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732
#731화
저벅.
윤기가 흐르는 구둣발이 바닥에 깔린 카펫을 밟았다.
다음 순간, 마침내 돌아선 상대를 마주한 나는 문득 생각했다.
‘까마귀 같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새카만 그는 마치 19세기 어디쯤에서 건너온 유럽 신사 같았다.
주름 하나 잡히지 않은 정장과 깃 세운 코트. 거기에 더해 이미 유행이 백 년쯤 지난 실크 햇(Silk hat)까지.
흑인임이 분명했지만, 투명한 외알 안경 너머로 보이는 눈동자는 신비로운 황금빛이었다.
우리를 응시하던 그는 이내 모자 끝을 슬쩍 어루만지며 인사를 건넸다.
“처음 뵙겠습니다, 두 분.”
통역 마법을 통해 매끄럽게 흘러나오는 한국어.
선약도 없이 불쑥 찾아온 불청객이지만, 오딘 길드가 보낸 전령이라면 대놓고 냉대할 수는 없다.
게다가 이 정도 마나를 품은 자라면…….
‘단순한 전령도 아니지.’
나는 낯선 손님을 향해 작게 고개를 끄덕였고, 최 팀장은 자리를 권했다.
“우선 앉으시죠.”
나를 포함한 세 사람은 원목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잠깐 묘한 분위기가 흐르는 가운데, 상대가 먼저 침묵을 깨트렸다.
“소개가 늦었군요. 오딘 길드의 후긴(Huginn)이라고 합니다.”
“그 까마귀?”
무심코 흘러나온 내 중얼거림에 상대가 희미하게 웃었다.
“아. 물론 본명은 따로 있습니다만, 길드장님을 모시게 된 후부터는 후긴이라 불리고 있으니 두 분께서도 그렇게 알아주시면 될 듯합니다.”
어느 정도 이름이 알려진 헌터라면 이름보다는 능력에 따라 붙여진 이명(異名)으로 더 자주 불리기 마련이다.
하지만 눈앞의 상대, 후긴은 아무리 기억을 떠올려 봐도 낯선 존재였다.
‘오딘 길드장의 숨겨진 최측근, 뭐 그런 건가?’
당장 국내의 거대 길드도 여러 비밀을 숨기고 있는 판국에, 최전선을 담당하는 현장 요원인 내가 외국 쪽 사정까지 자세히 알기는 어렵다.
‘더군다나 오딘 길드 쪽 사람이니까.’
분명 아레스 길드가 세계 최고로 불렸던 시절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으로부터 20여 년 전, 천태민이 모두의 앞에서 종적을 감추고 사라졌다.
사람들은 의문을 품었고 아레스 길드의 새로운 선장이 된 이정룡으로서는 어떤 수완을 발휘해도 천태민의 빈자리를 채울 수 없었다.
1년, 5년. 그리고 10년.
아직도 천태민을 열렬히 추종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아레스 길드를 최고라 부른다.
하지만 현실을 아는 이들, 특히 헌터들의 생각은 달랐다.
‘아레스 길드는, 냉정하게 말해서 지는 해였지. 이미 10년 전부터.’
반면 오딘 길드는 새롭게 떠오르는 해였다.
유럽에 기반을 둔 그들은 아레스 길드가 주춤하는 틈을 타 빠르게 세력을 확장했고, 그 과정에서 여러 거대 길드를 인수 합병하며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만한 거인으로 우뚝 섰다.
아레스 길드의 새로운 주인에게 한낱 전령을 보낼 만큼.
“제가 오늘 갑작스럽게 찾아뵙게 된 이유는, 길드장님의 축하 인사를 전하기 위해섭니다.”
전령, 후긴의 말에 최 팀장이 담담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렇습니까.”
“예, 자격과 능력을 갖춘 뛰어난 젊은이가 아레스 길드를 맡게 되었다며 그분께서도 매우 기뻐하고 계십니다.”
언뜻 들으면 칭찬이지만, 속에 담긴 뜻은 다르다.
나는 혀로 입술을 핥으며 내심 중얼거렸다.
‘이놈들 봐라…….’
어떤 종류의 것은 아무리 덕지덕지 포장해도 내용물을 숨길 수 없다. 지금 후긴이 보인 정중한 목소리와 태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처음부터 내려다보네, 아주.’
꼭 상국(上國)의 사절을 만난 듯한 기분.
그리고 내가 아는 최 팀장은 이런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멍청하지도, 그렇다고 거칠게 불쾌한 기색을 내비칠 만큼 성급하지도 않은 사람이었다.
“외조부님께서 계시는 상황에 너무 과한 칭찬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없이 감사한 말씀이군요. 직접 만나 뵙고 인사를 드리고 싶을 정도입니다.”
하지만 뼈가 있는 최 팀장의 말에도 후긴은 미소를 잃지 않았다.
“아, 직접 오시지 못한 것에 대해서도 매우 안타까워하셨습니다.”
“길드장님께서 많이 바쁘신가 보군요. 제가 아는 바에 의하면 그분께서도 외부 활동을 끊으신 지 벌써 수년째라고 하던데…… 역시 소문은 믿을 게 못 되는 것 같습니다.”
지위가 높은 사람일수록 엉덩이가 무거워지는 건 만고불변의 진리다.
완전히 종적을 감춘 것으로 알려진 천태민의 경우가 과할 뿐.
대부분의 거대 길드장들은 외부와의 접촉을 삼갔고, 그것은 오딘 길드장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렇지 않아도 평소에 존경하던 분이라 한번 찾아뵙고 인사를 드리고 싶은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하하, 글쎄요.”
소리 내어 웃은 후긴이 깍지를 끼며 말을 이었다.
“죄송한 말씀이지만, 근래 들어 워낙 바빠지신 탓에 아마 힘들 것 같습니다.”
“무언가 일이 생긴 모양입니다.”
“네. 사소하지만 한편으로는 상당히 골치 아픈 문제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고민이 많으신 것 같습니다. 다른 분들도 마찬가지고요.”
“다른 분들이라면?”
“그분께서 오랜 세월 동안 알고 지내신 지인분들이시죠. 오늘 뵙기로 한 분은 크로노스의……. 아, 죄송합니다. 제가 괜한 말을 했군요.”
아레스와 함께 세계 10대 길드에 속해 있는, 또 다른 거대 길드의 이름이 불쑥 흘러나왔다.
최 팀장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크로노스 길드라.”
“부디 못 들은 것으로 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종종 이런 실수를 저질러서 길드장님께 불려 가 질책을 듣곤 하거든요.”
곤란한 표정을 짓는 후긴의 모습에, 나는 참지 못하고 피식 웃었다.
“실수는 무슨.”
“네?”
“거기 까마귀 아저씨. 어쭙잖은 발연기는 이제 집어치우고, 지금부터는 좀 진솔한 대화를 나눠 봅시다.”
음. 그냥 잠자코 지켜볼 걸 그랬나.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계속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동치미 국물 없이 고구마를 백 개를 처먹은 기분이라 더는 참을 수가 없다.
나는 푹신한 소파에 등을 기대며 입을 열었다.
“솔직히 딱 까놓고 말해서 곧 공개될 마나 연공법 때문에 온 거잖아. 적당한 선에서 멈춰라. 여기서 더 가면 재미없다. 크로노스 같은 다른 거대 길드랑 손잡고 너희 담가 버릴 수 있으니까 나대지 마라. 지금 하고 싶은 말이 그거 아니야.”
“…….”
“아니, 시부럴. 서로 다 아는 처지에 뭐 이렇게 이리저리 돌려 말해요, 머리 아프게. 어차피 우리가 녹취하는 것도 아닌데 할 말만 하고 돌아가면 되지. 안 그래?”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내 말을 말없이 듣고 있던 후긴이 문득 최 팀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혹여 예의에 어긋나는 것이 아닌가 싶어 말씀드리지 않았는데, 미스터 진께서 꼭 이 자리에 계셔야 할 이유가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최 팀장이 담담하게 대꾸했다.
“진태경 씨는 그만큼 중요한 사람이니까요. 그리고 독대를 원하셨다면 처음부터 그리 말씀하셨어야 했습니다.”
“그럼 지금부터라도 독대를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거절합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최 팀장의 대답에, 후긴이 황금빛 눈동자를 깜빡였다.
“이거 참…… 당혹스럽군요.”
“그건 우리 역시 마찬가집니다. 사전에 약속을 잡으셨다면 충분히 여러 부분을 조율할 수 있었을 텐데요.”
“흠.”
외알 안경을 매만진 후긴이 입을 열었다.
“그럼 제가 먼저 무례를 범한 셈이니, 정식으로 두 분께 사과드리겠습니다.”
이놈 보게.
처음에는 무슨 까마귀 컨셉인가 했는데, 괜히 신사 복장을 차려입은 게 아니다.
제법 깍듯한 후긴의 태도에 나 역시 신사답게 대답했다.
“그럼 그쪽이 먼저 잘못한 거니까, 전 사과 안 할게요.”
“…….”
“마음은 이미 알겠으니까 그렇게 쳐다보지 마시고. 아까 말했던 대로 진솔하게 대화나 나눠 봅시다. 오케이?”
후우.
후긴이 한숨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이렇게까지 나오시니, 저도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릴 수밖에 없겠군요.”
“짧게. 본론만.”
집무실에 설치된 조명 마법 아래에서 후긴의 외알 안경이 반짝 빛난다.
짧은 침묵은 금방 깨졌다. 말없이 나와 최 팀장을 응시하던 그가 입을 열었다.
“마나 연공법 공개를 중단하십시오. 이 제안을 거절할 시 불이익이 있을 겁니다.”
그것은 짧게 본론만 이야기하라는 내 요구를 백 퍼센트 충족시키는 한마디였고,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우리의 기분을 더럽게 만들었다.
“뭐, 이미 짐작은 하고 있었는데…… 막상 이렇게 들으니까 엿 같네. 안 그래요?”
내 물음에 최 팀장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도 조금 전처럼 몇 바퀴 돌려서 말하는 것보다는 훨씬 낫지 않습니까.”
“그건 그래. 이번에도 아까처럼 말했으면 그땐 진짜…….”
“참으셔야 합니다.”
“굳이 최 팀장님이 안 말려도 참았어요. 일 키우기는 싫으니까. 근데 일단 안경은 벗으라고 했을 것 같아.”
내 대답을 들은 최 팀장이 피식 웃었고, 후긴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매우 무례하시군요. 듣던 대로.”
“그러는 그쪽도 굉장히 불쾌하게 나오시네. 듣도 보도 못했는데.”
“당장 이 자리에서 무력시위라도 할 생각입니까?”
“필요하면 해야지. 아저씨가 안경 벗으면.”
“……이보십시오, 미스터 진.”
“네, 여보세요. 말씀하세요.”
“흥분하지 마십시오. 이건 단지 제안입니다.”
“입이 비뚤어졌어도 말은 똑바로 해야지. 내 귀에는 제안이 아니라 협박으로 들리는데.”
“협박으로 들으셨다면, 정말 그렇게 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제게 중요한 건 당신의 생각이 아닙니다.”
단호하게 대답한 후긴이 최 팀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어찌하시겠습니까? 미스터 최.”
차갑게 빛나는 황금빛 눈동자. 후긴의 입술 사이로 힘이 실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선택하십시오. 당신이 직접.”
* * *
후긴은 확신하고 있었다.
‘이건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다.’
사실상의 최후통첩.
조금만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한 걸음 물러설 수밖에 없다.
진태경이야 종잡을 수 없는 것을 넘어 반쯤 미친 인물이니 그렇다 쳐도 눈앞의 동양인 청년, 최민우의 선택은 다를 것이다.
게다가…….
‘슬레이어(Slayer)는 나서지 않는다. 마스터께서 그리 말씀하신 이상, 그건 곧 사실이야.’
다른 누구도 아닌 그분의 말씀이다.
후긴은 자신의 상관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바치고 있었다.
그의 말은 빗나간 적이 없으니, 최민우의 대답 역시 이미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래서일까.
후긴은 잠시 후 들려온 최민우의 대답이 너무나도 당연하게 느껴졌다.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군요. 알겠습니다.”
“역시. 미스터 최께서는 현명하시군요.”
진태경을 상대하며 흔들렸던 마음이 제자리를 찾는 기분이다.
그제야 잠시 잃어버렸던 미소를 되찾은 후긴이 말을 이었다.
“그럼 내일 저녁에 예정되어 있던 마나 연공법 공개는, 완전히 취소된 것으로 이해해도 되겠습니까?”
“물론입니다. 생각이 바뀌었어요.”
“좋습니다. 그분께서도 이 소식을 들으시면 기뻐하실 겁니다.”
후긴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한마디를 덧붙였다.
“다른 분들도 마찬가지고요.”
최민우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부디 그랬으면 좋겠군요.”
“합리적인 분들입니다. 앞으로는 더 부드러운 분위기에서,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겠지요.”
후긴은 뼈 있는 말과 함께 진태경을 바라보았다.
조금 전만 하더라도 자신의 면전에서 상스러운 소리를 지껄이던 그는, 어느샌가 소파에 눕듯이 몸을 기댄 채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는 중이었다.
‘끝까지 무례하군.’
그러나 언짢은 감정보다는 통쾌함이 더욱 컸다. 오늘 이 자리의 승리자는 바로 자신이었으니까.
떠나기 전, 교양을 갖춘 신사답게 실크 햇을 고쳐 쓴 후긴은 진태경을 향해 악수를 청했다.
“미스터 진, 오늘은 제가 본의 아니게 결례를 저질렀습니다. 다음에는 웃으며 뵈었으면 좋겠군요.”
친절한 말로 패자를 조롱할 수 있는 건 승자만이 누릴 수 있는 권리다.
더불어 다음 순간, 그가 내민 손을 잡지도 않고 퉁명스럽게 대답하는 진태경의 모습을 보자 오히려 기분이 더 좋아졌다.
“성질도 급하시네. 아직 업로드도 안 끝났는데.”
“급한 일이 있어서 말입니다. 그럼 이만.”
이제 이곳에서의 볼일은 끝났다.
최민우를 향해 정중히 인사한 후긴은 망설임 없이 돌아서서 문을 향해 걸었다.
저벅저벅.
가벼운 발걸음이 카펫 위를 지난다. 그러나 후긴은 문 앞에서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바로 직전에 들은, 결코 흘려듣지 못할 한마디 때문이었다.
“혹시 아까 뭐라고…….”
다시 돌아선 몸과 함께 흐려지는 말꼬리. 설마 하는 눈빛으로 바라보는 후긴을 향해, 진태경이 눈을 깜빡였다.
“응? 아, 업로드?”
“업로드……?”
“예. 별거 아니니까 아저씨는 이만 가세요. 바빠 보이시는데.”
업로드. 업로드. 업로드.
귓가에 얹힌 그 세 글자가 심장 박동 소리에 맞춰 펄떡인다.
“도대체. 뭘. 업로드 한 겁니까?”
그리고 뚝뚝 끊기는 그의 물음에 답한 것은, 진태경이 아닌 최민우였다.
“말하지 않았습니까. 생각이 바뀌었다고.”
“설마.”
“마나 연공법. 오늘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