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706
#705화
“백천대주 왕호, 궁주를 뵙습니다.”
그 첫마디를 듣는 순간, 남천마후는 세상이 멈췄다고 생각했다.
동시에 느려진 시간 속에서 주위를 둘러싼 모든 것들이 파도처럼 몰려와 그녀의 눈 앞을 가렸다.
암천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칠흑색 무복이 아닌, 눈처럼 새하얀 의복과 갑주.
거기에 더해 백족임이 분명한 복색과 이목구비를 지닌 삼백 명의 전사들과 낮은 울음소리를 흘리는 맹수들.
그리고…….
펄럭.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에 흩날리는 하나의 깃발과 누군가 용사비등(龍蛇飛騰)한 필체로 휘갈긴 세 글자.
백천대(白天隊).
“……!”
남천마후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알 수 없었다.
끝없이 펼쳐진 어두운 하늘 아래로 보이는 저 글씨가, 적지 않은 세월 속에 누렇게 변색 되어 버린 채 흩날리는 있는 저 낡은 비단 따위가 무엇이길래 이토록 마음을 불안하게 하는지.
그리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던 지난날의 기억이, 왜 지금 이 순간 다시 떠오르는지.
‘마후시여. 백상이 은밀히 전사와 맹수들을 육성하고 있습니다. 오직 백족으로만 이루어진 자들인데, 면밀하게 조사해 본 결과 그들 중 대부분이…….’
‘정마대전이나, 역병으로 부모를 잃은 고아들이지. 몇 년 전 일어난 대화재 이후 종적이 묘연해졌고.’
‘호, 혹시 알고 계셨습니까?’
‘그래, 오래전부터. 문산(文山)이라는 곳에 은거지를 마련했지, 아마?’
‘하, 하면 이 미천한 종이 마후께 감히 한 가지만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너, 궁금하구나? 왜 모든 걸 알면서도 지켜만 보는지.’
‘외람되지만 그렇습니다. 현재에도 백상에게 흘러 들어간 막대한 물자 중 상당수가 전사들의 육성에 쓰이고 있는 상황입니다. 만약 언젠가 놈이 다른 마음을 품는다면…….’
‘뭐 어때, 재미있잖아.’
‘예?’
‘생각해 보렴. 기껏해야 갈 곳 없는 고아들에게 영약을 먹이고, 무공 몇 초식 가르친다고 해서 뭐가 달라질까?’
‘그, 그건.’
‘잡철은 아무리 두드려 봤자 잡철이란다. 그 정도로는 절대 신병이기를 만들 수 없어. 그런데…… 난 그게 제법 즐겁더라고. 헛된 꿈에 부풀어서 잡철을 붙잡고 아등바등 애쓰는 백상의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 그 희망이 절망으로 바뀌었을 때 그가 어떤 표정을 지을지 상상하는 것도.’
‘……!’
‘그리고 백상은 결코 다른 마음을 품지 못해. 만에 하나 그런 일이 생긴다 해도, 내게는 그저 또 다른 즐거움이 되겠지.’
어언 십수여 년 전의 일이다.
그날 젊은 나이에 대족장의 자리에 오른 어느 간자(間者)는 이마에 피가 나도록 머리를 찧은 뒤 돌아갔고, 남천마후는 자연스럽게 그에 관한 기억을 잊었다.
아니, 아예 뇌리에서 지웠다.
더불어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심산유곡에서 벌어지는 일 역시 남천마후의 관심에서 서서히 멀어졌다.
‘계속해서 지켜보기에는, 그러기에는 너무나도 하찮은 일이었으니까.’
당연한 일이었다. 그녀는 백상의 목줄을 쥐고 있었고, 만약 그가 스스로 목줄을 끊고 자신에게 달려든다 해도 단숨에 짓눌러 죽일 만한 힘이 있었다.
오직 강자만이 보일 수 있는, 압도적인 힘에서 비롯된 광오(狂傲)와 여유.
하지만 지금에서야 남천마후는 깨달았다.
결코 배신하지 못하리라 생각했던 백상이라는 사냥개가, 어느 날 스스로 목줄을 끊었다는 것을.
자신의 광오함이 오늘 이 자리에 저들을 불러 왔다는 것을.
“……백천. 백천대.”
남천마후는 신음처럼 뇌까렸다.
그녀가 곧 도래할 어두운 하늘을 꿈꿀 때, 또 다른 누군가는 새하얀 구름이 떠다니는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었다.
원한 적 없던 목줄을 찬 사냥개가 되어 누군가의 뒤를 따르면서도. 그 길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렇게 할 수밖에 없는 자책과 분노를 담아 글자를 써 내려갔을 것이다.
한때는 눈부시도록 희었을 저 누렇게 낡은 비단에, 자신이 보고 싶었던 하늘을 그려 넣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손으로 이루지 못할 염원은, 한 사람에게 전해졌다.
“떠나시오. 이미 동문을 비워 두었소. 뇌옥의 경비도 평소보다 허술할 테니 한족들 역시 어렵지 않게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을 거요.”
“……!”
공간을 울리는 나직한 목소리에, 크게 뜬 눈으로 백천대와 야수묘왕을 번갈아 바라보던 진태경이 침음성을 흘렸다.
“설마.”
흩어졌던 조각들이 천천히 끼워 맞춰지는 듯한 기분.
야수묘왕이 붉게 충혈된 눈으로 남천마후를 응시하며, 며칠 전 누군가의 입을 통해 들었던 말을 이어 나갔다.
“곧장 북동쪽에 위치한 문산(文山)으로 가시오. 그리고 그중 가장 높은 봉우리에 머무르는 이들에게 이것을 보여 주시오.”
휙, 툭.
야수묘왕의 손을 빠져나온 무언가가 곡선을 그리며 남천마후의 발치에 떨어진다.
옥으로 만들어진 그것은 반으로 갈라진 누군가의 신패(信牌)였고, 백천대를 움직일 수 있는 하나뿐인 증표였다.
“나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걸었소. 스스로의 의지로 멈출 수도 없고, 만약 멈춘다 해도 대계(大系)를 막기에는 역부족이겠지.”
야수묘왕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렸다.
흐릿한 불빛이 감돌던 침소 내부, 검수(劍手)의 생명과도 같은 손목을 스스로 끊어 버린 의형제의 얼굴이 눈앞을 스치는 듯했다.
그가, 백상이 마지막으로 건넸던 한 마디와 함께.
“나는 결코 멈추지 않겠소. 그러니…… 궁주도 멈춰서는 안 되오. 진태경, 그 아이와 함께 끝까지 나아가시오. 나와는 다른 길로.”
그것이 전부였다. 의형(義兄)은 떠났고, 의제(義弟)는 남았다.
그리고 사흘 뒤, 백천대는 야수묘왕의 손에 들린 신패 앞에 무릎을 꿇었다.
집과 가족을 잃은 자신들에게 아버지이자 스승이 되어준 한 사람의 당부를 떠올리며.
‘만약 언젠가,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이 신패를 가져온다면…… 그가 바로 너희가 모셔야 할 주군이다.’
그렇게 수십 년간 심산유곡에 잠들어 있던 삼백 명의 전사들은 야수묘왕을 따라 하산(下山)했고, 거침없이 광야를 질주하는 어느 전사들에 관한 소문은 조용히. 동시에 빠르게 퍼져나갔다.
‘궁주께서 돌아오셨다!’
‘우리 태족(傣族)은 궁주께 합류한다! 암천과 결탁하여 궁주의 자리를 찬탈하고, 남만을 배신한 역도들로부터 이 땅을 지켜라!’
‘당장 모든 전사를 동원해라. 어서 전령을 띄워!’
자그마치 일만에 달하는 전사가 남만야수궁으로 향했으니, 그만큼의 공백이 생겨난 상황.
백상에게 반기를 들고 남만야수궁을 빠져나온 부족장들은, 휘하의 전사들을 이끌고 자신들의 진정한 궁주에게 합류했다.
‘자네들…….’
‘목숨 바쳐 따르겠습니다, 궁주.’
하루. 그리고 또 하루.
어느덧 거대한 군세(軍勢)로 거듭난 그들은 남만야수궁을 향해 달려나갔고, 예상치 못한 적과 마주쳤다.
아니, 적이라고 생각했다.
어림잡아 삼천에 달하는 대병력. 그들의 선두에 선 백족 사내가 홀로 앞으로 나서서 무릎을 꿇기 전까지는.
‘투항하겠습니다.’
야수묘왕은 이유를 물었고, 백족 사내는 혼이 나간 듯한 표정으로 답했다.
‘신물(神物)을 지키는 존재께서 저를 비롯한 모두를 일깨워 주셨습니다. 무엇이 옳은 길이며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
수왕석은 전설이자, 기적이다.
그리고 그날, 애뇌산에서 그 경이로운 광경을 목격한 것은 백족 사내. 아니, 호위장만이 아니었다.
‘그 한족 놈. 아니, 진태경 대협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속히 궁주님을 찾으라고. 더 늦으면 모든 것이 끝장이라고.’
그렇게 애뇌산을 포위했었던 삼천의 전사들마저 합류하자, 그들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험준한 산도, 깊은 늪과 풀숲이 우거진 밀림도.
그리고 그것은, 일이 틀어졌음을 깨닫고 황급히 남만야수궁으로 향하던 일단의 무리 역시 마찬가지였다.
“급하게 내궁으로 향하느라 끝을 보지 못했다. 전투는 어찌 되었느냐?”
남천마후에게 시선을 고정시킨 야수묘왕이 불현듯 던진 물음에, 백천대주 왕호가 뺨에 묻은 핏물을 닦으며 대답했다.
그의 눈동자는 아직 가시지 않은 전투의 열기로 달아올라 있었다.
“아군의 사상자는 이백입니다.”
“놈들은?”
“전멸입니다. 단 한 놈도 빠짐없이 죽이거나 사로잡았습니다.”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보던 진태경이 피식 웃었다. 자세한 내막은 몰라도, 일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는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는다.
“할망구. 좆 됐네?”
“……!”
으득.
순간 자신도 모르게 이를 악문 남천마후의 입안에서 비릿한 혈향이 맴돌았다.
죽었다. 모조리.
자그마치 오백에 달하는 정예가 몰살당했다.
야수묘왕과 함께 들이닥친 수천의 군세가, 이 불안한 상황을 단번에 타개할 수 있었던 마지막 한 수를 짓밟아 버린 것이다.
‘이런. 이런 말도 안 되는……!’
참을 수 없는 분노가 끓어오른다. 동시에 그보다 더한 불안감과 서늘한 한기가 가슴을 맴돌았다.
지금 남천마후의 뇌리를 가득 채운 것은 죽음이라는 두 글자였다.
‘……죽어? 죽는다고? 내가?’
믿을 수 없었다.
무려 일백하고도 삼십 년이 넘는 세월을 살아온 그녀다.
젊을 적부터 아름다워지기 위해, 젊음을 유지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고 수도 없이 인륜(人倫)을 저버리는 과정에서 고강한 무위를 쌓았다.
만약 언젠가 최후를 맞이한다 해도, 그것이 다른 누군가의 손에 죽는 것이라고는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해 본 적도 없던 그 허무맹랑한 상상이, 지금 이 순간 현실이 되어 눈앞으로 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마치 날카로운 송곳처럼 첨예한 살기와 함께.
구궁.
동시에 내디딘 수백의 걸음이 거대한 울림이 되어 퍼져 나가고.
크르릉.
전사들을 등에 태운 맹수들이 낮은 울음소리를 토해 낸다.
그중에서도 가장 거대한 백호를 중심으로 흘러나온 빛이, 그들 모두를 감싸 안고 어둠으로부터 보호했다.
화아아악.
흐릿하지만 분명한 빛. 아득한 세월 동안 이 땅과 운명을 함께한 신석(神石)의 힘을 느낀 변이체들이 본능적으로 뒷걸음질 친다.
아니, 어쩌면 그들 역시 느꼈을지도 몰랐다.
저들과의 전투에서 승리할 수 없다는 것을. 더욱 흉포하고 강력해진 이 몸뚱어리로도, 설령 자신들을 이끄는 남천마후가 나선다 해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으리라는 것을.
– 크륵.
– 큭.
흡사 신음처럼 울려 퍼지는 괴성. 그리고 괴성만큼이나 흉측한 외형을 지닌 괴물들이 무려 일천에 달한다.
그러나 백천대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변이체들을 향해, 앞서 상대한 적의 피로 흥건한 병장기를 겨누었다.
스릉.
흐릿한 빛을 받아 번쩍이는 수백의 창검.
지금으로부터 수십여 년 전, 그들을 잡철(雜鐵)이라 칭하며 한낱 유흥거리로 여기던 누군가의 생각은 틀렸다.
아니, 적어도 그때만큼은 사실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끊임없이 두드리고, 식히고, 달구어진 잡철은 어느 순간부터 새롭게 거듭났다.
단단하고 강철로, 강철마저 끊어 낼 수 있는 예리한 명검으로.
그리고 백천대라는 이름의 명검을 휘두를 수 있는 자는, 천하를 통틀어 오직 한 사람뿐이다.
“명을 내려 주십시오, 궁주. 아니…….”
흐르는 세월 속에 반백의 머리가 되어 버린 중년인. 백천대주 왕호가 묵직한 음성을 토해 냈다.
“주군.”
동시에 그의 시선이, 백천대 전원의 시선이 한 방향으로 흐른다.
그리고 모두의 앞에 철탑처럼 우뚝 서 있던 거한. 야수묘왕(野獸苗王) 야율척의 입술이 열렸다.
“나아갈 테니, 따르라.”
“존명(尊命).”
그것이 전부였다.
다음 순간, 그들은 동시에 나아갔다. 대해(大海)에서 시작된 파도처럼. 활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한 줄기의 벼락처럼.
그리고 그 선두에, 야수묘왕과 함께 나란히 쏘아지는 거대한 백호의 신형이 있었다.
– 크아아아앙!
콰드드드득!
천지를 떨어 울리는 포효와 함께 휘둘려진 앞발이, 막아서는 모든 것을 찢고 부순다.
자신의 혈색만큼이나 새하얀 수호령의 갈기를 힘껏 움켜잡으며, 진태경이 작게 중얼거렸다.
“아니 시팔. 힘들어 죽겠는데 나는 왜…….”
하지만 갑작스러운 급발진 현상에 떨떠름한 기분도, 수호령이 혹시 국산 호랑이인가 하는 의심도 다음 순간 사라졌다.
정확히 말하자면, 사라질 수밖에 없었다.
고오오오옹.
삽시간에 얼어붙는 공기. 주위의 어둠을 끌어당기며 솟아오르는 용권풍(龍卷風)의 중심에서 고개를 드는 남천마후의 모습에, 진태경은 섬전 같은 속도로 수호령의 갈기를 뒤로 잡아당겼다.
회심의 후진 기어.
그리고 수호령은 진태경의 뜻을 정확히 알아듣고 몸을 날렸다.
앞으로.
쉬쉬쉭!
– 꽉 붙잡아라. 인간!
“…….”
아니, 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