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799
#798화
나도 안다. 아무리 뛰어난 능력이 있어도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불행을 막을 수는 없다는 것을.
하지만 그럼에도 일 초가 한 시간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지금 이 순간에도 피를 흩뿌리며 쓰러지고 있을 저들의 불행이 나로부터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을 머나먼 이국의 사막으로 부른 것도, 죽음으로 몰아넣은 것도 나다.
맹주(盟主)라는 이름표를 단 이상, 나는 이 전쟁이 끝날 때까지 괴로워해야 한다.
누구보다 앞장서고 치열하게 싸워야 하는 숙명을 부여받았다.
쐐애애액!
나는 세찬 바람을 가르며 쏘아졌다.
이미 오래전 답설무흔(踏雪無痕)의 경지를 넘어선 경공은 고운 모래 위에도 흔적을 남기지 않았고, 한 걸음을 나아갈 때마다 수십여 미터의 거리가 지워졌다.
‘더, 더, 조금이라도 더 빨리.’
단 한시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지만, 사막 위의 요새처럼 우뚝 서 있던 본부가 보이지 않을 만큼 멀리 왔다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하늘 위로 솟구치며 확인했던 흐릿한 불빛에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는 사실도 함께.
‘그런데 왜…….’
왜 이리도 조용한 걸까.
차마 이어 갈 수 없던 그 생각에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는다. 이를 악문 나는 온 힘을 실어 진각(震脚)을 밟았다.
구구궁.
발끝을 타고 흘러간 공력이 지면을 뒤흔들고, 순간 용수철처럼 한껏 수축했던 근육이 반동과 함께 폭발적인 힘을 뿜어냈다.
퍼엉!
묵직한 파공성과 함께 포탄처럼 쏘아지는 신형. 그와 동시에 바람을 타고 귓가로 전해지는 희미한 소음들.
– ……도대체……놈이.
– 한스! 한스!
– 도주…… 본부에 생존자…… 연락.
드문드문 끊기는 사람들의 목소리와 차량의 엔진음.
빠르게 가까워지며 느껴지는 인기척도, 들려오는 소음도 많다. 다행히도 피해가 그리 크지 않음이 분명했다.
“아.”
그제야 안도 섞인 탄식을 흘린 나는 더욱더 속도를 높였다.
그리고 잠시 후,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을 본 순간 깨달았다.
앞서 느꼈던 모든 인기척과 소음들은, 이미 나보다 한발 앞서 이곳에 도착한 이들의 것이었다는 사실을.
“……!”
나는 석상처럼 굳은 채 미라처럼 바짝 말라붙은 수백여 구의 시체를 바라보았다.
이쪽을 향한 사람들의 시선도, 웅성거림도 메아리처럼 멀게만 느껴진다.
오직 한 단어만이 머릿속을 점령했다.
‘선지자.’
틀림없다.
바로 이곳에, 그놈이 있었다.
그리고 어쩌면…….
‘아직 근처에 있다. 분명히.’
죽은 이들에 대한 추모는 미루어야 한다.
오늘 이 자리에서 놈을 잡지 못한다면 몇십 배, 몇백 배나 되는 희생을 치러야 할 테니까.
‘어디냐.’
끓어오르는 가슴과 달리 머릿속은 얼음장처럼 차갑다. 나는 그 어느 때보다 곤두선 감각을 느끼며 기감(氣感)을 펼쳤다.
솨아아악.
보이지 않는 기운이 모래 위를 타고 뻗어 나감과 동시에, 신형을 힘차게 내쏘았다.
콰아아아!
파도처럼 솟구친 모래알 너머로 언뜻 익숙한 얼굴이 스쳐 지나간다.
지원군이 분명한 사람들 사이로 다급한 표정을 한 스켈레톤 킹이 뭐라 외치고 있었지만, 이미 빛살처럼 사막을 가로지르는 내 모든 감각은 오롯이 한 존재만을 좇고 있었다.
선지자.
병든 나무의 마지막 뿌리를, 오늘 이곳에서 뽑아내야 한다.
* * *
세상 모든 일이 바라는 대로 풀렸다면, 아마도 나는 지금 이곳에 없었을 것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실 일도 없었을 테고, 어머니가 아프지도 않았겠지.
만약 그랬다면 나는…… 모르겠다.
내신은 개판이고 장점이라고는 몸 튼튼한 것밖에 없었으니까.
그래, 시발.
어차피 결국 이루어지지 않을 헛된 바람이고 개소리다.
세상일은 언제나 내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았고, 그건 이번에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끔찍한 아침이군. 안 그래, 진?”
나는 지친 얼굴로 인사를 건네는 매직 존슨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우리는 서로에게 결과를 묻지 않았지만, 이미 여섯 시간에 걸친 수색이 수포로 돌아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굳이 입을 여는 이유는, 혹시나 하는 기대 때문이다.
“존슨.”
“미안해.”
“…….”
“인근 700km를 샅샅이 뒤졌어. 시리아와 이라크를 반쯤 협박하다시피 해서 협조까지 얻어냈다고. 그런데, 제기랄.”
선지자는 사라졌다.
아니, 증발했다.
마치 원래부터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내 뒤를 이어 곧장 수색에 참여했던 정예 헌터들이 모두 귀신에 홀린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분명히 간발의 차였는데, 도대체 어디로 도주한 거지?”
지원군의 움직임은 신속했다.
총원 이백여 명의 일본 헌터들로 구성된 J1팀이 교전 발생을 알린 지 불과 15분도 되지 않아 현장에 도착했으니까.
문제는 지원군이 도착하기 직전 전장을 이탈한 선지자를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진. 적어도 내가 아는 한에서, 이건 한 가지로밖에 설명이 안 돼.”
매직 존슨과 시선이 마주친 내가 조용히 뇌까렸다.
“마법.”
“그래. 선지자는 마법사야. 그것도 대마도사라 불러도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뛰어난 수준의 마법사.”
매직 존슨의 마법으로도, 스켈레톤 킹의 언데드 군단으로도, 마지막으로 나조차도 놈의 흔적을 찾지 못했다.
그렇다면 남은 건 하나뿐이다.
마법.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을 접했을 때, 사람들은 기적 혹은 마법 같은 일이라 표현하고는 한다.
선지자의 경우에는 후자가 틀림없다.
놈이 종교에 세뇌당한 광신도들이 믿는 것처럼 정말 신의 선택을 받은 인물일 리는 없으니까.
‘마법사라.’
문득 후긴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원거리형 헌터로 보였다는 그 진술.
반신반의했지만 이번만큼은 무게추가 그쪽으로 쏠릴 수밖에 없었다.
선지자는 마법사일 가능성이 높다. 그것도 매직 존슨의 눈을 피해 종적을 감출 수 있을 만큼 뛰어난 경지의 마법사.
혹은…….
‘수하 중에 그 정도 수준의 마법사가 있거나.’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최악 중의 최악이겠지만, 다행히도 내 생각을 들은 매직 존슨은 대번에 고개를 저어 보였다.
“그건 아냐.”
“저도 그러길 바라지만, 혹시 모를 가능성은…….”
“선지자는 분명히 혼자였어.”
“네?”
매직 존슨의 어조에서 묻어 나오는 것은 단순한 짐작을 넘어선 확신이었고, 반사적으로 되물은 나는 곧이어 들려온 한 마디에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생존자가 있어, 진.”
“……!”
“J1팀의 유일한 생존자. 네가 도착하기 얼마 전에 깨어났어.”
유일한 생존자.
그 단어에 더 이상 듣고만 있을 수만은 없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나는 매직 존슨에게 물었다.
“그 친구,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 * *
생존자는 각종 의료 장치를 주렁주렁 매단 채 누워 있었다.
침대 옆에서 심각한 얼굴로 대화를 나누고 있던 최 팀장과 스켈레톤 킹은 나를 발견하고 뭐라 말할 것처럼 입을 열었지만, 이내 굳게 다물었다.
아침이 밝도록 이어진 수색이 헛수고로 돌아갔다는 것쯤은, 내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저 사람이야?”
내 질문의 의미를 즉각 알아들은 스켈레톤 킹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곳에 있던 인간 중 유일한 생존자다.”
“그럼 내가 현장에 막 도착했을 때는…….”
“그때는 이미 부상자 한 명 없이 모두 숨이 끊긴 후였어. 저 인간도 심각한 상태였지만 운이 좋았지. 네놈은 오자마자 제대로 듣지도 않고 곧장 떠나 버렸고.”
그제야 급박했던 당시 상황이 머릿속에서 되살아났다.
처음 현장으로 향하던 그때 사람들의 목소리 사이로 섞여 들려온 생존이라는 단어와, 떠나려는 내게 뭐라 말하려던 스켈레톤 킹의 모습도.
“말하기도 전에 가 버리더군. 이 몸도 바로 쫓아가려다가 말았다. 나까지 자리를 비운 상황에서 또다시 무슨 일이 생길 수도 있으니까.”
스켈레톤 킹의 판단이 옳았다. 어쩌면 나보다도 냉철하게 상황을 읽었을지도 모른다.
말없이 입술을 깨무는 내 모습에 최 팀장이 입을 열었다.
“두 분 다 맞는 판단을 하셨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건 생존자가 있다는 점이고요.”
기백이 넘는 인명 피해는 안타깝지만, 생존자가 있다는 것은 천운이다.
그 참혹한 현장에서 살아남은 그에게도.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도.
“조금 전, 그러니까 발견 직후 여섯 시간 만에 깨어났습니다. 담당 힐러 말에 의하면 포션을 충분히 복용하고 마지막 회복 단계에 접어들었으니 문제없을 거라더군요.”
나는 멍하니 입을 벌린 채 허공만 바라보고 있는 생존자를 유심히 살폈다.
그리 안 괜찮아 보이는 건 둘째치고,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얼굴이다.
거기에 더해서 굳이 맥을 짚어 보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몸속 충만한 기운까지.
‘잠깐. 이 사람 설마?’
뭔가를 깨닫고 고개를 돌리자, 최 팀장이 내 생각을 읽은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내 귓가에만 전달되는 나지막한 전음(傳音)과 함께.
– 진태경 씨께서 생각하시는 그 사람이 맞습니다. 일본의 S급 헌터, 야마모토 겐지가 J1팀의 유일한 생존자입니다.
– ……!
– 간발의 차였습니다. 대략적인 상황을 유추해 보니 지원 병력이 도착하기 직전이라, 선지자로서도 발목이 잡힐 것을 우려하여 확실하게 끝을 맺지 못한 것 같더군요.
지원 병력으로 현장에 출동했던 오백 명의 헌터들은 운이 좋았다.
선지자가 조금만 더 멍청했더라면, 혹은 스스로의 힘을 과신했더라면 그들 역시 죽음을 면치 못했을 테니까.
그러나 선지자는 영리하면서도 신중했고, 한 자리에서 시간을 지체할수록 더욱 큰 위협에 직면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건 인류에게는 불행이지만, 살아남은 이들에게는 행운이다.
그런 의미에서 초점이 흐려진 눈동자로 줄곧 허공만 바라보는 눈앞의 생존자, 아니 야마모토 겐지는 그중에서도 천운(天運)을 타고난 셈이다.
물론 비슷한 경험을 겪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빌어먹을.’
나는 야마모토 겐지가 싫다.
그를 향한 감정을 정의하자면 싫은 것을 넘어 혐오에 가깝다.
많은 이들이 레비아탄을 저지하기 위해서 목숨을 걸고 싸우던 그때, 말 같지도 않은 핑계를 대며 느지막이 나타났으니까.
내가 굳이 그런 부류의 인간을 세계 헌터 연맹에 집어넣게 된 이유는 단순히 놈이 S급 헌터여서였다.
아무리 병신이어도 한 번쯤은 제 몫을 해낼 병신이라는 믿음 때문에.
하지만 내가 지금까지 놈을 어떻게 생각해 왔건 간에, 나는 야마모토 겐지를 욕할 자격이 없다.
모두가 죽었는데 왜 혼자 살아 돌아왔느냐며 물을 생각도 없다.
내가 바로 놈을, 그들을 사지(死地)로 보낸 장본인이니까.
턱.
나는 야마모토 겐지의 손목을 잡고 공력을 흘려보냈다.
따스한 온기를 머금은 열양지기가 완맥을 타고 몸속으로 흘러 들어가자, 불규칙하던 맥박이 안정되고 창백한 얼굴 위로 불그스름한 열기가 감돌았다.
“야마모토.”
나직하게 이름을 부르자, 그가 반응했다. 바싹 메마른 입술이 달싹인다.
“……아, 아아.”
나는 말하는 법을 잊은 사람처럼 입만 벙긋거리는 그를 가만히 지켜보며 계속해서 공력을 흘려보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간신히 초점이 돌아온 눈동자로 나를 바라본 야마모토 겐지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조…….”
“조?”
“조센징?”
아니, 이 씨발 새끼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