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811
#810화
직감이라는 것은 어쩌면 예지(叡智)의 다른 이름일지도 모른다.
세포에 각인된 본능이 갑작스럽게 깨어나는 듯한 감각.
머릿속에서 뒤죽박죽 엉켜 있던 수많은 잡념이 오직 하나로 합쳐지는 그 느낌.
“미카엘 실베르트. 미카엘 실베르트. 미카엘…….”
마음에서 맴돌아야 했을 이름이 달싹이는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고 있었지만, 진태경은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찰나의 순간 머릿속을 채운 하나의 의문. 동시에 잇따라 나타난 새로운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이 대답과 함께 부메랑처럼 되돌아오면, 진태경은 다시 한번 또 다른 의문을 실어 부메랑을 던졌다.
그럴 때마다 맨 앞에서 빠지지 않는 글자들과 함께.
혹시. 만약에. 어쩌면…….
단 한 순간도 끊임없이 의심하고 또 의심했다.
어느덧 다시 난잡하게 머릿속을 어지럽힌 생각들이 그럴듯한 형태를 갖출 때까지.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조차 모르는 채.
그리고…….
누구의 것인지도 모를 발걸음이, 지척에 이르는 것조차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깊게.
사박.
모래알이 바스라지는 소리에 잠들어 있던 오감(五感)이 깨어난다.
전신의 솜털이 곤두서고, 뇌의 명령을 기다리지 않는 본능이 몸을 움직였다.
쉭.
돌아섬과 동시에 내리그어진 창날이 공간을 갈랐다.
훈련과 실전에서 수천, 수만 번을 넘게 반복한 동작이다. 본능에 새겨진 그 움직임은 소름 돋을 정도로 예리하고 빨랐다.
어둠 속의 불청객이 순간적으로 죽음을 떠올리게 할 만큼.
하지만 그 역시 만만한 인물은 아니었다.
우우웅.
보이지 않는 기의 파동과 함께 섬광이 번뜩였다.
일순간 환해진 공간 속에서, 뒤늦게 상대의 정체를 확인한 진태경의 눈이 커졌다.
“……!”
깨달음과 함께 찾아온 통제력.
엄청난 속도와 힘을 머금으며 나아가던 일격이 일시 정지 버튼이라도 누른 것처럼 정지한다.
은은한 빛이 서린 반투명한 막에 닿기 직전, 정확히 멈춘 창날과 동시에 강맹한 바람이 휘몰아쳤다.
화아악!
용케도 피에 젖지 않은 모래가 바람을 타고 흩날린다.
간발의 차로 위기를 벗어난 불청객이 입안에 들어간 모래를 뱉어 내며 입을 열었다.
“부탁인데, 날 죽일 생각이면 미리 말해 줘.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 정도는 줘야지.”
창날을 내린 진태경이 다급하게 물었다.
“젠장. 미안해요, 존슨. 어디 다친 곳은 없어요?”
“……보시다시피.”
방어 마법을 해제한 매직 존슨이 간신히 대답했다. 그 잠깐 사이에 식은땀이 맺힌 목덜미가 흐릿한 달빛을 받아 번들거렸다.
“괜찮아. 살짝 지린 것 같긴 하지만.”
“네?”
“오해할 것 같아서 덧붙이자면, 나는 모든 게 큰 사람이지만 이번만큼은 작은 거야.”
그가 농담처럼 던진 말에 진태경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 전의 상황은 정말 위험했다. 마지막 순간 창날을 멈추지 않았더라면 분명 피를 봤을 것이다.
“다시 한번 미안해요.”
“괜찮다니까. 그보다 진, 도대체 뭐야?”
“뭐가요?”
“나처럼 훌륭한 친구이자 전우를 적으로 착각한 이유. 조금 전까지 네가 하고 있던 생각.”
“아, 그게…….”
뭔가 대답하려던 진태경은 문득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그런 그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매직 존슨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좋아. 우리 어린 보스께서 말하기 곤란한 거라면, 그만한 이유가 있을 테니까. 하지만 이 한마디는 꼭 해야겠어.”
“꼭 해야 할 말이라면…….”
“재정비를 끝마친 지 벌써 30분이 되어 간다는 거지. 지금 널 괴롭히는 고민이 뭐든 간에, 더 이상 추격을 지체하면 놈들을 영영 놓치게 돼. 난 그 말을 전하러 왔어.”
뭐? 벌써?
그제야 뒤늦게 시간을 확인한 진태경이 입술을 깨물었다. 매직 존슨의 말은 전부 사실이었다.
‘언제 이렇게 시간이…….’
체감상으로는 최민우가 다녀간 지 불과 일 분도 채 지나지 않은 것 같은데, 하늘은 그사이에 더 어두워져 있었다.
‘그만큼 생각이 많았던 거겠지.’
무아(無我)라는 두 글자는 무공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진태경은 꼬리를 물고 늘어지는 의문에 시간이 가는 것조차 인식하지 못했고, 매직 존슨은 그가 이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던 이유를 짐작할 수 없었다.
“그들의 죽음이 널 괴롭게 만든다는 걸 알아. 그래서 잠시 시간을 준 거고. 하지만 진, 이대로 놈들을 놓치거나 선지자를 찾아내지 못하면…… 지금까지의 희생도 개죽음이 된다는 걸 명심해.”
툭툭.
커다란 손바닥으로 진태경의 어깨를 두드린 매직 존슨은 한 마디를 남긴 채 돌아섰다.
“모두 기다리고 있어. 우린 네가 필요해, 보스.”
그것이 전부였다.
진태경은 서서히 멀어지는 대마도사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자신이 떠올린 이 의문들이, 과연 몇 퍼센트의 진실을 품고 있을지. 도대체 무엇이 거짓이고 무엇이 진실인지.
그리고 이내 호흡을 가다듬으며 중얼거렸다.
“아니, 어차피 길은 하나뿐이야.”
간신히 손에 쥔 실마리는 오직 단 하나.
다른 선택지가 없다면 더 이상의 고민은 무의미하다. 진태경은 사방에 도사린 어둠을 향해 무겁게 발걸음을 뗐다.
* * *
사막의 밤은 춥고 어두웠고, 또 광활했다.
그러나 그 누구도 볼멘소리 하나 없이 조용히 걸음을 옮겼다.
백팔십오 명.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함께 등을 맞대고 싸운 전우들을 잃었다. 그중에는 초면인 이들도, 가까운 이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 이들의 시신을 모래 언덕에 묻은 뒤 떠나야 했다.
영웅들의 최후에 어울리는 묘비 대신 피에 젖은 병장기를 꽂으며, 반드시 이 좌표로 찾아와 가족들의 품으로 돌려보내 주겠노라고 맹세했다.
그것이야말로 살아남은 이들이 계속해서 나아가는 이유였고, 나는 그 선두에 있었다.
쐐애애액!
빠르게 사막을 가로지르는 무수한 신형들.
모래가 섞인 바람을 맞은 얼굴이 따끔거렸다. 하지만 이 바람 안에 담겨 있는 것은 단지 모래알뿐만이 아니다.
‘피비린내. 그리고 악취.’
역하지만 익숙한 냄새가 바람을 타고 전해진다. 이동하는 도중 스쳐 지나간 초목과 바위에는 끈적한 액체가 묻어 있었다.
청록색 핏물. 몬스터의 것이 틀림없다.
‘어디냐.’
몸 안에 웅크린 기운을 넓게 퍼트렸다. 동시에 미세한 호흡과 불쾌한 마력의 잔재를 느낀다.
“쉔.”
발걸음을 멈춘 내 부름에, 그 의미를 즉각 깨달은 샤오 쉔이 벼락처럼 뽑아 든 검을 발밑 깊숙이 찔러넣었다.
푸푹!
순간 움푹 꺼진 모래 사이로 핏물이 솟구친다. 동시에 일대의 지면이 파도처럼 출렁였다.
솨아아아악!
흩날리는 모래 사이로 언뜻 모습을 드러내는 괴물들의 모습. 누군가의 다급한 외침이 밤공기를 뚫고 울려 퍼졌다.
“앤트 라이온(Ant Lion)이다!”
속칭 개미귀신.
가장 작은 개체라고 해도 어지간한 중형 자동차만 하고, 최소 B급으로 등급이 책정되어 있는 강력한 몬스터다.
한데 지금 막 모습을 드러낸 놈은 내가 아는 그 어떤 앤트 라이온보다 커다란 집게와 강대한 마나를 품고 있었다.
‘아까 전 전투에서 달아났던 놈이다.’
전장에서 이탈한 덕분에 목숨을 건진 백여 마리의 A급 몬스터 중 하나다.
나는 판단과 동시에 몸을 움직였다.
팟.
단숨에 이십여 미터의 공간이 사라진다. 나는 가장 가까운 헌터들을 집어삼키려는 놈을 향해 창날을 내리그었다.
서걱!
일격. 강철보다 단단한 두 개의 집게가 두부처럼 썰려 나간다.
고통에 찬 비명이 울려 퍼지기도 전에 허공에서 비튼 창대로 놈의 몸통을 찍었다.
콰직!
역한 악취와 함께 핏물이 뿜어졌지만, 결코 숨이 끊길 정도의 부상은 아니다.
나는 미간으로 추정되는 부위에 창날을 지그시 들이대며 입술을 달싹였다.
이 세상의 것이 아닌, 괴물들의 언어로.
– 몇 가지 묻자. 잘 생각하고 대답해.
– ……!
마계어를 연구하는 학자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를 능숙하게 구사하는 인간은 네임드 몬스터보다도 희귀하다.
이런 상황을 전혀 예상치 못했는지, 고통에 물들어 있던 앤트 라이온의 눈동자가 부릅떠졌다.
– 너. 인간. 어떻게?
나는 대답 대신 백염을 쥔 손에 힘을 더했다.
서걱.
예리한 창날이 갑옷처럼 단단한 살갗을 부드럽게 가르자 다급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 하겠다! 말. 무엇이든!
마계어를 구사하는 솜씨를 보아하니 지성은 낮지만, 눈치는 빠른 놈이 틀림없다. 창날을 멈춰 세운 나는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 다른 놈들은 어디에 있지?
– 갔다. 모두. 해가 떨어지는 쪽.
– 서쪽?
– 맞다! 그곳에 있다. 많이!
딱히 의심할 이유는 없었다. 눈앞의 앤트 라이온은 멍청한 놈인 만큼 하는 말마다 진실이 가득 담겨 있었으니까.
‘서쪽이라.’
당연히 도중에 낙오하거나 흩어진 놈들도 있겠지만, 전장에서 이탈한 몬스터 대부분이 서쪽으로 향한 것이 틀림없었다.
물론 내가 정말 알고 싶은 정보는 따로 있었지만.
– 그럼 선지자는?
– 선지자?
– 그래, 선지자.
앤트 라이온의 퉁방울만 한 눈동자가 깜빡였다.
– 그것은 무엇? 모른다. 나는.
나는 뒤늦게 실수를 깨닫고 혀를 찼다.
선지자라는 명칭은 놈이 스스로 세상에 밝힌 것이다. 몬스터 군단이 사막 어딘가에서 옹기종기 모여 TV를 보지 않는 이상 알 수가 없다.
– 정정하지. 선지자가 아니라 너희의 우두머리. 널 비롯한 몬스터들을 이끄는 지휘관으로.
– 지휘관? 우두머리? 우리, 이끌어?
더듬더듬 내가 한 말을 반복하던 앤트 라이온이 두려움과 혼란이 뒤섞인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 죽었다. 네가. 너희가. 모두 죽였다.
– 뭐?
– 하나. 둘. 셋. 넷. 전부 죽었다. 나, 모두. 겁났다. 그래서 도망쳤다.
나는 놈의 눈동자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앤트 라이온의 말에는 한 치의 거짓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 그래, 그렇단 말이지.
– 나, 나, 믿어라! 안 했다. 거짓말.
– 알아.
나는 앤트 라이온의 미간 깊숙이 창날을 밀어 넣으며, 담담하게 덧붙였다.
– 너로 인해 몇 명이 죽었는지도.
퍼걱. 푸그르륵.
피 끓는 소리와 함께 괴물의 거대한 몸뚱어리가 파르르 떨렸다.
나는 또 하나의 죽음을 알리는 시스템 알림을 들으며 창날에 묻은 피와 체액을 털었다.
심문이 끝났음을 알아차린 매직 존슨이 다가와 물었다.
“놈이 뭐라고 했어?”
나는 건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글렀어요. 선지자의 존재 자체를 모르고 있더라고요.”
“……빌어먹을. 하긴, S급도 아닌 A급 몬스터가 그걸 다 아는 것도 이상하지. 도망친 놈들이 어디로 향했는지는 알아냈고?”
“네.”
“어디?”
나는 별다른 대답 없이 매직 존슨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리고 이내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동쪽이요.”
매직 존슨의 어깨너머, 스켈레톤 킹이 부릅뜬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