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822
#821화
수십 대의 화살이 허공에 멈춘 순간, 노인은 자신의 두 눈을 의심했다.
‘마법?’
아니다. 그럴 리 없다.
마법사와 전사는 마나(Mana)라는 같은 뿌리를 공유하고 있지만, 그 줄기와 가지는 전혀 다른 방향을 향해 뻗어있다.
그렇기에 마나와 마력의 공존만큼이나, 아니 어쩌면 그 이상으로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는 존재가 바로 마검사(魔劍士)였다.
‘하지만 마법이 아니라면 어떻게?’
일찍이 초인(超人)의 경지에 들었던 노인이었다.
젊은 시절엔 험난한 중동의 정세 속에서 부족을 지키기 위해 전장을 누볐고, 중년 무렵 벌어진 대격변의 시작과 동시에 지금껏 알지 못했던 힘을 각성했다.
굳이 마력을 받아들이지 않았더라도, 대격변의 영웅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었을 강자.
그런 노인이었기에 더더욱 믿기지 않았다.
그와 같은 전사가 마나를 이용하여 무언가를 움직인다는 것에는, 확실하고도 분명한 한계가 존재하니까.
‘하물며 저것은 화살이다. 그것도 근거리에서 쏘아 보낸, 수십 발의 화살.’
심지어 후방에 머무르고 있던 부대는 그가 직접 훈련한 최정예들이다. 가장 중요한 순간을 위해 아껴 두고 아껴 두었던 검과 방패들.
한데 바로 그 정예들이 날려 보낸 화살이 가로막혔다.
아니, 통제했다.
마나를 머금은 채 강맹하게 쏘아진 수십 발의 화살을, 단 한 번의 손짓으로.
솨아아악.
공기가 멈춘다. 짙은 피비린내를 머금은 바람이 사라졌다.
모든 것이 사막의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린 그 공간 속에서, 한 사람을 향해 쏟아지던 강철의 파도가 고개를 돌렸다.
스윽.
마나를 머금은 수십여 개의 화살촉이 어둠 속에서 번뜩인다. 자신들을 쏘아 보낸 옛 주인들을 향해. 그리고…….
“이야. 이게 되네.”
새로운 주인의 뜻을 받들기 위해.
‘진태경.’
피를 뒤집어쓴 채 웃고 있는 청년의 얼굴을 바라본 노인은 자신도 모르게 이를 악물었다.
하얗게 질린 입술 사이로 신음 같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 이게 무……!”
이게 무슨 짓이냐.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것이냐.
노인은 그리 묻고 싶었지만, 청년은 그릇된 신앙에 눈이 먼 늙은이의 말을 기다려 주지 않았다.
“환불이다, 이 씨벌놈아.”
쉬쉬쉬쉭!
강맹한 파공성이 침묵을 깨트린다. 사방을 에워싼 수백의 광신도가 넋 나간 눈동자로 그 믿을 수 없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마치 보이지 않는 거인이 활시위를 당긴 것처럼, 강철로 이루어진 수십여 발의 화살이 조금 전과는 비교할 수도 없이 빠르고 강하게 빗발치고 있었다.
단 한 사람.
모든 광신도들을 이끌고 아우르는 늙은 총사령관을 향해.
“막……!”
퍼엉!
끝나지 않은 외침이 작은 폭발음에 파묻혀 사라진다.
화살을 튕겨 내기 위해 휘둘려졌던 검이, 주인의 팔과 함께 허공으로 솟구쳤다.
“크아아악!”
뒤늦게 터져 나온 비명. 그리고 막아서는 모든 것을 끊어 내고 부수며 들이닥치는 수십 줄기의 섬광.
으득.
입 안 가득 비릿한 혈향이 번진다.
피가 흐르는 것도 모를 만큼 강하게 입술을 깨문 노인이 손에 든 시미터를 내리긋자, 마력과 마나가 뒤섞인 혼탁한 기운이 터져 나왔다.
후우우웅!
도신(刀身)을 타고 흘러나온 막강한 풍압이 전방에서 날아드는 화살을 밀어 낸다.
포위당한 채 모든 방향에서 날아드는 화살을 맞이해야 했던 진태경과 달리, 노인의 주위에는 그를 위해 목숨 바쳐 화살을 막아 낼 광신도들이 있었다.
아마도 그래서였을 것이다.
노인이 단숨에 공세(攻勢)로 전환하여 걸음을 내디딘 것은. 방패처럼 주위를 둘러싼 수십의 수하들을 믿은 것은.
그러나 그 믿음은, 다음 순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쉬릭.
미세한 파공성과 함께 노인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지금 그의 노회한 회색빛 눈동자에 비치고 있는 것은, 마치 살아 있는 생물처럼 광신도들을 피해 날아드는 화살들의 모습이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비명과도 같은 외침이 혀끝에 맴돌다 사라진다. 아니, 입 밖으로 토해 낼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헛숨을 들이킨 노인은 황급히 시미터를 휘둘렀다.
그리고 어느덧 사방을 가득 메운 섬광들을 바라보며 직감했다.
‘빌어먹을.’
진태경과 달리, 자신은 이 공격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콰드득!
시미터의 궤적에 걸려든 화살들이 꺾이고 부서진다.
하지만 초인의 경지에 이른 노인조차 그 모든 것들을 쳐내고 피할 수는 없었다.
푸푸푸푹!
“커헉!”
악문 잇새 사이로 핏물이 흘러넘친다. 순간 눈앞이 아득해진 노인은 전신 곳곳에서 전해지는 통증을 느꼈다.
갈비뼈, 다리, 가슴과 등줄기…….
갑옷과 살을 뚫고 뼈를 부순 화살촉의 감촉이 전해진다. 그 끝에 실린 뜨거운 기운이 오장육부까지 스며들었다는 사실도 함께.
“쿨럭.”
굳건하던 두 다리가 흔들렸다. 십여 대의 화살을 전신에 깊숙이 박아넣은 채 비틀거리는 노인의 신형을 부축한 광신도들이 비명처럼 외쳤다.
“안 돼!”
“아미르! 아미르! 제발 정신 차리십시오!”
“무엇하는가! 어서 안전한 곳으로 모셔라!”
뒤늦게 상황을 깨달은 광신도들은 그 어느 때보다 크게 동요했다.
도플갱어가 선지자라는 이름으로 정신적인 지주의 역할을 했다면, 노인은 신의 총애를 받는 전사장이자 그들을 이끄는 장군이었기에.
그리고 그런 광신도들의 귓가로, 한 사람의 목소리가 송곳처럼 파고들었다.
“누구 마음대로?”
“……!”
“……!”
찬물을 뒤집어쓴 듯한 충격.
동시에 묵직한 발걸음이 앞으로 나아갔다.
“묻잖아. 누구 마음대로 움직이냐고.”
깊게 가라앉은 목소리. 피로가 짙게 밴 얼굴.
하지만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 친 광신도들은 그중 어떤 것도 보거나 느끼지 못했다.
크게 뜨여진 그들의 눈에는 오직 하나.
화염이 일렁이는 안광(眼光)만이 비치고 있었으니까.
“이 새끼들이 단체로 대추야자를 처먹고 있나. 대답하는 놈이 하나도 없네.”
피가 말라붙은 입가가 들썩인다. 진태경이 미소와 함께 손을 뻗자, 보이지 않는 거대한 기운이 공간을 짓눌렀다.
아니, 지배했다.
스아아아아.
공기가 멈춘다. 바람이 흩어진다.
진태경은 자신의 가슴에서, 중단전(中丹田)에서 샘솟는 무형의 기운을 느꼈다.
반경 수십여 미터는 이미 그에게 속한 권역(圈域)이었고, 경악에 휩싸인 채 그를 바라보고 있는 수백의 광신도들은 침략자였다. 이 땅을 넘어 세상 전체를 더럽히는 악마였다.
‘아니, 너희에게는 내가 악마겠지.’
진태경은 환멸에 찬 눈빛으로 얼어붙은 광신도들을 굽어보았다.
저들을 죽이고 싶지는 않았다. 그저 평화를 원했다.
그는 끊임없이 피를 갈구하는 살귀(殺鬼)가 아니었고, 세상을 위해 한 깃발 아래 선 헌터들이 하나둘씩 쓰러질 때마다 고통과 슬픔을 느꼈다.
하지만…….
결국 이 또한 각자의 목적을 위한 투쟁이다.
평화를 얻기 위해서는 전쟁을 치러야 한다. 그 전쟁 속에는 무수한 핏물과 죽음이 흐른다.
그 외의 선택지는, 어디에도 없다.
“이미 되돌리기에는 늦었어. 나도, 당신들도.”
진태경의 나직한 목소리가 울려 퍼진 그 순간.
고오오옹.
멈춰 있던 공기가, 바람이 깨어났다.
마력(魔力)의 도움으로 인간을 벗어난 회복력을 선보인 노인이 다시금 제 발로 일어선 것도 그때였고, 그러한 노인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허공을 가득 메운 강철의 향연이었다.
“이건…….”
노인은 말을 잇지 못했다. 비단 그가 아닌 그 누구라 해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저 넋 나간 시선으로 지켜보는 것뿐이었다.
창. 도. 검. 도끼. 무수한 화살과 깨져 나간 날붙이들의 파편들.
죽음을 맞이한 옛 주인의 곁을 떠나, 새로운 주인을 맞이한 강철의 물결이 허공에서 출렁였다.
각자의 표적을 향해 그 차가운 몸뚱어리를 번뜩이며.
그리고 그 중심에, 진태경이 있었다.
“유언은?”
믿을 수 없는 현실을 마주한 노인은 탄식했다. 괴물도, 인간도 아닌 혼탁한 기운이 손아귀에 쥔 시미터를 타고 흘러넘쳤다.
“인샬라.”
바라건대, 부디 신의 뜻대로 하소서.
마음속에서 울려 퍼진 기도문과 함께, 노인은 홀로 나아갔다.
공포에 사로잡혀 죽음만을 기다리는 수하들을 뒤로 한 채. 신이 택한 전사라는 사명감과 자부심을 안은 채.
그런데 어째서일까.
‘이것이, 이것이 정말 신께서 바라시던 것입니까?’
누구보다 신을, 선지자를 믿었던 노인은 처음으로 의문을 떠올렸다.
그러나 섬광처럼 달려가는 지금 이 순간에도, 용암과도 같은 마나를 머금은 채 하늘을 뒤덮으며 쏟아지는 강철의 비를 바라보면서도 그 의문에 대한 답을 찾지 못했다.
‘답해 주옵소서. 이곳이 정말, 당신께서 말씀하신 약속의 땅이 맞습니까?’
하지만 노인의 신은 응답하지 않았다.
까마득한 과거부터 지금까지 줄곧 그래 왔듯이. 그리고 앞으로도 그러할 듯이.
다만 신인지, 악마의 것인지 모를 누군가의 목소리가 흐릿하게 귓가에 닿을 뿐이었다.
“죽어라, 늙은이.”
슈화아악!
돌풍이 휘몰아친다. 축축한 빗물 대신 쏟아져 내린 강철의 파도가 그를 집어삼켰다.
몬스터와 인간이 뒤섞인 육신과 기운이 산산이 부서지는 가운데, 노인은 아스라이 울려 퍼지는 끔찍한 비명을 들을 수 있었다.
크아아아악!
검게 물드는 시야. 흩어지는 의식. 그리고 참혹한 최후를 맞이하는 신의 전사들.
‘아아.’
이제야 의문의 답을 알았다.
이곳은 약속의 땅이 아닌, 죽음의 땅이었다.
털썩.
생명이 다한 육신이 힘없이 널브러졌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 답을 찾았음에도, 노인의 얼굴은 분노와 불신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 * *
한순간이었다.
서로를 향해 휘둘려지던 병장기가 허공에서 멈추고, 잔뜩 갈라진 목소리로 토해지던 외침이 뚝 끊긴 것은.
그리고 모두의 고개가 한 방향을 향해 움직인 것은.
파아아앗!
그것은 굉음인 동시에 비명이었다.
허공에서 빗발치는 강철의 비명. 동시에 죽음을 직감한 인간들이 내지르는 공포에 찬 비명.
콰아아아앙!
흙먼지가 솟구친다. 돌풍처럼 솟구친 모래 사이로 무수한 핏물이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촤아악, 철퍽!
수십여 미터 밖에서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던 광신도들이 눈을 깜빡였다.
머리 위로 쏟아진 핏물이 끈적하게 흘러내렸다. 딱딱하기도 하고, 물컹한 무언가와 함께.
그리고 그 무언가의 정체가, 인간의 뼈와 살점이라는 것을 깨닫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아, 아아…….”
손발이 떨렸다. 이빨이 딱딱거리며 부딪치는 소리가 전염병처럼 광신도들 사이로 번졌다.
그들도 이미 알고 있었다. 최후방에는 고르고 고른 정예들이 총사령관과 함께 투입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을.
하지만 지금 이 순간부로, 그들이 알고 있던 사실은 지나간 과거가 되어 버렸다.
전멸(全滅).
전장의 모두가 본능적으로 깨닫고 있었다.
지금 휘몰아치는 저 강철의 폭풍 속에서는 그 누구도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을.
아니, 있다면 그것은 단 한 사람뿐이라는 것을.
‘진태경.’
모두의 뇌리에 떠오른 이름과 함께.
콰아아아아.
서서히 내려앉는 돌풍 속에서, 누군가의 인영이 아지랑이처럼 일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