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78
#77화
남자 둘이 술잔을 기울이다 보면 온갖 얘기가 다 튀어나오기 마련이다. 돈, 사람, 미래…….
그중에서도 진호 형이 선호하는 대화 주제는 여자였다.
그는 술만 들어갔다 하면 세상에서 가장 슬픈 남자가 되어 첫사랑을 회상하곤 했다.
‘고2 때 처음 만났지.’
‘이 인간 또 취했네.’
‘때는 바야흐로 꽃이 만개한 3월의 새 학기. 교실 문 열고 걔가 딱 들어오는데…….’
‘눈앞이 아찔했겠지. 귀에서는 막, 천국의 종소리가 댕댕 울려 퍼지고?’
‘어? 어떻게 알았냐?’
‘백 번도 넘게 들었으니까. 천국의 종소리는 개뿔. 아주 소설을 써라.’
‘네가 사랑을 몰라서 그래, 인마. 하긴 모태 솔로가 뭘 알겠냐마는.’
‘못 사귄 게 아니라 안 사귄 거거든.’
‘모쏠 새끼들이 꼭 저 소리 하더라. 무슨 모쏠 가이드북이라도 있냐? 너 누구 좋아해 본 적도 없지?’
‘……이, 있을걸?’
‘어휴, 됐다. 백 번, 천 번 말해 봤자 뭐 하냐. 직접 겪어 봐야 알지. 술이나 한잔 더 따라 봐.’
몇 달 전의 술자리가 지금 갑자기 생각난 이유는 간단했다.
‘형 말이 맞았어.’
댕- 대앵-
들린다. 종소리가.
* * *
송 양.
늘씬한 체구에 조막만 한 얼굴. 식재료가 가득 담긴 봉투를 양손에 주렁주렁 매단 천사가 나를 발견하고 멈칫했다.
“누구?”
고혹적이면서도 청량한 목소리에 정신이 아득해지고, 오밀조밀 인형 같은 이목구비에 가슴이 쿵쾅거렸다.
‘세상에.’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지난 27년간 모태 솔로로 지내 왔던 게 바로 오늘을 위해서였다는 생각이 든다.
머릿속에서는 이미 시뮬레이션이 돌아가는 중이다.
‘집은 마당이 있는 전원주택. 아이는 둘에 고양이 한 마리. 완벽해.’
운기조식 때도 꿈쩍 않던 연애 세포가 살아 숨 쉰다.
나는 최대한 낮은 목소리로 말하려 입을 열었다. 자칭 연애 고수라는 진호 형은 마음에 드는 여성에게는 중저음을 사용하라고 누누이 강조해 왔다.
“저는…….”
“이쪽은 진태경. 송 양도 알지? 그 왜, 지난번에 한 번 얘기했었잖아. 내가 아끼는 동생이 C급 헌터로 재각성 했다고.”
“아, 그분이세요? 생각보다 젊으시네.”
“…….”
나는 난데없이 끼어든 임꺽정의 발을 지그시 밟으며 재차 입을 열었다.
“네. 제가 바로 그…….”
“뭘 이렇게 많이 사 오셨습니까? 따로 예약해 둔 식당이 있는데요.”
“비싸고 양도 적은데 거길 왜 가요? 그냥 안에서 고기나 좀 구워 먹으면 되지.”
“…….”
최 팀장. 당신 내 손으로 죽인다. 반드시 죽일 거야.
훼방꾼들을 차례차례 노려봤다. 내 살벌한 시선에 뭔가 말하려던 김 집사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기회는 지금뿐이야.’
아무도 끼어들지 않는 완벽한 타이밍. 마침 송 양도 나를 보고 있다. 나는 매력적인 중저음으로 말했다.
“안녕하세요. 이번에 C급 헌터가 된 스물일곱 살 진태경이라고 합니다. 생일은 4월 22일. 별자리는 황소자리고, 혈액형은 RH+A형입니다. 취미는 독서와 영화 평론.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
“…….”
“…….”
아무도 입을 열지 않는 고요한 침묵, 마침내 그녀의 붉은 입술이 열렸다.
“아, 네.”
송 양이 사슴 같은 눈망울로 빤히 나를 바라봤다. 내 동굴 목소리에 제대로 뻑이 간 표정이다. 거기에 취미가 독서와 영화 평론이라는 지적인 면모까지 부각시켰으니 100퍼센트다.
‘고마워 진호 형. 잘되면 술 살게.’
마음속으로 환호성을 내지르던 그때, 최 팀장이 더듬거리는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시, 식사라도 하면서 천천히 얘기해 볼까요? 송이 씨도 장 보느라 고생하셨을 텐데.”
또다시 대화를 방해받았다는 분노는 그녀의 이름을 듣는 순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송이 씨요?”
“송송이. 송송이예요. 제 이름.”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한 송 양, 아니 송이 씨가 가게 안으로 쏙 들어갔다. 나는 멍하니 서서 그녀의 이름을 되새겼다.
“송송이…….”
세상에, 이름도 예뻐. 매력적이야. 눈부셔.
머리부터 발끝까지 내 스타일이다. 운명의 상대를 만났다는 생각에 반쯤 넋이 나간 나를 깨운 건 최 팀장의 목소리였다.
“태경 씨.”
“예, 예?”
“저기…… 아닙니다. 천천히 들어오세요.”
한숨을 푹 내쉰 최 팀장이 등을 돌렸다. 뭐야, 왜 저래?
“제가 뭐 잘못했어요?”
내 물음에 최 팀장의 뒤를 따르던 김 집사가 멈칫했다.
“그…… 힘내십시오.”
두 사람이 떠나자 남은 건 임꺽정과 나, 단둘뿐이었다.
“형님. 제가 뭐 실수한 거예요?”
“실수? 아니, 넌 죄를 저지른 거야.”
“죄요?”
“그래. 결코 용서받지 못할 죄를 지었지.”
“헉.”
내가 무슨 실수라도 했나? 가슴이 덜컥 내려앉은 그때, 임꺽정이 굳은 얼굴로 말을 이었다.
“한 여자의 마음을 훔친 죄.”
“……!”
“짜식. 남자인 나도 반할 뻔했다. 송 양 표정 봤어? 완전 뻑 갔더라. 게임 끝이야, 끝!”
“저, 정말요?”
“축하한다, 태경아! 국수 먹자!”
“형니임-!”
와락!
나는 감격을 이기지 못하고 임꺽정의 품에 안겼다. 그가 호탕하게 웃으며 내 등을 두드렸다.
“애는 몇 명 낳을 거야? 뭐? 두 명? 그러지 말고 세 명 해! 으하하하!”
* * *
가게 내부.
문 앞에 바짝 붙어 있던 최 팀장과 김 집사가 서로를 마주 보았다.
“김 집사님, 어떻게 생각하세요?”
“마법 아이템으로 소리를 차단한 도련님의 현명한 판단에 감탄할 뿐입니다.”
“그렇죠?”
“그렇습니다.”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뒤를 힐끔거렸다. 송송이는 부산하게 식사를 준비 중이었다.
“만약 방금 대화를 송이 씨가 들었으면…….”
“송이 씨께서 당장 길드를 탈퇴하더라도 저희가 위약금 물어 줘야 됩니다.”
“저런 멘트는 어디서 배운 걸까요? 혹시 김 집사님께서 젊었을 때…….”
김 집사가 정색하고 대답했다.
“도련님, 방금 말씀은 상당히 듣기 거북하군요. 저런 멘트는 대격변 이전에도 없었습니다.”
“태경 씨, 모태 솔로겠죠?”
“모태 솔로가 아니면 제가 오늘부터 김 집사가 아니라 박 집삽니다.”
“임 헌터님도 문제가 있던데요.”
“이런 말씀 드리기 좀 그렇지만, 입마개를 씌우고 싶었습니다.”
“임 헌터님, 미혼 맞죠?”
“안타깝게도 기혼입니다. 애도 둘 딸린.”
“도대체 어떻게……?”
“저도 그게 의문입니다.”
길드의 미래가 어둡다.
두 사람이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젓던 그 순간이었다.
“저기요.”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앞치마를 걸친 송송이가 허리춤에 손을 얹고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두 분이서 뭘 그렇게 속닥거리세요? 준비하는데 손 하나 까딱 안 하고.”
“아, 송이 씨. 그게.”
“식사 후에는 저희가 치우겠습니다.”
“됐고요. 식사 준비 끝났으니까 와서 들어요. 그리고 임씨 아저씨랑…….”
송송이가 한숨처럼 말을 이었다.
“그, 황소자리도 부르시고.”
* * *
적당히 달궈진 불판 앞.
내가 비장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송이 씨.”
집게와 가위를 막 집어 든 송이 씨가 멈칫했다.
“네?”
“주십시오. 제가 굽겠습니다.”
“괜찮아요. 이따 뒷정리할 때나 도와주시면 되는데.”
“제 취미가 고기 굽기, 특기는 고기 자르기입니다.”
“……독서와 영화 평론 아니었어요?”
“그건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습니다.”
테이블 밑으로 임꺽정의 발을 건드리자 곧장 지원 사격이 들어왔다.
“송 양이 몰라서 하는 말인데 이 친구가 고기 하나는 끝내주게 잘 구워. 언제 한번은 불판 다섯 개를 동시에 막, 어? 고기를 씹으면 육즙이 아주 그냥 입 안에서 주르륵. 머릿속에서는 폭죽이 펑펑!”
나는 점잖게 한마디를 보탰다.
“별자리는 황소자리.”
“그렇지! 황소자리 남자가 말이야, 고기도 잘 굽고 성격도 순수하고 참 우직…….”
우지직.
최 팀장이 부러진 나무젓가락을 내려놓으며 중얼거렸다.
“죄송합니다. 힘 조절이 안 돼서.”
“여기요.”
기다렸다는 듯이 새 젓가락을 건네주는 송이 씨의 모습에 억장이 무너진다. 인정하긴 싫지만 미인과 미남. 선남선녀의 투 샷은 매우 잘 어울렸다.
‘설마. 아니겠지?’
애써 부정해 보지만 마음이 착잡하다.
나는 울적한 얼굴로 고기를 불판에 올렸다.
치이이익.
송이 씨는 최 팀장이랑 무슨 사이일까.
치이이익.
예전부터 친분이 있었던 건 확실하다. 괜히 길드 창립 멤버가 아닐 테니까.
치이이익.
생각해 보니까 최 팀장 저 자식 수상해. 아까부터 대화를 끼어들지 않나, 멀쩡한 젓가락은 왜 부러트려서 맥을 끊어?
치이이익.
B급 헌터라는 놈이 힘 조절을 못 해서 그랬다는 게 말이야, 방구야. 송이 씨 앞이라고 힘 센 거 자랑하나? 나는 쇠젓가락으로 매듭도 지을 수 있는데…….
“저기요.”
퍼뜩 고개를 들었다. 호수처럼 맑은 눈동자가 나를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타요.”
“예, 예?”
“탄다구요. 고기.”
“헉!”
치지지직.
황급히 고기를 뒤집었지만 이미 늦었다.
“그냥 제가 할게요.”
“아뇨. 제가.”
“생각해 보니 그래도 오늘 처음 오셨는데 고기는 제가 구워서 대접하는 게 맞죠.”
세상에, 외모만 천사 같은 게 아니다.
‘아, 송이 씨. 당신은 도덕책.’
그녀의 비단결 같은 마음씨에 다시 한번 반했다.
서걱. 서걱.
치이익.
집게를 건네받은 그녀가 솜씨 좋게 고기를 굽고 자른다.
나는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봤다.
‘고기 굽는 모습도 예쁘네.’
대충 틀어 올려 쪽진머리, 분주히 움직이는 희고 가느다란 손. 동작 하나하나에서 빛이 난다.
“으음.”
얼마나 지났을까, 신중한 얼굴로 고기를 지켜보던 그녀가 말했다.
“다 익었다. 거기 접시 좀 주실래요?”
“옙.”
일회용 용기에 다 익은 고기를 척척 담아낸다. 아까부터 느낀 건데, 한두 번 해 본 솜씨가 아니다.
“이런 거 많이 해 보셨나 봐요.”
“네.”
“혹시 고기 집 알바 하셨어요?”
“네.”
“우와. 얼마나요?”
“2년이요.”
“히야, 언제요?”
“고등학교 때요.”
“허어, 그때 알바 하는 애들 별로 없었는데.”
“아, 네.”
어쩜 좋아. 생활력 강한 것도 딱 내 스타일이야.
이상하게 대답이 짧은 것 같지만 기분 탓일 거다. 호응을 위한 추임새도 마음껏 퍼부어 주었다.
‘대화 자체는 순조로워.’
진호 형이 말하길, 공통점부터 파고들어야 호감을 얻을 수 있다고 했다. 나는 열정적으로 말을 내뱉었다.
“저랑 비슷하네요. 하루 두 탕, 세 탕도 뛰고 그랬는데. 어느 하루는 일 끝나고 집에 왔더니…….”
“아, 네. 그런데 저기.”
“네?”
“너무 가까운 것 같아서요. 불판 아직 뜨거운데…….”
나도 모르게 몸이 송이 씨를 향해 잔뜩 기울어진 상태였다.
“괜찮습니다. 그까짓 거 조금 데이고 말죠. 하하하!”
“그래도 조심하는 게.”
“정말 괜찮아요. 걱정 안 하셔도 돼요.”
“…….”
어쩐지 송이 씨의 낯빛이 어둡다. 이거 설마.
‘내가 다칠까 봐 걱정하는 건가!’
충격이다. 오늘 처음 만난 나를 이렇게까지 생각해 주다니.
그리고 확실히 알았다. 그녀도 내게 관심이 있다는 사실을.
환청처럼 진호 형의 목소리가 어디선가 들려왔다.
‘커플이 되는 가장 중요한 덕목이 뭔지 알아? 바로 용기야.’
‘태경아, 명심해라. 용기 있는 자가 미인을 얻는다.’
형, 나 이제야 알 것 같아. 그리고 고마워.
‘그래. 용기를 내자.’
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지금부터 하려는 말은 27년 인생을 통틀어 난생처음으로 뱉는 거다.
“송이 씨. 우리 오늘부터 1일…….”
그 순간, 벌떡 일어난 최 팀장이 외쳤다.
“1일! 오늘은 진태경 헌터님이 우리 길드 가족이 된 첫날입니다! 김 집사님?”
“예, 도련님! 술 준비됐습니다!”
언제나 느긋하던 김 집사가 소주잔을 번개 같은 속도로 채워 넣었다.
콸콸콸!
꼴꼴꼴이 아니라 콸콸콸이다.
반은 버리고 반은 때려 붓는 모습에 어이가 없었지만 나는 반드시 해야 할 말이 있었다.
“송이 씨. 다시 한번 말할게요. 우리…….”
최 팀장이 술잔을 번쩍 치켜들었다.
“우리 길드를 위하여!”
“송이 씨. 저쪽은 신경 쓰지 말고 내 말 들어요.”
송이 씨가 대답했다.
“위하여!”
“…….”
내 말 못 들은 거겠지? 그래, 못 들었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