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788
#787화
“아.”
진태경은 외마디 탄성을 토해 냈다.
지금 이 순간. 그는 자신에게 찾아온 이능(異能)의 축복을 고스란히 느끼고 있었다.
귓가에는 오직 한 사람만이 들을 수 있는 맑은 종소리가 끊임없이 울려 퍼졌고, 폐허 위로 솟아오른 무수한 홀로그램 창이 눈 앞을 가렸다.
띠링. 띠링. 띠링.
― [Lv.175 미카엘 실베르트]를 처치했습니다!
― 막대한 경험치와 명성을 획득했습니다!
― 희귀한 업적, [참초제근(慘草除根)]을 달성하셨습니다!
― 모두가 함께 살아가는 숲을 위해 병든 풀을 베고, 그 뿌리를 뽑은 당신의 과감한 결단에 아낌없는 찬사를 보냅니다.
― 그러나 명심하십시오. 숲을 집어삼킬 거대한 화염은 그 어떤 병균보다 위협적이라는 사실을.
― 업적 달성 보상으로 막대한 경험치와 명성을 획득했습니다!
― 특별 추가 보상으로 20포인트를 획득했습니다!
― 레벨 업!
― 레벨 업!
― 레벨 업의 중첩 효과로 대부분의 부상 및 체력이 회복됩니다!
― 특수 디버프, [부서진 신체]가 치유의 힘을 거부합니다!
.
.
.
눈과 귀를 점령한 무수한 알림들.
그와 동시에 다른 이들은 볼 수도, 느낄 수도 없는 따스한 광휘가 진태경의 몸속 깊숙한 곳에서 샘솟았다.
화악.
치유를 넘어 정화(淨化)라 부르기에 조금의 부족함도 없는 기운이 소나기처럼 전신을 씻어 내려간다.
자연스럽게 쌓인 몸 안의 노폐물과 망가진 혈관, 장기, 부서지고 베여 나간 뼈와 피부를 감싸 안으며.
솨아아아.
몸 곳곳에서 전해지던 격통이 빠르게 가라앉는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뒤덮은 끈적한 핏물들 아래로, 사람들이 미처 보지 못하는 상처가 씻은 듯이 아물었다.
그러나 진태경에게 있어 이 모든 것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지금 이 순간 그가 느끼고 있는 안도감에 비하면.
‘끝이다.’
진태경은 참았던 숨을 토해 냈다.
눈을 부릅뜬 채 숨이 끊긴 미카엘 실베르트에게서는 더 이상 어떤 생명의 기운도 느껴지지 않았다.
틀림없다.
놈은 확실히 죽었다.
지금까지 상대한 그 어떤 적보다 교활하고, 그의 마음을 뒤흔들었던 간웅(奸雄)은 인간으로 태어나 괴물의 모습으로 이 세상을 떠났다.
아니, 어쩌면 지금쯤 놈의 영혼은 저 부릅뜬 눈동자에 담긴 심연(深淵)으로 굴러떨어졌을지도 모른다.
서늘한 창날이 목젖을 파고들던 그 순간, 진태경이 건넨 마지막 인사처럼.
“……지옥으로 꺼져라.”
씹어뱉듯 토해 낸 한 마디와 함께 진태경이 창대를 쥐었다. 그리고 힘주어 비틀 듯 괴물의 목을 갈랐다.
촤악. 철벅.
솟구치는 녹색 핏줄기와 함께 몸뚱어리에서 완전히 분리된 미카엘 실베르트의 목이 피 웅덩이 위를 굴렀다.
동시에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거대한 굉음이 터져 나왔다. 아니, 그것은 굉음인 동시에 함성이었다.
쿵! 쿵쿵쿵!
드드드득!
살아남은 수백여 명의 헌터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포효를 내질렀다.
마나가 실린 함성에 압축된 공기가 터져 나갔고, 쉼 없이 지면을 두드리는 발과 병장기에 국회 의사당이 뒤흔들렸다.
누군가는 순수하게 기뻐했고, 누군가는 채 가시지 않은 분노로 치를 떨었으며, 그런 그들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또 다른 누군가는 눈물을 흘렸다.
모든 것을 끝낸 창 한 자루를 힘없이 늘어트린 채로.
“……씨발.”
이게 뭐라고. 이깟 게 도대체 뭐라고.
진태경 스스로도 그 이유를 잘 몰랐다.
왜 갑자기 욕이 튀어나왔는지. 모두가 기뻐하고 있을 때, 왜 자신은 병신처럼 울고 있는지.
하지만 다음 순간 귓가에 닿은 누군가의 목소리가 그를 대신하여 정답을 알려주었다.
“네놈이 지금 어떤 머저리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것 하나만 말해 주마.”
스켈레톤 킹이 진태경의 어깨를 짚으며 말을 이었다.
“사람들이 죽은 건 네 잘못이 아니다. 이 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몬스터가 되었듯이.
“……!”
“그러니 병신처럼 질질 짜는 것은 그만둬라. 누구도 너를 비난하거나 탓하지 않으니까.”
까칠하지만 따뜻한 그 말에 진태경은 침묵했다.
그리고 끊임없이 울려 퍼지는 함성과 진동 속에서 문득 실소를 흘렸다.
“야.”
“으흠. 불렀느냐.”
“왜 갑자기 무게를 잡고 난리야, 몬스터 새끼가.”
“……!”
“뭘 봐. 눈 착하게 안 떠?”
안 그런 척하면서도 은근히 대답을 기대하고 있던 스켈레톤 킹이 충격받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이게 진정 사람의 인성이란 말인가……?”
“다 들린다.”
“들으라고 한 소리다.”
“몬스터가…… 말대꾸?”
“아, 그만하라고!”
스켈레톤 킹을. 아니, 친구를 놀리는 건 언제나 즐거운 일이다.
발작하는 스켈레톤 킹의 모습에 진태경은 낄낄거리며 웃었다. 피에 젖은 소매로 눈물까지 닦아 가면서.
“그러면서 은근슬쩍 눈물 닦지 마라. 이미 늦었으니까.”
“……이 새끼 허위 사실 유포하네. 내가 언제. 증거 있어?”
“증거는 없어도 증인은 있지. 이 몸 말고도 본 사람이 수두룩, 어?”
덥석.
순간 휘청거리는 진태경의 팔을 붙잡은 스켈레톤 킹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너…….”
“아. 핏물 때문에 바닥이 미끄러워서.”
진태경이 씩 웃으며 대답했다. 하지만 파르르 떨리는 입꼬리와 반쯤 감긴 눈동자에 담겨 있는 극심한 피로만큼은 숨길 수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두 번의 레벨 업 효과는 그가 입은 대부분의 상처를 회복시켜 주었지만, 지금 이 순간에 이르기까지 있었던 수많은 사건과 정신적 피로는 고작 이십 대에 불과한 청년이 홀로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미카엘 실베르트의 추악한 실체와 야망을 깨달은 그 날부터 시작된 불면(不眠)의 밤과 숱한 전투들.
지난 몇 주간 진태경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싸워야 했다.
그리고 그가 쓰러트려야 했던 적은 미카엘 실베르트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몬스터 군단뿐만이 아니었다.
나날이 거세지는 세상의 극심한 비난. 뉴스를 통해 전해 들었던 전 세계 곳곳의 재앙들과 그들의 죽음 앞에 무력했던 스스로에 대한 자괴감까지.
진태경은 자기 자신과 싸웠고, 이 세상과 싸웠다.
마침내 미카엘 실베르트를 꺾은 지금. 그저 제자리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휘해야 할 만큼.
하지만…….
‘안 돼.’
진태경은 자꾸만 감겨 오는 눈꺼풀을 애써 들어 올렸다.
지금은 아니다. 조금만, 조금만 더 버텨야 했다.
자신이 시작한 것을 끝맺을 때까지.
어느샌가 사람들의 함성에 뒤섞여 들려오기 시작한 저 사이렌 소리가 더 가까워지고, 오늘 이 자리에서 있었던 모든 진실을 세상에 밝히기까지 쓰러질 수 없었다.
‘절대로.’
푹.
지면에 박아 넣은 창을 지팡이 삼아 몸을 기댄 진태경이, 꺼질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조온나게 고맙다. 황 조교 이 씹새끼야…….”
“너 정말 괜찮은 거 맞……. 그런데 지금 뭐라고?”
“야, 골골아.”
“어?”
“너도 창 써라. 검 쓰지 말고.”
아니, 갑자기?
도무지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한 스켈레톤 킹이 눈을 껌뻑거렸다.
“왜?”
“검보다…….”
“검보다.”
“창이…….”
“창이.”
“멋있어.”
“멋있……. 시팔.”
스켈레톤 킹은 탄식했다.
도대체 저 인간 같지도 않은 새끼의 말을 왜 귀 기울여 들었단 말인가.
어차피 하는 말이라고는 개소리가 절반이고 나머지 반은 자신을 갈구는 쌍욕일 텐데.
‘내가 병신이지.’
하지만 스켈레톤 킹은 아무 말 없이 한숨만 푹 내쉬었다.
지면 깊숙이 박아 넣은 창 한 자루에 몸을 기댄 채, 마치 기절하듯 깊은 잠에 빠져 버린 친구를 깨우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고생했다. 쉬어라.’
아마도 모두가 같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도대체 언제 함성을 내질렀냐는 듯,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굳게 입을 다문 수백여 명의 헌터들은 그저 말없이 바라보았다.
오늘 이 자리의 누구보다 용감하고 빛났던 청년을.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두컴컴한 진실 속에서, 온 세상과 맞서 싸우며 묵묵히 자신이 가야 할 길로 나아간 초인을.
‘만약 나였다면 그처럼 할 수 있었을까.’
모두가 스스로에게 묻고, 이내 답했다.
이 자리의 누구도 그럴 수 없었을 것이라고.
넘어지고, 긁히고, 깨지고, 부서지다가 마침내 쓰러져 두 번 다시 일어나지 못했을 것이라고.
그러나 고작 이십 대에 불과한 저 청년은, 진태경은 그것을 해냈다.
수없이 넘어져도 일어났고, 깨지고 부서질지언정 쓰러지지 않았다.
오직 그만이 어둠 속에서 헤매던 이들에게 이정표이자 길을 밝히는 등불이 되어 주었다.
가장 앞에서 모두를 이끄는 자.
상처 입은 이들을 보며 함께 아파하나 결코 나약하지 않으며, 꺾이지 않는 불굴(不屈)의 의지로 용맹하게 나아가는 자.
그리고 사람들은 바로 그런 이를 이 세상의 모든 경의와 사랑을 담아 이렇게 칭한다.
‘영웅(英雄).’
그 짧은 한 단어가 뇌리에 가득 찬 순간.
이 자리의 모두는 형용할 수 없는 감정에 사로잡혔다.
영웅. 더없이 익숙한 단어다.
어느 날부터 온 세상이 그들을 영웅이라 불러 주었으니까. 평소와 다를 것 없던 어느 날 예기치 못한 힘을 얻었고, 몬스터와 싸우며 인류의 검과 방패가 되었으니까.
하지만 어째서일까.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그 단어에 이토록 가슴이 벅차오르는 이유는.
지난날의 모든 순간이 부끄러우면서도 먹먹해지는 까닭은.
다만…… 계속해서 눈앞에 떠올랐다.
수백 개의 무기에 둘러싸인 상황에서도 두려움 없이 진실을 외치던 그 눈빛이.
치열했던 전투가 막을 내리고 모두가 환호할 때, 홀로 하염없이 눈물 흘리던 한 청년의 모습이.
아마도 그런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어느샌가 처참한 폐허가 되어 버린 국회 의사당 내부로 진입한 수많은 지원 병력이 자신들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추고 숨을 죽인 것은.
그리고 바늘 하나 떨어지는 소리도 들릴 것 같은 고요함 속, 누군가가 참았던 숨을 토해 낸 것은.
“Fuck.”
갑작스럽게 깨진 침묵에 고개를 돌린 사람들은 세 번 놀랐다.
욕을 저렇게 고풍스러운 어조로 할 수 있다는 것에 한 번.
욕이 이토록 어색할 수 있다는 것에 또 한 번.
그리고 이 어려운 일을 동시에 해낸 사람이,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인물이었다는 것에 마지막으로 한 번.
하지만 당사자인 필릭스 왕자는 자신을 향해 모여든 사람들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니, 이제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Fuck. Fuck. Fuck.”
후련하다.
아직 어설프기 짝이 없는 발음이었지만, 연달아 욕을 뱉고 나니 가슴에 응어리진 무언가가 풀어지는 듯했다.
필릭스 왕자는 자신도 모르게 킥킥대며 웃었다.
‘빌어먹을. 그까짓 게 전부 뭐라고.’
혈통. 품위. 체면. 예법.
그가 삼십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자랑스럽게 여겼던 모든 가치가 덧없고, 무겁게만 느껴졌다.
지금 당장이라도 훌훌 벗어던져 버리고 싶을 만큼.
그래서 그렇게 했다.
부둣가의 노동자처럼 난생처음 상스러운 욕을 지껄이고, 왕가(王家)의 문장이 아로새겨진 갑옷도 벗어 던졌다.
과연 아버지인 국왕 폐하께서 이 광경을 보셨다면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지만, 뭐.
‘그게 그렇게 중요한가.’
저벅. 저벅.
사람들의 시선 속, 폐허가 되어 버린 공간을 천천히 가로지른 필릭스 왕자는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불쑥 입을 열었다.
“손이 부족해 보이는데, 실례가 안 된다면 내가 도울 수 있겠나?”
그 어느 때보다 정중한 필릭스 왕자의 제안에, 창대에 기댄 채 쓰러지듯 잠이 들어 버린 진태경을 부축하고 있던 스켈레톤 킹이 고개를 끄덕였다.
“원한다면 그렇게 해라, 인간 왕자.”
그리고 곧이어 들려온 필릭스 왕자의 대답은, 곁에서 그들을 지켜보던 모두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부디 필릭스라고 불러 주게, 미스터 킹. 내 친구여.”
“……!”
자신을 멍하니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에 희미하게 웃어 보인 필릭스 왕자가 진태경의 한쪽 어깨를 부축한 그때, 또 다른 손이 뻗어 나와 그를 도왔다.
“그대는…….”
“옆에서 보고 있자니, 지금도 손이 부족해 보여서 말입니다.”
담담하게 대답한 최민우에 이어 또 다른 손들이 더해졌다.
덜덜 떨리는 손은 이미 금단 현상에 접어든 척 헤이글의 것이었고, 유난히 굳은살이 많고 자그마한 손은 파이 첸의 것이었다.
그리고 매직 존슨은, 손에 든 스태프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문득 씩 웃어 보였다.
“종종 내가 익힌 모든 것들이 쓸모없게 느껴질 때가 있지. 바로 지금처럼.”
스태프를 품에 집어넣은 매직 존슨이 성큼성큼 걸어와 손을 보탰다.
언뜻 보면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수백 개가 넘는 마법을 익힌 대마도사가, 수 톤에 달하는 콘크리트 더미를 단숨에 베어 버릴 수 있는 최고의 헌터들이 한 청년을 들어 올리기 위해 모여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것이야말로 그들이 진심으로 경의를 표하는 방식이었다.
슥. 스륵.
옷깃 스치는 소리만이 조용히 울려 퍼졌다. 어느새 수백 개로 불어난 손길이 호수 속 작은 물결이 되어, 깊은 잠에 빠진 젊은 영웅을 자신들의 머리 위로 천천히 움직였다.
유리를 다루는 것처럼 조심스럽게.
잠시나마 그에게 찾아온 평온이 깨지지 않도록.
그리고 마침내 진태경의 신형을 지면에 기대어 눕혔을 때, 사람들은 불현듯 깨달았다.
인류의 역사에 기록될 신(新) 세계 헌터 연맹의 발족식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자신들의 눈앞에 있는 이 청년이야말로, 이후 벌어질 대전쟁의 시작과 끝이 되리라는 것을.
스릉.
적막을 가르며 울려 퍼지는 서늘한 마찰음.
그와 동시에 천천히 뽑혀 나온 검이 허공을 겨누었다.
이내 수십, 수백으로 불어난 무수한 병장기가 산산조각 난 스테인드 글라스(Stained glass) 사이로 흘러나온 석양을 받아 번뜩였다.
화염처럼 불그스름한 온기에 물든 폐허 속, 누구도 깨트릴 수 없는 평안에 젖어 있는 한 청년을 향해.
아니.
그들의 새로운 맹주(盟主)를 향해.
띠링. 띠링. 띠링.
― 믿을 수 없는 업적, [오직 한 사람을 위한 대관식]을 달성하셨습니다!
― [세계 헌터 연맹]이 당신을 [맹주]로 추대합니다!
― 막대한 경험치와 명성을 획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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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한 사람만이 들을 수 있는 그 종소리는 어느 때보다 크고, 맑게 울려 퍼졌다.
깊은 잠에 빠진 누군가의 입가에 미소가 스칠 만큼.
여전히 그의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는 죄책감을 녹여 낼 만큼.
그렇게 길고도 치열했던 하루 끝에, 새로운 역사의 한 페이지가 넘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