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770
#769화
아무리 냉철한 이성의 소유자라 해도 매 순간 평정심을 유지할 수는 없다.
미카엘 실베르트가 자신이 동요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연거푸 세 잔의 커피를 내리고 난 후였다.
‘동요한다고? 내가?’
이는 그에게 있어서도 꽤 놀라운 일이었고, 그 놀라움은 곧 불쾌감으로 변했다.
지도자는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 적에게도, 아군에게도. 심지어는 스스로에게도 마찬가지다.
이 전쟁에서 반드시 승리하기 위해서는 조금의 허점도 보여서는 안 되니까.
치열한 전투 도중 사람의 움직임이 무뎌지는 것은, 자신이 상처 입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그 순간부터다.
미카엘 실베르트는 어떤 고통도 무시할 수 있어야 비로소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했고, 그 생각대로 살아왔다.
아주 오래전,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 돌아온 그 날부터.
하지만 그랬던 그가 오늘 같은 동요를 보이는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원대한 꿈에 거의 다다랐다는 떨림.
또 다른 하나는…….
‘아마 그놈 때문이겠지.’
커피 잔이 뿜어내는 김 사이로 한 사람의 얼굴이 스쳐 지나간다.
자신보다 한참이나 젊고, 말도 안 되는 짧은 시간 만에 대중의 사랑을 독차지했으며 결국 가장 까다로운 장애물이 되어 버린 한 청년이.
‘진태경.’
입 안에서 맴도는 그 이름과 함께 목 언저리에서 느껴지는 미약한 통증.
슥.
미카엘 실베르트가 목을 빈틈없이 감싼 폴라티를 조심스럽게 내리자, 목 언저리에 선명히 각인된 검붉은 상처가 보였다.
한순간 스며든 열기로 인하여 일그러진 피부.
장장 십여 년 만에 처음으로 입은 상처이자, 며칠 전 진태경이 남기고 간 흔적을 더듬던 그때였다.
지이이잉.
어디선가 울리는 진동음에 채 아물지 않은 상흔(傷痕)을 어루만지던 손끝이 흔들렸다.
본능적으로 옷깃을 끌어 올려 상처를 덮은 미카엘 실베르트는 스마트폰 화면에 뜬 이름을 바라보았다.
[임마누엘]세상에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들은 많다.
그러나 후긴이라는 다리를 거치지 않고 그에게 직접 연락할 수 있는 임마누엘은 단 한 사람뿐이다.
달칵.
― 축하드립니다. 길드장님.
통화가 연결되자마자 들려오는 프랑스 대통령의 목소리에, 소리 내어 웃은 미카엘 실베르트는 자신의 앞에 놓인 세 잔의 커피를 곧장 바닥을 향해 기울였다.
그 안에 담겨 있던 자신의 초조함과 동요도, 뿌옇게 솟아오르던 김 사이로 슬며시 비치던 한 사람의 얼굴도 함께.
그리고 그렇게 모든 것을 쏟아 낸 뒤 텅 빈 잔에 남은 것은 오직 환희와 승리감뿐이었다.
‘내가…… 이겼다.’
왕좌가 마련됐으니, 이제 남은 것은 화려한 대관식.
지금 이 순간 미카엘 실베르트는 문득 궁금해졌다.
소식을 접한 진태경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눈앞에 선하게 떠오르는 그 광경에 입꼬리가 꿈틀거렸다.
* * *
이상한 일이다.
절대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 현실로 이루어졌음에도, 지금 내 마음은 이상하리만치 담담했다.
그리고 그럴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아마도 충분히 예견했던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씨벌.”
그래도 할 건 해야지. 야호라고 할 수는 없으니까.
습관처럼 쌍욕을 내뱉은 나는 지금 막 문을 열고 들어온 최 팀장을 바라보았다.
“결국…… 막지 못한 겁니까?”
최 팀장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계가 분명했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러시아까지 도왔는데도?”
“설령 이번 총회에서 중립을 지킨 영국이 저희와 뜻을 함께했어도 결과는 그리 달라지지 않았을 겁니다. 지금은 이미 전시(戰時) 상황이나 마찬가지니까요.”
정치에는 심 봉사나 다름없는 나조차도 상임이사국이 얼마나 막강한 권한을 지녔는지는 알고 있다.
TV에 나와 떠들어 대는 전문가들이 말하는 국제 정세라는 것이 결국 나라 간의 파워 게임(Power Game)이라는 것도.
어차피 이곳도 또 다른 무림이나 다름없다.
무림인들이 가문과 무공을 내세운다면 강대국은 군사, 경제, 그리고 생산력을 비롯한 각종 자원으로 자신들을 과시하며 약소국들을 찍어 누른다.
그리고 이번 UN 총회에는 강대국 중의 강대국인 상임이사국이 무려 다섯이나 힘을 합쳐 세계 헌터 연맹 재설립을 반대했다.
평소였다면 좋고 싫고를 떠나 그들이 지닌 힘과 영향력이 미치는 많은 국가가 부속품처럼 그 뜻을 따라갔을 것이다.
그러니까, 평소였다면.
“이미 콩고, 시리아, 에티오피아와 미얀마를 비롯한 20여 개국은 내전 발발 직전입니다. 곳곳에서 민심을 명분으로 쿠데타 세력이 일어나고 있으니, 그들로서는 하루라도 빨리 결정을 짓고 싶었겠죠. 다른 국가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고요.”
“빌어먹을.”
“공포가 법치(法治)를 무너트리고 있습니다. 미카엘 실베르트가 원했던 상황이었겠죠.”
이건 정치를 떠나 생존의 문제다.
당장 본인들의 집이 잿더미가 되게 생겼는데 힘 좋고 덩치 큰 떡대 여러 명이 소화전 앞을 가로막고 조금만 기다려 보라고 한다면 누가 고분고분하게 돌아갈까.
나 역시 그들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했다.
다만…….
‘알고 보니 그 소화기의 정체가 화염 방사기라는 건 전혀 다른 문제지.’
인정한다.
세계 헌터 연맹은 반드시 필요하다.
지난 대격변 당시, 끔찍한 불길이 사방으로 번지는 상황에서 그들은 훌륭한 소방관 역할을 해 주었으니까. 누구보다 헌신적인 영웅으로서 최선을 다했으니까.
하지만 미카엘 실베르트는 아니다.
사람들 몰래 불을 지른 장본인이 새로운 소방관으로 임명된다니, 그것만 한 블랙 코미디가 어디 있겠나.
그렇기에 나는 사흘 전, 모두의 앞에서 말했었다.
놈을 막아야 한다고. 앞으로 허락된 시간 안에 모든 힘을 다해 미카엘 실베르트의 발목을 붙잡아야 한다고.
그리고 이제, 뒤집어 놓았던 모래시계의 모래알이 끝나 가고 있었다.
그것도 불과 사흘 만에.
“이건…… 이건 너무 이르지 않나.”
방 안에는 나와 최 팀장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신음처럼 중얼거린 스켈레톤 킹이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힘껏 움켜쥐었다.
손아귀에서 형편없이 구겨진 종이 사이로 프린팅되어 있는 낯익은 얼굴이 보인다. 지금보다 더 젊고, 더 인간적인 표정으로 카메라를 바라보는 남자.
바로 미카엘 실베르트였다.
정확히는, 수십 년 전의 미카엘 실베르트.
지난 사흘간, 우리는 지금까지 지크프리트 바스만의 은거지에서 가져온 모든 자료와 미카엘 실베르트의 지난 행적을 조사했다.
놈을 저지할 수 있을 만한 단서를 찾기 위해서.
그러나 미카엘 실베르트는 전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유명 인사. 대격변 당시부터 수십 년간 차곡차곡 쌓여 온 정보는 너무나도 방대했고, 시간은 우리를 기다려 주지 않았다.
“막을 수 없는 거냐?”
나는 스켈레톤 킹의 물음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은거지에서 나온 자료를 담당한 매직 존슨이 지금쯤 무언가를 발견했을지도 모르지만, 그 가능성은 희박했다.
이미 사흘 전에 홀로그램으로 찾아왔을 당시에도 그는 모든 자료를 열 번도 넘게 검토하고, 또 검토한 뒤였으니까.
결국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대답은 절망에 가까운 짐작뿐이었다.
“그래. 아마도.”
“……!”
“지금까지 나온 결과는, 이미 모두가 아는 사실을 재확인한 것뿐이야.”
그 말을 끝으로 무거운 침묵이 내리깔린 그때.
파르르 떨리는 눈빛으로 산더미처럼 쌓인 서류 더미를 응시하던 스켈레톤 킹이 불쑥 입을 열었다.
“아니, 방법이라면 남아 있다.”
“방법이…… 있다고?”
“아주 간단하고 손쉬운 방법이다. 어렵게 돌아갈 필요조차 없는.”
그리고 다음 순간, 귓가를 파고든 스켈레톤 킹의 한 마디는 내가 조금도 예상치 못했던 것이었다.
“간악한 인간이여, 네가 이 몸을 소멸시키면 된다.”
“뭐?”
처음에는 잘못 들은 줄 알았다.
하지만 멍하니 반문하는 나를 향해, 스켈레톤 킹은 침착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 갔다.
“물론 지금 당장은 아니다. 모두의 앞에서, 중요한 인간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이 몸의 정체를 밝히고 소멸시켜라. 그래야 확실한 효과를 볼 수 있을 테니.”
“……!”
“간단한 해결책이지 않나. 놈의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을 만큼 강한 약점을 잡혔다면, 그 약점을 없애면 된다. 적당한 이유와 함께.”
얼음장 같은 기운이 등골을 타고 흐른다. 전신의 솜털이 곤두섰다.
평소와 같이 마주하고 있지만, 눈앞에 보이는 녀석이 그 어느 때보다 낯설게 느껴졌다.
깊게 가라앉은 눈빛. 흐릿하게 맺힌 미소. 담담한 목소리까지.
그 모든 것 하나하나가.
“이 몸은 몬스터다. 너희 인간에게는 악(惡) 그 자체나 다름없는 존재이며, 하찮은 인간의 시선 따위는 얼마든지 속이고 접근할 수 있을 정도로 교활하기도 하지.”
스켈레톤 킹이 씩 웃었다.
“너, 인간이여. 이제 와 고백하건대 사실 너는 그리 간악하지 않다. 단지 무식하게 강하고 훨씬 더 멍청할 뿐이다. 다른 인간들도 그 사실을 알고 있으니 직접 행동으로 보여 준다면 그리 어렵지 않게 납득할 것이다.”
쿵. 쿵. 쿵.
심장이 거세게 뛴다.
수많은 생각이 머릿속을 헤집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벌어진 입에서는 차마 토해 내지 못한 목소리들이 맴돌았다.
‘이런 미친…….’
단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고, 그렇기에 더욱 충격이었다.
그리고 일순간 얼어붙은 내 귓가로, 한 사람의 음성이 송곳처럼 파고들었다.
“가능성이 있습니다.”
“최 팀장님!”
본능적으로 터져 나온 내 고함에도 최 팀장은 털끝 하나 움찔하지 않았다.
그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말을 이었다.
“약점은, 그것이 노출되고 적이 이용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약점이라 부를 수 있습니다. 스스로 제거한다면 아무런 문제도 생기지 않습니다.”
“도대체 지금 무슨…….”
“대중들은 여전히 진태경 씨를 사랑합니다. 비록 테러리스트 집단의 토벌로 말미암아 선지자의 등장을 불러오긴 했으나 그것은 더 큰 선의(善意)를 위해서였고, 수많은 비난에도 온 힘을 다해 사람들을 구했으니까요. 특히 레비아탄과 뮌헨에서의 몬스터 웨이브에서 진태경 씨가 보여 준 희생정신은…….”
“그만!”
다시 한번 터져 나온 고함에 비로소 입이 닫힌다.
그러나 최 팀장의 침묵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그럼 어쩌실 생각입니까?”
“……!”
“다른 방법이 있습니까? 미카엘 실베르트가 세계 헌터 연맹을, 전 세계를 손아귀에 넣는 것을 막을 방법이 있습니까?”
숨이 막혔다.
순간 말문을 잃은 나를 향해, 최 팀장은 어딘가에 억누르고 있던 말들을 쉼 없이 쏟아 냈다.
“스켈레톤 킹을 아무도 모르는 먼 곳으로, 혹은 누구도 찾지 못할 곳에 숨길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미카엘 실베르트가 진실을 밝힌다면 사람들이 그 사실을 믿어 주겠습니까?”
“하지만 저 녀석은…….”
“예, 맞습니다. 그는 분명 많은 사람들을 구했습니다. 쓰촨에서, 부산에서, 일본과 뮌헨에서도 우리와 함께 싸웠습니다. 어쩌면 그로 인해 목숨을 건진 이들이 수십만이 넘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쿵.
강하게 내디딘 발걸음과 함께, 최 팀장의 얼굴이 눈앞으로 성큼 다가온다.
수많은 감정이 뒤섞인 한 쌍의 눈동자와 힘 있는 목소리가 뒤를 이었다.
“사람들은 믿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의 마지막 한 마디는, 꺼져 가는 모닥불처럼 힘없이 사그라졌다.
“스켈레톤 킹은, 그는 몬스터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