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725
#724화
누군가는 떠나고, 누군가는 남았다.
하지만 먼 길을 떠나는 이들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야수묘왕은 알고 있었다. 이 이별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그들은 다시 재회하리라는 것을.
그리고 그 만남의 장소가, 함께 등을 맞대고 싸울 전장(戰場)이 되리라는 것 역시도.
“결국, 다시 한번 중원으로 향하게 되었군요.”
귓가를 파고드는 누군가의 목소리에, 야수묘왕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끝끝내 이리되었다.”
“많은 피가 흐를 것입니다.”
“이 아비의 결정이 잘못되었다 생각하느냐?”
“아닙니다.”
야율목이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아버님께서. 아니, 궁주께서 중원행을 원치 않으셨다면 저 혼자서라도 저들과 함께 떠났을 테니까요.”
“……!”
야율목의 시선이 저 멀리 멀어져 가는 이들의 뒷모습을 향한다.
낯선 땅에서 온 이방인들. 그러나 저 이방인들이 있었기에, 자신들의 고향을 지켜 낼 수 있었다.
“이제는 우리가 저들을 도울 차례입니다.”
분명 그 역시 중원을 적대시하고, 한족을 배척하던 때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아직 여물지 않은 남만야수궁의 소궁주는 한 이방인으로부터 인의(人義)을 배웠고, 언젠가 그와 나누었던 대화를 평생토록 잊지 못할 것이다.
‘만약 목초지에 불이 나면 어쩔래?’
‘당장 꺼야지.’
‘왜?’
‘꺼트리지 않으면 불길이 사방으로 번질 테니까.’
‘좋아. 답 나왔네.’
‘……!’
‘우리가 온 이유에 대해 복잡하게 생각하지 마. 불이 났으니까 끄려고 하는 것뿐이야. 수십 년 전 고향을 떠나 중원으로 향한 이 땅의 남만인들처럼.’
처음에는 믿지 않았다. 믿을 수 없었다.
야율목이 알고 있는 한족은, 신뢰를 저버리고 숱한 남만인을 죽음으로 내몰았던 비열하기 짝이 없는 족속이었으니까.
아무 대가 없는 도움을 주기 위해 만 리가 넘는 거리를 넘어 찾아왔을 리 없었다.
분명…… 그리 생각하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안다. 네가 했던 그 말의 의미를.’
이미 천하(天下)라는 목초지에 불이 붙었고, 암천이라는 거대한 화마(火魔)는 모든 것을 집어삼킬 것이다.
어디에서 태어나고 자랐는지, 어떤 복색과 생김새를 지녔는지는 이제 중요하지 않다.
비로소 하나로 통합된 남만처럼, 저 불을 끄기 위해서는 모두가 합심해야 한다.
“목숨을 걸고 싸울 것입니다. 이 땅에 살아가는 모두를 위해서. 그리고 저들을 위해서.”
그리고 이처럼 굳은 의지를 보이는 야율목의 모습에, 야수묘왕은 희미한 웃음을 머금었다.
‘언제 이리 컸는지.’
마침내 하나가 된 남만처럼, 그의 하나뿐인 아들도 한 단계 성장했다.
그러나 어째서일까. 지금 이 순간 야수묘왕의 마음은 텅 빈 항아리처럼 허전했다.
‘못난 녀석.’
씁쓸한 뇌까림을 삼킨 야수묘왕은 품에서 꺼낸 호리병을 기울였다.
향긋한 주향(酒香)을 풍기는 과실주가 서서히 잦아드는 빗줄기와 함께 땅으로, 어느 의형제가 함께 나고 자란 고향의 흙 속으로 스며들었다.
“술맛 한번 좋군. 그렇지 않으냐?”
술 한 방울 입에 대지 않은 야수묘왕의 중얼거림에 주위의 사람들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그는 후련하게 웃어 보였다.
이것으로 되었다.
먼 훗날, 그들은 다시 만나 술잔을 기울이게 될 테니까.
‘그래, 언젠가 반드시.’
야수묘왕은 문득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서서히 그쳐 가는 빗줄기 사이, 무수히 많은 남만인들의 머리 위로 푸르른 창천(蒼天)이 펼쳐져 있었다.
아니, 그것은 어쩌면 보이지 않는 절대자의 시선일지도 몰랐다.
“전고(戰鼓)를 울려라.”
숨 막히는 적막을 깨트리는 나직한 목소리. 크게 심호흡한 야수묘왕은 공력을 끌어올려 외쳤다.
“신께서 원하신다!”
사방을 떨어 울리는 창룡후(蒼龍吼)와 함께, 높은 언덕 어딘가에서 그들을 굽어보고 있던 새하얀 백호가 포효를 내질렀다.
– 크아아아앙!
차차창!
와아아아아!
수천, 수만에 달하는 짐승과 인간이 힘껏 발을 구르고 함성을 내질렀다. 무수히 많은 날붙이에 반사된 햇빛이 사방으로 퍼져 나간다.
바야흐로, 대전쟁의 서막이었다.
* * *
우수에 찬 눈빛과 진중한 분위기. 혁무진이 모두의 시선 속에서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그저 사람이, 사람을 살리고자 한 것뿐입니다.”
“그만해라.”
“대가를 얻기 위해 한 일이 아니라서. 다시 한번 누군가의 희생을 요구할 수가 없어서. 그래서 떠나려고 했습니다.”
“그만하라고.”
“에이, 왜 그러십니까. 이런 건 몇 번을 다시 해도 안 질립니다. 솔직히 다들 인정하시죠?”
쉼 없이 달려가는 곰 위에서 멧돼지 뒷다리를 뜯고 있던 태산이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태산이! 인정한다!”
“보세요. 쟤도 인정하잖아요. 그저 사람이, 사람을 살리고자…….”
나는 조용히 혁무진의 말을 끊었다.
“무진아.”
“예.”
“고자 되고 싶니?”
혁무진의 얼굴에 만연해 있던 미소가 사그라졌다.
“아뇨.”
“아니면 인생이 무료해?”
“그럴 리가요. 이미 지금도 제 인생이 너무 격렬한 것 같아서 걱정입니다.”
“그럼 평안하게 해 줘?”
“혹시 죽이시겠다는 뜻은 아니죠?”
“맞다면?”
“우와, 저기 좀 보세요. 경치가 참 좋네요.”
“그래. 조용히 가자.”
“……넵.”
하지만 조용히 입을 다문 혁무진과는 달리, 태산은 아쉬운 표정으로 앵콜을 요청했다.
“각주! 태산이는 더 듣고 싶다!”
그리고 나는 담당 일진을 불렀다.
“남 노인, 저 새끼 주둥이를 틀어막을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오오, 드디어!”
광복을 맞이한 독립투사처럼 환호한 남호가 기다렸다는 듯이 품속에서 입마개를 꺼냈다.
검고 단단한 철과 가죽끈으로 이어진, 해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익숙한 형태의 입마개를.
“잠깐. 그거 어디서 났어요?”
“남만인 조련사에게 얻었다. 주로 야생 곰을 길들일 때 쓴다더군.”
“…….”
“왜 그런 눈빛으로 보는 거지? 무슨 문제라도 있느냐?”
“그, 문제가 될 것까진 없는데.”
왠지 모르게 약간 마음에 걸린다고나 할까. 앞으로는 태산이라는 이름 대신 TAESAN-317이라는 품번으로 불러야 할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이랄까…….
잠시 망설이던 나는 이내 찝찝함을 이겨 내지 못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거 채우지 마세요. 아니다. 그냥 버리세요.”
“안 돼! 어째서!”
어째서긴. 내 눈만 더러워질 것 같아서 그렇지.
나는 거의 통곡하다시피 하는 남호로부터 입마개를 뺏어 저 멀리 던져 버렸고, 그 광경을 모두 지켜보던 적천강은 떨떠름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도대체 남만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게냐?”
순간 말을 이해하지 못한 내가 되물었다.
“예?”
“무슨 일이 있었기에 다들 제정신이 아니냐고 묻는 게다.”
“남만에서 많은 일이 있던 건 사실이지만, 다들 처음 상태 그대로인데요.”
“뭣이!”
“놀랍게도 사실입니다.”
“이노옴! 헛소리하지 말거라. 돌아가는 꼴이 이토록 개판인데 한 사람도 죽지 않았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
그러게요. 시바 거.
남만에서의 일을 돌이켜보니 정말 대지모신의 가호가 있던 건 아닌가, 하는 합리적 의심이 들 정도다.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기긴 했지만, 멀쩡히 돌아가는 것만으로도 기적이지.’
물론 그 고비를 여러 번 넘긴 것은 내가 유일하고, 각각 크고 작은 부상을 입었던 일행들도 전부 성우(聖雨)의 효력을 톡톡히 본 덕분에 지금은 씻은 듯이 나을 수 있었다.
‘게다가 암천의 흉계도 어찌어찌 막았고.’
비록 그 과정에서 적지 않은 희생자가 나왔지만, 애당초 나와 화룡각의 최우선 목표나 다름없던 남천마후를 저지할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절반 이상의 성공이다.
‘거기에 더해 남만야수궁의 정식 입맹(入盟)까지.’
사실 남만야수궁의 합류는 남천마후를 저지함과 동시에 예견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설령 대지모신이라는 브랜드 효과가 없었어도 결과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어중간하게 짓밟은 불씨는 더욱 크게 타오르고, 분노라는 감정은 흩어졌던 이들을 하나로 뭉치게 하니까.
나는 단지 그들에게 또 다른 구심점을 만들어 주었을 뿐이다.
수백 년간 내려온 부족 간의 경계마저 지울 수 있는 유일신의 존재. 그들이 보다 더 단결되고 강력한 세력으로 거듭날 수 있는 구심점을.
‘그리고 그 덕분에 무림맹의 전력 역시 강해졌고.’
이번만큼은 단언할 수 있다. 이 사건으로 인해 남만야수궁은 확실한 아군이 되었다.
떠나기 전 야수묘왕이 약속한 바에 따르면 그들은 과거 정마대전 때보다도 많은 병력을 파견할 것이고, 사력을 다해 암천을 막아설 것이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왜 이렇게 불안하지?’
분명 큰 성과를 거두었음에도, 내 마음 한구석은 여전히 석연치 않은 찝찝함으로 가득했다.
그리고 어쩌면 그 이유는, 아직 해결되지 못한 의문 때문일지도 몰랐다.
‘신(新) 무림맹이 탄생하고,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를 중심으로 중원의 모든 힘이 모이고 있다. 그런데도 암천의 완전한 전력이 드러나지 않았어.’
산서성에서의 첫 개입. 이후 벌어진 소림혈사부터 지금까지 이어진 일련의 사건들을 절대 소소하다 할 수는 없지만, 그건 암천이라는 집단 전체가 아닌 파편의 일부분에 불과하다.
‘간을 볼 시기는 이미 지났을 텐데.’
도대체 놈들의, 아니 천주의 의도는 무엇일까.
그리고 천주는 어째서…….
“왜 굳이 나한테 이렇게까지 관심을 가지는 거지?”
무심코 흘러나온 내 중얼거림에, 모두의 시선이 확 쏠렸다. 뭐라 수습하기도 전에 혁무진이 미어캣처럼 바짝 고개를 쳐들었다.
“헉, 조장님. 혹시 누구한테 고백받으셨어요? 세상에. 남만인?”
“…….”
저 샛별처럼 반짝이는 혁무진의 눈깔을 후벼 파고 싶다.
나는 애써 충동을 억누르며 대답했다.
“그런 거 아냐. 미친놈아.”
“미쳤다. 그럼 한족?”
“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야…… 아, 생각해 보니까 한족은 맞겠네.”
“와. 도대체 언젭니까? 고백한 상대는 누구예요?”
“천주(天主).”
“이야. 이름부터가 범상치 않은 처자일세. 딱 봐도 양갓집 규수 같은…….”
호들갑을 떨던 혁무진이 문득 입을 다물었다. 눈을 깜빡이며 잠시 생각하던 녀석이 말을 이었다.
“누구요?”
“천주.”
“제가 아는, 그러니까 모두가 아는 그 천주요?”
“그럼 걔 빼고 누가 있냐.”
침묵하던 혁무진이 작게 중얼거렸다.
“씨바, 그 양갓집이 신강(新疆)에 있었네…….”
곤륜파가 위치한 청해(靑海)를 넘으면 신강이고, 신강은 이미 천 년 전부터 마도(魔道)의 영역.
내게 관심을 보인다는 처자가 암천댁 규수라는 걸 알게 된 사람들은 잠시 할 말을 잃은 채 서로를 바라보았고, 동시다발적으로 의문을 쏟아냈다.
“아니, 천주가 왜요?”
혁무진의 물음에 남호가 끼어들었다.
“뻔하지. 번번이 훼방을 놓으니 그런 것 아니겠느냐?”
“그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조장님이 삼성(三星)도, 십왕(十王)은 아니잖습니까. 꼴랑 이제 막 명성을 얻은 찌꺼기인데.”
“생각해 보니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군.”
“태산이는 찌꺼기도 먹을 수 있다.”
“저 썅노무 새끼. 내 이럴 줄 알고 입마개를 하나 더 챙겨 왔지. 이리 와. 주둥이 벌려.”
“아니, 다들 말씀을 왜 그리하세요? 우리 각주님이 찌꺼기라니! 송 호위, 사마 소협! 무슨 말이라도 해봐요!”
“주 소저, 미안하지만 난 이쯤에서 떠나야 할 것 같소. 남만까지는 어찌어찌 왔다 해도 저자에게 천주가 관심을 보인다는 건 좀.”
“태산아! 그거 고기 아니니까 물지 마라! 남 노인! 그 입마개 당장 내려놓지 못하겠소!”
“…….”
씨바. 개판도 이런 개판이 없다.
그리고 눈 앞에 펼쳐진 총체적 난국을 멍하니 바라보던 그때. 나직한 전음(傳音)이 귓가를 파고들었다.
– 이야기 좀 하자.
적천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