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815
#814화
투둑. 드드득.
지반이 흔들린다. 까마득히 높게 솟은 절벽에서 떨어져 나온 흙과 암석 파편이 하나둘씩 머리 위로 쏟아져 내렸다.
“……빌어먹을.”
매직 존슨이 신음처럼 중얼거린다. 협곡의 출구를 봉쇄한 스켈레톤 킹과 수백의 언데드는 자세를 낮추고 어둠 속을 노려보았다.
정확히는 저 너머에서 다가오고 있는 수많은 적을.
솨아아아.
나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기감을 끌어올렸다. 한껏 곤두선 감각으로 주위의 모든 정보를 받아들였다.
지면을 통해 전해지는 울림의 크기와 깊이. 서쪽에서 불어오는 바람과 그에 스며 있는 냄새. 그리고 소리.
먼 거리다 보니 적들의 정확한 숫자나 수준을 파악하는 건 무리였으나, 한 가지 사실만큼은 확신할 수 있었다.
‘몬스터가 아니다.’
그렇다면 남은 건 하나뿐이다. 내 시선을 느낀 도플갱어가 피에 젖은 이빨을 드러내며 웃었다.
“인간이란 참 희한한 존재야. 본 적도 없는 존재를 신이라 부르며 목숨을 내던지니까. 근엄한 척 말 몇 마디만 내뱉어도 눈물을 줄줄 흘리더군.”
“광신도들…….”
“나는 처음부터 이 땅이 참 마음에 들었어. 일을 꾸미거나 은폐하기에도 좋고, 무엇보다 종교라면 영혼까지 바치는 인간들이 득실거렸거든. 그런 멍청이들의 믿음을 얻는 건 놀랄 만큼 쉬웠지.”
스슥. 뿌드득.
깨끗하게 잘려 나간 손목의 단면이 꿈틀거린다. 부서진 갑옷 사이로는 단검에 베인 가슴에는 어느새 뽀얀 새 살이 돋아나 있었다.
포션도, 마법도 아니다.
하지만 놈은 지금 이 순간에도 망가진 몸을 회복하고 있었다.
한눈에 봐도 인간의 것이 아닌, 믿을 수 없을 정도의 회복력.
그 누구라도 의심할 수밖에 없는 재생(再生)의 힘.
그러나 이와 같은 광경은 대격변 이전부터 전 세계를 상대로 테러를 벌이던 광신도들에게 다른 모습으로 비쳤을 것이다.
자신들과 같은 붉은 피와 살, 마나를 사용하는 도플갱어에게서 신의 그림자를 엿보았을지도 모른다.
“기적.”
들뜬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도플갱어는 형형한 안광으로 나를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저들이 바라보는 나는 괴물이 아닌 기적 그 자체요, 약속의 땅으로 이끌 선지자다.”
“……!”
“최후의 한 사람이 쓰러지는 순간까지 싸우겠지. 신을 위해. 그리고 나를 위해.”
나는 확신에 찬 도플갱어의 말에 반박하지 않았다.
엄연한 현실이니까.
무슨 수를 쓴다 해도 격돌은 피할 수 없다.
도플갱어는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자신의 추종자들을 이 사막에 심었고, 그렇게 시작된 광신도의 물결은 이미 테러라는 형태로 전 세계를 뒤흔들었다.
그러니 내가 저 광신도들에게 도플갱어의 정체를 알려 봤자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말 몇 마디 정도로 순순히 넘어갈 놈들이었다면, 광신도라 부르지도 않았겠지.’
이건 결국 괴물과 미친놈들이 만들어 낸 합작품이었고, 지금의 나는 반드시 죽여 없애야 하는 이교도일 뿐이다.
신이 내린 위대한 선지자를 핍박하는 이교도.
“그럼 남은 길은 하나밖에 없네.”
나는 담담하게 뇌까리며 도플갱어를 응시했다. 내가 한 말의 의미를 깨달은 놈이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거 기대되는군.”
“그래?”
푹!
말과 함께 뻗은 단검이 심장을 관통한다.
사지가 결박되어 있었기에 피할 수도 없었던 일격. 그러나 도플갱어는 눈살을 찌푸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적당히 하지. 더럽게 아프네.”
뿌드득.
끊어졌던 근육이, 박살 났던 뼈가 제자리를 찾는다. 선홍빛 핏물이 차오르고 어린아이처럼 매끄러운 살갗이 그 위를 덮었다.
마치 동영상을 빠르게 재생시킨 것처럼 엄청난 회복 속도.
사지를 꿰뚫고 그대로 절벽 깊숙이 박힌 커다란 뼛조각들마저 재생된 살과 뼈에 밀려 조금씩 들썩이고 있었다.
내가 [진실의 눈]으로 보았던. 그리고 지금도 보고 있는 수많은 레벨 창은 결코 단순한 의미가 아니었다.
‘또 다른 목숨.’
그것은 양분인 동시에 도플갱어가 집어삼킨 희생자들의 생명이다.
마치 동전만 넣으면 되살아나는 오락실 게임 캐릭터처럼, 놈은 끊임없이 부활할 수 있었다.
‘하지만 완전한 불사(不死)는 아니지.’
나는 여전히 손에 쥐고 있던 단검을 비틀었다. 단전에서 솟구친 열기가 혈도를 타고 단검으로 내달렸다.
푹, 퍼엉!
가슴 깊숙이 박아넣은 단검을 따라 흘러나온 열양지기가 도플갱어의 몸 깊숙한 곳에서 폭발한다.
앞서 한 번 관통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불사신처럼 회복하고 있던 심장이 완전히 으스러지자, 기다렸던 맑은 종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띠링.
– [Lv.120 야마모토 겐지]를 처치했습니다!
– 상당량의 경험치를 획득했습니다!
“……!”
한 사람의 생명이 사그라지고, 새로운 생명이 차오른다.
도플갱어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녹듯이 흘러내린 살갗 뒤에는 또 다른 누군가의 낯선 얼굴이 준비되어 있었다.
“이런. 바로 그 진태경이 겐지를 죽이다니. 이 사실을 일본에서 알면 한바탕 난리가 나겠는데.”
“아가리 닥쳐.”
낮은 콧대와 입안으로 보이는 덧니.
동양인 중에서도 구분되는 특유의 이목구비를 보아하니, 야마모토 겐지를 제외하고 전멸당했다고 알려진 J1 팀 소속의 헌터가 분명했다.
“그러고 보니 인사를 깜빡했군. 반가워, 난 이노우에 히로시라고 한다. 나가사키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뒤 도쿄로 상경…….”
덥석, 콰드득.
목을 붙잡고, 그대로 힘주어 비틀었다.
무시무시한 손아귀 힘을 이기지 못하고 단번에 목뼈가 으스러진 도플갱어의 고개가 기이하게 꺾였다.
띠링. 또 한 번의 종소리와 함께 꺾였던 고개가 바로 세워졌다. 새치름하게 웃고 있는 얼굴은 처음 보는 여자의 것이었다.
“오, 혹시 그거 알아? 이 여자, 방금 네가 죽인 그 인간의 연인이었어. 올해 안에 결혼할 생각이었나 봐.”
“……!”
누군가 정지 버튼을 누른 것처럼 우뚝 멈춰선 손. 도플갱어가 흥미진진하다는 듯이 휘파람을 불었다.
“이야, 뜨겁다. 뜨거워. 확실히 이런 면에서는 인간들이 대단하다니까. 우리도 좀 배울 필요가 있어.”
“……너.”
“아, 미안. 불편하게 느껴졌다면 사과하지. 하지만 이게 내 능력인 걸 어떡해?”
나는 이를 악물었다.
도플갱어가 희생자들로부터 흡수한 것은 겉모습뿐만이 아니었다. 그들이 생전에 갖고 있던 능력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기억마저 제 것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놈의 주둥이에서 흘러나오는 그들의 기억이, 내 가슴을 송곳처럼 후벼 파고 머뭇거리게 만들었다.
으득.
악문 잇새 사이로 피가 흘렀다.
어느덧 협곡 너머에서는 더욱더 강해진 진동과 함께 흉흉한 살기(殺氣)가 느껴졌고, 눈앞에는 죽여도 죽여도 되살아나는 괴물이 빙긋 웃고 있다.
“진!”
매직 존슨의 다급한 외침이 고막을 때린다. 도플갱어의 입가에 맺힌 미소가 진해졌다.
“마지막 기회야.”
“뭐?”
“바로 지금이, 네가 도망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고.”
“……!”
훅.
서늘한 사막의 바람이 얼굴에 닿았다. 마치 찬물을 뒤집어쓴 기분이다.
석상처럼 굳어 버린 나를 향해 도플갱어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이해해. 자존심 상하고 쪽팔리겠지. 하지만 네가 다른 인간들처럼 여기에서 죽으면? 그건 개죽음이 아니라 영웅의 숭고한 희생인가?”
“……그건.”
“멀리, 넓게 봐야지. 넌 세계 헌터 연맹의 맹주잖아. 과거 어떤 인간이 그랬듯이 이 세상을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빛이자 희망. 안 그래?”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귓가를 간질였다. 금기된 사과를 훔쳐 먹으라 권유하는 뱀의 목소리처럼.
낮게 깔린 도플갱어의 속삭임은 부드럽게 내 전신을 휘감았다.
“도망쳐. 그리고 살아남아.”
구구궁.
협곡이 뒤흔들린다. 무수한 광신도들의 발걸음이, 그들이 올라탄 낙타의 발굽이 가파르게 저 어둠 너머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가족과 친구들을 생각해. 네 죽음으로 인해 그들이 겪을 슬픔과 고통이 얼마나 클지, 상상이나 가?”
“……슬픔과 고통?”
“그래. 너도 이미 겪어 봤잖아.”
나는 소리 없이 입술을 달싹였다.
누군가의 죽음으로 인한 슬픔과 고통. 그래, 겪어 봤다. 마음이 흔들리다 못해 무너질 것 같은 경험이었다.
“누구도 널 비난하지 않아. 심지어는 나조차도 네가 해 온 일들을 존중하지. 그러니 지금이라도…….”
이름 모를 여자의, 아니 도플갱어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도망쳐.”
– 알라 후 아크바르!
수많은 목소리가 모여 하나로 합쳐진 거대한 함성이 어둠이 내리깔린 사막에 울려 퍼진다.
매직 존슨을 중심으로 눈부신 광휘가 어른거렸고, 수백의 언데드들은 흐릿한 안광으로 자신들을 향해 덮쳐 오는 무수한 광신도들의 파도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도플갱어의 목을 붙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저벅.
한 걸음 물러나자 웃고 있는 도플갱어의 모습이 보였다. 놈은 마치 어린아이를 대하는 듯한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좋아. 잘 생각했어.”
나는 문득 중얼거렸다.
“이게 최선일까?”
“그럴 거야.”
“그렇다면 다행이고.”
고개를 끄덕인 나는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오픈. 소환.”
“응?”
서걱!
공허한 되물음과 함께 도플갱어의 목이 솟구쳤다.
마치 책의 페이지를 넘긴 것처럼 새롭게 어깨 위로 솟아난 얼굴이 눈을 깜빡였다.
백염의 창날을 휘감으며 타오르는 열기가 놈의 눈동자를 불그스름하게 달구고 있었다.
“무슨 씨벌 통신 교환 실패한 메타몽 같은 새끼가. 어디서 개수작 부리고 있어?”
그제야 상황을 파악한 도플갱어가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미친놈…….”
“좀 더 참신한 거 없냐. 하도 들어서 좀 지겨운데.”
“도대체 이러는 이유가 뭐지?”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인데.”
“뭐?”
“처음부터 헛소리를 지껄이길래 이게 뭔가 싶었는데, 듣다 보니까 흥미가 생기더라고. 내가 살다 살다 인간한테 도망치라고 하는 몬스터 새끼는 또 처음 봐서 순간 엄마라고 부를 뻔했다, 이 개새끼야.”
“…….”
“너, 도대체 뭐 하는 놈이냐? 들키지 않으려고 안간힘 쓰면서도 티 팍팍 내는 거 보니 멍청한 건 알겠고, 진짜 원하는 게 뭐야?”
짧은 침묵이 흘렀다. 말없이 나를 응시하던 도플갱어가 미간을 찌푸렸다.
“빌어먹을. 일 한번 더럽게 꼬였군. 왜 이렇게 무모하지? 숭고한 희생을 한 영웅. 뭐 그렇게 역사에 남고 싶은 거냐?”
“코끼리 코 빠는 소리 집어치우고 대답이나 해라. 내 장래희망이 장수마을 촌장이야.”
“그럼 도대체 왜……!”
삐이잇!
하늘에서 울려 퍼진 무언가의 울음소리가 도플갱어의 뒷말을 삼켰다.
자연스럽게 머리 위 상공을 올려다본 놈의 눈동자가 문득 크게 뜨였다.
“……저건?”
지금 도플갱어의 눈에 비친 광경을, 나는 이미 알고 있다.
부대를 나누어 떠나기 전, 직접 스켈레톤 킹에게 전음을 날려 지시했던 것이었으니까.
“조금 늦긴 했는데. 그래도 때맞춰 왔네.”
삐이이잇!
수십여 마리의 독수리와 그리핀이 날개를 활짝 편 채 협곡 위를 활강한다.
거대한 날짐승들의 위에는 동쪽으로 떠났어야 했을 헌터들의 얼굴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