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814
#813화
스아아.
모든 것이 선명하고 느려진다.
비틀거리며 물러나는 발걸음을 따라 튀어 오르는 흙과 모래, 부릅떠진 눈동자, 가슴에서 솟구치는 핏물까지.
그리고…….
“너, 뭐 하는 새끼냐?”
입술 밖으로 토해 낸 한마디와 함께 느려졌던 시간이 돌아온다.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히죽 웃는 야마모토 겐지의, 아니 놈의 얼굴이 똑똑히 보였다.
‘선지자.’
조금 전만 해도 고통으로 부릅떠져 있던 두 눈동자는, 어느덧 이해할 수 없는 기쁨과 놀라움으로 번뜩이고 있었다.
‘기쁘다고? 이 상황이?’
도대체 왜, 라는 의문을 뒤로한 채 손에 쥔 단검을 재차 휘둘렀다.
핏물이 솟구치는 가슴을 움켜잡으며 비틀거리던 선지자가 허리춤의 검자루를 잡은 순간. 단검의 날을 타고 뛰쳐나간 참격(斬格)이 그보다 한발 앞서 섬광처럼 어둠을 가로질렀다.
서걱.
서늘한 절삭음과 함께 선지자의 손목 위로 희미한 실선이 그어진다.
검신을 반쯤 뽑아 올리고 있던 놈의 오른손이 힘을 잃고 몸뚱어리에서 떨어져 나왔다.
툭. 푸화악!
뿜어져 나온 핏물이 바닥을 적셨다. 여느 인간과 다를 것 없는 붉은 선혈이었고, 그렇기에 더욱 믿기지 않았다.
놈을 향해 달려들고 있는 지금 이 순간조차.
후웅, 콰직!
천근(千斤)의 힘을 발끝에 실어 내리찍듯 짓밟는다. 종아리의 살이 터지고 뼈마디가 으스러진다.
완전히 몸의 균형을 잃어버린 채 한쪽 무릎을 꿇은 선지자가 하나밖에 남지 않은 손을 뻗었으나 이번에는 내가 나설 필요조차 없었다.
“멈춰.”
깊게 가라앉은 목소리와 함께 바람이 멎는다. 공기가 떨렸다.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히 느껴진다.
주위를 휘감은 대마도사의 강대한 마나(Mana)가. 내게 닿으려던 선지자의 손목을 움켜쥔 그 힘이.
으드득.
허공에서 우뚝 멈춘 손. 뼈 어긋나는 소리와 함께 놈의 미간이 일그러진다.
마치 보이지 않는 거인의 손이 몸뚱어리를 잡고 들어 올리는 것처럼, 선지자의 신형이 허공으로 천천히 떠오른 그때였다.
쐐액, 푸푸푹!
새하얀 무언가가 빛살처럼 날아와 선지자의 사지(四肢)를 꿰뚫었다.
길고 날카로운 뼛조각은 살과 뼈를 두부처럼 가르고, 허공에 떠올라 있던 놈의 몸뚱어리를 절벽 깊숙이 박아넣었다.
콰드득!
수백, 어쩌면 수천 년간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을 단단한 암석은 훌륭한 지지대였다.
예상치 못한 내 기습을 시작으로 한순간에 제압당한 선지자는 왈칵 핏물을 토해 냈다.
“쿨럭. 크흐흐.”
고통은 그 누구에게나 평등하다.
하지만 놈은 마치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피에 젖은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웃었다.
“좋아, 먼저 칭찬해 주지. 아주 잘했어.”
뻑!
안면을 직격당한 선지자의 머리가 뒤로 젖혀졌다. 굉음과 함께 절벽에 뒤통수를 처박은 놈이 고개를 흔들었다.
“오랜만에 골이 울리는군. 재미 보는 것도 좋지만 적당히 하자고.”
“……!”
나는 새어 나오려는 신음을 억눌렀다.
이미 손목을 자르고 무릎을 부쉈다. 그뿐인가. 가장 처음의 일격은 심장 어림을 정확히 파고들었다.
마지막 순간 놈이 몸을 빼긴 했지만, 단검에 실린 엄청난 열양지기가 신체 내부를 엉망으로 만들기에는 충분했다.
‘평범한 인간이라면 이미 숨이 끊어지고도 남았다.’
하지만 놈은, 선지자는 아니었다.
저 불가사의할 정도로 강인한 생명력은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반인반마(半人半魔)와 다름없던 미카엘 실베르트가 괴물의 모습으로, 괴물의 피를 흘리며 죽었던 것과는 달리 지금도 붉은 선혈을 흘리고 있었다.
“……진.”
“저놈은, 저놈은 도대체 뭐지?”
귓가를 파고드는 두 줄기의 음성.
파르르 떨리는 시선으로 불가해(不可解)의 존재를 바라보는 매직 존슨과 스켈레톤 킹의 모습에, 선지자는 피 끓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 누구도 답하지 못할 것이다. 나는 그런 존재니까.”
아니다. 놈의 말은 틀렸다.
나는 어느새 가빠진 호흡을 가라앉혔다. 은은한 빛을 토해 내는 두 눈동자는 타오르는 것처럼 뜨거웠다.
이것은 인간이 아닌 초월적인 힘을 일시적으로나마 받아들인 대가다.
동시에 시스템이 어느 멍청한 인간에게 건네준 선물이자, 이 거대한 퍼즐을 맞출 수 있는 유일한 열쇠이기도 했다.
‘진실의 눈.’
지크프리트 바스만의 죽음으로 시작된 퀘스트, [알 수 없는 죽음]을 완료한 보상으로 받았던 특수 아이템.
내가 스쳐 지나가듯 확인했던 [진실의 눈]의 정보를 다시금 떠올렸던 것은, 실마리를 잡은 직후였다.
아이템창
[진실의 눈]종류 : 일회용 아이템
등급 : 특수
제한 : 진태경
설명 : 아득히 먼 옛날, 신화가 되어 버린 과거의 신이 지혜의 샘물을 마시기 위해 바친 눈동자. 그는 한쪽 눈동자를 바친 대가로 무한한 지혜를 얻었고, 샘 밑바닥에 가라앉은 눈은 다른 세상의 진실마저 꿰뚫는 힘을 얻었다.
효과 : 단 하나의 대상에 한하여 [진실의 눈]을 적용할 수 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시스템은 언제나 길을 알려 줬었지.’
처음에는 몰랐다. 시스템이 [진실의 눈]이라 이름 붙인 소모성 아이템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 오직 내게만 보이는 저 홀로그램이 내게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나는 몇 시간 전 유일한 실마리를 얻었고, 시스템은 그보다 한발 앞서 실마리를 풀 수 있는 열쇠를 쥐여 주었다.
단 하나의 대상에게만 사용할 수 있는, 그래서 더욱 신중하게 사용해야 하는 열쇠를.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나는 모든 진실을 꿰뚫는 힘을 얻었다.
화아아악.
뜨겁다. 눈앞이 새하얗게 물든다.
하지만 그 안에 깃들어 있는 신의 이능(異能)은 고통을 딛고 뻗어 나갔다.
야마모토 겐지를 향해. 이 사막에 신전을 세운 광신도들의 교황을 향해.
지난 삼십여 년간 무닌이라는 이름으로 이 땅에 재앙의 씨앗을 심고, 이제 스스로 꽃피우려 하는 알 수 없는 존재를 향해.
그것은 [기감]조차 뚫지 못한 두터운 장막이었으나, 오딘이라 불린 옛 신의 눈동자는 그 모든 것을 직시했다.
관통하고, 밝혀 냈다.
파앗.
아득한 섬광이 시야를 물들인 그 순간. 무수한 종소리가 뇌리에서 몸부림쳤다.
지금껏 들은 적도, 본 적도 없는 시스템 알림과 홀로그램 창이 사방을 땅끝을 내달리고 구름 위로 치솟았다.
띠링. 띠링. 띠링. 띠리리링!
소리가 소리를 집어삼킨다. 반투명한 홀로그램 창이 하나에서 다섯으로, 다섯에서 수십으로, 또 일백으로 증식한다.
그건 파도였고, 산이었다.
“아……!”
나도 모르게 외마디 탄식이 터져 나왔다.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서늘한 한기가 등골을 타고 흘렀다.
수백, 어쩌면 수천.
헤아릴 수도 없을 만큼 무수한 홀로그램 창이 폭죽처럼 터져 나오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의 시작이자 중심인, 한 존재로부터.
‘선지자.’
숨이 막혔다.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것은 단순한 정보가 아니다. 지금껏 놈이 집어삼킨 수많은 생명이며, 그들이 남긴 묘비였다.
레벨과 이름뿐인 묘비.
그리고 내게 깃든 [진실의 눈]은, 망자들의 이름이 가득한 이 거대한 묘지를 쌓아 올린 묘지기의 정체를 간파해 냈다.
놈이 뒤집어쓴 두꺼운 장막을 걷어내고 진실을 밝혔다.
띠링.
귓가를 울리는 마지막 종소리. 그와 함께 머릿속에서 맞춰지는 퍼즐의 마지막 한 조각.
‘이건.’
비로소 깨달았다.
선지자의 진정한 본질이 무엇인지. 이 저주받은 괴물이 어떻게 삼십여 년간 자신의 정체를 숨기며 모든 일을 해낼 수 있었는지.
‘그래, 이제야 알겠다.’
나는 여전히 웃고 있는 선지자를 응시했다. 그리고 참았던 숨과 함께 한 마디를 토해 냈다.
“도플갱어(Doppelganger).”
그 순간, 똑똑히 보였다.
“……!”
반달처럼 휘어져 있던 입꼬리가 경직되는 모습이. 놈의 정수리 위에 떠 있는 홀로그램 창이 유독 음울하게 빛나는 광경이.
[Lv.170 “최후의 심연” 도플갱어]* * *
도플갱어.
악운(惡運)의 전조이자, 미신처럼 전해져 내려오는 존재.
그러나 전설로만 전해지던 무수한 괴물들이 낡은 신화의 한 페이지를 찢고 현실로 뛰쳐나오는 와중에도 도플갱어라는 존재는 단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인류는 생각했다.
자신들이 지금껏 쓰러트린, 혹은 앞으로 쓰러트려야 할 적 중 도플갱어는 없다고.
저 끔찍한 마계에서조차 존재하지 않는, 그저 사람들의 두려움이 불러온 허상이며 단순한 미신에 불과했다고.
하지만 틀렸다.
도플갱어는 처음부터 존재했다. 단지 단 한 번도 드러난 적이 없었기에 모두가 착각했을 뿐이었다.
적어도 진태경만큼은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무수한 생명을 집어삼킨 저 불가해(不可解)의 존재가, 도대체 언제부터 이 세상에 스며들었는지도.
“미카엘 실베르트. 파리 대전투.”
불쑥 흘러나온 청년의 목소리는 앞뒤를 둘러싼 절벽의 암반처럼 딱딱했고, 잠시 경직되어 있던 괴물의 입꼬리는 부드럽게 풀어졌다.
“그래, 맞다. 너희 인간들이 크리스마스라고 부르는 바로 그 날. 나는 그를 만나 이 세상의 일원이 되었다.”
2020년 12월 25일.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동시에 미카엘 실베르트라는 이름을 인류에게 각인시킨 대전투.
그날의 진실이 한 꺼풀 몸을 벗자 진태경은 숨을 삼켰다. 스켈레톤 킹은 이를 악물었고, 매직 존슨은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선지자를, 아니 도플갱어를 바라보았다.
“말도 안 돼. 당시 파리를 습격했던 건 분명히…….”
“드래곤이었지. 정확히는 태어난 지 삼백 년도 되지 않은 헤츨링(Hatchling)이었어. 태어나길 용이라 천성이 오만했고, 어린놈답게 방심했다. 물론 그렇다 해도 인간에게 죽은 건 의외이긴 했지만.”
매직 존슨의 말을 잘라 낸 도플갱어가 말을 이었다.
“결국 운이 없었던 거야. 그 어린 드래곤도, 그리고 용을 상대로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던 인간들도.”
대격변이라는 파도를 온몸으로 헤쳐나온 대마도사는 참지 못하고 신음을 흘렸다.
“……거짓말이었군. 그 모든 게 미카엘 실베르트가 꾸며 낸 거짓말이었어.”
“글쎄. 완전히 꾸며 냈다고는 할 수 없지. 드래곤이 파리를 습격한 것도, 홀로 살아남은 것도 사실이긴 했으니까.”
도플갱어는 히죽 웃었다.
“처음 미카엘을 보자마자 느낌이 왔지. 다른 인간들과는 달리 녀석은 계산이 빨랐어. 절반을 죽이기도 전에 내게 무릎을 꿇더군. 살고 싶다고. 무엇이든 할 테니 제발 살려만 달라고.”
“……!”
“흥미로운 제안이었다. 나는 그 제안을 받아들였고, 녀석은 남은 인간들은 제 손으로 죽였지.”
진태경은 문득 떠올렸다. 미카엘 실베르트가 최후를 맞이하기 전, 마지막으로 주고받았던 대화에서 들었던 한 마디를.
‘나 역시, 살기 위해 몸부림쳤을 뿐이다!’
피를 토하는 듯했던 외침.
그 말이 맞았다. 미카엘 실베르트는 살기 위해 몸부림쳤다. 그에게는 누구보다 커다란 생존 욕구가 있었고, 아직 이루지 못한 야망이 있었다.
그렇게 인간과 몬스터는 손을 잡았다.
그러나 그것은 족쇄가 아닌 계약이었다. 겉모습은 다르나 본질은 같은 두 괴물이, 각자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계약.
하지만…….
“뭘 위해서였지?”
“뭐?”
“뭘 위해서였냐고 물었다. 이 세상에서, 사람들 사이에 섞여 살고자 했던 진짜 목적이.”
씹어뱉듯이 흘러나온 진태경의 목소리에, 잠시 침묵하던 도플갱어가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글쎄. 지금은 내 대답을 기다릴 때가 아닌 것 같은데.”
그리고 그 순간.
드드드득.
저 멀리에서부터 전해진 진동이, 협곡을 휩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