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736
#735화
얇은 실크 가운을 걸친 중년인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1월의 냉기를 머금은 구름이 손에 잡힐 것처럼 눈앞을 스쳐 지나가고, 까마득한 저 아래의 지상에는 구획(區劃)별로 나뉜 건축물과 광장이 내려다보인다.
오랜 역사를 간직한 대도시의 전경. 그리고 도시 속 자그마한 점이 되어 움직이는 수많은 사람.
비록 음울한 잿빛 하늘과 안개에 잠긴 거리는 빛의 도시(La Ville Lumière)라는 이름에 어울리지 않는 광경이었지만, 어차피 중년인에게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는 이 도시의, 파리의 모든 것을 사랑했으니까.
안개조차 닿지 못하는 마천루(摩天樓)에서 바라보는 세상은 언제나 아름답다.
오늘 같은 날이라면 더더욱.
뎅. 데엥-
광장에서 울려 퍼지는 종소리가 오전 일곱 시를 알렸고, 한쪽 벽면을 채운 유리창에서 시선을 뗀 중년인은 천천히 돌아섰다.
거대한 서재.
그 중심에 자리한 원탁(圓卓)에는, 홀로그램 특유의 초록색 빛무리와 함께 나타난 십여 명의 인물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렇게 한자리에 모인 건 오랜만이군. 마지막 회의가 아마…… 3년 전이었던가?”
상석에 앉자마자 입을 연 중년인의 농담에, 가면 아래로 드러난 사람들의 입꼬리가 슬쩍 말려 올라갔다.
3년 전?
이미 이틀 전 밤에도 은밀한 회의를 가졌던 그들이었다.
– 제 기억으로는 10년 전이 마지막이었을 겁니다.
– 10년이라. 벌써?
– 한 30년쯤 되지 않았나?
– 빌어먹을. 30년 전이라면 대격변 때잖아. 개고생하던 기억은 떠올리기도 싫으니까 그만둬.
오고 가는 대화 속에 잔잔한 웃음소리가 섞여 있다.
그런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던 중년인이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다들 여유가 넘치는 모양이군. 그래, 가끔은 이런 잡담을 나누는 것도 좋지.”
– ……!
– ……!
나직한 한마디와 함께 내려앉은 침묵.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동시에 입을 다문 사람들을 바라보며, 중년인은 미소 띤 얼굴로 말을 이었다.
“이따위 영양가 없는 헛소리나 쓰레기 같은 잡담을 듣기 위해서 회의를 연 건 아니었는데…… 모두 어떻게 생각하나?”
그의 숨소리 하나, 미세하게 움직이는 손끝 움직임 한 번에 사람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홀로그램임에도 전해지는 압도적인 존재감. 그리고 기세.
당장 이 회의에 참석한 인원 중 거물(巨物)이라 불리지 않는 사람은 누구도 없었지만, 중년인에게는 감히 범접할 수 없었다.
이유? 간단하다.
눈앞의 중년인은 세계 최고라 불리는 오딘 길드의 수장이자, 이 세상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절대자 중 한 사람이었으니까.
– 죄, 죄송합니다. 미카엘. 일이 차질 없이 진행된다는 사실에 기분이 좋은 나머지…….
“변명이나 듣자고 한 말이 아닐세.”
누군가의 말을 끊어 낸 중년인, 미카엘이 말을 이었다.
“단지, 벌써 모든 게 끝난 것처럼 풀려 있는 모습이 같잖았을 뿐이지.”
– …….
“상대는 생각 이상으로 과감해. 그렇지 않았다면 그런 정신 나간 짓을 벌일 수 있었겠나.”
그 ‘정신 나간 짓’이 무엇을 말하는지 모르는 사람은 이 자리에 없다. 아니, 이제는 전 세계의 모두가 안다.
마나 연공법의 공공화.
극소수의 인물들에게는 질서를 무너트리는 미친 짓이었지만, 상대는 그 미친 짓을 현실로 만들었다.
“후긴을 보냈는데도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더군. 믿을 수 없이 무모하지만…… 그만큼 자신이 있다는 뜻이겠지.”
한 사람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 만약, 정말 만약에 저들이 믿는 것이 스카이(Sky)라면.
“이미 말했을 텐데. 그에 관한 문제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 ……알겠습니다.
석연치 않은 대답.
지금껏 그들 모두에게 있어 미카엘의 말은 곧 법이었다.
그가 이렇게까지 단언한 이상, 해결되지 않은 의문이 있더라도 가슴 깊숙한 곳에 구덩이를 파서 묻어야 했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하나같이 그 의문을 곱씹을 수밖에 없었다.
그 대상이 다름 아닌 천태민이었기에.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런 중대한 문제에 대해 신경 쓰지 말라니.’
‘만약 스카이가 나선다면, 그땐 어떻게 되는 거지?’
‘도대체 어디에서 얻은 정보길래…….’
끊임없이 머릿속에 맴도는 생각들.
미카엘의 정보는 언제나 확실했다. 누구를 통해 그런 정보를 얻는지, 어떤 방식을 이용했는지는 아무도 몰랐지만 그가 가져온 정보를 믿고 따르기만 한다면 이익을 얻을 수 있었다.
막대한 부와 명예. 드높은 사회적 지위.
하지만 아무리 단단하고 높은 성벽이라 할지라도 무너지는 것은 한순간이다.
특히나 천태민이라는 이름은 그저 믿음으로 묻어 둘 수 있는 것이 아니었고, 그런 그들이 느끼는 위기감이라는 감정은 한 사람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툭. 툭.
느릿하게 원탁을 두드리는 손가락. 그와 동시에 강대한 마나의 파동을 느낀 사람들이 상념에서 깨어났다.
“불안한 모양이군.”
부드러운 목소리에 사람들이 앞다투어 대답했다.
– 아닙니다.
– 그럴 리 있겠습니까.
– 우리 연합은 강력하오. 저런 애송이들에게 질 리 없지.
천태민만 없다면, 이라는 사족은 삼켰다.
지금은 그저 믿는 수밖에 없다. 지금껏 미카엘이 자신들에게 보여 준 힘과 능력이라면, 누군가의 말대로 그깟 애송이들은 상대도 되지 않을 테니까.
– 최, 그 젊은이의 수완은 대단 하지만 한계 역시 분명합니다.
– 진태경도 마찬가지요. 그가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우리가 세운 벽을 넘을 수는 없지.
분명 그럴 수 있던 시절도 있었다.
지극히 잔인하고 혼란스러웠던, 그렇기에 대격변이라 부를 수밖에 없었던 시절이.
인간이 몬스터를, 몬스터가 인간을. 그리고 인간이 인간을 가축처럼 도살하기도 했다.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던 격동의 시기.
그러나 대격변은 끝났다.
폭풍이 휘몰아치는 바다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지만, 지금처럼 평화로운 세상에서는 잔물결 정도로 변화를 일으킬 수 없다.
이번에 공개된 마나 연공법 역시 마찬가지다.
– 놈들이 마나 연공법을 공개함으로써 우리 역시 막대한 손해를 입게 되었지만…… 당장 급한 불은 껐으니 우려할 것은 없습니다.
– 맞습니다. 결과적으로는 언론도 감히 우리를 비난하지 못했고, 무엇보다 오딘 길드장님께서 발 빠르게 나서 주신 덕분이지요.
미카엘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출과 함께 오딘 길드의 이름으로 공개한 마나 연공법에 관한 소식은, 지금 이 순간에도 각종 미디어를 통해 세계 곳곳으로 퍼져 나가고 있다.
기존의 거대 길드를 비난하던 여론은 차차 수그러들 것이고, 자신의 너그러운 제안을 무시한 풋내기들은 곧 후회하게 될 것이다.
이제는 말뿐인 경고가 아니라, 행동으로 직접 보여 줄 테니까.
‘어리석긴.’
미카엘은 내심 중얼거렸다.
지금의 세상에서 마나 연공법은 가치를 따질 수 없는 보물이다.
얼마나 강한 헌터를 보유하느냐에 따라 길드의 위상이, 국가의 영향력이 달라지는 마당에 그걸 세상에 공개해 버리다니.
‘그전에 잘 생각해 봤어야지. 지금껏 왜 그런 선례(先例)가 한 번도 없었는지를.’
도덕과 정의감만으로 나선 얼간이들은 이미 과거에도 있었다.
전 세계에서 인정받는 강자였던 그들은 자신들이 지닌 이 특별한 능력을 모두와 나누고자 했고, 그렇기에 죽음을 맞이했다.
‘그리고 이번에도 결과는 같겠지.’
역사는 반복되는 법.
비록 상대의 예상치 못한 돌발 행동으로 마나 연공법이 공개되었지만, 그들은 어리석은 행동에 대한 값을 치러야 할 것이다.
그것이 이 세상의 법칙이었으니까.
다만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다면…… 최근 들어 가장 큰 변화를 불러일으킨 한 젊은이에 관한 것이었다.
‘진태경.’
미카엘이 아직 풋내기로 생각하는 최민우와 달리, 놈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강자다.
불과 일 년도 되지 않는 짧은 시간 속에서 숱한 업적과 명성을 쌓았고, 얼마 전에는 석고준을 비롯한 수백여 명의 헌터들이 대기하고 있던 아레스 길드 본사를 단신으로 무너트리기까지 했으니.
그뿐만이 아니다.
아직 세상에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미카엘은 최근 테러 단체와 반군 집단을 쓸어 버린 것이 진태경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S급 헌터 중에서도 손꼽히는 무력. 그리고 과감성.’
그것은, 지금 자신의 눈앞에서 쉴 새 없이 지껄이고 있는 이들 중 그 누구도 닿을 수 없는 영역이다.
세계적인 거대 길드를 이끌고 있는 S급 헌터, 강대국을 좌지우지하는 정치인, 수백 개의 게이트와 유전(油田)을 소유한 재벌…….
한 사람 한 사람이 거물이라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는 구성원들이었지만, 미카엘의 시선에는 저들 모두가 전부 탐욕스러운 멍청이들로 보였다.
‘물론 그 덕분에, 오딘 길드를 세계 최고로 끌어올릴 수 있었지만.’
마음속으로 뇌까린 미카엘은 작게 혀를 찼다. 쯧, 하는 소리와 함께 끊임없이 이어지던 목소리가 사라지고, 모두의 시선이 그를 향해 쏠렸다.
그리고 그런 그들의 모습을 차례차례 응시하던 미카엘은, 문득 저 멀리서 가까워지는 인기척을 느끼고 입을 열었다.
“손님이 온 모양이군.”
– 아, 그럼…….
“다음 회의는 추후에 따로 통보하지.”
지잉.
그것이 전부였다.
미카엘의 한 마디와 함께 홀로그램이 녹아내리듯 사라진 순간, 굳게 닫혀 있던 서재의 문이 그의 손짓에 따라 활짝 열렸다.
“그래서, 여행은 즐거웠나?”
기다리고 있던 미카엘의 물음에, 고풍스러운 차림을 한 사내가 대답했다.
“지시를 따랐을 뿐입니다.”
“자네는 언제나 딱딱하군. 후긴, 어서 안으로 들어오게.”
“감사합니다.”
저벅.
모자를 벗어 툭툭 턴 후긴이 서재 안으로 들어섰다.
문 앞에 떨어진 모래 알갱이를 본 미카엘이 담담하게 미소지었다.
“제법 바쁘게 돌아다닌 모양이군.”
“상당히 촉박한 일정이었으니까요.”
“먼 곳까지 다녀오느라 고생했네. 별다른 문제는 없었나?”
“있었지만, 잘 해결했습니다.”
무뚝뚝한 대답과는 달리, 뜨겁게 달아오른 후긴의 눈동자에는 아직 채 가시지 않은 전투의 여운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미카엘은 별다른 반응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후긴은 그가 직접 선별해서 가르친 인재다. 해결사로서의 그는 언제나 최고였고, 모든 임무를 완벽하게 수행했다.
바로 이번처럼.
“친구들은 데려왔나?”
“예, 제가 찾아온 이유를 듣더니 자발적으로 협력하겠다며 나서더군요. 한국에서 받은 대접과는 달리 모두가 친절하게 대해 줬습니다.”
“멀리서 와 주다니, 고마운 친구들이군. 지금 다들 어디에 있나?”
“지금쯤 모두 목적지로 향하고 있을 겁니다.”
“선물은?”
“틀림없이 전달했습니다.”
품속에서 회중시계를 꺼내 확인한 후긴이 한 마디를 덧붙였다.
“첫 번째 선물이 배달되기까지 한 시간 정도 남았군요.”
“한 시간이라, 좋아. 기다리는 동안 커피나 한잔할 텐가?”
“가능하다면 홍차로 부탁드립니다.”
기껍게 웃은 미카엘은 커피와 홍차를 한 잔씩 탔다.
그리고 정확히 한 시간 뒤, 자신의 지시가 확실히 이행되었음을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콰아아아앙!
희뿌연 구름 아래, 굉음과 함께 솟구치는 붉은 화염. 그리고…….
슈화아아악!
서서히 일그러지는 허공을 바라보며, 미카엘은 가벼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역시, 아름다운 도시야.”
화염에 휩싸인 한 빌딩.
아레스 길드 파리 지부를 중심으로, 공간이 찢어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