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767
#766화
나는 언젠가부터 끊임없이 투쟁하고 있었다.
힘이 없던 시절에는 내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 게이트에서 싸웠고, 힘을 가진 이후에는 그들을 지키기 위해 싸웠다.
하지만…… 참 아이러니한 일이다.
죽음의 위기 앞에서도 뒷걸음질 치지 않았던 내가, 고작 몇 마디 말에 물러나고 있다는 것이.
스륵.
맹렬하게 타오르던 청백색의 불꽃이 사그라진다.
나는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검신을 향해 맞닿아 있던 주먹을 천천히 거두어들였다.
“현명한 선택이야.”
귓가에 닿는 가증스러운 목소리에 뱃속이 뒤틀린다. 나는 분노로 잘게 떨리는 주먹을 늘어트렸다.
아니, 주위의 공기가 느슨해진 그 순간을 노려 재차 일권(一拳)을 뻗었다.
꽈앙!
다시 한번 울려 퍼진 굉음과 함께, 뜨거운 열풍(熱風)이 사방을 휩쓸었다. 그와 동시에 등 뒤에서 분노에 찬 외침이 터져 나왔다.
“감히!”
쉬쉬쉭!
그리고 강렬한 살기(殺氣)와 파공성이 뒤섞여 나를 향해 쏘아지던 그 순간.
“그만.”
나직한 음성에 후긴을 비롯한 수십의 친위대가 우뚝 멈춰섰다.
담담한 눈짓으로 수하들에게 무언의 뜻을 전한 미카엘 실베르트가 입을 열었다.
“분명히 경고했을 텐데.”
그그그극.
또 다시 서로를 향해 맞물린 주먹과 검신이, 푸르고 어두운 강대한 기운이 파르르 떨린다. 나는 놈을 노려보며 대답했다.
“그래, 그랬지.”
“결국 끝장을 볼 셈인가. 지금 이 자리에서?”
나는 이를 악물었다.
머릿속으로는 이미 수십 번도 넘게 미카엘 실베르트를 죽였다. 사지를 부러트리고, 아가리를 뭉개 버리고, 심장을 뽑아 터트렸다.
그러나 이곳은 무림이 아니다.
아니, 어떤 세상이어도 놈이 뒤집어쓴 저 가면을 벗기지 않는 한, 내가 하려는 행동은 용납될 수 없다.
“그럴 생각이었다면…… 진작 그렇게 하고도 남았어.”
“자네는 생각 이상으로 무모하고, 그보다 더 오만하군.”
“단순한 오만이라고 생각하면 섭섭하지.”
내 대답을 들은 미카엘 실베르트가 묘한 표정을 지은 그때.
사악.
아주 가까이 있어야만 들을 수 있는, 미세한 소리와 함께 놈의 매끈한 목에 옅은 혈흔(血痕)이 비쳤다.
찰나의 순간 들이닥친 막대한 압력을 이기지 못한 살갗이 뒤늦게 베여 나간 것이다.
“허.”
“내가 주는 경고다. 명심해.”
한 음절, 한 음절 씹어뱉듯이 흘러나온 내 목소리에 미카엘 실베르트가 담담히 대꾸했다.
“아까 했던 말에 오만은 빼고, 다른 한 가지를 추가해야겠군. 자네는 생각 이상으로 흥미로운 사람이야.”
“너 이 새끼…….”
“그리고 이렇게 친절히 경고해 주어서 고맙네. 적어도 한 가지는 확실해졌거든.”
“뭐?”
“진. 자네는 결코 날 죽일 수 없어.”
그리고 뒤이어 들려오는 건조한 목소리에는, 숨길 수 없는 웃음기가 스며들어 있었다.
“왜냐하면…… 자네는 언제부터인가 너무 많은 것을 가져 버렸거든.”
“……!”
순간, 알 수 없는 한기에 전신의 털이 쭈뼛 곤두섰다.
끈적하고 불쾌한 무언가가 뻗어 나와 사지를 붙잡는 듯한 기분.
마치 깊은 늪으로 끌려 들어가는 그 소름 끼치는 감각에 나는 반사적으로 검신을 뿌리쳤다.
콰득!
찰나 지간 섞여드는 두 기운.
마지막으로 번쩍이는 섬광 속에서 낯익은 얼굴들이 눈앞을 스쳤고, 의식할 새도 없이 신형을 비틀거린 나는 거칠게 호흡했다.
인정하기 싫다. 인정할 수 없다.
그러나 동시에……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미카엘 실베르트.
놈의 말은 모두 사실이었다.
혈흔이 비치는 자신의 목에는 관심도 없다는 듯, 태연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저놈의 명줄을 끊는 순간. 나와 내 사람들의 인생도 함께 베인다.
지금껏 내가 쓰러트린 무수한 적들처럼 불길에 타올라 잿더미가 되어, 결국은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 분명했다.
“아무런 대답도 없다는 건, 내 짐작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으로 이해해도 되겠나?”
나는 침묵했고, 미카엘 실베르트는 미소지었다.
“앞으로 잘 부탁하지. 조만간 다시 연락하겠네.”
스윽.
그리고 승리를 확신하는 미소와 함께 내민 그 손을, 나는 끝끝내 잡지 않고 돌아섰다.
오늘. 뮌헨의 밤에 달빛은 찾아오지 않았다.
* * *
진태경이 떠났다.
어둠 너머로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말없이 바라보던 후긴이 입을 열었다.
“저자가 순순히 협조할까요?”
미카엘 실베르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틀림없이.”
“하지만 진태경의 무모함은 규격 외입니다. 언제나 예측하기 힘든 행동을 보여 오지 않았습니까.”
“누구에게나 약점은 있다네. 그리고 그는 누구보다 치명적인 약점을 갖고 있지.”
“약점이라면, 어떤?”
“감정. 진태경은 누구보다 감정적인 사람이야.”
담담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희로애락이 분명한 상대는 속물적인 이들보다 다루기 쉽다네. 부와 명예는 잃어버려도 다시 얻을 수 있지만, 사람은 그렇지 않거든.”
미카엘 실베르트는 격돌의 여파로 박살 나다시피 한 자신의 전용기를 바라보았다.
온갖 최첨단 설비에 마법까지, 수천억을 들여 주문 제작한 것이었지만 별다른 감정은 들지 않았다. 그저 단순한 고철 덩어리에 불과하니까.
그러나 사람은, 하나뿐인 목숨과 인생은 다르다.
“진태경은…… 생각보다 잃을 것이 많은 사람일세.”
어쩌면 나보다도 더.
아무런 소리도 없이 혀끝만 맴도는 그 뒷말을, 미카엘 실베르트는 애써 삼켜 냈다.
인정하기 싫었다.
이미 아무리 써도 마르지 않는 재산과 막강한 권력을 지닌 그다.
머지않아 재탄생할 세계 헌터 연맹까지 손에 넣는다면 그야말로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이 세상의 왕이 될 것이다.
그런데 그런 자신보다 진태경이 더욱 잃을 것이 많다니.
‘말도 안 되는 생각이야.’
마음속으로 뇌까린 미카엘 실베르트는 후긴의 어깨를 두드렸다.
“걱정할 것 없네. 며칠 후면 모든 것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될 테니까.”
“저 역시 그러길 바랍니다만…….”
말꼬리를 흐린 후긴의 시선은, 더 이상 보이지 않는 한 사람의 뒷모습을 계속해서 쫓고 있었다.
“잘 모르겠습니다. 놈을 이대로 돌려보내는 것이 옳은 선택인지.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른 것처럼 마음 한구석이 불안합니다.”
“그럴 필요 없네. 별다른 선택권이 없었던 건 우리 역시 마찬가지였으니까.”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
콰창!
이어지려던 목소리를 집어삼킨 낯선 소음.
다음 순간 돌아선 후긴의 눈동자에 비친 것은, 어느덧 자루밖에 남지 않은 검을 들고 있는 상관의 모습이었다.
“길드장님!”
다급하게 외친 후긴을 향해 고개를 저어 보인 미카엘 실베르트가, 묘한 눈빛으로 발치에 흩어진 검의 파편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이거 참…….”
단 두 번의 격돌.
하지만 그것만으로 최고의 재료와 마법으로 완성된 애검이 산산 조각났다.
아마 검신을 감싸고 있던 강대한 오라가 아니었더라면, 지금까지 형태를 유지하고 있지도 못했을 것이다.
‘역시,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흥미로운 놈이야.’
진태경의 실력은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다.
처음 두각을 드러내던 시점부터 오딘 길드의 눈과 귀는 그를 향하고 있었고, 보고가 올라올 때마다 미카엘 실베르트는 저 동양인 청년에 대한 평가를 매번 수정해야 했다.
단순한 스카우트 대상에서 상당한 잠재력을 지닌 차세대 S급 헌터로.
그리고…… 어느샌가 자신의 앞길을 막아설 가장 큰 장애물로.
‘이제 천태민을 제외한다면 누구도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분명 그랬다. 그래야 했다.
그런데 오늘, 한 치의 오차도 없어야 할 계산이 완벽하게 어긋나 버렸다.
‘진태경.’
미카엘 실베르트는 고개를 들어 조금 전 한 사람을 집어삼킨 어둠을 바라보았다.
아직 자신이 살아온 인생의 절반도 지나지 않은 청년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또 그 안에 웅크린 거대한 힘을 다시금 떠올리며 생각했다.
‘만약 내가, 모든 힘을 다했다면?’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실소를 흘렸다.
덧없는 생각이다. 그가 지금의 자리에 있을 수 있었던 이유는 지금껏 만난 모든 적을 상대로 전력을 다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으니까.
온 힘을 다한 자는 전투에서 승리하지만, 결국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은 힘을 숨긴 자다.
그리고 미카엘 실베르트는 전쟁에서 승리하고 싶었다. 전투가 아닌 전쟁에서.
생존이 아닌 군림을 목표로 지금껏 살아왔고 왕좌로 향하는 마지막 계단만을 남겨 두고 있었다.
‘모든 것이 코앞이다. 서두를 필요 없어.’
적어도 오늘만큼은.
혀끝에서 감도는 말을 삼켜 낸 미카엘 실베르트는 문득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의 회색빛 눈동자에 비친 뮌헨의 밤하늘은, 조금 전 같은 것을 바라봤던 누군가와 달리 그 어느 때보다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래, 적어도 오늘만큼은.’
콰득. 푸스슥.
꽉 움켜쥔 손아귀 안, 단단하기 그지없는 칼자루가 작은 가루가 되어 바람을 타고 흩날린다.
한 번 앞길을 막아선 장애물을 같은 자리에 내버려 둘 만큼, 미카엘 실베르트는 허술하지 않았다.
* * *
모든 이야기가 끝난 이후에도, 넓은 스위트룸 내부는 무거운 공기와 침묵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겠지.’
나는 딱딱하게 굳어 있는 최 팀장과 스켈레톤 킹의 표정을 바라보며 내심 중얼거렸다.
이미 나로서도 충분히 예상했던 반응이다.
당장 머리에 불이 붙었는데 침착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경우가 경우인 만큼, 설령 사람이 아니라 몬스터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이런 빌어먹을.”
먼저 침묵을 깨트린 것은 스켈레톤 킹이었다. 작게 욕설을 중얼거린 녀석은 복잡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간악한 인간이여. 그럼 이제 어떻게 되는 것이냐?”
“음.”
평소 같으면 농담을 건넸겠지만, 이번만큼은 사안이 사안인 만큼 나도 쉽게 뭐라 대답할 수 없었다.
아마 지금쯤 스켈레톤 킹도 여러모로 마음이 복잡할 것이다.
자신의 정체가 발각되었다는 사실에 대한 혼란과 이후의 처지에 관한 두려움으로 가득하겠지.
그리고 이런 생각들로 차마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입술만 달싹이는 내 모습에, 스켈레톤 킹이 진중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정 말하기 힘들다면, 하나만 알려다오.”
“말해.”
“이 몸은 이제 영영 클럽에 출입할 수 없는 것인가?”
잠시 질문을 이해하지 못한 나는 눈을 깜빡였고,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백염의 창날이 놈의 가슴을 파고드는 중이었다.
콰득. 우지직.
“악! 아아악! 농담이다! 농담이었다!”
“죽어, 제발 죽어…….”
“제발 살려다오! 갈비! 갈비에 금 갔다!”
“이 명륜 진사 갈비보다 생각 없는 새끼…….”
“진태경 씨! 진태경 씨! 안 됩니다!”
잠깐 눈깔이 뒤집혔던 게 분명하다.
잠시나마 분노로 인한 유체이탈을 경험한 나는 최 팀장의 만류에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가슴팍을 부여잡고 갈비뼈를 끼워 맞추는 녀석을 보자 다시 눈앞이 새하얗게 물들었지만, 초절정 고수다운 초인적인 정신력으로 버텨냈다.
‘시벌, 주화입마 올 것 같네.’
아마 저 꼴을 십 분만 더 지켜봤다면 기혈이 뒤엉켜 죽거나 불구가 됐을 거다. 미카엘 실베르트는 깨춤을 추며 스켈레톤 킹을 새로운 오른팔로 영입했을 테고.
그러나 다행히도, 주화입마보다 한발 앞서 찾아온 손님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