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772
#771화
지이잉.
진동음의 정체를 알아차리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당장 내 주머니에도 비슷한 소리를 내는 물건이 하나 들어 있었으니까.
“팀장님, 전화 온 것 같은데 안 받아요?”
“신경 쓰지 마십시오.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니까요.”
“왜, 내가 전화 받는 틈을 타서 기습이라도 할까 봐?”
“그건…….”
최 팀장은 말꼬리를 흐렸다.
사실 우리가 이렇게 대치하고 있다는 것 자체부터가 어불성설이다.
최 팀장이 제아무리 타고난 재능이 뛰어나고, 실력이 일취월장했어도 나를 막아서는 건 불가능하니까.
그럼에도 지금까지 그가 서 있을 수 있는 이유는, 온전히 내 배려 때문이었다.
어쩔 수 없이 쓰러트려야만 하는 친구를 향한 배려.
그리고 한편으로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배려이기도 하다.
“직통으로 걸려 올 정도면 제법 중요한 전화 같은데, 그냥 받으시죠. 어차피 나도 목격자들이 충분히 모일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데.”
“목격자…… 말입니까?”
“네. 목격자.”
그 세 글자의 의미를 곱씹는 최 팀장을 바라보며, 나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앞으로 벌어지는 일은, 지켜보는 사람들이 많을수록 좋을 겁니다. 우리 모두를 위해서라도.”
어쩔 수 없다.
최 팀장과 나는 이미 오래전부터 같은 배를 탄 몸. 내가 미카엘 실베르트를 죽이게 된다면 최 팀장 역시 한 패거리로 엮여 들어갈 것이 뻔하다.
그뿐인가. 평화 길드도, 아레스 길드도. 가족과 친구, 나와 연관된 사람들 모두가 다치게 된다.
그렇게 되면 모든 게 끝장이다.
‘최악의 상황을 막기 위해서라도, 많은 이목이 지켜보는 앞에서 선을 그어야 한다.’
이제 곧 나는 선지자와 버금가는, 혹은 그 이상으로 악명 높은 범죄자가 된다.
한솥밥을 먹던 동료에 의해 언데드 몬스터와 손을 잡았다는 사실을 추궁당하자, 주저 없이 그를 쓰러트리고 몬스터와 함께 도망친 인류의 배신자.
그리고…… 희대의 영웅. 미카엘 실베르트를 대낮에 죽인 희대의 살인범.
“뼈 한두 개 부러트리는 정도로는 안 끝날 겁니다. 전화 받는 김에 포션도 체크해 두세요.”
내 담담한 제안에 최 팀장이 입술을 깨물었다.
“……진심이시군요.”
“이미 고민은 끝났고, 가야 할 길은 정해졌으니까요.”
어느 순간부터 지켜야 할 것들이 많아진 나는 선택에 앞서 늘 고민에 고민을 거듭해야 했다.
그러나 한번 결정을 내렸다면 망설임 따위는 집어던져야 한다.
뒤를 돌아보는 순간 망설임이, 빈틈이 생기고 만다.
그렇게 나는 돌아보지 않는 법을 조금씩 배웠다.
무림에서. 현대에서.
날 죽이려 달려드는 온갖 괴물들과, 그 괴물보다도 더한 혐오스러운 인간군상의 틈바구니에서.
“이게 내가 선택한 길이고, 지금으로서는 최선입니다,”
스켈레톤 킹을 희생시키는 것과, 미카엘 실베르트에게 이 세상을 들어 바치는 것.
무엇하나 결정할 수 없는 그 양자택일(兩者擇一)의 상황 속에서 나는 결정했다.
이대로 허수아비처럼 조종당하느니, 차라리 영웅을 죽이고 몬스터와 결탁한 배신자가 되겠다고.
그렇게 해서라도 화근(禍根)을 뿌리 뽑겠다고.
‘놈은…… 오늘 내 손에 죽는다.’
화악.
뜨거운 열기가 전신으로 번진다. 씹어뱉듯 한 마디를 토해 낸 나는 한껏 끌어올린 기파(氣波)를 사방으로 퍼트렸다.
구구구궁!
건물 전체를 넘어, 인근을 뒤흔드는 거센 진동.
최 팀장의 발산한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그 거대한 힘에 소리 없이 틀어져 있던 홀로그램 TV가 치직거리며 꺼지고, 건물 곳곳에 설치되어 있던 경보 장치가 커다란 울음소리를 토해 냈다.
삑, 삑! 위이이이잉!
“도대체 이게 뭐…… 헉!”
“꺄아아악!”
“비상! 비상 상황입니다! 모두 대피해 주십시오!”
이미 앞서 최 팀장에 의한 진동에 웅성거리던 사람들의 목소리가 순식간에 비명으로 돌변했다.
문밖을 오가는 수많은 인기척과 그들이 토해 내는 다급한 외침 속, 허탈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던 최 팀장이 돌연 [영웅의 검]을 치켜세웠다.
푹!
바닥을 두부처럼 가르며 파고든 은빛 검신.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뜬 그가 자포자기한 듯 품에서 스마트폰과 포션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나는 볼 수 있었다.
크게 뜨여진 최 팀장의 눈과 얼마 지나지 않아 빠르게 화면을 터치하는 그의 손길을.
파앗.
홀로그램 특유의 빛과 함께 허공에 나타난 거구의 사내. 매직 존슨이 그 어느 때보다 다급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 젠장. 왜 이렇게 연락을 늦게 받는 거야? 내가 보낸 자료는 봤어? 조금 전에 뭔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 잠깐, 이건 또 무슨 상황이지?
횡설수설하던 매직 존슨이 이상함을 눈치채고 우리를 번갈아 봤지만, 나는 대답 대신 그를 향해 성큼 다가갔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의 손에 들린 서류를 향해.
‘이건.’
몇 장의 사진과 깨알 같은 글자들로 가득한 서류.
그러나 나는 무시무시한 동체 시력으로 불과 십여 초 만에 모든 내용을 파악했고, 동시에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던 가설들을 떠올렸다.
‘도대체 이게 왜…… 잠깐. 그렇다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뒤죽박죽으로 섞여 들어가는 생각들.
순식간에 머릿속을 가득 메운 희뿌연 안개와 그 안에 숨어 있는 실체를 더듬고 있던 그때.
“아.”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온 외마디 탄성과 함께, 금방이라도 폭발할 듯이 들끓던 몸속 기운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솨아아아.
흩어지는 기파와 순식간에 서서히 잦아드는 진동.
하지만 내 눈은, 뇌리를 채운 안개 너머로 언뜻 무언가의 실체를 확인한 마음은 그 어느 때보다 흔들리고 있었다.
‘만약 이게 사실이라면.’
그래, 정말 그렇다면…….
입안에서만 맴도는 말꼬리를 흐린 나는 멍하니 매직 존슨을 바라보다, 이내 최 팀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의 앞에 마치 엑스칼리버처럼 꽂혀 있는 [영웅의 검]도 함께.
“최 팀장님.”
“네.”
“왜 다짜고짜 검을 뽑고 그러세요, 무섭게.”
“네?”
“생각 좀 해야 하니까 우선 검부터 집어넣고, 사람들 진정시키세요. 바깥에 엄청 시끄럽네.”
“……네?”
뭐지, 미친놈인가?
최 팀장의 눈빛에서 고스란히 전해지는 그 생각을 읽자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주위에서 어떻게 쳐다보던, 한참을 정신 나간 놈처럼 혼자 피식거리던 나는 두 뺨을 강하게 후려쳤다.
짝!
너무 세게 때렸나.
온 힘을 다한 셀프 싸대기에 골이 흔들렸지만, 덕분에 잠깐 무단 탈영했던 정신이 위수지역을 벗어나기 전에 돌아왔다.
‘좋아.’
비로소 완전히 현실로 돌아온 나는, 얼떨떨한 표정을 짓고 있는 두 사람을 보며 입을 열었다.
“자, 여러분. 그럼 이제부터 다 함께…….”
호흡 좋고. 감정 좋고.
마지막은 엄숙하게.
“씨벌놈들은 싹 다 뒈지고, 우리는 살아남을 수 있는 네 번째 길을 뚫어 봅시다.”
그리고 이 장엄하고도 엄숙한 선언에, 최 팀장과 매직 존슨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진태경 씨…….”
– 헤이, 진…….
더 무슨 말이 필요할까.
나는 다 안다는 듯이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 순간에 엿본 새로운 희망에, 열양지기와는 다른 뜨거운 열기가 몸속 어딘가에서 끊임없이 샘솟고 있었다.
아니, 샘솟다 못해 흘러넘칠 정도다.
주르륵. 촤아악.
“……뭐여, 시벌.”
이게 진짜 흘러넘친다고?
네 번째 길보다 먼저 시원하게 뻥 뚫린 콧구멍으로 열기를, 아니 붉은 액체를 콸콸 쏟아내는 내 모습에 두 사람의 눈빛이 짜게 식었다.
“코피 납니다. 진짜 많이 납니다.”
– 마치 내 저택 광장에 설치된 분수를 보는 것 같군. 정확히는 분수에 포함된 아기 천사가 오줌을 저렇게 싸.
“그러니까 살살 좀 때리시지.”
– 이러다 과다 출혈로 쓰러지겠는데. 최, 포션 있어?
“안 그래도 방금 전에 하나 꺼내 놓은 거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쓰게 될 줄은 몰랐지만…….”
– 잘됐군. 얼른 진에게 줘. 그런데 아까 네 번째 길 운운했던 건 무슨 뜻이야? 아냐, 됐으니까 우선 코피부터 어떻게 하고 다시 설명해 봐.
“여기 받으십시오. 아, 피 튀니까 한 걸음만 좀 뒤로 물러나서요.”
“…….”
나는 최 팀장이 건네는 포션을 받아들며 생각했다.
어쩌면 곧장 미카엘 실베르트와 싸우러 가는 편이, 지금보다는 훨씬 멋있었을 거라고.
하지만 그래도 이게 나다.
당장은 멋없고, 더럽게 모양 빠지더라도 어떻게든 최선의 결과를 위해 발버둥 치는 남자.
남들이 모르는 곳에서 이 세상을 위해 불철주야 뺑이치는 현실적인 이 시대의 진정한…….
“뭐 합니까. 얼른 삼키십시오. 한입에 꿀꺽.”
– 진, 혹시 포션 잘 못 먹어? 원한다면 내가 도와줄까?
나는 시어머니처럼 구박하는 최 팀장과, 왠지 모르게 갑자기 입술을 핥는 매직 존슨을 두려운 눈빛으로 바라보다 후다닥 포션을 입에 털어 넣었다.
스아아.
그리고 얼음장처럼 차가운 치유의 기운이 몸속을 한 바퀴 돌았을 때, 거짓말처럼 멈춘 진동과 함께 정상으로 돌아온 홀로그램 TV에서 익숙한 얼굴을 발견할 수 있었다.
회색빛 머리카락. 회색빛 눈동자.
빛과 어둠. 그 사이 어딘가에서 태어난 것 같은 사내는 무수한 카메라 플래시와 카메라 앞에 서 있었고, 소리 없이 말을 이어 가는 그의 모습 아래로는 딱딱한 자막이 흐르고 있었다.
Live) [UN 긴급 총회, 압도적인 표결로 세계 헌터 연맹 재설립 승인.] [미카엘 실베르트 : 인류를 위한 UN의 결정에 아낌없는 찬사를 보내며, 새롭게 설립될 세계 헌터 연맹의 첫 발족식을 제안하는 바입니다.]
“음소거 모드 해제!”
삑.
최 팀장의 다급한 명령어에, 스피커에 갇혀 있던 소음이 물밀 듯이 흘러나왔다.
– 지금 하신 발언은, 스스로 세계 헌터 연맹의 대표가 되시겠다는 뜻입니까?
– 미카엘! 지금 같은 상황에서 발족식이 열릴 수 있겠습니까?
– 언제, 어디에서 열리길 바라십니까!
– 워싱턴 포스트지에서 나왔습니다. 한 말씀만 부탁드립니다!
비명과도 같은 외침들.
카메라에도 채 담기지 않을 만큼 수많은 취재진이 그를 중심으로 에워싼 채 질문을 던지고 있었고, 미카엘 실베르트는 대답 대신 무거운 표정으로 손을 내저었다.
슥.
분명 홀로그램인데도, 실제로는 적어도 수 킬로미터 밖에 있을 그였음에도 모든 것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한 사람을 에워싼 공기. 한 사람만을 위해 마련된 현장의 분위기.
그저 보고 듣는 것만으로도 숨 막히는 위엄을 뿜어내는 놈의 존재감이.
이제 저곳에서 자유롭게 입을 열고닫을 수 있는 것은, 오직 미카엘 실베르트 한 사람뿐이었다.
– 하느님께 맹세컨대, 본인이 사흘 전 세계 헌터 연맹의 재설립을 제안했던 것은 단 하나. 이 세상을, 우리 인류를 위해서였습니다.
– ……!
느껴진다. 저들을 휘감은 격동이.
그리고 생애 어느 순간보다 화려하게 빛나는 스포트라이트 앞에 선, 타고난 선동가이자 연설가가.
– 세계 헌터 연맹의 대표는 본인이 아닌 다른 이에게 돌아가야 합니다. 이미 한 차례 마왕으로부터 인류를 구한 대격변의 영웅, 살아 있는 구세주!
공력이 실린 목소리가 끝도 없이 뻗어 나갔다. 격동을 이기지 못한 사람들이 하늘을 보며 부르짖었다.
스카이. 슬레이어. 천태민.
한 사람에게 주어진 여러 개의 이름. 하지만 동시에 적지 않은 숫자가 다른 누군가의 이름을 연호하고 있었다.
바로 미카엘 실베르트의 이름을.
그리고 그렇게 불길이 타오르듯 번지는 열기 속, 놈은 거침없이 말을 이어 갔다.
– 발족식은 반드시 열릴 것입니다. 스스로를 선지자라 칭한 미친 테러리스트도, 그 어떤 몬스터도, 설령 마왕이 돌아온다 해도 세계 헌터 연맹의 헌터들은 한자리에 집결하여 자신들의 대표를 뽑고 인류의 검과 방패가 되었음을 맹세할 것입니다!
– 와아아아아아!
귀가 먹먹하다. 이제 스피커가 아닌 두 귀로도 저들의 함성을 들을 수 있었다.
굳게 닫힌 문틈 사이로, 이 도시의 모든 이들이 하나가 되어 외쳤다.
아니, 어쩌면 전 세계 곳곳에서.
빛이 스며들고 전기가 통하는 그 모든 장소에서.
수많은 환호에 둘러싸여 홀로 빛나고 있는 저 영웅이, 이 모든 일의 배후라는 사실을 짐작조차 하지 못한 채.
그리고 타오르다 못해 터져 나오는 엄청난 열기 속, 미카엘 실베르트는 어느 때보다 힘 있는 눈빛과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열광하는 사람들을 향해. 자신을 비추는 카메라를 향해.
혹은…….
– 이틀 후. 대한민국의 서울.
이곳에서 놈을 지켜볼 수밖에 없는, 나를 향해.
미카엘 실베르트는 전 세계에 선언했다.
– 구원자의 고향이자 세계 헌터 연맹이 처음 시작되었던 그곳에서, 우리는 다시 한번 그때와 같이 일어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