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766
#765화
화아아악.
무거워진 공기가 전용기 내부를 짓누른다.
어느덧 미카엘 실베르트와 나를 중심으로 흘러나온 기운이 보이지 않는 선을 경계 삼아 서로를 향하고 있었다.
한 치의 물러섬도 없는,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대치.
하지만 이 경계를 넘어 격돌하게 되는 순간, 모든 사태는 돌이킬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가게 된다.
놈과 나. 둘 중 누군가의 죽음과 함께.
그리고 나는 결코 이 자리에서 물러날 생각이 없었다.
이미 치명적인 약점을 잡힌 이상, 지금 이 자리에서 뒷걸음질 치게 된다면 그걸로 끝이니까.
툭. 투둑. 콰창!
균열과 함께 폭발하듯 터져 나가는 커피잔.
그와 동시에 이곳을 향해 빛살과도 같은 속도로 쏘아지는 수십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쾅!
합금으로 만들어진 출입문이 단숨에 뜯겨 나가고 파공성이 일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전용기 내부로 진입한 충견들이 주인을 향해 꼬리를 흔들었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익숙한 목소리다.
내 어깨너머, 불과 몇 분 만에 다시 돌아온 후긴을 향해 미카엘 실베르트가 침착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밖에서 대기하라고 했을 텐데.”
“죄송합니다. 소란이 벌어진 것 같아서 그만.”
“별거 아닐세. 손님이 실수로 커피잔을 떨어트렸을 뿐이야.”
“그렇군요.”
온 사방에 흩뿌려진 유리 조각을 힐끗 바라본 후긴이 말을 이었다.
“다시 내오겠습니다.”
“괜찮네. 뭘 가져와도 저 친구 마음에 들진 못할 테니.”
“그럼…….”
“다시 물러가게. 내가 직접 호출하기 전까지는 돌아오지 말고.”
담담하지만 단호한 상관의 어조에 잠시 망설이던 후긴이 수하들을 이끌고 돌아섰다.
친위대가 전용기를 빠져나가자 미카엘 실베르트가 문득 입을 열었다.
“이쯤에서 멈추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자네 생각은 어떤가?”
“…….”
“이대로면 어떤 결과가 나오건 간에, 우리 둘 다 많은 것을 잃게 될 거야. 정말 그렇게 되길 바라나?”
미카엘 실베르트를 빤히 노려보던 나는 천천히 기세를 갈무리했다.
기분은 더러웠지만, 저 말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세상이 놈의 실체를 알아차리지 못한 이상, 설령 이 자리에서 놈을 죽여 후환을 없앤다 해도 나는 최악의 살인자이자 범죄자로 낙인찍힌다.
무림 공적(武林公敵)보다 더한 추적과 감시를 피해 평생을 도망쳐야 할 테고, 가족과 친구들은 평범한 인생을 송두리째 잃어버리겠지.
그것이야말로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일이었고, 미카엘 실베르트는 그 부분을 명확히 꿰뚫고 있었다.
“이제 좀 한결 낫군.”
옷에 묻은 유리 파편을 툭툭 털어 낸 놈이 손가락을 까딱이자, 새로운 잔과 커피가 반쯤 채워진 머신이 두둥실 날아들었다.
“여분을 준비해 놔서 다행이지. 아, 혹시 자네도 필요한가?”
“굳이 버리고 싶은 잔이 많다면야.”
“싫다는 소리로 알아듣겠네. 나름대로 어렵게 구한 것들이라 깨지면 마음이 아프거든.”
쪼르륵.
신중한 손길로 잔을 채우며 미카엘 실베르트가 말을 이었다.
“이제 진정된 것 같으니, 본론부터 말하지. 나를 돕게.”
좆 까.
그 두 글자가 목구멍까지 솟구쳤지만, 나는 꾹 눌러 참았다.
미카엘 실베르트는 이미 스켈레톤 킹의 정체를 간파해 냈고, 내가 아무리 분노하더라도 당장 자신을 죽이지 못하리라는 사실 역시 알고 있다.
그리고 이 두 가지 약점이야말로 내가 이 자리를 박차고 나가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였다.
‘빌어먹을.’
테이블 아래로 힘껏 움켜쥔 주먹이 파르르 떨린다. 나는 애써 담담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만약 내가 당신을 돕는다면?”
“세계 헌터 연맹이 성공적으로 자리 잡겠지. 아무런 잡음도 없이. 깔끔하게.”
각설탕을 커피잔에 빠트린 미카엘 실베르트가 한 마디를 덧붙였다.
“물론 새롭게 탄생한 연맹의 주인은 바로 내가 될 테고.”
“자신감치고는 너무 과한데.”
“이런, 진.”
작게 실소를 흘린 놈이 고개를 저었다.
“이미 알고 있잖나. 지금 같은 상황에서 연맹이 세워진다면 누가 맨 윗자리에 앉을지.”
“…….”
“그럴 만한 자격을 갖춘 것은 자네와 나뿐일세. 그리고…….”
찰랑.
천천히 휘저어진 티스푼을 따라 각설탕이 커피에 녹아든다. 한 모금을 머금은 미카엘 실베르트의 얼굴 위로 더할 나위 없는 만족감이 떠올랐다.
“이 유익한 대화가 끝난 후부터는, 오직 나만이 그 자격을 갖게 되겠지.”
“……!”
“그나저나 정말 안 마셔도 괜찮겠나? 이 커피, 향도 맛도 완벽한데.”
으득.
저절로 이가 악물렸다.
지금 이 순간, 나는 마치 놈의 손에 들린 저 커피잔 속 각설탕이 된 기분이었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천천히 녹아들어, 커피의 맛을 완성시키는 각설탕.
그리고 그렇게 세계 헌터 연맹이라는 완벽한 커피가 완성되어 미카엘 실베르트의 입 안으로 흘러 들어간다.
어떤 국가와 제약도 무시하는 강력한 힘을 가진 무력 단체가, 영웅의 탈을 뒤집어쓴 괴물의 손아귀에 들어가는 것이다.
‘이대로 흘러간다면…… 끝장이다.’
과거 대격변 당시 세계 헌터 연맹이 칭송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이 인류를 지키는 검이자 방패였기 때문이다.
사익(私益) 대신 공익(公益)을.
그들은 막대한 부와 권력 대신 대의(大意)를 좇아 목숨 걸고 싸운 영웅이었고, 마왕 아스모데우스의 소멸 이후 자연스럽게 해산했다.
하지만 미카엘 실베르트는 그들과 정반대다.
오직 자신의 이익과 권력을 위하여 스스럼없이 재앙을 일으키는 자. 끝없는 욕망에 사로잡힌 괴물이 바로 내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
기약 없는 의식불명 상태에 빠진 진정한 영웅 대신, 저 괴물이.
“……천태민.”
나도 모르게 신음처럼 흘러나온 그 이름에, 잠시 얼굴을 굳혔던 미카엘 실베르트가 이내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아, 그래. 스카이(Sky). 그가 있었지.”
달칵.
커피잔을 내려놓는 손길도, 뒤이어 이어지는 목소리에도 여유로움이 가득했다.
“그렇지 않아도 그에게 가장 먼저 연맹을 이끌어 달라 부탁할 생각일세.”
“지금, 뭐라고?”
“자네가 놀라는 이유를 모르겠군. 이미 자격은 차고 넘치지 않나. 마왕 아스모데우스로부터 인류를 구원한 살아 있는 구세주, 역사상 다시없을 대영웅이자 대격변 당시 세계 헌터 연맹을 이끌었으니 누구보다 적격이지.”
단단한 쇠몽둥이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한 충격.
그제야 미카엘 실베르트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깨달은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너 이 새끼…… 설마?”
“참 안타까운 일이지 않나? 그토록 위대한 영웅이, 다시 한번 인류를 이끌고 이 세상을 구원해야 할 그가 병세가 깊어 나설 수 없다니. 이것이야말로 신의 변덕이지.”
“……!”
“하지만 사람들에게 다행인 점은, 바로 그 스카이가 다른 누군가를 당신의 대체자로 추천했다는 것일세. 새롭게 탄생한 세계 헌터 연맹이라는 방주를 이끌 선장. 전 세계가 아는 또 다른 대격변의 영웅이자 숭고한 희생정신으로 테러 확산을 막은 다른 누군가를 말일세.”
문득 숨이 막혔다.
분명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임에도, 귓가를 파고드는 놈의 목소리를 따라 모든 상황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천태민을 연맹의 맹주로 추천하는 미카엘 실베르트.
하지만 천태민은 병환을 이유로 맹주직을 거절하고, 그와 동시에 미카엘 실베르트에게 자리를 권한다.
그리고 그 후에는…….
“세 번 정도는 거절할 생각일세. 나 자신을 낮추며 겸손하게. 그렇게 한바탕 촌극을 벌인 뒤에 자네가 나선다면 매우 보기 좋은 그림이 완성되겠지.”
미카엘 실베르트는 미소 띤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지만, 나는 웃을 수 없었다.
이건 단순히 돕는 것을 넘어선, 말 그대로 추대(推戴)다.
크고 작은 무수한 톱니바퀴가 맞물려 돌아가는 일련의 상황이 끝난다면…… 놈이 권력을 위해 세계 헌터 연맹의 재설립을 주장했다는 비판 의견은 완전히 사라질 테고 미카엘 실베르트는 모두의 손에 이끌려 왕좌에 앉게 된다.
어떤 잡음이나 의혹도 없이.
살아 있는 구세주인 천태민과, 가장 큰 걸림돌인 내 지지를 받아 완전무결한 명분을 갖춘 채.
그야말로 차세대의 구원자이자 막강한 힘을 손에 넣은 왕이 되는 것이다.
“이런 미친 새끼…….”
입술을 비집고 신음처럼 흘러나온 목소리에, 미카엘 실베르트는 빙긋 웃어 보였다.
“걱정하지 말게. 자네와 주위의 친구들이 순순히 따라 준다면, 나 역시 세계 헌터 연맹의 맹주로서 본분을 다할 테니까.”
“지금, 나보고 그 말을 믿으라고?”
“이런. 안타깝게도 내가 충분한 믿음을 주지 못한 모양이군.”
“뭐?”
“자네도 알고 있지 않나. 오늘 내가 카메라 앞에서 말한 것들이 모두 진실이라는 것을. 세계 곳곳에 분포된 마력 수치는 임계점을 돌파했고, 지금 인류에게는 세계 헌터 연맹이 필요하네.”
남아 있던 커피를 깨끗이 비운 놈이 담담한 어조로 덧붙였다.
“나는, 바로 그 세계 헌터 연맹이 필요하고.”
“……!”
그 한마디에, 뜨거운 무언가가 단전 깊숙한 곳에서 울컥 솟구쳤다.
까드득.
나는 불길이 쏟아지는 눈빛으로 미카엘 실베르트를 노려보았다.
하얗게 물들 만큼 힘껏 움켜쥔 두 주먹은 금방이라도 활화산처럼 터질 것 같았다.
놈이 얻고자 했던 그 알량한 권력 때문에, 그것 때문에 수십 개의 도시가 파괴되고 수백만이 넘는 사람들이 죽었다.
그뿐인가. 무너진 빌딩 숲과 거리를 태운 검은 연기는 햇빛조차 가로막았다.
갑작스럽게 덮쳐 온 재앙으로부터 가까스로 살아남은 생존자들은 방공호에서, 자신들의 보금자리에서 가족과 친구들을 끌어안은 채 공포에 떨고 있다.
그런데, 뭐?
“이 개새끼가……!”
화륵.
아까부터 줄곧 떨려 오던 주먹을 타고 청백색의 화염이 솟구친다. 강대한 열양지기가 공기를 태우고 주위의 모든 것을 녹였다.
다음 순간 나는 전신을 사로잡은 분노를 따라, 동시에 함께 일어난 살기(殺氣)를 실어 주먹을 내뻗었다.
후웅. 콰아아!
멸염신권(滅炎神拳).
모든 것을 잿가루로 만들어 버리는 초고온의 열기를 머금은 일권이 공간을 격하며 쏘아졌다.
인두겁을 뒤집어쓴 괴물을 향해. 제 목적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희생시킬 수 있는 미친놈을 향해.
‘이 자리에서, 반드시 죽인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분노에 모든 것을 잊고, 분노에 모든 것을 맡겼다.
그리고 한없이 느려진 세상 속, 나는 볼 수 있었다.
화염에 휩싸인 주먹을 가로막는, 눈부신 빛줄기를.
콰아아앙!
거대한 굉음이 사방을 뒤흔들었다. 전신을 밀어내는 충격파를 견뎌 낸 나는 부릅뜬 두 눈으로 미카엘 실베르트를 바라보았다.
마지막 순간, 번개처럼 뽑은 검신으로 멸염신권을 막아 낸 놈의 모습을.
츠츠츠츠!
주인의 눈동자를 닮은 회색빛 오라가 음울하게 빛난다.
청백색의 화염과 맞닿은 검신 너머로, 깊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경고하건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면 정말 돌이킬 수 없을 걸세.”
쉬쉬쉭!
아직 마지막 선이 남아 있음을 의미하는 한 마디와 함께, 등 뒤로 다가오는 후긴과 친위대의 인기척을 느낀 나는 눈을 감았다.
까맣게 물든 시야 속에서 가족과 친구들의 얼굴이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빌어먹을.’
스륵.
힘이 풀린 주먹이, 검신과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