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789
#788화
프랑스 파리. 엘리제 궁전.
미식(美食)을 인생의 미덕 중 하나로 꼽는 프랑스인답지 않게, 짧고 간단한 아침 식사를 끝마친 임마누엘 대통령은 소중히 보관해 두었던 시가 상자를 바라보며 감회에 젖었다.
‘드디어 이걸 꺼내는 날이 오다니.’
이미 이십 년 전부터 금연(禁煙)을 이어 오던 임마누엘 대통령이다.
젊었을 적의 그는 주위에서도 알아주던 시가 애호가였지만, 한 사람을 만난 이후 모든 것이 뒤바뀌었다.
‘시가를 좋아한다고 들었네만.’
‘아, 취미로 가끔 즐기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꽤 값비싼 취미로군.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원에 앉아 풀 태우는 일 따위에 매달 만 유로가 넘는 거금을 쏟아붓지 못하거든.’
‘……!’
‘정치를 하고 싶다고 했나? 그럼 시가부터 줄이는 게 좋아. 시간과 건강을 동시에 잡아먹는 몬스터니까. 게다가 기업가 가문 출신의 사치스러운 정치인만큼 물어뜯기 좋은 상대도 없지. 자, 이제 가 보게.’
가문의 인맥과 막대한 로비로 성사된 거물과의 첫 만남은 그렇게 허무하게 끝났다. 시가를 줄이라는, 어처구니없을 만큼 간단한 조언과 함께.
하지만 촉망받던 젊은 변호사 임마누엘은 그 조언을 잊지 않았다.
그는 저택으로 돌아가자마자 수십만 유로의 값어치를 지닌 시가들을 모조리 벽난로에 던져 넣었고, 전보다 훨씬 검소한 삶을 살기 시작했다.
그리고 몇 년 뒤 찾아온 부활절에, 두 마리의 까마귀가 그려진 카드를 전달받았다.
새로 태어난 걸 축하하네.
M. S.
그렇게 임마누엘은 미카엘 실베르트의 선택을 받았고, 이듬해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프랑스 정계(政界)에 데뷔했다.
그 후?
말해 무엇하겠는가.
임마누엘은 누구보다 승승장구했다.
그가 그 어떤 정치 거물도, 심지어 총리나 대통령조차 함부로 대할 수 없는 확고한 실력자로 자리매김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불과 십 년 남짓이었고, 미카엘 실베르트의 그림자는 모든 걸 뒤덮고도 남았다.
‘이번 대선에 도전하게. 최연소는 아니지만, 최장기 집권의 역사를 새로 쓸 수 있게 도와주지.’
도와주겠다.
미카엘 실베르트의 그 한 마디에, 어느덧 파리를 상징하는 상원의원이자 의회 내 최대정당을 이끄는 당수(黨首)가 된 임마누엘은 직감했다.
이 대선은 시작되기도 전에 끝났다는 것을.
엘리제 궁전의 다음 주인은 바로 그가 되리라는 것을.
그리고 마침내 그 짐작이 현실로 이루어진 날, 임마누엘 대통령은 자신을 찾아온 후원자를 향해 용기 내어 물었다.
‘왜 그 많은 사람 중에 굳이 저를 선택하신 겁니까?’
돌아온 대답은 짤막했다.
‘말을 잘 듣더군.’
‘예?’
‘내가 원하는 건 하나뿐이야. 지금까지 해 왔던 것처럼 절대적인 충성을 바치게. 짖으라면 짖고, 물으라면 물어. 자네의 전임자가 했던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다면 막대한 부와 명예는 물론 이 나라를 통째로 그 손에 쥐여 줄 테니.’
‘……!’
‘내게 충성하겠나?’
‘아닙니다. 복종하겠습니다.’
더할 나위 없는 그 대답에 미카엘 실베르트는 소리 내어 웃었고, 자신의 새로운 충견에게 금박으로 장식된 시가 한 상자를 건넸다.
‘이건…….’
‘선물일세. 내 목표가 이루어지는 날, 자네 역시 왕과 다름없는 존재가 될 거야. 이 시가는 그 순간을 위해 아껴 두도록 하게.’
아직도 생생한 그 날의 기억.
시가 상자를 바라보며 상념에 잠겨 있던 임마누엘 대통령은 가슴이 뛰는 것을 느꼈다.
‘왕이라, 왕.’
21세기 현대에서, 그것도 혁명에 미친 이 나라에서 왕이라니.
그야말로 미친 소리다.
하지만 미카엘 실베르트가 하는 말이라면 다르다. 그는 지금껏 수많은 불가능과 상상을 현실로 이루어 낸 사람이니까.
임마누엘 대통령은 문득 떠올렸다. 대격변이라는 혼란의 시기를 발판 삼아, 단숨에 천문학적인 부를 쌓아 올렸던 아버지의 유언을.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이 투자고 거래다. 상대가 원하는 것이 있다면 아낌없이 내어주어라. 단, 반드시 내준 것 이상을 얻어내야 한다.’
세간에 ‘죽음의 상인’이라 불리며 멸시받던 아버지였지만, 설령 지옥에 떨어졌더라도 별다른 여한은 없을 것이다.
당신의 아들이 누구보다 성공적인 거래를 하는 것을 지켜보았을 테니까.
젊은 변호사 임마누엘은 한 사람에게 복종에 가까운 충성을 바쳤고, 그 대가로 대통령 임마누엘이 되었다.
그리고 곧 대통령을 넘어선 무소불위의 권력을 손에 넣게 될 것이다. 임마누엘 1세라 불러도 부족함이 없을, 그런 막강한 힘을.
“임마누엘 1세…….”
꿈에 젖은 임마누엘 대통령이 몽롱한 얼굴로 중얼거린 그때, 집무실 벽면에 놓여 있던 괘종시계가 울렸다.
뎅. 데에엥.
종소리와 함께 괘종시계에서 튀어나온 새와 난쟁이가 빙글빙글 돌아간다.
시침이 가리키는 숫자를 확인한 임마누엘 대통령이 눈을 깜빡였다.
“정오? 벌써?”
옛 추억에 잠겨 있느라 시간 가는 줄도 몰랐던 모양이다. 임마누엘 대통령은 느릿하게 집무실 책상을 두드리며 생각했다.
‘생각보다 늦어지는군.’
프랑스와 한국의 시차를 생각한다면, 지금쯤 세계 헌터 연맹의 발족식이 열리고 있을 서울은 오후 여덟 시.
혹시나 하는 마음에 스마트폰을 확인해 봤지만, 그가 기다리던 연락은 아직 들어오지 않은 상태였다.
‘하긴. 일찍 끝나는 것이 이상하지.’
다른 자리도 아니고, 세계 헌터 연맹의 첫 발족식이다.
향후 전 세계의 안보를 좌우할 중요한 자리인 만큼, 풀 코스 마라톤만큼이나 회의가 길어지는 건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물론 미카엘 실베르트를 향한 굳건한 믿음과는 별개로 약간의 초조함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지만.
똑똑.
갑작스럽게 울려 퍼진 노크 소리에, 임마누엘 대통령이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일인가?”
닫힌 문 틈새 사이로 수행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식사하실 시간입니다, 대통령 각하.”
“필요 없네. 그리고 내가 직접 호출하기 전까지는 그 누구도 집무실 가까이 들이지 마. 알겠나?”
“예, 그렇게 전달하겠습니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을 앞두고 식욕이 있을 리가.
내심 멍청한 수행원을 향해 욕설을 퍼부은 임마누엘 대통령은 손에 쥔 스마트폰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망설임 끝에 한 사람의 번호를 터치했다.
뚜우. 뚜. 뚜.
하염없이 이어지는 통화 연결음.
임마누엘 대통령이 애써 초조함을 억누르며 시가 상자를 어루만지고 있던 그때, 마침내 달칵하는 소리와 함께 상대방이 전화를 받았다.
“발족식, 발족식은 어떻게 됐소?”
다짜고짜 던진 물음에, 잠시 침묵하던 상대방이 대답했다.
– 성공적으로 끝났지.
이 얼마나 기다려 왔던 말인가.
임마누엘 대통령은 전신에서 솟구치는 환희를 느끼며 크게 웃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불끈 쥐어진 주먹을 허공에 휘두르며, 그토록 원했던 대답을 들려 준 상대에게 감사를 표했다.
“고맙소! 정말 고맙소! 후긴, 당신도 그간 정말 고생 많았……!”
– 고맙긴. 오히려 내가 더 고맙지.
“뭐?”
그 순간.
임마누엘 대통령은 불현듯 깨달았다.
상대방의 목소리가 평소와는 달리 굵고 거칠다는 것을.
더불어 그 목소리의 주인이, 지금 서울이 아닌 문밖에 서 있다는 것을.
그리고 뒤늦은 깨달음의 대가는, 지금부터 시작이었다.
쾅!
굉음과 함께 수백 여년의 역사를 간직한 집무실의 문이 가루가 되어 흩어진다.
그 너머로 성큼성큼 걸어들어온 반백의 거한이 얼어붙은 임마누엘 대통령을 향해 반갑게 웃어 보였다.
“오랜만이군, 임마누엘. 이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을 쥐새끼 같으니.”
“다, 당신은.”
“참 희한하지. 조금 전까지만 해도 삼 초 안에 잠들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네놈 얼굴을 보니 피곤함이 싹 가시는군. 아마 지금쯤이면 스위스에 있을 존슨도 나랑 같은 기분일 거야. 응?”
척 헤이글은 껄껄거리며 웃었다.
손에 든 후긴의 스마트폰을 뒷주머니에 찔러넣은 그는 석상처럼 굳어 버린 임마누엘 대통령을 향해 말을 이었다.
조금 전까지와는 다른, 마치 무저갱처럼 깊고 어두운 목소리로.
“미카엘 실베르트는 죽었다. 세계 헌터 연맹의 이름으로. 우리가 직접 추대한 새로운 맹주의 손에 의해서.”
“……!”
“자, 이제 네놈이 선택해라. 사지가 부러진 채 끌려 나갈지. 아니면 그 면봉 같은 다리로 걸어 나갈지.”
끝이다. 전부 끝장이다.
지금까지 그가 쌓아 올린 모든 것이, 앞으로의 모든 미래와 함께 무너졌다.
이 믿을 수 없는 현실을 마주한 임마누엘 대통령은 숨 쉬는 것조차 잊은 채 몸을 떨었다.
그리고 수많은 고민과 상념 끝에, 간신히 한 마디를 토해 냈다.
“시, 시가.”
“뭐?”
“시가 한 대만 피우고 가도 되겠소?”
눈을 깜빡이던 척 헤이글이 호탕하게 웃었다.
“시가라, 그거 좋지.”
그리고 곧장 임마누엘 대통령의 얼굴에 쇠뭉치 같은 주먹을 꽂아 넣었다.
뻑! 콰창!
우수수 튀어나온 이빨과 핏물이 허공에 흩날린다. 포탄처럼 튕겨 나간 임마누엘 대통령이 창문을 박살 내며 시야에서 사라졌다.
“개자식. 그걸 말이라고.”
작게 중얼거린 척 헤이글이 창밖을 내려다봤다.
밑에서 대기하고 있던 수십 명의 아레스 길드원들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임마누엘 대통령의 몸에 포션을 들이붓고 있었다.
“살았나?”
“아, 예. 충분합니다.”
“그럼 됐어. 숨만 붙여 놔.”
“알겠습니다. 그런데 미스터 헤이글. 혹시 다음 행선지는…….”
“신경 쓰지 말게. 우리 임무는 끝났어.”
“그럼 바로 복귀하는 겁니까?”
“아니. 조금만 기다리게. 아직 할 일이 남았으니까.”
척 헤이글은 테이블 위에 곱게 올려진 시가 상자를 열며 흐뭇하게 웃었다.
“아주 중요한 일이지, 음.”
잠시 후, 때아닌 소란에 몰려든 사람들은 볼 수 있었다.
전신이 으스러진 채 실려 나가는 자신들의 대통령과 엘리제 궁전의 부서진 창밖으로 흘러나오는 희뿌연 연기를.
하지만 사람들이 느낄 충격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두 눈으로도 보고도 믿을 수 없는 이 희대의 범죄 행위를 신고하기 위해 스마트폰을 들었을 때, 그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거대한 폭탄이 세상을 뒤흔들었으니까.
– 긴급 속보) 세계 헌터 연맹 첫 공식 발표, “두 시간 전, 인류를 배신한 미카엘 실베르트와 그 일당을 즉결 처단했으며 지금도 현재 진행 중.”
– 사상 초유의 유혈 사태. 구세주의 핏줄이자, 세계 헌터 연맹의 임시 대변인 Choi, “모든 증거 자료와 함께 진실을 밝히겠다.”
– [Live] 세계 헌터 연맹 공식 기자회견
사상 초유라 불러도 부족하지 않을, 극심한 혼란과 충격 속에서 시작된 기자회견.
그리고 수백 개의 카메라 렌즈를 통해 모두의 앞에 선 최민우가 담담히 말을 이어 가던 그 순간에도, 바람을 탄 민들레 씨처럼 전 세계 곳곳으로 퍼져 나간 신(新) 세계 헌터 연맹의 핵심 인사들은 미카엘 실베르트가 남긴 잡초를 뿌리 뽑았다.
하루. 이틀. 사흘…….
마침내 깊은 잠에 빠졌던 한 청년이 깨어나던 그 날까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