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816
#815화
쉬이이익.
차가운 밤바람이 전신을 스친다.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쓸어넘긴 최민우는 빠르게 가까워지는 협곡을 내려다보았다.
‘저곳이다.’
시린 빛을 토해 내는 창날은 짙은 어둠 속에서도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지금껏 수많은 명품 무기와 아티펙트를 수집한 그였지만, 백염(白炎)이라 이름 붙여진 저 창의 강도와 예리함에는 매번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물론 그 주인보다는 아니지만.’
최민우는 문득 진태경을 떠올렸다.
처음 그를 보았을 때만 해도 상상하지 못했다. 짐꾼 역할로 함께 레이드에 참여했던 또래의 청년이, 불과 일 년도 채 되지 않아 전 세계 모든 헌터들의 정점에 서리라는 것을.
그러나 진태경은 누구도 상상할 수 없던 일을 현실로 만들었다.
수많은 재앙을 막아 냈고, 험난했던 그 과정에서 눈부신 성장을 이뤄 냈다.
위기마다 그가 보여 주는 과감함과 용기는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봐 온 최민우의 예상마저 아득히 뛰어넘고는 했다.
바로 오늘처럼.
‘평소와는 다르다고 느끼긴 했지만…… 진태경 씨는 점점 더 한발 앞서가시는군요.’
스켈레톤 킹이 보낸 언데드를 통해 상황을 전달받았을 때는 놀라움과 섭섭함을 동시에 느꼈지만, 그 감정들은 머지않아 기쁨으로 바뀌었다.
다른 이들이 풀지 못한 난제(難題)를 홀로 해결했다는 것은, 그가 한 단계 성장했다는 증거였으니까.
‘그와 함께라면 우리는 승리할 수 있다.’
진태경은 모두를 이끄는 총사령관이면서 전장을 진두지휘하는 장군이요, 또한 누구보다 앞서 적을 향해 달려 나가는 선봉장이다.
신뢰하지 않을 수 없고, 사랑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설령 진태경이 가는 길에 무수히 많은 장애물과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하더라도, 그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많이도 몰려왔군.’
최민우는 침착한 눈빛으로 지상을 응시했다.
수백 미터 아래 지상에서는 새카맣게 몰려든 적들이 파도처럼 협곡으로 쏟아지고 있었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무수한 적들.
그들의 발걸음이 지축을 울리고, 거대한 함성이 사방에서 울려 퍼졌다.
– 알라 후 아크바르!
– 형제자매들이여, 돌격하라! 약속의 땅으로!
– 신께서 내리신 구원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세상의 눈을 피해 숨어 있던 광신도들이 부르짖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신의 구원을 입에 담는 그들의 손에는, 피와 죽음을 부르는 병장기가 들려 있었다.
‘저들은 우리와 같은 사람이 아니라, 단지 쓰러트려야 할 적이다.’
최민우는 다짐하듯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아니,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는 헌터들 모두가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이미 보았다. 뼈저리게 겪었다.
인간은 그 어떤 생명체보다 선해질 수도, 악해질 수도 있는 동물이라는 것을.
이 세상을 위협하는 것은 단지 몬스터뿐만이 아니라는 것을.
마왕 아스모데우스가 강림하기 이전. 숱한 전쟁과 죽음을 불러온 일으킨 이들 역시 그들과 같은 인간이었다.
인류는 그로 인하여 고통받았고, 고통 속에서 잊지 말아야 할 교훈을 깨달았다.
‘세상에는, 붉은 피를 지닌 괴물도 있지.’
그리고 이 자리에 있는 헌터들의 존재 이유이자 유일한 의무는, 그 괴물들을 사냥하는 것이다.
스릉.
곳곳에서 모습을 드러낸 날붙이들이 서늘한 예기(銳氣)를 토해 낸다.
앞서 치른 몬스터 군단과의 전투로 인해 평소보다 지친 기색이 역력했지만, 헌터들의 눈동자에 깃든 의지는 그 어느 때보다 굳셌다.
쐐애애액!
더욱더 맹렬해진 바람. 그리고 가파르게 뛰는 심장.
수십여 마리의 독수리와 그리핀들이 거대한 날개를 비스듬히 세우며 지상을 향해 떨어져 내린다.
저 멀리에서 되돌아오는 메아리처럼 들리던 광신도들의 함성은, 지금 이 순간 모두의 귓가를 쩌렁쩌렁하게 울리고 있었다.
“최후의 한 사람까지 싸워라! 물러서지 마라!”
최민우는 숨을 삼켰다. 전장의 바람이 따끔거린다. 광신도들은 손에 만져질 듯한 광기를 흘리며 협곡을 향해 쏟아지고 있었다.
거구의 대마도사와 수백의 언데드를 거느린 스켈레톤 킹이 있었으나, 그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저들에게 있어 이 전투는 성전(聖戰)이었다. 설령 죽더라도 거룩한 순교자의 일원으로 신의 곁에 설 수 있을 터다.
이미 각성이라는 기적을 경험한 신의 전사들은 낙타의 등을 박차고 눈부신 속도로 쏘아졌다.
삼백 미터. 백 미터. 오십 미터.
가파르게 좁혀지는 거리.
그리고…….
격돌.
퍼엉! 콰아아아앙!
크아아악!
불꽃이 어둠을 살라 먹는다.
매직 존슨의 공격 마법에 직격당한 선봉대가 비명과 함께 타올랐고, 죽음과 함께 찾아온 잠깐의 공백을 순식간에 채워 낸 또 다른 광신도들은 망설임 없이 언데드들을 덮쳤다.
우직, 콰드드득!
터무니없이 좁은 협곡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넓은 것도 아니다.
그러나 오랜 세월 동안 도플갱어가 육성한 광신도들은 단번에 언데드로 이루어진 전열(戰列)을 허물어트렸다.
광신도들이 품은 뜻과 마음은 이미 괴물과 다름없다 해도, 몬스터들과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그들은 여느 헌터처럼 강하고 영리했으며, 무엇보다 훌륭한 지휘관이 둘이나 있었으니까.
“타락한 악마들이다! 모조리 쓸어 버려라!”
“인샬라.”
거친 외침과 함께 선두에서 날뛰는 한 사내. 그리고 후미에서 침착한 표정으로 전장을 주시하는 노인.
혼란스러운 전장 속에서도 유독 눈에 띄는 두 사람의 모습을 확인한 최민우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그들이 지닌 힘의 크기를.
‘S급 헌터, 아니 광신도라고 해야 하나?’
지금의 그로서는 상대할 수 없는 강자들.
그러나 희한하게도 두려움은 들지 않았다.
다음 순간, 문득 하늘을 응시한 노인과 시선이 마주쳤음에도 최민우의 마음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쉭, 서걱!
그야말로 섬광 같은 일격.
노인의 허리춤에서 솟구친 한 줄기의 오러가 최민우가 올라탄 그리핀의 목을 깔끔하게 가른다.
힘을 잃은 거대한 비행 몬스터의 몸뚱어리가 힘을 잃고 기울었다.
슈화악. 드드득!
흉폭해진 바람과 함께 거칠게 흔들리는 신형.
하지만 최민우는 동요하지 않았다. 급강하에서 추락으로 상황이 변했음에도, 어째서인지 입꼬리가 올라갔다.
등뼈를 붙잡고 버티던 다른 헌터들이 내지르는 비명도, 그를 미친놈처럼 바라보는 시선들도 상관없었다.
‘지금까지의 선택에 후회는 없다. 그저 최선을 다해 싸울 뿐.’
마음이 고요하다. 손에 들린 검은 깃털처럼 가볍다. 오늘이라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성큼 가까워진 지상과 함께 어느 이름 모를 광신도의 고함이 고막을 후려쳤다.
“위대한 신을 위하여, 선지자를 위하여!”
소리 내어 웃은 최민우가 문득 입을 열었다.
“우리의 맹주를 위하여.”
낮지만 힘 있는 목소리. 그것이 곧 신호였다.
파팟!
최민우가, 아니 헌터들 모두가 지상을 향해 수직으로 처박히던 그리핀의 몸뚱어리를 박차며 솟구쳤다.
탁. 가장 먼저 지면에 내려앉은 그의 손에 들린 검이 흐릿해졌다.
쉬익! 촤아악!
검을 타고 일어난 날카로운 바람이 사방에서 달려들던 광신도들의 사지를 베어 가른다.
핏물을 뿜어내며 허물어지는 몸뚱어리들 사이로 한 줄기 빛이 쇄도했다.
쐐액, 쾅!
빠르게 검을 들어 막았지만, 그것이 최선이었다.
엄청난 힘을 이기지 못하고 몇 걸음이나 밀려난 최민우의 귓가에, 착 가라앉은 누군가의 목소리가 닿았다.
“어디서 본 얼굴인가 했더니. 이제야 알겠어, 스카이의 핏줄.”
흉흉한 눈빛.
오러에 휘감긴 한 자루의 검을 든 채 다가오는 아랍인 사내를 바라보며, 최민우는 이 혼잡한 전장의 틈바구니에서 보이지 않는 한 사람을 향해 마음속으로 말을 건넸다.
‘모르겠습니다. 제가, 우리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그러나 한 가지 사실만큼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싸워야 한다. 적들보다 먼저 쓰러져서는 안 된다.
설령 그것이 자신보다 훨씬 강한 상대라 해도.
스윽.
최민우는 사내를 향해 검을 겨누었다. 선명한 오러가 깃든 [영웅의 검]이 환한 빛을 토해 낸다.
허공에서 떨어져 내린 팔백여 명의 헌터들이 어둠 사이로 번져가는 광휘를 중심으로 뭉쳤다.
“빌어먹을 이교도 놈들. 지옥으로 보내 주마.”
흉흉한 미소를 띤 사내의 몸이 시야에서 사라진다. 동시에 터져 나온 검격이 본능적으로 고개를 숙인 최민우의 목덜미를 스쳤다.
사방에서 몰려드는 광신도들을 막아 내던 스켈레톤 킹이 사내를 향해 쏘아졌다.
콰앙!
무수한 굉음과 비명이 협곡을 휩쓸었다. 지면이 들썩이고 견고한 암반이 갈라진다.
수백여 년간 겪은 적 없던 피바람과 충격은 양옆으로 늘어선 절벽을 향해 고스란히 전해졌다.
입구로부터 수십 미터를 지나야 도달할 수 있는 협곡의 중심지까지도.
그리고 그 미세한 균열은, 풀려나서는 안 될 누군가가 자유를 되찾는 것을 조금이나마 도왔다.
투두둑. 쾅!
창처럼 길고, 창보다 두꺼운 뼛조각이 폭발하듯 튕겨 나간다. 동시에 수없이 으스러지고 끊어진 사지의 단면으로부터 새로운 피와 살이 차올랐다.
스륵. 뿌드득.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는 초고속 회복.
아니, 재생.
일백하고도 마흔다섯 번째 부활을 끝마친 도플갱어가 피에 젖은 이빨을 드러내며 웃었다.
“이런. 지금부터가 시작인데, 벌써 지쳤나?”
푸푹!
대답 대신 날아든 섬광이 미간을 관통한다. 창을 쥔 청년이 물기 하나 없이 메마른 입술을 달싹였다.
“아니. 이제 힘이 좀 날 것 같은데.”
그리고 그 순간.
띠링.
오직 한 사람만이 들을 수 있는 종소리가, 맑게 울려 퍼졌다.
* * *
초절정의 경지에 오른 직후, 나는 이미 초인(超人)의 반열에 들었다. 그것 하나만큼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초인이라 불리는 이들도 결국 한 사람의 인간에 불과하다.
부상을 입으면 고통스러워하고, 강한 상대를 만나면 긴장하고, 끊임없이 움직이다 보면 언젠가는 지치는. 그런 인간.
나도 바로 그 인간 중 하나다.
한 가지 차이점을 제외한다면.
띠링.
– [Lv.78 브로디 우즈]를 처치했습니다!
– 극소량의 경험치를 획득했습니다!
– 레벨 업!
– 레벨 업의 효과로 치유의 힘이 깃듭니다!
– 특별 디버프, [부서진 신체]가 치유의 힘을 거부합니다!
– 상태 이상, [피로]가 해제되었습니다!
– 상태 이상, [근육통]이 해제되었습니다!
– 상태 이상, [공력 고갈]이…….
.
.
.
줄줄이 떠오르는 시스템 메시지와 함께 흐릿해지던 시야가 선명해진다.
나는 눈 녹듯 사라지는 신체의 피로와 차오르는 공력을 느끼며 중얼거렸다.
“브로디 우즈. 브로디 우즈…….”
끝까지 기억해야 할 이름이다. 슬슬 한계에 다다르고 있던 나를 구해 준 영웅이니까.
두 번이나 죽음을 맞이한 희생자들 한 사람, 한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의미에서.
“죽어.”
서걱.
창날이 그린 궤적을 따라 비틀거리며 일어나던 도플갱어의 상반신이 비스듬히 미끄러진다.
그리고 동시에 이미 지긋지긋하게 봤던 그 광경이 다시 한번 눈앞에 펼쳐졌다.
스르륵.
무서운 속도로 차오르는 피와 살. 멀쩡하게 일어나는 도플갱어의 얼굴은 어느 때보다 여유로웠다.
“그만하지. 슬슬 한계일 텐데.”
“아냐. 할 만해.”
푹!
“얼마 안 남았군. 허세 부릴 필요 없어.”
“괜찮다니까.”
퍼걱, 촤아악!
“이제 진짜 마지막…….”
“어허.”
서걱!
다시 한번 부활한 도플갱어가 중얼거렸다.
“아니, 뭐 이런 씨발놈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