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764
#763화
생각은 실현되지 않는 한 그저 생각일 뿐이지만, 완성된 문장이 되어 목소리로 흘러나오는 그 순간부터 파급력을 지닌다.
바로 지금처럼.
“저는 지금껏 무수한 죽음을 지켜봐 왔습니다.”
슬픔에 젖은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수많은 카메라와 마이크 앞에 우뚝 선 미카엘 실베르트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날파리와 갱단으로 들끓던 파리의 빈민가에서, 대격변의 무수한 전장에서. 그리고 마왕 아스모데우스가 쓰러진 승리의 날 이후로도 줄곧. 계속해서.”
지이잉.
카메라가 작동하는 미세한 소음이 유난히도 크게 들린다.
침 삼키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침묵 속, 미카엘 실베르트를 바라보는 기자들의 눈빛은 알 수 없는 기대로 빛나고 있었다.
‘이건…….’
‘뭔가 있다!’
처음만 해도 갑자기 웬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를 하나 싶었다.
그들이 원했던 것은 아버지와 아들뻘인 두 영웅이 어깨동무를 하고 찍은 다정한 투 샷과 덕담 몇 마디 정도였으니까.
오늘 이 자리의 주인공은 틀림없이 진태경이었고, 미카엘은 누구보다 환하게 그를 밝혀 줄 확실한 조명장치에 불과했다.
그가 입을 열기 전까지는.
“그러나 그토록 숱한 죽음을 지켜보면서도 제게는 버리지 못한 희망이 있었습니다. 꿈이 있었습니다. 마왕 아스모데우스와 몬스터 군단이 사라진 이상, 언젠가는 모든 분쟁이 끝나고 완전한 평화가 찾아오리라 믿었습니다.”
높낮이가 분명한 어조와 호소력 짙은 표정.
보고 듣는 이로 하여금 집중하게 만드는 미카엘 실베르트의 모습이 카메라 렌즈에 비친다.
생중계로 이 모든 것을 지켜보던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거실에 놓인 TV 앞으로, 컴퓨터 모니터로, 손에 든 스마트폰을 향해 더욱 가까이 몸을 기울였다.
“엄마. 아빠. 나 만화 봐야 하는데…….”
“쉿. 피터. 잠시만 조용히 하렴.”
– 아, 노재헌 이 미친 새끼 뭐 하냐. 오라는 갱은 안 오고 잠수 오지게 타네.
– 재헌이 왜? 여친이랑 싸움? 이번 판 서렌 각이냐?
“그게 아니고 잠깐 아이튜브 라이브 보고 있었는데. 아니다. 그냥 톡방에 링크 올릴 테니까 너네도 한 번 봐봐.”
– 아니 시발 저 새끼가 여친이 어디 있냐. 그냥 지 승급전 아니라고 존나…… 뮌헨 라이브? 이거 뭐냐.
전 세계에서 생중계되는 수십 개의 TV 채널과 인터넷 스티리밍 사이트에 불이 붙었고, 어느덧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난 시청자들은 숨죽이며 화면을 바라보았다.
굳은 얼굴을 한 진태경과 그보다 한 발자국 앞에서 말을 이어가는 미카엘 실베르트의 모습이 카메라 렌즈를 넘어 무수히 많은 눈동자에 비치고 있었다.
모두의 귓가를 파고드는 힘 있는 목소리와 함께.
“오랜 기다림과 망설임 끝에, 저는 오늘 이 자리에 섰습니다. 이 한 마디를 여러분께 말씀드리기 위해서. 평화를 향한 믿음과 더 나은 미래를 위해서.”
한바탕 말을 쏟아낸 미카엘 실베르트는 숨을 삼켰다. 아니, 그의 모습을 바라보던 모두가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다음 순간. 모래알처럼 퍼석한 목소리가 그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바야흐로, 두 번째 전쟁이 코앞으로 다가왔습니다.”
“……!”
“……!”
보이지 않는 동요와 파장이 사방을 휩쓸었다.
퇴근 후 소파에 앉아 의미 없이 TV 채널을 돌리던 직장인도, 길거리를 수놓은 커다란 전광판 아래를 지나가던 다정한 연인도, 게임도 멈춘 채 심심풀이 삼아 라이브 방송을 보고 있던 청소년도.
그리고 현장에서 이 모든 상황을 보고 듣던 기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지금 이 순간. 그들은 자신의 눈과 귀를 의심했고 이내 극심한 혼란에 빠져들었다.
두 번째 전쟁.
저 짤막한 한 마디가 무엇을 뜻하는지 모르는 이들은 없다. 누군가의 입술 사이로 신음과도 같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대격변……?”
어찌 모를 수 있을까.
인류에게 있어 가장 또렷한 악몽이자 공포로 각인된 기억.
오대양 육대주를 피와 시체로 뒤덮었던, 인류 역사상 최악의 대전쟁을.
그런데 지금 미카엘 실베르트는 바로 그 대격변이 다시 시작될 것이라 말한다. 바야흐로 두 번째 전쟁이 도래했다고 선언했다.
그들의 앞에서. 아니, 전 세계의 앞에서.
‘이건…… 말도 안 돼.’
‘이럴 수는 없어. 이럴 수는.’
하지만 머릿속에 즉각 떠오른 부정과 달리, 그들의 입술은 쉽사리 움직이지 않았다.
정확히는 부정과 동시에 엄습한 한 가지 생각으로 움직일 수 없었다.
‘만약, 저 말들이 모두 사실이라면?’
두 번째 대격변이라니.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저마다의 가슴 깊숙한 곳에서 꿈틀거리는 불안감의 윤곽을 더듬고 있었으니까.
이미 전조(前兆)는 충분했다.
나날이 상승하는 마력 수치. 시간이 흐를수록 잦아지는 이상 현상들.
불과 몇 달 전 중국 쓰촨성에서 아크 리치가 발호했고, 마정석을 이용한 몬스터 웨이브 현상이 세계 곳곳에서 잇따라 발생했다.
이와 같은 테러 방식은 이미 오래전 학계를 통해 연구된 바 있으나, 마력 분야의 내로라하는 석학들은 입을 모아 주장했었다.
지금으로서는 불가능하다고.
단, 마력 수치가 한계치에 이르지 않는 한은.
그리고 오늘, 미카엘 실베르트는 바로 그 한계에 도달했음을 알리고 있었다.
“어쩌면 두 번째라는 표현이 틀렸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저를 비롯한 여러분 모두가 종전(終戰)이라 믿었던 그것은 휴전(休戰)에 불과했다는 것입니다.”
“……!”
“이 자리를 빌려 말씀드립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 분포된 마력 수치는 이미 임계점을 돌파했고, 과거와 같은 재앙이 전 세계를 덮칠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제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
이는 동네 술집에서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는 술주정뱅이의 말이 아니다.
미카엘 실베르트. 대격변 당시부터 오늘날까지 눈부시게 활약한 영웅이자 세계 최고의 길드를 이끄는 거인의 선언이다.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던 기자 중, 누군가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 그 말씀은 마왕이, 마왕 아스모데우스가 돌아온다는 뜻입니까?”
“승리의 날. 인류의 운명을 건 그 마지막 전투에서 마왕은 분명 흔적도 남기지 못하고 소멸했습니다. 제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으니 이는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잠시 망설이던 미카엘 실베르트가 한 마디를 덧붙였다.
“이제는 그 누구도 확신할 수 없습니다.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마왕 아스모데우스가 정말 소멸했는지조차도.”
“아, 아아.”
“이럴 수가…….”
카메라가 잘게 흔들리고 마이크에 섞여든 기자들의 탄식이 고스란히 전파를 타고 전해졌다.
그러나 각자의 자리에서 화면으로 이를 지켜보던 사람들은 누구도 불평하거나 신경 쓰지 않았다.
그들의 상황 역시 현장에 있는 저들과 다를 바 없었으니까.
마침내 실체를 드러낸 공포를, 차마 마주할 용기가 없어 모른 척하던 진실에 자신들도 모르게 몸을 떨고 있었으니까.
이제는 그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미래. 아니, 재앙.
그리고 마왕 아스모데우스라는 끔찍한 존재의 재림(再臨)에 대한 두려움.
먹구름과도 같은 감정들이 사람들의 정신을 좀먹고 잠식한다.
화면으로, 혹은 두 눈으로 재앙을 예견한 미카엘 실베르트를 응시하는 사람들의 눈빛이 파르르 떨렸다.
지금 당장이라도 그가 지금껏 했던 모든 발언을 취소했으면 했다. 전부 농담이었다고 웃으며 말하는, 말도 안 되는 희망까지 떠올렸다.
그러나 곧이어 들려온 미카엘 실베르트의 한 마디는, 마음에 남아있던 한 줌의 희망마저 송두리째 무너트렸다.
“평화는, 혹은 평화라고 생각했던 시간은 끝났습니다.”
미카엘 실베르트는 카메라를 응시했다. 그에게서 흘러나온 슬픔과 분노는 손으로 만질 수 있을 것처럼 선명했다.
적어도 이 광경을 지켜보는 사람들에게는 그랬다.
“전쟁은 이미 시작되었고, 우리는 한 치의 망설임이나 물러섬도 없이 맞서 싸워야 합니다.”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목소리가 물결처럼 흔들렸다. 마치 흐느끼듯, 호소하듯 말을 쏟아낸 미카엘 실베르트가 이를 악물었다.
“하나가 되어! 그 어느 때보다 공고히 단결하여!”
붉어진 눈가에서는 화염과도 같은 눈빛이 쏟아지고, 천둥 같은 외침이 마이크를 타고 울려 퍼진다.
카메라는 더 이상 진태경을 비추지 않는다. 화려한 조명과 스포트라이트는 오직 한 사람을 향하고 있었다.
미카엘 실베르트.
사람들의 눈에 비친 그는 결의에 찬 투사(鬪士)와도 같았다.
아니, 그가 생각하는 자신은 이미 영웅이자 왕이었다.
위기에 빠진 사람들에게 새로운 길을 제시한 영웅. 이 세상 위에 군림할 제왕.
그리고 파르르 떨리는 공기와 무수한 시선들 속에서, 미카엘 실베르트는 마지막 한 걸음을 내디뎠다.
오직 이날을 위해 기다려왔던 그 한 마디를.
“세계 헌터 연맹.”
그 한 단어에 모두가 숨을 삼켰다. 공기와 바람이 멎었다. 미카엘 실베르트를 중심으로 발산된 압도적인 기세가 주위를 짓눌렀다.
“전 세계의 모든 국가를 아우르고 어떠한 제약도 않는 연맹. 과거 대격변이라는 재앙으로부터 우리를, 지구상의 모든 인류를 구했던 바로 그 세계 헌터 연맹의 부활을…….”
흐려지는 말꼬리.
미카엘 실베르트의 눈동자가 형형하게 빛났다.
세상 곳곳에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을 수억, 어쩌면 수십억의 사람들을 응시하던 그가 참았던 숨을 토해 냈다.
“감히 이 자리를 빌어 제안합니다.”
“……!”
“……!”
모든 법과 제약을 초월하는 국제기구의 부활.
마침내 흘러나온 그 한 마디에, 보이지 않은 파동이 좌중을 휩쓸었다.
카메라와 마이크를 통해, 무수한 전파를 통해 전 세계 곳곳으로 파고들었다.
그리고 이 광경을 지켜보던 모두가 거대한 충격과 알 수 없는 감격에 사로잡힌 그 순간.
“좆 까.”
그 모든 것을 깨트리는 한 줄기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 * *
수백 명의 취재진. 그들을 통제하는 독일 연방군과 경찰들.
그리고 뒤늦게 현장에 도착한 또 다른 헌터들까지.
헤아릴 수도 없을 만큼 수많은 눈동자가 나를 향한다.
번들거리는 카메라 렌즈 너머, 보이지 않는 또 다른 시선과 목소리들이 파도처럼 쏟아지는 듯했다.
하지만 나는 그런 것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았다.
아니, 신경 쓰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지도 모른다.
‘이거였어.’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한 충격에 눈앞이 아찔하다.
유치원생의 놀이방처럼 어질러진 머릿속에서, 조금 전 들었던 한 마디가 선명하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세계 헌터 연맹.’
삼십여 년이 흐른 지금, 국제 헌터 연맹이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는 옛 영웅들의 잔재.
나이, 성별, 국가와 인종.
심지어는 법마저 초월하여 천태민이라는 구세주를 따랐던 헌터들의 단체. 그것이 바로 세계 헌터 연맹이었다.
그들은 오직 인류의 생존을 위해 싸웠고, 수많은 피를 흘려 가며 승리를 쟁취했다. 그리고 마왕 아스모데우스가 쓰러진 직후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런데, 바로 그 세계 헌터 연맹을 부활시킨다고?’
물론 나는 다른 사람들과 같이 과거에 싸웠던 그들을 존경한다.
모두를 위해 싸웠다는 점에서. 그리고 전쟁이 끝난 직후, 그 엄청난 권력을 미련 없이 놓고 떠났다는 점에서.
하지만 이건 다르다.
미카엘 실베르트가 꿈꾸는 세계 헌터 연맹은…… 그저 한 사람을 위한 왕국에 불과하다.
그렇기에 지금 이 순간. 모두가 지켜보는 앞에서 다시 한번 말할 수 있었다.
“좆 까.”
“……!”
“……!”
그리고 자신의 귀를 의심하던 사람들이 눈을 부릅뜬 그때였다.
나직한 목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진 것은. 다시 한번 내 머릿속을 뒤흔든 것은.
– 말하기 전에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미카엘 실베르트.
이 세상을 위기로 몰아넣고, 그 위기를 계단 삼아 왕좌에 오르려는 자.
영웅의 탈을 쓴 간웅(奸雄)이 이쪽을 바라보며 웃는다.
내 어깨너머의 누군가를 바라보며 뱀과 같은 눈동자를 빛낸다.
– 자네의 몬스터 친구를 생각해서라도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