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778
#777화
드디어 시작됐구나.
나는 마음속으로 뇌까리며 홀로 걸음을 옮기는 누군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아니, 나뿐만 아니라 이 자리의 모두가 마찬가지다.
곳곳에 설치된 카메라와 원탁을 채운 삼백여 쌍의 눈동자가 한 사람을, 정확히는 미카엘 실베르트를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저벅저벅.
일말의 망설임 없이 나아가는 발걸음.
주위의 웅성거림은 이미 사그라든 지 오래다.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입을 다문 사람들은 각기 다른 감정으로 미카엘 실베르트를 바라보는 중이었다.
누군가는 갑작스럽게 나선 그의 모습에 혼란스러워하는 기색을 감추지 못했고, 누군가는 깊어진 눈빛으로 생각에 잠겼으며, 혹은 이 모든 상황이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거나 옅은 웃음을 띤 이들도 있었다.
나는 그런 사람들의 모습을 모두 눈에 담았다.
그들이 순간 드러낸 감정과 미세한 입꼬리의 움직임마저 빠짐없이 보았고, 수많은 얼굴들을 머릿속에 각인시켰다.
그리고 다음 순간.
슥.
미카엘 실베르트가 발걸음을 멈추었다.
이 거대한 원탁의 중심이자 수십 년간 오직 한 사람을 위해 존재했던 그 공간의 코앞에서.
하지만 놈의 마지막 한 걸음은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가로막힌 것처럼 나아가지 못했고, 굳게 닫혀 있던 입술이 열렸다.
“여러분. 오늘 저는, 참으로 충격적인 소식을 접했습니다.”
잠겨 있는 목소리. 눈가에 맺힌 물기가 조명을 받아 반짝인다.
이 예상치 못한 상황에 동요하는 사람들과 녹화 중인 카메라를 차례차례 응시한 미카엘 실베르트가 말을 이었다.
“발족식이 시작되기 직전, 두 청년이 찾아와 그 소식을 전해 주었습니다. 처음에는 믿기 힘들었지만 결국 현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고, 제게는 마음을 추스를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그 소식을 전해 주었다는 두 사람이 누구인지, 또 소식의 내용이 무엇인지 알려 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적절한 흐름과 타이밍에 튀어나온 누군가의 질문.
마치 사전에 계획된 것처럼 완벽하다.
아니, 계획된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대본대로 흘러가는 이 한편의 뮤지컬 속에서, 적절하게 끼어든 단역의 물음에 주인공은 다음 대사를 읊었다.
“저를 찾아온 두 청년의 정체를 밝히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그 두 사람 모두 익히 알려진 인물이고, 지금도 이 자리에 함께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소식의 내용을 제가 직접 여러분께 말씀드리는 것은 곤란합니다.”
“어째서입니까?”
“제게는 그럴 만한 자격이 없으니까요.”
침착하게 대답한 미카엘 실베르트가 고개를 돌려 나를, 정확히는 내 오른편에 앉은 최 팀장을 바라보며 덧붙였다.
“핏줄을 이어받은 가족이라면 모를까.”
“……!”
아무리 둔감한 사람이라 해도 저 말의 의미를 눈치채지 못하는 것이 이상한 상황.
순식간에 주위를 물샐틈없이 감싼 수백 명의 시선 사이로, 은밀히 전해진 음성이 귓가를 파고들었다.
– 자네가 무슨 마음으로 이곳에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부터는 한 가지만 기억하게.
미카엘 실베르트.
놈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조금 전 흘렸던 악어의 눈물이 아닌, 오직 야망으로 빛나는 두 눈동자로.
– 모든 선택에는, 그에 합당한 결과가 뒤따른다.
“…….”
– 그러니 부디 신중히 선택하길 바라네. 단 한 번뿐인,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일 테니.
마지막 권고와 함께 쏘아지는 그의 눈빛이, 주위에서 쏟아지는 그 시선들이 너무나도 뜨거워서 나는 그만 눈을 감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그래. 결국, 이렇게 되는구나.
처음부터…….
‘이 길밖에는 없는 거였구나.’
텅 비어 버린 듯한 공허함과 함께 눈을 떴다. 동시에 시선이 마주친 최 팀장이, 내 눈동자에 담긴 뜻을 읽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드르륵.
새로운 주인보다도 오랜 세월을 버텨 온 의자가 천천히 뒤로 밀려난 그 순간.
“오늘의 발족식의 목적인 대표 선출에 앞서, 제 외조부이신 천태민 헌터께서는…….”
마침내 흘러나온 한 사람의 이름과 함께 찾아온 숨 막히는 고요함 속에서, 구세주의 유일한 혈육은 나직이 말을 이었다.
“병세가 깊어 이번 전쟁에 참전하지 못하게 되셨음을 알려 드립니다.”
“……!”
“……!”
보이지 않는 거대한 충격이, 사방을 휩쓸었다.
* * *
제1 국회의사당에 숨 막히는 침묵이 내려앉았다.
지금 이 순간 혼란과 충격으로 얼어붙은 사람들이 할 수 있었던 것은, 조금 전 자신들이 들었던 그 한 마디를 끊임없이 되새기는 것뿐이었다.
‘제 외조부인 천태민 헌터께서는, 병세가 깊어 이번 전쟁에 참전하지 못하게 되셨음을 알려드립니다.’
발족식이 시작된 지 불과 십여 분만에 터진 폭탄.
아니, 어쩌면 또 다른 의미로의 재앙.
‘스카이가 병환이라니. 이게 도대체 무슨.’
‘그분이 어찌…… 그럴 리 없다. 말도 안 돼.’
가장 거세게 현실을 부정하는 이들은 주로 원로라 불리는 구세대의 헌터들이었다.
천태민을, 인류를 마왕으로부터 구원한 대영웅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는 그들이 느낀 충격은 그 누구보다 컸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들의 기억 속에 존재하는 천태민은 인간을 넘어, 현인신(現人神)에 가까운 존재였으니까.
단신으로 수만에 달하는 몬스터 군단을 격멸하고, 강대하기 그지없던 S급 몬스터들의 사지를 찢어발기던 그 모습.
그리고 그 압도적인 무용만큼이나 강렬했던 위엄.
그렇기에 천태민과 함께라면 기꺼이 사지(死地)로 향할 수 있었다.
어깨를 나란히 하고 파도처럼 밀려드는 몬스터들을 가르며 나아가고, 또 나아갔다.
원로들이 끔찍하기 짝이 없는 전장을 기억을 떠올릴 수 있는 것은, 바로 그 기억 속에 천태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와 함께 인류의 승리를 이끌었다는 찬란한 영광이 그 안에 스며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병이라니.
마왕 아스모데우스조차 쓰러트린 인류의 구세주가, 전쟁에 참여하지 못할 만큼 병환이 깊어졌다니.
사람들이 느낀 충격은 이내 허탈감이 되었고, 몇몇 원로들은 분노마저 느꼈다.
“도대체, 도대체 이게 무슨 소리인가!”
“병세가 깊다니. 자네의 외조부께서 어떤 분이신지 몰라도 유분수지!”
“자세히 설명해 보게. 그분께서 그럴 리가 없어!”
그러나 목소리까지 높인 원로들의 바람과는 반대로, 천태민의 하나뿐인 외손자는 침착하게 고개를 내저을 뿐이었다.
“제가 말씀드린 것은 모두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자네!”
“선배님들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합니다. 몇 달 전의 저 역시 그랬으니까요.”
“그게…… 무슨 말인가?”
“언제나 의문이었습니다. 외조부님께서는 어디 계신지. 도대체 무슨 이유가 있어 그토록 오랜 시간 동안 하나뿐인 손자에게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시는지.”
최민우가 모두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이정룡 부길드장. 그리고 석고준이 사망한 뒤에야 알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그분께서 알 수 없는 이유로 코마(Coma), 즉 의식불명의 상태에 빠지셨고 극소수의 인물들이 그 사실을 숨기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
다시 한번 거대한 충격이 주위를 휩쓸었다. 그러나 이번 충격이 불러온 침묵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믿기 힘들겠지만 모두 사실이야. 내가 보증하지.”
불쑥 들려온 저음의 목소리에, 사람들의 시선이 한 방향으로 쏠렸다.
줄곧 입을 다문 채 상황을 주시하던 거구의 흑인이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매직 존슨!”
“다, 당신도 알고 있던 거요?”
고개를 끄덕인 매직 존슨이 대꾸했다.
“몇 달 전 저 친구들의 연락을 받고 이 나라에 왔었지. 그곳에서 의식을 잃은 스카이를 보게 될 줄은 몰랐지만.”
“그, 그렇다는 건 정말로…….”
“그래,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지식과 마법을 떠올려봐도 그의 의식을 회복시킬 만한 방법을 찾지 못했어. 물론 다른 누군가에게 털어놓을 수도 없었지. 만약 이 엄청난 비밀이 새어 나간다면 더한 혼란이 생겨날 테니까.”
사람들은 문득 당시의 상황을 떠올렸다.
어느 순간부터 서서히 증가하기 시작한 마력 수치와 이변(異變)들.
중국에서는 아크 리치가 몬스터 군단을 이끌고 쓰촨을 피로 물들였고, 사람들의 불안감은 점차 커져만 가고 있었다.
“하지만 더 이상은 감출 수 없게 됐지. 이제 전 세계가 스카이를 찾고 있고, 오늘로 첫발을 내디딘 세계 헌터 연맹은 UN이 그랬던 것처럼 저들이 원하는 답을 내놓아야 해.”
그 순간 사람들의 머릿속을 스친 단어는 하나였다.
‘지도자.’
천태민이 쓰러진 지금, 그들에게는 어떻게든 새로운 지도자가 필요했다.
구세주의 빈자리를 최대한 메울 수 있는, 이 거대한 원탁에 둘러앉은 삼백여 명의 인물 중 과반수의 지지를 받을 수 있는 새로운 영웅이.
‘그렇다면?’
생각이 거기까지 미쳤을 때,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미 마음의 결정을 내린 후였다.
무력. 명성. 인망. 희생정신과 용기. 지도력…….
그들에게는 지도자를 평가하는 각자의 기준이 있었고, 이미 영웅이라 불리는 이들 중에서도 조건을 충족시킬 만한 인물은 한 줌에 불과했으니까.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한 사람이 있었다.
미카엘 실베르트.
수많은 이들의 시선이 그를 스쳐 지나갔다.
그중에는 마침내 때가 왔다는 듯 의기양양하게 미소짓는 이들도 있었고, 신중하게 생각에 잠겨 있는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미카엘 실베르트는 이처럼 뒤바뀐 상황 속에서도 결코 내색하지 않았다.
이미 마지막 한 걸음만을 남겨 둔 그는, 그다음을 생각하고 있었다.
‘예상했던 시기보다는 이르지만…… 제거해야겠어. 하루라도 빨리.’
벌써 세계 헌터 연맹이라는 절대 권력이 손에 만져지는 듯했지만, 두고두고 거슬릴 장애물은 반드시 치워야 하는 법.
미카엘 실베르트는 깊게 가라앉은 눈동자로 한 사람을 바라보았다.
투표가 시작되는 와중에도 굳게 입을 다문 채, 침묵하고 있는 진태경의 옆에는 담담한 표정을 한 금발의 몬스터가 있었다.
* * *
나는 손에 들린 철 조각을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이걸 뭐라고 하더라.’
도편추방제? 도편추첨제?
고대 아테네에서 독재자를 추방할 때 쓰던 방법에서 기원했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잘은 모르겠다.
다만 확실한 것은 내 손에 들린 것이 도자기 파편이 아닌 타워 실드의 파편이고, 여기에 가장 많이 이름이 쓰인 사람은 추방되는 것이 아니라 세계 헌터 연맹의 지도자가 된다는 것이다.
– 그 반대였으면 참 좋았을 텐데. 안 그러냐?
문득 흘려보낸 전음(傳音)에, 기대하지 않았던 대답이 돌아왔다.
– 그게 무슨 뜬금없는 소리냐.
– 그냥 해 본 소리지, 뭐. 그나저나 이번에는 대답하네?
– 아마도 이게 마지막일 테니까.
나는 철조각을 만지작거렸다.
– 미친 새끼. 웬일인가 했더니, 아직도 그 소리네.
– 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안다. 하지만 그건 너무…….
– 위험하다고?
잠시 침묵하던 스켈레톤 킹이 대답했다.
– 그래. 이 몸은 지금까지도 확신하지 못하겠다.
– 가능성은 반반에 가까워. 그리고 이건 내 짐작이지만, 성공 가능성이 미세하게 더 높고.
– 알고 있나? 그건 모든 것을 잃을 확률이 절반이나 된다는 뜻이다.
– 그래? 나한테는 모든 것을 지킬 수 있는 확률이 절반이나 된다는 뜻으로 들리는데.
– ……!
– 날 믿어.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익숙한 얼굴들, 믿을 만한 사람들이 곁에 있다. 모두가 내 전우고, 친구들이다.
– 나를 정 못 믿겠으면, 우리를 믿든지.
이번 침묵은 처음의 것보다 더 길었다. 그리고 나는 아주 오랜만에, 스켈레톤 킹과 눈을 마주할 수 있었다.
–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냐? 그 위험을, 네 가족과 친구들이 다칠 수 있는데도.
나는 대답했다. 어쩌면 처음 녀석을 만난 그날부터 정해져 있던 그 사실 그대로.
– 너도 내 친구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