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717
#716화
누가 그랬다. 원래 조용하던 사람이 화를 내면 더 무서운 법이라고.
지금 주화란의 모습이 딱 그랬다.
투두둑.
용봉표국의 금지옥엽이자, 쉰내를 풍기다 못해 맵기까지 한 이 할라피뇨 고추 파티를 환기시켜 주던 인간 공기 청정기의 손에서 목재 파편이 우수수 쏟아진다.
항상 부드럽던 눈매와 목소리는 어느새 가시처럼 뾰족해져 있었다.
“태산 소협.”
첫 타깃이 된 태산이 몸을 움찔 떨었다.
“각주님께서, 진 공자가 우리를 위해서 얼마나 고생하셨는지 몰라요? 그런데 어떻게 그런 소릴 할 수 있어요?”
“태, 태산이 잘못했다.”
“아무리 식탐이 강해도 그렇지, 한 번만 더 불길한 소리 하면 그땐 진짜 남 노야 말대로 재갈을 물릴 거예요.”
주화란의 엄중한 경고에 사마표가 미간을 좁히며 입을 열었다.
“주 소저, 태산이는 짐승이 아니오.”
“그럼 태산 소협 대신 그쪽한테 재갈을 물리면 되나요?”
“…….”
“대답은요.”
잠시 생각하던 사마표가 진중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 생각해 보니 식단 관리 차원에서 가끔 재갈을 물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소.”
“앞으로 조심하세요. 악의가 없다는 건 알지만 너무하잖아요.”
“……알겠소. 내 잘 타이르지.”
자신이 발의한 입마개 법안이 아슬아슬하게 무효로 돌아가자, 남호가 안타까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내가 죽기 전에 저놈한테 재갈 물리는 건 봐야 하는데…….”
하지만 그런 남호 역시, 주화란의 타깃이 되는 건 피하지 못했다.
“남 노야.”
“어, 엉?”
“어르신이면 어른답게 행동하셔야죠. 아직 회복되지도 않은 환자 앞에서 험한 욕 하시는 것도 보기 안 좋아요.”
“뭐? 환자?”
빵빵한 레벨 업과 그간의 휴식으로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내 얼굴을 바라본 남호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그건 둘째 치고 진태경 저놈보다 더한 욕쟁이가 어디 있다고 갑자기 나를…….”
툭.
그 순간, 나는 똑똑히 봤다.
억울한 목소리가 이어지려던 그때, 옆에 있던 혁무진이 슬쩍 팔꿈치로 남호의 옆구리를 찌르는 모습을.
그리고 그 작은 몸짓에 담긴 뜻을 현대식으로 재해석하자면 이랬다.
‘분위기 망치지 말고 ㄹㅇㅋㅋ만 치십쇼.’
첩보원 짬밥만 수십 년인 남호다.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던 그는 체념한 듯 고개를 떨구었다.
“알았다. 내 조심하마.”
“좋아요. 그럼 다음으로 혁 소…… 지금 뭐 하세요?”
“조장님의 노고를 풀어 드리기 위해 어깨를 주물러 드리고 있습니다.”
그래. 괜히 혁퀴벌레가 아니지.
눈치 빠르게 내 몸을 안마하는 혁무진의 모습을 보며 흐뭇하게 웃은 주화란이 남아 있는 한 사람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송 호위.”
처음부터 지금까지, 시종일관 침묵을 지키던 송일섬의 동공에서 지진이 일어났다.
“난 아무 말도 안 했소만.”
“저도 알아요. 계속 그 자세 유지하세요.”
“……알겠소.”
마지막 타깃까지 처리한 주화란의 시선이 나를 향해 옮겨진다.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반사적으로 입술이 열렸다.
“죄송합니다. 미안합니다. 잘못했습니다.”
“네?”
“예?”
“뭐가요?”
“아, 아니. 그냥…….”
뭔가 그렇게 해야 할 것만 같은 느낌이다. 생존 본능이라고나 할까.
나는 열심히 다리를 주무르고 있는 혁무진에게 눈빛을 보냈다.
‘무슨 일 있었냐? 주 소저 왜 이래.’
혁무진 역시 눈빛으로 대답했다.
‘주 소저께서 조장님 때문에 워낙 노심초사하셔서 저런 거니까, 그냥 그러려니 하십쇼.’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공기가 달라, 공기가.’
‘눈치가 없으면 그냥 입이라도 다물고 계세…….’
그때, 주화란이 불쑥 입을 열었다.
“두 분. 지금 뭐 하세요?”
“……!”
“……!”
화들짝 놀란 혁무진의 안마 속도가 두 배는 빨라졌다.
“뭐 하긴요. 저야 계속 조장님 다리 주물러 드리고 있죠. 어이구, 여기 근육이 아주 단단하게 뭉치셨네. 좀 더 세게 할까요?”
문득 이상한 기분을 느낀 나는 조심스럽게 녀석의 팔을 가로막았다.
“됐다. 그만해라.”
“예? 왜요?”
“그, 아니다. 이제 괜찮아.”
“우리 조장님 또 이러신다. 시원하고 좋으시면서.”
“아니. 괜찮다니까. 너도 피곤할 텐데 그만해.”
“어허. 사양하지 마십쇼. 저 혁무진, 조장님의 오른팔로서 뭐든 할 수 있습니다. 주 소저도 보셨죠? 우리 조장님께서 자기 사람을 이렇게 챙기신다니까요.”
그리고 주화란을 보며 껄껄 웃는 혁무진을 향해, 나는 비통한 심정으로 전음(傳音)을 흘려 보냈다.
– 방금 그거 다리 아니다…….
“……!”
– 그러니까 당장 치워, 이 새끼야. 손모가지 분질러 버리기 전에.
잠시 침묵하던 혁무진이 슬그머니 손을 뺐다.
경이로움과 두려움이 뒤섞인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녀석의 뒤통수를 갈겨 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다른 사람들 앞이라 간신히 참았다.
아니, 어쩌면…….
‘음. 아니다. 그건 너무 나갔지.’
내심 작게 중얼거린 나는 모두의 얼굴을 차례대로 눈에 담았다.
불과 며칠 전만 하더라도 두 번 다시 못 만날 수도 있을 거라 생각했던 사람들이다.
그만큼 우리에게 주어진 상황은 최악이었고, 모든 것이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안개 속과 같았다.
하지만 살아서 이렇게 함께 모여 있으니 감회가 새롭다.
그들 중 누구도 죽지 않았다는 사실이 나를 기쁘게 만들었다.
“다행이야, 정말로.”
짧은 침묵을 깨트리는 내 한마디에, 모두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이내 희미하게 웃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어느덧 조금씩 가까워진 우리는 서로의 마음을 알고 있었다.
* * *
모든 이야기를 듣기까지는 제법 오랜 시간이 걸렸다.
같은 시간을 보냈지만 나와 그들은 각자 다른 장소에서 다른 상황을 겪었고, 그 이야기 속에는 내가 의식을 잃은 채 흘려보냈던 지난 칠 주야의 시간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그땐 진짜 죽는 줄만 알았습니다. 조장님도 안 계시고, 저희는 포박되어 있는 상태에서 말로만 듣던 그 혈승이 난데없이 쾌조선에서 딱 내리는데, 와…….”
“적 대협을 알아보지 못했다면 한바탕 전투가 일어났을 거예요. 함께 있던 남만 전사들이 워낙 호전적이어서.”
“그때는 정말 모든 게 끝났다고 생각했다. 네 녀석을 구할 지원군을 데려와도 모자랄 판에, 혈승이라는 대마두가 나타났으니까.”
적천강에게 들었던 것보다는 좀 더 자세한 이야기였다.
혈승의 진짜 정체가 밝혀지자 남만인들은 처음에는 반신반의했으나, 하나도 빠짐없이 눈에 멍이 든 수룡채의 수적들까지 나서서 그가 화왕임을 인증해 주자 전투는 시작되기도 전에 끝났다.
그 후 적천강은 전력을 다해 남만야수궁으로 향했고, 한 걸음 늦게 화룡각 대원들과 척후대의 남만인들이 도착했을 때는 모든 것이 끝나 있었다.
“조장님께서 쓰러지시는 걸 보고 처음에는 정말 돌아가신 줄 알았습니다. 몸은 온통 피투성이에, 주위에는 죄다 핏물과 시체뿐이고…….”
이쯤에서 혁무진의 말을 끊으려고 했다.
내 멀쩡한 몸 상태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면, 누구든 의심을 품지 않을 수 없을 테니까.
하지만 다음 순간, 내가 입을 열기도 전에 주화란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런데 적천강 대협께서 나서서 모두를 안심시켜 주셨어요. 단지 피로 때문에 쓰러지신 거라고.”
나는 설마 하는 마음으로 물었다.
“……혹시 노야, 아니 스승님께서 정확히 뭐라고 하셨나요?”
“음. 글쎄요. 그때 당시에는 다들 워낙 경황이 없어서. 하지만 적 대협께서 때맞춰 도착하신 덕분에 진 공자님께서는 그리 큰 부상을 입지 않았다고 하신 것으로 기억해요. 야율 궁주님도 맞다고 하셨고요.”
남호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받았다.
“천운이지, 천운. 저놈이 아무리 뛰어난 고수라고 해도, 어찌 그 지옥도에서 살아남을 수 있겠느냐. 십왕(十王) 중 둘이 나섰으니 남천마후라 해도 어쩔 수 없었겠지.”
사실과는 조금 다른 이야기.
그러나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여 수긍하는 뜻을 내비쳤다.
이건 명백한 보호다. 내가 가진 비밀을 숨기고, 사람들의 의심을 피할 수 있도록 적천강과 야수묘왕이 손을 쓴 것이다.
‘백천대의 생존자들 역시 입을 다물겠지. 그들은 야수묘왕에게 충성을 바치니까.’
죽음은 곧 침묵이다.
그날의 전투는 주로 내궁에서 이루어졌고, 그 자리에 있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었다.
살아남은 이들이 입을 열지 않는다면 비밀은 지켜진다.
‘아무리 이들과 가까워졌다고 해도, 그 사실을 말할 수는 없어.’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을 현대에서는 마법, 혹은 기적이라 부르고는 한다.
그러나 이곳, 무림에서는 다르게 불릴 것이다.
‘마(魔).’
이해할 수 없는 괴력난신(怪力亂神)의 힘은, 언제나 사람들의 두려움을 불러일으키기 마련이다.
나는 가급적 시스템이라는 이 능력을 다른 이들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긴 하지만.’
모르겠다. 나로서는 피할 수 없었던 그 날의 선택이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
하지만 가장 가까이에서 그 모습을 목격한 사람이 적천강이라서 다행이었고, 야수묘왕 역시 어떤 사람인지 알기에 안심할 수 있었다.
“조장님?”
“어?”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상념이 길었던 모양이다.
나는 수상쩍다는 눈빛으로 쳐다보는 혁무진을 향해 손을 내저었다.
“별거 아냐. 잠시 다른 생각이 나서. 계속해.”
“아, 예. 그런데 제가 어디까지 얘기했죠?”
“……너 머리 다쳤냐?”
“아뇨. 누구한테 하도 뒤통수를 얻어맞아서 그런가.”
슬쩍 나를 쳐다봄으로써 ‘누구’의 정체를 명확하게 전한 혁무진이 말을 이었다.
“죽은 이들을 한데 모아 화장(火葬)했다는 말은 이미 한 것 같고. 그 와중에 백상 쪽에 붙어먹었다가 도망친 족장들이 모두 뇌옥에 갇혔다는 건 아시죠?”
“어느 정도는.”
“아, 맞다. 그러고 보니 요희 대족장도 스스로 죄를 청했다 하더라고요.”
“요희도?”
“네. 야율 대협께서는 용서할 뜻을 내비치셨는데, 자진해서 뇌옥에 갇혔다고 하던데요.”
요희가 그렇게까지 행동했다는 건 의외였지만, 한편으로는 당연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비록 뒤늦게 뉘우쳤다고는 하나, 요희 역시 부와 권세를 누리기 위해 백상과 결탁했다. 그녀 역시 죽을 고비를 넘기며 깨달은 바가 많았을 것이다.
‘스스로 선택한 거지. 그게 옳다고 생각했을 테고.’
내심 중얼거린 나는 이어지는 이야기들을 들었다.
폐허가 되어 버린 내궁과 상당한 피해를 입은 외궁을 수복하기 위해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숫자의 남만인들이 남만야수궁에 머무르고 있다는 사실.
그로 인해 소궁주인 야율목 역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는 것 역시도.
“우선 소식은 전했는데, 바로 올지는 모르겠네요. 요새 그림자도 보기 힘들어서.”
“아마 그렇겠지. 아마 야수묘왕도 마찬가지일 거고.”
“야율 대협은…… 저희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 눈에도 안 보일걸요?”
“뭐?”
“이틀 전부터 자취를 감추셨어요. 이미 수뇌부는 난리라던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