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71
#70화
밖은 어스름한 새벽이었다. 겨울철 공기는 얼음장처럼 차가웠고 걸을 때마다 연무장 바닥에 낀 서리가 바스러졌다.
미리 몸을 풀고 있던 진무경이 나를 보며 씩 웃었다.
“그래, 마음의 준비는 끝났고?”
당연히 아니지. 하지만 쓰린 속을 감추고 고개를 끄덕였다.
누가 그랬다. 피할 수 없다면 즐기라고. 강해지는 과정 중 하나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한결 편안…….
스르릉.
“그럼 그 대단한 실력 좀 보자.”
이 새끼 한국인인가. 성격이 왜 이렇게 급해?
피할 시간도 없다. 순식간에 코앞까지 짓쳐 든 진무경을 향해 황급히 창대를 휘둘렀다.
캉! 카가가각!
서로 맞댄 무기 너머로 진무경의 입김이 흘러나온다.
“자세는 제법이구나.”
그럴 수밖에.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게이트에서 7년을 창 하나로 버틴 나다. 권각술과는 쌓인 깜냥부터 다르다.
나는 녀석의 눈을 노려보며 대답했다.
“이번에는 쉽지 않을 겁니다.”
한 글자씩. 또박또박.
“너…….”
범상치 않은 내 기세를 느낀 걸까? 진무경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눈깔 똑바로 안 떠?”
“아.”
* * *
스르륵. 쿵!
진태경이 쓰러졌다.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다. 벌써 다섯 번째 기절이니까. 정말 놀랄 만한 일은 따로 있다.
‘날 상대로 이백 합을 버틸 줄이야.’
두 시진 동안 이어진 다섯 번의 비무.
사람이라면 응당 지치기 마련이다. 하지만 진태경은 달랐다. 오뚝이처럼 일어났고 점점 강해졌다. 결국 마지막에는 진무경도 진심으로 상대해야 했다.
‘이 녀석, 정체가 뭐야?’
적수공권일 때는 여든 먹은 노인네처럼 엉거주춤하던 동생. 그러나 창을 잡자 모든 것이 달라졌다.
맞기 싫어 살살 비위를 맞추던 겁쟁이는 어디 가고 노련한 창수(槍手)가 그곳에 있었다.
‘낭인 같았다. 수도 없이 죽음의 위기를 넘긴.’
투박해 보일 정도로 간결한 움직임, 스스로의 직감에 의존하는 변칙적인 공격과 회피. 낭인의 싸움에는 정해진 것이 없다. 진무경의 눈에 비친 진태경이 바로 그랬다.
그렇기에 더욱 큰 의문이 남는 거고.
‘도대체 어떻게?’
걸음마와 동시에 검을 잡는 명문가의 자제들도 일류 언저리만 기웃거리는 놈들이 부지기수다. 한데 저놈은 삼 년 만에 절정의 벽 앞에 섰다.
그것도 기녀들의 분 냄새가 아닌, 노련한 낭인의 냄새를 풀풀 풍기면서. 생각할수록 기가 찼다.
‘이게 가능한 일인가?’
가능하긴 하다. 초절정 고수의 벌모세수, 영약을 이용한 체질 개선. 그다음 피똥 쌀 만큼 창을 휘두르며 실전 경험을 쌓으면 된다. 삼 년간 하루도 빠짐없이!
“……말도 안 되는 소리지.”
허탈한 목소리로 중얼거린 진무경이 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답은 하나밖에 없다.
‘천재.’
이 단어 하나면 모든 의문이 명쾌하게 해결된다.
왜? 천재니까. 말 그대로 하늘이 내린 놈. 재능을 타고난 놈이니까. 모든 면에서 천재는 앞서간다. 출발점부터가 다르다.
“드르렁. 푸우.”
“…….”
그런데 하필 이런 놈이 천재라고?
그럴 리가 없다. 그래서는 안 되는 거다! 문득 분노가 치밀어 오른 진무경은 동생의 엉덩이를 걷어찼다.
“푸루루루룹.”
데굴데굴 굴러간 진태경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워, 월화 누나. 거긴 안 돼요.”
“……!”
“갑자기 이러시면. 앗. 아아!”
뚜둑.
실오라기 같던 마지막 인내심이 끊어졌다.
* * *
삐빅!
– 수면 모드가 강제 종료 됩니다!
이거 강제 종료도 되는 거였구나.
새로운 기능을 알았다는 기쁨도 잠시였다. 수면 모드가 왜 강제 종료 됐겠는가. 누가 깨우니까 종료된 거지.
“신성한, 연무장에서, 뭐? 거긴 안 돼요? 안 돼요?”
뻑! 뻑! 뻑!
새우처럼 웅크린 나는 죽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살려 주세요…….”
“안 돼요!”
퍼버버벅!
정확히 몇 대를 맞았는지 모르겠다. 중간에 두 번 정도 의식이 끊겼기 때문이다.
마지막 힘을 쥐어짜 연무장에 다잉 메시지를 남기다가 쓰러진 것이 마지막 기억이었고, 눈을 떠 보니 이미 밤이었다.
‘뭐 했다고 벌써 밤이냐.’
시간 여행자가 된 기분이다. 진무경을 만난 후로는 아주 그냥 하루가 휙휙 지나간다. 나는 전신을 엄습하는 통증을 느끼며 중얼거렸다.
“진무경, 세긴 세다.”
진무경을 제외한다면 지금까지 내가 상대한 절정 고수는 두 명이다. 대장로, 그리고 조필.
‘그중에서 대장로는 제외.’
대장로의 경우는 천운이 따랐다고 봐야 한다. 그는 태원진가 무인들의 희생과 이천백의 기습이 아니었다면 죽었다 깨어나도 이길 수 없는 고수였다.
‘그럼 조필과 진무경을 비교한다면?’
고민은 그리 길지 않았다.
두 명 모두 겪어 봤기에 선택은 쉬웠다.
‘진무경이 더 강해.’
조필은 분명 괴물 같은 놈이다. 화염신장에서 뿜어져 나오는 무지막지한 열기를 떠올리면 지금도 소름이 돋는다.
하지만 뭐랄까, 절정 고수답게 강하고 화염신장이라는 치명적인 무공을 사용했지만 그게 전부였다.
‘정확히는 무공의 활용 차이라고 해야겠지.’
진무경은 조필과 다르다. 그는 비무 중에도 최소 십여 개의 무공을 사용하며 내 공격을 철저히 차단했다.
무림인에게 무공이란 또 다른 무기다. 진무경은 적재적소에 알맞은 무기를 꺼내 쓸 줄 아는 녀석이다.
‘그에 비하면 나는?’
처음부터 있었던 진가심법은 제외. 무림에서 익힌 무공이라고는 진가창법과 진가보법 두 개가 전부다.
물론 둘 다 의심할 여지가 없는 일류 무공이지만…… 바꿔 말하면 딱 일류 수준에서나 쓸 만한 무공이라는 말도 된다.
무공의 한계. 내가 느낀 것을 진위경이 모를 리 없다.
‘그게 나를 진무경한테 붙여 준 이유고. 윽.’
고통에 절로 눈살이 찌푸려진다. 상반신을 조금 일으켰을 뿐인데, 전신의 뼈마디가 욱신거리고 살갗이 아려 왔다.
수면 모드를 통한 휴식에도 한계가 있었던 모양이다.
‘하긴, 그렇게 얻어맞았으니.’
진무경의 인정을 받아 퀘스트를 완료하려면 오늘 같은, 아니 오늘보다 더한 날들을 보내야 한다.
어쩌면 흠씬 두들겨 맞기만 하고 퀘스트까지 실패할지 모른다.
‘산 넘어 산이군.’
그래서 기쁘다.
F급 헌터였던 내게는 산을 오를 수 있는 자격조차 주어지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모든 것이 달라졌다.
넘어야 할 산이 있고, 그 산에 오를 자격이 주어졌다. 그것도 누구보다 빠르게!
‘이럴 때가 아니지.’
나는 통증도 잊은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덧없이 흘려보내는 1분 1초가 아쉬웠다.
* * *
진무경은 지하 연무장에 있었다. 최대한 발소리를 죽이며 지하로 통하는 계단을 내려가자 그의 모습이 보였다.
“합!”
짧은 기합성과 함께 검이 움직였다.
쉭! 쉬쉬쉭!
검신을 따라 바람이 갈라진다. 빛살 같은 속도로 허공을 찌르고 베어 내는 진무경의 움직임은 거침없었다.
그렇게 일각 정도가 흘렀을까? 검을 내린 진무경이 긴 날숨을 토해 냈다.
“후우.”
소매로 땀을 훔친 그가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미 아까 전부터 내 존재를 눈치채고 있었던 모양이다.
“말해 봐.”
뜬금없는 한마디.
당황한 나는 엉겁결에 반문했다.
“뭐, 뭘요?
“내가 방금 펼친 무공에 대해서.”
“어, 그게 일단 굉장히 빠…….”
“참고로 빠르다, 강하다. 이딴 헛소리 지껄이면 죽는다.”
귀신이네. 나는 살기 위해 머리를 쥐어짰다.
진무경의 무공이 어땠더라? 곰곰이 생각해 보니 희미하게 떠오르는 느낌이 있었다.
“거칠다?”
진무경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정답인가?
“너 지금 나한테 말 놓은 거냐?”
“……거칠었던 것 같아요.”
“그따위 말은 삼척동자도 할 수 있어. 더 자세히.”
머릿속의 이미지가 점점 또렷해진다. 허상의 적을 향해 쏟아지던 검날과 움직임이 떠올랐다. 빠르고, 거침없는 동작들. 그리고 사방을 짓누르던 기세.
그건 마치…….
“폭포?”
“…….”
“엥?”
뭐야, 정답이야?
한동안 말이 없던 진무경이 돌연 검집을 휘둘렀다.
딱!
“악! 왜 때려요!”
“그냥.”
그가 묘한 눈빛으로 나를 응시했다.
“어쩌다 너 같은 놈이 나왔을까?”
저게 욕일까, 칭찬일까.
속뜻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질문에 대한 답은 억울해서라도 들어야겠다. 나는 욱신거리는 이마를 문지르며 물었다.
“그래서, 정답입니까?”
“천무학관에는 수천 권의 무공 비급이 존재한다. 정파 무림의 후학 양성을 생각한 선배 고인들의 안배지.”
“그런데요?”
“방금 네가 본 낙류검(落流劍)도 그중 하나다. 서고 깊숙이 파묻혀 있었던 것을 내가 찾아냈지.”
낙류. 풀이하자면 떨어지는 물의 흐름. 즉, 폭포다.
그냥 생각나는 대로 말한 건데 설마 정답일 줄이야.
“오, 오오.”
설마 나, 진짜 천재인 건가? 무공 입문 두 달 만에 이 정도면 앞으로 얼마나 강해질지 내가 생각해도 나 스스로가 무서워진다.
“설마 겨우 이 정도로 난 천재니, 뭐니 하는 낯부끄러운 생각을 하는 건 아니겠지?”
“…….”
진짜 귀신이네. 그래도 조금은 재능이 있는 것 같은데.
나는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원래 다들 이 정도는 하는 건가요?”
내 질문에 진무경이 순간 움찔했다.
“그, 그럼. 눈 달린 놈이면 이 정도는 맞춰야지.”
“에이.”
“에이? 눈깔 하나 뽑아 줘?”
“……그건 좀.”
이 자식은 오늘따라 유난히 정색하네. 무슨 기분 나쁜 일이라도 있나. 한발 물러났는데도 진무경은 화를 삭이지 못하고 씨근덕거렸다.
“기본이야, 기본. 누구나 다 하는 거라고.”
“알았다니까요. 왜 자꾸 화를 내고 그러세요? 무섭게.”
“너 지금 반항하냐? 질풍노도의 시기라서 질풍십이권으로 맞고 싶어?”
질풍십이권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맞으면 아플 것 같다.
맹렬히 고개를 흔들었지만 진무경의 화는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네가 무공을 알아? 어?”
“모, 모릅니다.”
“너 무공 익힌 지 얼마나 됐어.”
반사적으로 대답이 튀어 나갔다.
“두 달, 두 달이요.”
“그래, 두 달밖에 안 된 놈이…… 뭐? 두 달?”
진무경이 핏줄 선 눈동자로 나를 노려본다.
“삼 년이 아니라 두 달?”
다급한 상황. 7년의 사회생활을 통해 얻은 눈치가 빛을 발하는 순간이다. 나는 재빨리 입을 열었다. 특히 일정 부분을 강조하는 것도 잊지 않고.
“삼 년 하고도! 두 달이요.”
풍 맞은 것처럼 부들거리던 진무경의 주먹이 안정을 되찾았다. 왠지는 몰라도 목소리까지 살짝 온화해진 느낌이다.
“자식이, 깜짝 놀랐네.”
내가 더 놀랐다. 이 새끼야…….
‘분노 조절 장애인가.’
진위경에게 물어보면 금방 들통나겠지만, 적어도 지금 당장 질풍십이권을 체험하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어쨌건 그사이에 진무경의 분노는 수그러들었다.
“딱 한 번 말한다. 잘 들어.”
“가슴에 새기겠습니다.”
내가 넙죽 고개를 숙이자 그가 고압적인 자세로 선언했다.
“난 가르치고, 넌 복종한다.”
“…….”
애견 훈련소야 뭐야.
“반론은 없다. 왜? 내가 너보다 강하니까.”
맞는 말이라 반박할 생각도 들지 않는다.
돈, 권력, 무력. 형태는 달라도 세상은 강자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법이니까. 나는 그 중심에 서고 싶다.
“어찌하겠느냐?”
아주 오래전부터, 내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