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81
#80화
게이트 관리소.
번쩍거리는 갑옷을 입은 청년이 얼굴을 구겼다.
“그러니까, 왜 안 되냐고.”
B급 게이트인 ‘미노타우로스의 미로’를 담당하는 공무원이 곤란한 기색을 내비쳤다.
“이미 말씀드렸잖습니까. 지난주에 있었던 사망 사고 때문에…….”
“내가 지금 그걸 몰라서 물어? 알 만한 사이에 왜 이렇게 빡빡하게 구냐, 이거지.”
“안전 단속 기간입니다. 인원이 부족하면 저도 허가해 드리기가 곤란해요.”
공무원은 죽을 맛이었다.
사망 사고가 발생한 게이트는 일주일간 안전 단속이 들어온다. 즉, 게이트 입장 인원이나 수준을 높여 사고를 방지하겠다는 건데…… 눈앞의 청년은 막무가내였다.
“평소보다 좀 더 넣었다. 됐지?”
“이게 무슨!”
청년이 불쑥 내민 흰 봉투에 공무원은 화들짝 놀라 주위를 살폈다. 얼마 전에 들어온 신입 하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 이러시면 안 됩니다.”
“안 되긴 무슨. 지금까지 잘 받아 놓고.”
“…….”
“게이트 담당이 원래 이런 재미지. 맞잖아?”
청년의 노골적인 말에 중년 공무원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의 말대로 하루 이틀 일은 아니지만 신입 앞에서 이 무슨 개망신이란 말인가.
하지만 어차피 엎질러진 물이다. 두툼한 흰 봉투만큼 공무원의 양심은 얇아졌다.
“……지금 팀 구성이 어떻게 되십니까?”
“나 포함해서 열 명.”
“열 명이요?”
“B급 다섯에 C급 다섯. 왜, 문제 있어?”
당연히 있다. 바로 지난주 있었던 사고의 당사자인 부천터미널 길드는 B급 헌터 다섯에 C급 헌터 열 명이 참여했고, 그들이 어떻게 됐는지는 지역 신문 1면에 대대적으로 실렸으니까.
[허술한 레이드가 불러온 참사] [부천터미널 길드장, 헌터 협회 조사에 적극적으로 임할 것]이런 상황에 열 명이라니. 공무원이 갈등하던 그 순간이었다.
“아저씨, 잠깐만.”
방금까지만 해도 험악한 얼굴로 쪼아 대던 청년의 얼굴에 언제부터인지 웃음이 맺혀 있었다.
“어차피 숫자는 얼추 맞춰야 하잖아. 그치?”
“아, 예. 그럼 좋죠.”
“그럼…… 쟤들 끼워서 가자. 모양새 좋게.”
공무원은 청년의 손가락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막 관리소로 들어온 다섯 명의 남녀가 보였다.
‘중년 남자 둘. 젊은 놈 둘. 그리고…….’
끝내주는 미인 하나.
청년의 시선이 떨어지지 못하는 걸로 봐서, 속셈이 뭔지는 안 봐도 뻔했다.
“이제 됐지?”
빠르게 셈을 끝마친 공무원이 봉투를 집어 들었다.
“문제없습니다.”
* * *
중년의 공무원은 친절하게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지금은 안전 단속 기간이라는 사실과 그로 인해 입장이 지연되는 길드들이 꽤 많다는 것. 현재 우리 인원으로는 용병을 구하든가, 다른 길드와 합류해야 한다는 사실까지.
“운이 좋으시네요. 상동 길드에서 온 분들이 대기 중이신데 딱 다섯 분이 부족하거든요.”
“저희까지 합류하면 게이트 진입까지 얼마나 걸리겠습니까?”
“들어오시면 바로 처리할 수 있습니다.”
그럼 우리야 땡큐지. 실질적인 결정권자인 최 팀장도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좋습니다.”
길드장을 맡은 김 집사가 계약서에 서명한 그때, 불쑥 끼어드는 목소리가 있었다.
“반가워요. 상동 길드에서 팀장직을 맡고 있는 임창수라고 합니다.”
유들유들한 목소리와는 다르게 제법 다부진 체격이다.
성큼성큼 걸어오는 그의 모습에서 감출 수 없는 자신감이 흘러나왔다.
‘상동 길드 정도면 그럴 만하지.’
상동 길드는 부천 인근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중견 길드로, 소속된 B급 헌터만 스무 명이 넘는다.
기껏해야 20대 후반으로 보이는데 직책은 팀장이라니. 고스톱으로 올라갈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다.
‘한가락 하는 놈이네.’
뒤이어 끌어 올린 [기감]이 짐작을 확신으로 바꿔 주었다.
[Lv.65 임창수]그런데 어째 이름이 낯이 익다. 어디서 들어 봤더라?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이 김 집사가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십니까. 평화 길드의 김화종입니다.”
우리야 김 집사님, 아저씨, 김 형 등등으로 부르고 바지 길드장인 걸 알고 있지만 외부인 시선에서는 딱 봐도 책임자일 거다.
임창수가 환하게 웃으며 응대했다.
“아하, 평화 길드요. 이름은 많이 들었습니다.”
옆에 서 있던 임꺽정과 송이 씨가 소곤거렸다.
“송 양, 우리 길드 만들어진 지 얼마나 됐지?”
“음. 2주 정도 됐을걸요?”
“레이드는? 많이 했어?”
“무슨 말씀이세요. 길드 하우스 리모델링도 시작 안 했는데. 이게 첫 공식 레이드예요.”
“…….”
B급 헌터쯤 되면 아무리 작게 말해도 다 들리는 법이다. 임창수의 고개가 두 사람을 향했다.
“이분들은?”
“우리 길드원들입니다.”
그의 시선이 두 사람을 스쳤다. 임꺽정에게 잠깐, 그리고 송이 씨에게는 좀 더 길게.
“그렇군요. 이거 제가 괜한 말을 해서, 하하.”
“별말씀을요.”
“어찌 됐든 이것도 인연인데, 기왕 한 팀이 됐으니 잘 부탁드립니다.”
“네, 그럼 저희는 장비로 갈아입고 오겠습니다.”
“게이트 앞에서 기다리죠.”
번쩍거리는 사슬 갑주를 쩔그럭거리며 떠나는 임창수의 뒷모습을, 최 팀장이 심각한 얼굴로 응시했다.
“저 사람…….”
“무슨 문제라도 있어요?”
“장비가 한정판이네요. 저거 굉장히 구하기 어려운 건데.”
“…….”
어, 그래. 비싸 보이긴 하더라.
* * *
헌터는 선망받는 직업이다. 대격변으로부터 인류를 지켜 낸 수호자들이라서……인 것도 있겠지만 일단 돈을 많이 벌기 때문이다.
최하급 헌터였던 나도 빡세게 생활해서 연봉 1억 이상은 벌었으니 두말할 것도 없다.
‘문제는 나가는 돈도 많다는 거지만.’
지출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바로 장비다.
기본적으로 마정석이 들어가니 아무리 가성비를 따져도 돈이 왕창 깨질 수밖에 없다. 거기에 꾸준한 관리와 파손 시 수리비까지.
가슴이 찢어지는 건 둘째치고 통장 잔고가 찢어진다.
‘장비 관련 보험이 괜히 나온 게 아니지.’
그런 의미에서 최 팀장의 최고의 고용주다.
고급 장비를 무상 대여해 주니까.
돌돌돌.
캐리어를 끌고 탈의실로 들어온 최 팀장이 우리를 불렀다.
“각자 포지션에 맞게 괜찮은 것들로 골라 왔습니다. 하나씩 가져가세요.”
단기 여행용으로나 쓸 법한 조그마한 캐리어다. 임꺽정이 실망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내 건 없나 보네.”
최 팀장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그럴 리가요. 이게 뭔지 아시면 깜짝 놀라실…….”
“어, 이거 공간 확장 마법이 걸린 캐리어네.”
“…….”
딱 맞췄군.
내 정확한 예측에 미소가 흐릿해진 것도 잠시. 순식간에 마음을 추스른 최 팀장이 재차 입을 열었다.
“맞습니다. K사에서 제작한 공간 확장 캐리어. 북미 최고의 장인으로 알려진 니콜라스가…….”
덜컹!
“우와, 진짜네! 태경아, 이거 봐라. 안이 엄청 넓어!”
“그러네요.”
“그밖에도 세계 굴지의 디자이너들이 참여…….”
“이야, 이런 건 또 처음 보네. 그냥 여기 들어가서 자도 되겠는데?”
“캐리어 닫으면 누가 열어 주기 전까진 못 나올걸요.”
“그런가?”
“해당 제품은 항상 적절한 온도와 환기를 통해 보관한 물건을 최상의 상태로…….”
철컥, 철컥.
“이거 엄청 멋있네. 어떠냐, 나 잘 어울려?”
“찰떡인데요. 맞춤 정장인 줄.”
“너도 멋있다. 그건 뭐야?”
“흑색 드레이크 가죽 세트라는데요? 아니, 가죽 세트예요.”
“그래? 최 팀장 거니까 좋은 거겠지 뭐. 으하하! 최 팀장 고마워!”
“……별말씀을.”
완전히 전의를 상실한 최 팀장이 힘없이 장비를 갈아입는 사이, 나는 입고 있는 장비들을 하나씩 확인해 나갔다.
‘아이템 확인.’
띠링.
아이템창
[장인의 흑색 드레이크 가죽 세트]종류 : 갑옷
등급 : 절정
설명 : B급 몬스터 흑색 드레이크의 가죽으로 제작된 갑옷 세트. 훌륭한 장인의 손길이 느껴진다.
효과 : 근력, 체력, 민첩, 맷집 +10
– 풀 세트 효과가 적용 중입니다.
아이템창
[장인의 검은 가시 창]종류 : 창
등급 : 절정
설명 : B급 몬스터 흑색 드레이크의 척추 뼈로 제작된 창. 매우 단단함과 동시에 날카롭다. 훌륭한 장인의 손길이 느껴진다.
효과 : 적에게 명중 시 90% 확률로 [출혈] 발동
확인 뒤 드는 생각은 딱 하나다.
‘미쳤네.’
착용하는 것만으로도 40포인트가 부여되는 갑옷에, 찌르는 족족 과다 출혈로 사망시킬 수 있는 창까지.
아이템 정보만 봐도 어마어마한 효과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이런 게 템빨이구나.’
무림에서의 기억을 문득 떠올리니 눈물이 앞을 가린다.
갑옷은 개뿔, 보들보들한 천 쪼가리 걸치고 싸구려 창만 수십 자루는 부러트렸다. 무림인들이야말로 하드보일드의 진수, 진정한 상남자들이 아닐 수 없다.
“명품이라 그런지 느낌부터 확실히 다르네.”
옆을 돌아보니 상기된 표정의 임꺽정이 제자리에서 펄쩍펄쩍 뛰고 있었다.
“무지 가볍고, 몸도 빨라진 것 같고. 기분 탓인가?”
“아닐걸요.”
기분 탓일 리가 있나. D급 헌터인 임꺽정을 위해서 최 팀장이 준비한 장비인데 당연히 좋은 거겠지.
‘살짝 확인해 볼까?’
내가 임꺽정이 입고 있는 풀 플레이트 메일에 손을 올리려던 그때, 어느새 장비를 갖춘 최 팀장이 다가왔다.
“준비되셨으면 출발하시죠.”
“김 집사님은요?”
“밖에서는 길드장님입니다.”
나를 향한 최 팀장의 일침에 김 집사가 허허 웃었다.
“괜찮습니다. 그리고…… 전 항상 장비를 입고 있어서요.”
말과 함께 정장 단추를 푸니 양 손목의 팔찌와 목걸이가 드러났다. 물론 일반적인 장신구가 아니다.
마정석이 박힌 목걸이와 기이하면서도 아름다운 문양이 음각된 팔찌.
“아티팩트(Artefact)?”
“지팡이보다는 이게 더 편하더군요.”
김 집사는 겸손하게 대답했지만 저 정도로 간편한 복장의 마법사는 흔치 않다. 생존율을 높이기 위해 경갑옷이나 호신용 지팡이 하나쯤 들고 있는 게 보통이지.
‘뭐, 보통 마법사는 아니겠지.’
아레스 길드 출신이라고 하면 다들 한 수 접고 들어간다.
문득 김 집사의 과거가 궁금해졌지만 다음 순간 의문은 깨끗이 지워졌다.
똑똑.
“남자분들. 아직 멀었어요?”
“아, 준비 끝났습니다.”
탈의실 밖에서 들려온 송이 씨의 목소리. 최 팀장이 대답하자마자 문이 살며시 열렸다.
“빨리 가요. 사람들 기다릴 텐데.”
“헉.”
질끈 올려 묶은 긴 생머리. 가벼운 가죽 갑옷을 착용한 그녀의 모습에 나는 헛숨을 삼켰다.
‘사람이 이렇게 예뻐도 되나.’
콩깍지가 아니라 사실이 그렇다. 지금까지 귀여운 조카 대하듯 굴던 임꺽정이 침을 삼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꿀꺽.
“…….”
이 인간 조심해야겠군.
어쨌든 임꺽정이 이 정도인데 다른 놈들이야 말할 것도 없을 거다. 좀 젊고 한가락 한다 싶은 놈들이 트럭으로 몰려와 껄떡거릴 게 분명하다.
‘예를 들면 임창수라든지, 임창수라든지. 혹은 임창수라든지…….’
임창수. 상동 길드의 젊은 팀장.
아까부터 자꾸 놈의 얼굴이 눈앞에 어른거린다.
‘분명히 처음 보는 얼굴인데.’
그런데…… 왜 이렇게 신경이 쓰일까. 그 자식이 송이 씨한테 관심 있어 보여서 그런가?
“뭐 해? 안 나오고.”
“아, 네.”
생각은 이어지지 못했다. 임꺽정의 재촉에 나는 황급히 탈의실을 빠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