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781
#780화
세상에는 수많은 사건과 그에 따른 가능성이 존재한다.
문제는 그중 어느 것도 확실치 않다는 것이다.
아무리 문명이 발달하고, 최첨단 과학이 지금껏 닿을 수 없는 영역까지 도달했어도 완전무결한 100%는 존재하지 않는다.
하물며 기계가 아닌 사람의 일이라면 더더욱.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목의 상처는 나았나, 미카엘?”
파르르 떨리는 회색빛 눈동자를 보며 나는 확신했다.
아주 작은 단서로부터 시작된 이 믿을 수 없던 의문이, 비로소 어두컴컴한 실체를 드러냈다는 것을.
마침내 놈을, 미카엘 실베르트를 낭떠러지로 몰았다는 것을.
그러나 나는 입가에 맺혀 있던 웃음을 지웠다.
전세(戰勢)를 뒤집었다는 기쁨보다 눈앞의 상대에 대한 혐오가 더욱 컸기에.
나는 온통 회색빛으로 물든 저 사내의 모든 것을 경멸했다.
“이 버러지 같은 새끼.”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온 목소리가 정적을 깨트린다.
그리고 앞서 스켈레톤 킹의 정체를 밝혔을 때와는 달리, 이번에는 좌중의 그 누구도 나를 비웃지 못했다.
아니, 지금 저들은 조금 전 자신들이 들었던 말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혹은 너무나 생각지도 못한 진실을 받아들일 수조차 없었거나.
“지금 그게…… 도대체 무슨 소리지?”
크로노스 길드장의 목소리다. 나는 미카엘 실베르트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입을 열었다.
“물어봐, 당사자한테 직접.”
숨 막히는 침묵 속, 수백 쌍의 시선이 미카엘 실베르트를 향해 쏠렸다.
물론 그중에는 이미 조사를 통해 알고 있던, 또는 몰랐던 놈의 지지자들 역시 포함되어 있었다.
“아까 보니까 다들 앞뒤로 열심히 빨아 주던데, 그중에 뭐 하나 제대로 알려 준 놈이 없었나 보네. 하긴, 그럴 만도 하겠지. 안 그래?”
미카엘 실베르트는 대답 대신 나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아직도 파문이 남아 있는 놈의 회색빛 눈동자에서, 지금쯤 머릿속을 떠다니고 있을 수많은 생각이 읽히는 듯했다.
하지만.
“괜히 힘들게 대가리 굴리지 마라. 이미 알고 있잖아?”
모든 공식이 성립된 이상, 답은 나왔다.
“미카엘 실베르트.”
마치 오랫동안 헤매던 미로를 빠져나온 기분이다.
그리고 사방을 가로막았던 벽을 지나, 마침내 도달한 출구에는 한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다.
빛과 어둠. 그 사이 어딘가에서 서성이다 끝끝내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회색빛의 괴물이.
놈의 실체를 가리고 있던 장막의 끝자락이.
“넌…….”
나는 참았던 숨을 토해 냈다.
“이제 좆 됐어.”
* * *
미카엘 실베르트는 문득 생각했다.
도대체 언제, 어떻게, 어디서부터 어긋나기 시작한 걸까.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의문에 대한 답을 찾을 수는 없었다.
현재의 이 모든 상황은 한 존재로부터 비롯되었으니까.
만약 그가 그 답을 알아낸다 해도, 눈앞의 상대는 반드시 또 다른 변수를 만들어 냈을 테니까.
‘진태경.’
무한한 변수의 또 다른 이름.
그의 앞을 가로막기에는 아직 턱없이 젊고, 무모하며, 경박하기까지 한 동양인 청년.
그러나 이제는 미카엘 실베르트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저 청년은 단순히 치워야 하는 장애물이 아니라, 반드시 부수었어야 하는 또 다른 벽이었다는 사실을.
‘뜨겁구나.’
저 검은 눈동자에 담긴 빛과 같은 열기가.
동시에 지금까지도 낙인(烙印)처럼 남아 있는 목덜미의 상처가 지지듯이 아파 왔다.
툭.
미카엘 실베르트는 자신도 모르게 목을 더듬었다.
하지만 상처를 감추기 위해 목까지 뒤덮은 갑옷의 차가운 감촉이 손끝으로 전해지자, 문득 실소가 흘러나왔다.
변명? 수습?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무의미하다. 되려 추해질 뿐이다.
물방울 하나가 바위를 쪼개는 것처럼, 미카엘 실베르트라는 태산(太山)을 무너트리는 것은 손바닥만 한 포션 한 병으로도 족했다.
‘신체가 포션에 담긴 마나(Mana)를 받아들이지 못하게 된 이상, 어떤 변명도 소용없겠지.’
다만 의문이 남았다.
어떻게 진태경이 이 비밀을 알게 되었는지. 수많은 위험과 불확실성으로 점철된 양날의 검으로 자신을 찌를 마음을 품었는지에 대한 의문이.
그렇기에 미카엘 실베르트는 변명 대신 질문을 택했다.
“하나만 묻지. 어떻게 알았나?”
“……!”
진태경을 향한 짧은 물음. 그러나 그 한 마디가 불러온 여파는 실로 막대했다.
“지금…… 뭐라고?”
“기, 길드장님.”
사실상 인정이나 다름없는 그 말에 가장 큰 충격을 받은 것은 바로 미카엘 실베르트를 열렬히 지지하던 이들이었다.
그러나 그는 석상처럼 굳어 버린 자신의 아군들에게는 시선 한번 주지 않았다.
그저 사람들의 비난 속에서 진실을 밝히던 진태경이 그러했듯이 같은 말을 재차 반복할 뿐이었다.
“어떻게 알았느냐 물었네.”
그리고 곧이어 들려온 대답은, 앞서 던진 질문보다 짧았다.
“지크프리트 바스만.”
“지크프리트?”
“그래, 그 양반이 죽기 전에 참 이것저것 많이도 조사해 놨더라고.”
쉭!
순간 울려 퍼지는 파공성.
마치 화살처럼 날아든 한 장의 종이를 두 손가락으로 받아 낸 미카엘 실베르트는, 맨 윗줄에 적힌 제목을 읊조렸다.
“……마나와 마력의 양립성.”
“대마도사이기 전에 당대 최고의 몬스터 학자였다더니. 별걸 다 연구했더군.”
“분명 남은 연구 자료는 없었을 텐데.”
“그랬겠지. 알려진 바로는.”
미카엘 실베르트는 말없이 손에 들린 종이를 내려다봤다.
빠르게 움직인 회색빛 눈동자가 모든 내용을 읽고, 이해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찰나에 불과했다.
“인간의 신체에 몬스터의 마력을 받아들여 공존시킬 가능성을 연구하다니. 누가 봐도 지크프리트 바스만 정도 되는 괴짜나 할 수 있는 미친 소리지. 물론…….”
진태경의 나직한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당신한테는 아니었겠지만.”
미카엘 실베르트는 고개를 들었다. 어느덧 형편없이 구겨진 종이가, 그의 손아귀에서 불길에 휩싸였다.
화륵. 투두둑.
잿가루가 흩날린다. 그 너머에서 착 가라앉은 한 쌍의 눈동자가 불그스름한 열기를 띠었다.
“지크프리트 바스만도 그게 궁금했던 모양이야. 하지만 그런 그조차 끝끝내 입증에는 실패했지. 아니, 어쩌면 금기(禁忌)를 범했다는 생각에 연구를 중단했을지도 몰라.”
진태경은 날아드는 잿가루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이런 자료를 남겨 두면 안 된다는 그만의 의지였는지. 아니면 그를 죽인 누군가의 뜻이었는지는 몰라도…… 해당 연구에 대해서는 남은 자료가 거의 없더라고. 덕분에 저걸 찾아내기까지 시간이 꽤 걸렸지.”
“자네는 바로 이것 때문에 내가 그를 죽였다고 생각하나?”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지.”
“처음에는?”
“그래. 하지만 당신이 지크프리트 바스만을 제거한 건 다른 이유가 있어서야.”
“부정하지는 않겠지만, 그렇게 생각한 이유를 묻고 싶군.”
“간단해. 당신은 이 연구 자료를 남겨 둘 만큼 허술하지 않으니까.”
그 말을 들은 직후, 말없이 진태경을 바라보던 미카엘 실베르트는 소리 내어 웃었다.
“그거 고맙군. 자네까지 나를 그런 병신 취급했다면 내심 안타까웠을 거야.”
“고맙긴. 그저 병신이 아니라 씹새끼로 취급했을 뿐이지.”
“하지만 아직 명쾌한 해답이 나오지 않았네. 고작 이런 자료로 나를 의심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을 텐데.”
“아니, 충분했어.”
“어째서?”
“범죄가 벌어지면, 근처에 사는 전과자가 가장 먼저 의심을 받는 건 당연한 이치니까.”
“……!”
“얼마 남지도 않은 그 연구 자료를 다시 한번 살피는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진태경은 경멸 어린 조소와 함께 고개를 돌렸다.
온통 의문 투성이였던 대마도사의 죽음에 대한 진실까지 밝혀진 지금, 충격에 휩싸인 좌중은 얼어붙은 채 두 사람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만약 미카엘 실베르트가, 그 씨벌 놈이 정말 이미 반인반마(半人半魔)나 다름없는 상태라면. 이 허무맹랑한 연구 자료를 이미 현실로 이루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완전한 침묵 속, 진태경은 처음 그 생각을 떠올랐던 순간을 되새겼다.
수백 쌍의 눈과 귀 앞에서.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처음부터 끝까지 철저히 기획한 그 무대 위에서.
마치 홀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주인공처럼 입을 열었다.
“그랬더니…… 마침내 모든 퍼즐이 맞춰졌지.”
누구도 떠올릴 수 없었던 그 가정(假定)이야말로, 바로 이 복잡한 퍼즐을 완성할 마지막 한 조각이었다.
미카엘 실베르트가 스켈레톤 킹의 정체를 알아차릴 수 있었던 이유.
대격변 당시에는 수백 명의 영웅 중 한 사람에 불과했던 그가, 용의 꼬리에서 머리로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
그리고 오딘 길드의 성장이 천태민의 잠적을 기점으로 시작되었던 이유와 세계 각국의 명사들이 참석한 이정룡의 장례식에서조차 모습을 내비치지 못한 이유까지.
모두 오직 한 가지 때문이었다.
“마력(魔力).”
진태경은 천천히 돌아섰다. 더 이상 흔들리지 않는 회색빛 눈동자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럴 수 있었던 방법도, 계기도 알 수 없지만…… 당신은 마력을 흡수함으로써 강해질 수 있었어. 마치 몬스터처럼.”
그러나 동시에 마나를 품고 있었기에, 그 기운의 균형을 완벽히 조절하고 숨겨 왔기에 누구도 그의 실체를 알아낼 수 없었다.
심지어는 스켈레톤 킹조차도.
미카엘 실베르트에 관한 대화를 나눌 때마다 입버릇처럼 붙였던 ‘불쾌한 인간’이라는 수식어가 무엇을 뜻하는지, 몬스터인 그조차도 명확히 정의 내리기 어려울 정도였으니까.
이 세상에서 미카엘 실베르트가 누구보다 두려워하고, 자신의 정체를 반드시 숨겨야 하는 존재가 있다면 그건 바로 한 사람뿐이었다.
“천태민. 그분이었다면 네 실체를 알아봤겠지.”
그리고 진태경의 나직한 목소리가 모두의 귓가에 닿은 그 순간.
한 사람의 메마른 입술이 긴 침묵을 깨트리며 달싹였다.
“그래, 그로 인해 오랜 세월을 숨죽이며 살아야 했지. 자네가 지금껏 살아온 인생과 비슷할 만큼, 아주 오랜 세월을.”
무려 삼십여 년의 세월이 지났지만, 미카엘 실베르트는 지금까지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새로운 힘을 얻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
수많은 이들이 한자리에 모인 가운데 정확히 자신을 응시하고 있던 절대자의 시선을. 그 순간 전신을 옥죈 공포를.
당시에는 터무니없을 만큼 적은 마력을 보유했었기에 더 이상의 시선은 받지 않았으나, 그날 느꼈던 공포는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 천태민이 자취를 감추고, 지그프리트 바스만에게서 A구역에 얽힌 비밀을 알아낸 후에도.
심지어 이정룡의 장례식 때도 참석하지 않았다.
만에 하나 그가 가진 정보가 틀렸을 수도 있으니까.
천태민이, 자신의 실체를 꿰뚫어 볼 수 있는 유일한 존재를 그곳에서 마주칠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한 가지. 자네가 착각하는 게 있네.”
나직한 목소리와 함께, 미카엘 실베르트는 몸속 깊숙이 잠든 거대한 기운을 일깨웠다.
이미 오래전부터 빛과 어둠이 뒤섞였던, 그러나 어느 날부터 증폭된 어둠으로 짙게 물들어 버린 그 혼탁한 미증유(未曾有)의 기운을.
“이 세상에서 내가 두려워하는 유일한 한 사람은, 지금 이 자리에 없어.”
구구구구궁.
파도처럼 일어난 거대한 기파가, 사방을 짓눌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