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80
#79화
나는 은은한 두통과 함께 눈을 떴다. 주위를 둘러보니 낯선 공간이다. 널찍하고 깨끗한 호텔 방.
그제야 간밤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아, 맞다. 2차로 호텔 가서 샴페인 파티 했지.’
세상에, 호텔에서 샴페인 파티라니.
이렇게 말하니까 무슨 재벌 3세가 된 기분이다. 아니, 최 팀장 정도면 진짜 재벌 3세일 수도 있겠다.
“크허어어업. 크헙!”
“…….”
저 아저씨는 진짜 산적이고.
무슨 코골이가 소리 지르는 것 같냐. 진호 형도 한 코골이 하는데 저 양반 앞에서는 음소거 수준이다.
내가 호텔 지배인이면 진작 내쫓았을…….
똑똑.
“누구세요?”
순간 강제 퇴실을 통보하러 온 호텔 직원인가 싶었지만 아니었다. 문 너머로 맑고 시원시원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예요. 송송이.”
잠깐만. 누구?
“자, 잠시만요!”
나는 빛의 속도로 뛰어가 문을 열었다. 그전에 룸에 비치된 향수를 뿌리고 옷매무새를 점검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달칵.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는 송이 씨의 호수 같은 눈동자에 가슴이 쿵쾅거린다. 간신히 떨리는 목소리를 끄집어냈다.
“아, 안녕히 주무셨어요?”
“아니요. 코 고는 소리 때문에 잠을 설쳐서.”
“아.”
시작부터 좋지 않다. 나는 지금도 맹렬하게 코골이 중인 임꺽정을 원망하며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어쩐 일로 오셨어요?”
“아침 먹을 시간이잖아요.”
“……식사 말입니까?”
송이 씨가 뭐 잘못됐냐는 눈빛으로 말했다.
“네. 왜요?”
왜긴. 좋아서 그러지.
살다 살다 여자랑 단둘이 아침을 먹는 날이 올 줄이야. 심지어 그 여자가 내 이상형이기까지 하다. 왠지 안구가 촉촉해져 오는 것만 같다.
‘드디어 내 사막 같은 인생에 오아시스가 찾아왔구나.’
그녀와 함께라면 아침으로 전투식량을 먹어도 상관없다. 나는 결연하게 대답했다.
“지금 당장 준비하겠습니다.”
“그럼 꺽정 아저씨부터 깨워 줄래요?”
“……꺽정 형님은 왜요?”
“톡 안 보셨어요?”
송이 씨가 자신의 스마트폰을 내밀었다.
화면에는 지난밤 만들었던 길드 단체 채팅방이 띄워져 있었다.
〈 평화 길드
최 팀장님
다들 일어나셨습니까?
김 집사님
전 일어났습니다.
송송이
저도 일어났어요.
최 팀장님
다른 두 분은요?
송송이
코 고는 중.
최 팀장님
……깨워서 1층 레스토랑으로 와 주세요.
“…….”
젠장. 좋다 말았네. 내 인생이 이렇지 뭐.
시무룩해진 나를 두고 송이 씨가 돌아섰다.
“그럼 전 먼저 내려갈게요.”
나는 사뿐거리는 발걸음으로 떠나는 그녀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뒷모습도 예쁘네.”
“크헙, 크허어어업!”
“…….”
저 아저씨 진짜 산적 출신 아니야?
* * *
임꺽정을 겨우 깨워서 1층으로 내려갔다.
창가 자리에 앉아 있던 최 팀장이 손을 흔들어 알은척했다.
“미리 시켰습니다. 식기 전에 드세요.”
호텔 조식이라고 해서 양도 더럽게 적은 파스타 같은 게 나오진 않을까 생각했는데, 테이블에 올라온 것은 뜨끈한 해장국이었다.
“크, 역시 최 팀장!”
“팀장님이 뭘 좀 아시네요.”
아직 숙취가 남아 있었는데 해장국 한 그릇이면 운기조식도 필요 없겠다.
나와 임꺽정의 반응에 최 팀장이 고개를 저었다.
“송이 씨가 시킨 겁니다. 전 파스타 먹고 싶었는데.”
“송이 씨가요?”
“네.”
표정이 어두운 걸 보니 어지간히 먹고 싶었나 보다.
그나저나 송이 씨가 해장국이라니. 외모만 보면 애지중지 자란 부잣집 아가씨 같은데 어제 보여 준 모습도 그렇고, 의외로 털털한 구석이 있다.
후루룩.
“크으, 좋다. 다들 뭐 해요? 국물 뜨끈할 때 먹어야죠.”
야무지게 해장국을 먹는 송이 씨를 보고 있자니 가슴 한구석이 뜨끈해진다. 먹는 것도 참 복스럽다.
‘보기만 해도 배가 부르다는 게 이런 거였구나.’
그렇게 밥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도 헷갈리는 상태에서 식사가 마무리됐다. 나를 뺀 다른 사람들이 포만감에 늘어져 있을 때 최 팀장이 말했다.
“식사도 했으니 이제 자리를 옮길까요?”
뭐야, 이제 집 가서 쉬는 분위기 아니었어?
“무슨 자리요?”
내 말에 임꺽정이 빵빵한 배를 두드리며 끼어들었다.
“어디긴, 어제에 이어서 또 달려야지. 오늘은 막걸리 어때? 내가 잘하는 집 알아.”
“아, 저도 막걸리 참 좋아하는데.”
우리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김 집사가 빙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아쉽지만 거긴 다음 회식 때 가는 게 좋겠습니다. 오늘은 더 중요한 일이 있으니까요.”
길드장은 김 집사지만 결정을 내리는 사람은 따로 있다.
사람들의 시선 속에서 최 팀장이 입을 열었다.
“먹고 마시고 쉬었으니 이제 일해야죠.”
평화 길드의 첫 레이드다.
* * *
대격변을 맞이한 인류는 경악했다.
어느 날 예고 없이 생성된 게이트, 그리고 그곳에서 쏟아지는 정체불명의 생물체들.
– 저, 저게 뭐야?
– 괴물, 괴물이다!
차라리 팔다리가 가늘고 머리가 큰 외계인이 쳐들어왔다면 덜 놀랐을 거다. 그러나 놈들은 우주선을 타고 오지도, 총을 쏘지도 않았다.
– 취이이익!
– 카룩! 크루루룩!
끔찍한 악취와 살기로 번들거리는 눈. 인간을 종잇장처럼 찢어 죽이는 괴물들이 도시를 휩쓸고 불태웠다.
소설에서, 영화에서, 혹은 신화 속에서나 나올 법한 괴물들.
미노타우로스(Minotaurus)도 그중 하나였다……고 역사 시간에 배웠다.
“미노타우로스 아시죠?”
최 팀장의 물음에 임꺽정이 자랑스럽게 대답했다.
“그럼. 나 초등학생 때 그리스 로마 신화 만화로 봤지. 되게 멋있었는데, 근육 빵빵하고.”
“……태경 씨는요?”
“구경도 못 해 봤는데요.”
미노타우로스는 B급 몬스터 중에서도 제법 상위에 속하는 놈이다. 만년 F급이었던 나와는 오백 광년쯤 거리가 있었지.
“괜찮습니다. 이참에 구경해 보면 되죠.”
“…….”
게이트가 무슨 동물원이야? 가서 구경만 하게?
자기 일 아니라고 시원하게 대꾸한 최 팀장이 태블릿을 건넸다.
“자요.”
“이게 뭡니까?”
“C급 마정석으로 작동하는 차세대 태블릿입니다. 유려한 디자인과 뛰어난 성능으로 소수의 VIP에게만 한정 판매 되는…….”
“결론만.”
“레이드 영상 넣어 놨습니다. 보세요.”
진작 그렇게 말할 것이지. 나와 임꺽정은 머리를 맞대고 태블릿에 저장된 영상을 감상했다.
– 자, 차분하게 해. 차분하게. 특히 탱커들! 실드 바짝 들어라. 이거 뚫리면 여기 있는 사람들 다 뒈진다. 물론 그전에 너흰 나한테 뒈지고.
– 옙!
열댓 명의 헌터들이 레이드 팀장의 지시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대형을 갖춘다. 다들 긴장한 기색이 역력하다.
‘탱커 넷에 근거리, 원거리 딜러들. 마법사도 있고 힐러까지.’
팀웍도 괜찮고, 팀 구성도 괜찮다.
그리고…….
‘저게 미노타우로스군.’
몬스터 백과사전에서나 보던 B급 몬스터가 모습을 드러냈다.
– 음모오오.
소의 머리에 인간의 몸. 반인반수(半人半獸)의 미노타우로스 일곱 마리가 침입자들을 향해 다가간다.
아니, 돌격했다.
– 모오오오오!
놈들이 울부짖는 소리가 동굴을 울렸다. 떨림 때문에 투두둑 떨어지는 돌가루 아래, 전투가 시작됐다.
– 원거리! 쏴!
레이드 팀장이 목이 터져라 외쳤다. 동시에 마나를 머금은 이십여 발의 화살이 선두에 선 미노타우로스의 머리에 꽂혔다.
퓨퓨퓩!
광범위한 공격 대신 한 놈에게 일점사를 가한 것은 좋은 선택이었다. 특히 머리를 정확히 노리고 쏜 것이 주효했다.
제아무리 B급 몬스터라 한들 눈동자까지 강화할 수는 없으니까.
– 모오오!
제 얼굴을 할퀴며 괴로워하던 놈의 최후를 장식한 것은 뒤따르던 동료들이었다.
퍼걱!
거무튀튀한 쇠몽둥이가 소 대가리를 터트렸다. 그리고.
쿵쿵쿵!
‘허.’
죽은 놈의 시체를 방패로 삼고 그대로 내달린다. 화살이며 마법이 날아들었지만 시체만 걸레짝으로 만들 뿐, 뒤에 숨은 미노타우로스들은 멀쩡했다.
‘이놈들…….’
제법 머리를 쓸 줄 안다. 최소한 고블린만큼 지능이 뛰어나고, 고블린보다는 수십 배 강한 놈들이다.
그래서 더 위험하다.
– 버텨!
– 으하압!
팀장의 외침에 탱커들의 핏줄이 불뚝 섰다. 희뿌연 마나가 어린 방패로 거력이 담긴 쇠몽둥이를 막아 낸다.
퍼버벅!
그 사이로 자그마한 그림자 하나가 허공에서 뚝 떨어졌다. ‘은신’ 계열의 헌터인 그는 또 다른 미노타우로스의 눈알에 검게 칠한 단검을 쑤셔 박고 사라졌다.
– 모오오…….
B급 몬스터는 무적이 아니다. 다른 근접 딜러들과 궁수, 마법사의 원조까지 더해지니 눈 깜짝할 사이에 두 마리가 더 쓰러졌다.
하지만 위기는 빠르게 찾아왔다.
‘뚫린다!’
생각이 들기가 무섭게 위태위태하던 탱커 라인이 허물어졌다.
콰과광!
– 크아아악!
– 힐러, 힐러!
비명과 괴성이 난무한다. 피어나는 먼지 너머로 대형을 헤집으며 쇠몽둥이를 휘두르는 소 대가리들이 보였다.
– 음모오오!
– 탱커, 딜러! 원거리 마나 아끼지 말고 쏟아부어! 원거리는 거리 벌려!
퍼버버벅!
– 음모오오오오!
– 힐러어어어!
영상은 10분 남짓 이어지다가 끊겼다. 전투가 완전히 끝난 건 아니고, 카메라가 쇠몽둥이에 박살 났기 때문이다.
– 음모오오오오!
치지지직.
미노타우로스의 포효와 함께 화면이 흑백으로 물든다. 임꺽정이 침을 꿀꺽 삼켰다.
“……이거 장난 아닌데.”
당연하지, 이 양반아.
나는 태블릿을 최 팀장에게 넘겨주며 물었다.
“어느 길드예요?”
“지난주에 있었던 부천터미널 길드의 레이드 영상입니다.”
“…….”
거, 누가 지었는지 작명 센스 한번 끝내주네. 평화 길드에 들어온 입장으로서 할 말은 아니지만 부천터미널 길드보다는 낫다.
“결과는요?”
“미노타우로스는 전멸. 헌터는 두 명이 죽었습니다.”
레이드 중 사망하는 일은 그리 드문 일이 아니다. 헌터는 죽음에 가까워졌다 도망치기를 반복하는 직업이니까.
그런데도 마음이 무거워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살아남은 자들이 평생 짊어져야 하는 무게다.
지금의 나처럼.
“그렇군요.”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이 정도가 고작이었다. 스마트폰을 꺼내어 검색해 보니 관련된 인터넷 기사가 몇 개 떴다.
[부천 모 길드. 무리한 레이드가 불러온 희생]지난 16일 C급 헌터 이 모 씨, 박 모 씨가 B급 게이트 ‘미노타우로스의 미로’에서 사망했다. 헌터 협회 당국은…….
사망자들이 C급 헌터였구나. 하긴 저 정도 중소 길드에서 B급 헌터들로 열댓 명을 꽉꽉 채워 보낼 만한 인재 풀이 될 리가 없지.
‘그럼…….’
나는 빠르게 길드원들을 훑었다. 그보다 한발 먼저 끌어 올린 [기감]이 그들의 레벨창을 띄운 후였다.
띠링. 띠링. 띠링.
[Lv.75 최민우] [Lv.80 김화종] [Lv.64 송송이]그리고 다음 순간, 임꺽정과 눈이 딱 마주쳤다.
“왜 그래?”
“별것 아니에요.”
애써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고 고개를 돌렸지만 속마음은 그게 아니었다.
[Lv.24 임혁준]이 레이드, 위험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