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710
#709화
쐐애애액!
가파른 속도로 쏘아지던 진태경의 신형이 미미하게 흔들렸다.
언제나 솜털처럼 가볍던 팔다리는 축 늘어진 채 고통을 호소하고, 지면을 밟는 발끝은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무겁게 느껴진다.
실로 극심한 일섬의 여파.
야수묘왕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지금쯤 제대로 서 있는 것조차 불가능했을 게 뻔했다.
만약 필사적인 의지로 버텼다 해도, 남천마후가 쏟아 낸 그 파괴적인 힘 앞에서는 분명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하지만…… 살아남았다.
가장 여력이 부족했던 진태경을 구하기 위해 야수묘왕이, 수호령이 죽음을 무릅쓰며 몸을 내던졌고 그 뜻을 이어받은 백천대는 지금 이 순간도 목숨을 내던지고 있다.
짙은 어둠을 향해. 그들로서는 대적할 수 없는 악귀(惡鬼)를 향해.
퍼걱!
단 일격.
피를 머금은 악귀의 손이 뼈와 살을 부수고 가슴을 관통한다.
이름 모를 한 사람의 생명이 그렇게 사그라지고, 그 빈 자리를 채운 것은 또 다른 누군가다.
‘도대체 왜.’
진태경은 저들을 알지 못하고, 저들 역시 진태경을 알지 못한다.
그런데도 저들 모두는 기꺼이 목숨을 내던지고 있었다.
끊임없이 죽어 나가는 동료들의 빈 자리를 메우고, 자신들의 힘으로는 막을 수 없는 죽음을 향해 달려들고 있다.
그리고 그런 백천대의 모습이, 어두컴컴한 동굴 속에서 애써 웃음 짓던 한 사람과 겹쳐졌다.
‘먼저 가라. 태경아.’
도망쳤기에 살아남을 수 있었고, 살아남았기에 수도 없이 후회했다. 만약 그때로 돌아간다면 진태경은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난 안 가, 절대로.”
악문 잇새 사이로 흘러나온 목소리에 백천대주 왕호가 고개를 돌린다.
누구의 것인지 모를 핏물을 흠뻑 뒤집어쓴 그가, 빠르게 가까워지는 신형을 발견하고 눈을 부릅떴다.
진태경은 이곳에 남아 있어서는 안 된다.
주군인 야수묘왕이, 왕호 자신을 비롯한 일백의 백천대가 목숨을 바쳐 얻어 낸 귀중한 시간이다.
어떻게든 살아남는 것이 그에게 주어진 유일한 사명이었을 터였다.
그런데 제 발로 위험을 찾아오다니.
“지금 이게 무슨……!”
경호성을 토해 낸 왕호가 다급히 코앞까지 다가온 진태경을 막아선 그때, 못 박힌 손이 그의 어깨를 짚었다.
동시에 귓가를 파고드는 나지막한 목소리.
“같이 좀 살자.”
“……!”
“씨이발. 같이 좀 살아남자고!”
순간, 왕호의 몸이 덜컥 굳었다.
모르겠다. 같이 죽자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자는 진태경의 그 외침에, 불처럼 타오르면서도 축축하게 젖어 있는 그의 눈빛에 말문이 막혔다.
자신을 뒤로한 채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저 어린 청년을, 도저히 막을 수 없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어째서 야수묘왕이, 십만에 달하는 부족민을 이끌어야 할 자신의 주군이 그러한 선택을 했는지.
‘이것 때문이었습니까? 바로 이런 모습 때문에, 당신의 안위보다 저 청년을 지키고자 하신 겁니까?’
함께 죽기 위해 돌아왔다면, 그것은 필부(匹夫)의 용맹에 불과하다.
그러나 진태경이 돌아온 이유는 함께 싸우기 위해서다.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은 이들을 구하고, 모두가 살아남기 위해서였다.
츠츠츠!
금방이라도 꺼질 것 같던 검기(劍氣)가 힘을 되찾는다. 푸른 기운에 뒤덮인 검신을 곧추세운 왕호가 달려 나갔다.
그리고 이제는 채 절반도 남지 않은 수하들을 향해 외쳤다.
“저 악귀를 죽여라!”
그것은 아주 작지만 큰, 마음가짐의 차이였다.
막아서느냐. 혹은 죽이느냐.
지금까지의 남천마후는 그들의 전력으로는 죽일 수 없는 존재였다. 아니, 모두가 그렇게 착각하며 죽음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지금부터는 남천마후를 죽이기 위한 싸움. 자신들이 살기 위한 싸움이다.
그 중심에, 그 모든 것을 깨닫게 해준 한 청년이 있었다.
“남천마후!”
분노로 가득 찬 포효와 함께, 진태경의 발끝에서 미약한 불꽃이 솟구쳤다.
쾅!
작은 폭발음과 함께 움푹 꺼진 지면이 거미줄처럼 갈라진다.
그 반동으로 더욱 빠르게 쏘아지는 신형의 끝에는, 피와 어둠으로 점철된 악귀가 있었다.
서걱! 촤아아악!
혼탁한 어둠이 깃든 수도(手刀)에 누군가의 몸뚱어리가 반으로 갈라진다.
사방으로 흩뿌려지는 핏물 너머, 공간을 가르며 자신을 향해 쇄도하는 진태경의 모습을 확인한 남천마후는 기쁘게 웃었다.
‘우둔한 아이야. 너의 그 무모함이, 내게는 마지막 기회가 되었구나.’
조금 전까지의 그녀는 격분하고 있었다.
목숨을 담보로 한 선천지기(先天之氣)는 시시각각 소모되고 있었고, 죽음을 불사한 채 앞길을 막아선 일백의 백천대는 끊임없이 죽어 가면서도 남은 힘을 갉아먹었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웃을 수 있었다. 가장 중요한 사냥감이, 참으로 멍청하게도 제 발로 죽을 자리를 찾아왔으니.
“이제 잔챙이들은…… 모조리 꺼져라.”
콰아아아!
혼탁한 장력(掌力)이 앞길을 막아선 전사들을 휩쓸었다. 핏물을 뿜어내며 사방으로 튕겨 나가는 신형들.
그렇게 순간 텅 비어 버린 공간 너머에서 파공성이 일었다.
쐐애애액! 쾅!
섬광처럼 짓쳐 든 한 자루의 철창을 맨손으로 튕겨 낸 남천마후가 수도를 내리그었다.
슈화아악!
공간이 갈라지고 칼날 같은 바람이 휘몰아친다. 그러나 진태경의 신형은 어디에도 없었다.
‘위!’
깨달음과 함께 남천마후의 신형이 흐릿해졌다. 뒤늦게 허공으로부터 내리그어진 투명한 창날이 그녀의 잔상을 갈랐다.
서걱!
아니, 창날이 갈라 낸 것은 잔상뿐만이 아니었다.
이마를 타고 또르르 굴러떨어지는 핏방울을 느낀 남천마후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빠르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초절정에 오른 무인이라면 이미 초인(超人)이라 불러도 부족함이 없으니까.
그러나 그들이 초인이라 불릴 수 있는 이유는, 무공에 대한 깨달음 외에도 막강한 공력이 있기 때문이다.
오랜 수련으로 단련된 신체 능력을 더욱 극대화시킬 수 있는 공력이.
‘그런데 어떻게…….’
분명 대부분의 공력을 소모한 진태경이, 이토록 빠르고 강한 힘을 낼 수 있단 말인가.
쉬쉬쉬쉭!
창끝이 흔들린다. 수십여 개로 불어난 창영(槍影)이 남천마후의 전신을 향해 쏟아졌다.
예상했던 범위를 아득하게 뛰어넘는 속도와 힘. 하지만 남천마후는 물러서지 않았다.
“네놈 따위가 감히……!”
끓어오르는 듯한 음성과 함께 하나뿐인 손이 공간을 격하고 쏘아진다.
수많은 전사의 핏물을 머금은 일장이 코앞까지 들이닥친 창영을 뒤덮었다.
콰아아아!
거짓이 아무리 많더라도, 결국 드러날 진실은 하나뿐.
수십여 개에 달하던 창영이 장력에 휩쓸려 사라진다. 혼탁한 어둠에 휩싸인 남천마후의 손이 투명한 창날을 붙잡았다.
서걱!
만년한철(萬年寒鐵). 천하의 그 어떤 것보다 단단하며 예리하다는 금속이 강기를 찢고 살갗을 가른다. 그와 동시에 엄습해 오는 통증.
그러나 남천마후는 도리어 웃어 보였다.
‘잡았다.’
그 순간.
쏴아아아악!
창날을 타고 흘러 들어간 남천마후의 기운이, 진태경의 내부를 휩쓸었다.
퍼엉!
“……!”
들썩이는 신형. 야수묘왕의 도움으로 잠시 가라앉혔던 내부가 다시 한번 진탕된다.
그러나 진태경은 울컥, 솟구치는 핏물을 삼키며 창대를 쥔 손에 힘을 더했다.
콰드득!
남천마후의 손에 붙잡힌 백염의 창날이 회전과 동시에 더욱 앞으로 나아간다.
순식간에 너덜너덜해진 손아귀, 그리고 엄습하는 고통에 남천마후가 눈을 부릅떴다.
“너…….”
하지만 그녀의 말이 끝까지 이어지기도 전에, 날카로운 파공성이 울려 퍼졌다.
쉬이이익!
바람을 가르며 날아드는 한 자루의 검. 푸른 검기에 휩싸인 검의 주인은, 다름 아닌 백천대주 왕호였다.
서걱!
황급히 몸을 비틀었지만, 이미 늦었다.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약해진 호신강기는 검기를 막아 낼 수 없었고, 남천마후는 베어 나간 옆구리로부터 전해지는 고통을 느끼며 다리를 차올렸다.
쐐애애액, 콰직!
채찍처럼 휘둘려진 발끝이 왕호의 복부를 파고들었다. 포탄처럼 쏘아진 그의 신형이 십여 장 밖으로 튕겨 나갔다.
콰앙!
충돌의 여파와 함께 솟구치는 먼지구름. 그러나 남천마후를 향해 달려든 것은, 왕호 한 사람뿐만이 아니었다.
파파팟!
전후좌우. 남천마후를 둘러싼 모든 방향을 점하며 쇄도하는 신형들.
이제 스무 명도 채 남지 않은 백천대의 전사들은 마지막 힘을 쥐어 짜내어 쇄도했다.
이 싸움을 끝내기 위해. 하나뿐인 목숨을 바쳐서라도 저 악귀의 몸에 창칼을 박아넣기 위해.
쉬쉬쉬쉭!
강맹한 파공성이 바람에 뒤섞이던 그 순간.
콰아아앙!
마치 폭풍과도 같은 기운이 터져 나와, 사방에서 날아들던 모든 것을 휩쓸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우뚝 선 누군가의 입술 사이로, 끝끝내 참지 못한 핏물이 흘러나왔다.
쿨럭.
아득해진 시야 속, 남천마후는 파르르 떨리는 눈으로 자신의 앞에 무릎을 꿇은 한 청년을 바라보았다.
금방이라도 꺼질 듯이 흐릿한 눈동자.
그러나 창대를 굳게 말아쥔 채 앞으로 내민 두 손은 흔들림이 없었고, 그 끝에는 남천마후의 가슴 어림을 파고든 투명한 창날이 있었다.
“커……헉!”
남천마후는 검붉은 핏물을 게워 내며 숨을 헐떡였다.
막아야 했다. 막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막지 못했다.
‘도대체. 도대체 어떻게 움직일 수 있었지?’
전사들을 향해 장력을 쏟아내기 직전, 남천마후는 분명 진태경을 향해 다시 한번 공력을 흘려보냈다.
두 번 다시 일어나지 못하도록, 이번에는 확실히 숨이 끊어지도록.
하지만 진태경은 쓰러지지 않았고, 죽지도 않았다.
이미 심맥이 갈기갈기 찢어졌음이 분명한데도. 마지막까지 놓지 않은 창을 남천마후의 가슴에 박아넣었다.
“진태……경.”
끊어질 듯한 목소리가 남천마후의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온 그 순간.
스르륵. 툭.
피에 젖은 진태경의 양손이 창대에서 미끄러졌다. 힘없이 뒤로 젖혀진 고개와 흐릿해진 눈동자.
그와 동시에 남천마후는 느꼈고, 들을 수 있었다.
느리지만 분명하게 진태경에게 다가오는 죽음을.
그리고 죽음을 앞둔 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환한 그의 목소리를.
“드디어 잡았다. 이…… 개 같은 년.”
“……!”
그 순간, 남천마후는 전신의 털이 곤두서는 듯한 감각에 사로잡혔다.
그것은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을 일념(一念)을 지닌 한 인간에 대한 두려움이었고, 공포였다.
‘……두려워? 두려워한다고? 내가? 저놈을?’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천주가 아닌 누군가를 두려워한다는 것도. 그 대상이 죽음을 앞둔 핏덩이라는 것도.
‘죽여야 해. 이 손으로 직접, 놈의 숨통을 끊어야 해.’
넋 나간 듯이 마음속으로 뇌까린 남천마후는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아마 그녀 역시 죽음을 피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놈을, 진태경의 숨통을 끊어놓지 않는다면 죽어서도 편안히 눈을 감지 못할 것만 같았다.
‘죽어라.’
이 괴물아.
미처 토해 내지 못한 그 한 마디와 함께, 남천마후는 마지막 힘을 실은 수도(手刀)를 내리그었다.
쉬익!
그리고 혼탁한 어둠의 기운이 진태경의 정수리를 파고들려던 그 순간.
쐐애애애액! 퍼걱!
어디선가 날아온 한 줄기의 섬광이, 남천마후의 하나뿐인 팔을 집어삼켰다.
동시에 누군가의 서늘한 목소리가 얼어붙은 그녀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감히 누구의 몸에 손을 대려는 것이냐, 이 호로 잡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