따위가 날?”
남천마후는 피식 실소를 흘렸다. 어느새 굳어 있는 진태경과 야수묘왕의 얼굴을 보자 흘러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인정하지. 너희는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잘 싸웠어. 아니, 누구도 이렇게까지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거야.”
하지만 그것도 이제는 끝이지.
뒷말을 삼킨 남천마후는, 언제 그랬냐는 듯 사뿐하게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팽팽하던 긴장감이 느슨해진 그때, 야수묘왕이 불쑥 입을 열었다.
“있다.”
“뭐?”
“이렇게 되리라고 예견했던 사람이.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걸으면서도, 자책감에 몸부림치면서도 마지막까지 희망을 놓지 않았던 한 사람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말.
남천마후는 눈을 깜빡이던 그때, 야수묘왕이 섬전처럼 돌아서며 일권(一拳)을 뻗었다.
콰아아아!
가파르게 쏘아진 녹색 강기가 어둠을 뚫고 길을 만든다.
그리고 그 길을 따라, 이 전투의 마지막 향방을 가를 지원군이 도착했다.
두두두두!
새하얀 옷과 갑주로 무장한 일단의 무리.
그 선두에 선 사내가, 야수묘왕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백천대주 왕호가…… 궁주를 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