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825
#824화
새벽이 찾아오면, 어둠이 물러간다.
그것은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것처럼 당연한 이치 중 하나였지만, 누군가의 추격을 피해 도망치는 이들에게는 그리 달갑지 않은 소식이었다.
특히, 그 추격자가 인간인지조차 의심될 정도의 괴물이라면 더더욱.
‘벌써?’
도플갱어는 서서히 밝아 오는 하늘을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너무 이르다. 아니, 생각 이상으로 시간을 지체했다는 표현이 옳을 것이다.
‘최소한 날이 밝기 전에 모든 것이 끝났어야 했다.’
도플갱어도 알고 있었다. 아무리 후회하고 곱씹어 봤자 현실이 달라지지는 않는다는 것을.
그만큼 그가 세워 놓았던 계획은 이미 한참 전에 어그러졌고, 모든 것의 중심이자 시작에는 바로 ‘그놈’이 있었다.
‘진태경.’
욱신.
단지 이름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몸 곳곳에서 찌르는 듯한 통증이 올라온다.
진태경에 의해 수백 번도 넘는 죽음을 겪은 도플갱어는 그 무시무시한 신위를 떠올리며 몸서리쳤다.
‘처음부터 놈에게 접근하지 말았어야 했다.’
실수였고, 욕심이었다.
야마모토 겐지를 흡수한 뒤 서둘러 자리를 뜨거나, 애초에 끝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말았어야 했다.
‘조금만, 아주 조금만 더 채우면 되는 일이었는데.’
처음부터 목표는 다른 인간들이었다.
후방에 남겨져 있던 수많은 헌터들. 그들의 마나와 생명력을 흡수할 수 있다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으리라.
‘빌어먹을.’
하지만 진태경은 도플갱어를 쉽게 놔주지 않았다.
마치 노예를 부리듯이 그를 다루며 자신의 시야에서 벗어나는 것을 허락하는 법이 없었다.
그것은 도플갱어에게 있어 불행이었고, 진태경을 제외한 다른 헌터들에게는 행운이었다.
만약 도플갱어가 진태경의 손아귀를 벗어났다면, 야마모토 겐지의 거죽을 덮어쓰고 후방의 본대로 향했다면…… 수많은 몬스터와 광신도들을 이끌고 사막을 피로 물들였을 테니까.
물론 결과는 정반대였다.
몬스터 군단은 분쇄되었고, 제법 공들여 키운 광신도들은 안전한 도주를 위한 방패막이로 쓰였으니.
‘이렇게 어이없게 당할 줄이야.’
도플갱어는 입맛이 썼다.
자그마치 수만에 달하는 전력이다. 그 강대함은 둘째치고, 오직 그의 명령에 절대복종하는 사병(私兵)들을 잃었다는 점이 더욱 아쉬웠다.
‘그래도 놈이 선택받은 자라는 것을 확인했으니…… 주인님께서는 흡족해하시겠군.’
도무지 그 뜻과 깊이를 알 수 없는 주인을 떠올린 도플갱어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지난 수십여 년간 보이지 않는 장막 뒤에서 은밀히 세상을 주물러 온 도플갱어였지만, 그조차도 자신의 주인 앞에서는 하찮은 종복에 불과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를 따르고 있는 눈앞의 멍청한 인간들처럼.
“아직 멀었는가.”
짐짓 근엄한 어조로 건넨 한 마디에, 검은 터번으로 전신을 꽁꽁 싸맨 흑의인이 대답했다.
“곧 도착합니다. 위대한 선지자시여.”
“느려 터졌군. 이대로는 따라잡힐 수도 있다. 속력을 더욱 높여라.”
“따라잡힌다 하셨습니까?”
“그래, 놈은 생각했던 것 이상의 괴물이다. 무슨 짓을 벌일지 몰라.”
평소와는 달리 조급함과 두려움마저 뒤섞인 도플갱어의 말에, 호위하듯 도플갱어를 에워싼 채 달려가던 수십여 명의 흑의인들이 시선을 교환했다.
이미 한 시간 가까이 전속력으로 달려온 그들이었다. 한데 여기서 더욱 속력을 높이라니.
힘을 아끼기 위해 제 등에 업혀 있는 도플갱어의 눈치를 보던 흑의인이 결국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말씀드리기 송구하오나…… 이 이상으로 속도를 높이는 것은 어렵습니다.”
“뭐라?”
“부족한 저희를 용서하시옵소서, 선지자시여.”
말을 하면서도 쉴 새 없이 나아가는 발걸음.
자신을 등에 업은 광신도의 뒤통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도플갱어가 문득 입을 열었다.
“그래, 그렇구나. 내 잘못이야. 그렇지 않아도 무리하고 있는 그대들의 사정을 모르고 재촉했어.”
“그런 말씀은 감당키 어렵습니다. 거둬 주시옵소서.”
“아니다. 내 어찌 그대들의 마음을 모르겠는가. 함께 자라 온 형제, 자매들을 두고 전장을 떠나면서도 마음이 편치 않았을 테지.”
“그건…….”
“어째서 사악한 이교도들을 피해 이리 쫓기듯이 도망쳐야 하는지도 내심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게야. 그렇지 않나?”
터번 사이로 드러난 흑의인들의 시선이 흔들렸다.
도플갱어의 한 마디, 한 마디가 그들의 마음을 훤히 들여다보듯 정곡을 찌르고 있었다.
수장인 아미르에 의해 오직 선지자를 위한 친위대로 길러진 그들이다.
그러나 모두가 그토록 염원했던 약속의 땅은 척박하기 그지없는 협곡이었고, 푸른 생기와 희망 대신 이교도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곧이어 벌어진 격렬한 전투와 피를 흩뿌리며 쓰러지는 형제자매들.
하지만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신의 뜻을 바로 세우기 위한 성전(聖戰)이라 생각했으니까.
형제자매들의 죽음 역시 거룩한 순교(殉敎)라고 믿었으니까.
적어도 그들이 존경해 마지않는 선지자가, 보잘것없는 몰골로 나타나 전장을 이탈하기 전까지는 그랬다.
‘정말 이것이 옳은 선택인가?’
선지자를 호위하며 끝없이 펼쳐진 서쪽 땅을 향해 사막과 황야를 가로지르고, 오아시스를 지나쳤다.
한순간도 쉼 없이 달려가는 사이, 문득 뇌리를 스친 의문은 점점 커졌다.
신은 전지전능하다. 선지자는 위대한 예언자다.
한데 왜 자신들은 도망치고 있는가. 왜 고작 십분지 일도 되지 않는 이교도의 군세를 피하여 비겁하게 전장을 떠나는가.
아무리 평생토록 다져 온 굳건한 신앙심으로 억눌러 봐도, 마음속에서는 미처 덮지 못한 의문들이 울컥거리며 삐져나온다.
그리고 결국 지금 이 순간, 소리가 되어 혀끝으로 흘러나온다.
“실은,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등에 업힌 선지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을 허락으로 받아들인 흑의인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마침내 저 멀리 모습을 드러낸 목적지를 눈에 담으며.
“맞서 싸운다면 승리할 수 있습니다. 선지자께서 항상 저희에게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신께서는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신다고. 그렇기에 늘 승리와 영광만이 가득할 것이라고.”
쐐애애액.
가파르게 쏘아지는 신형들을 따라 휘몰아치는 바람. 그 사이로 다른 흑의인들의 목소리가 섞여들었다.
“저희는 형제자매들을 버리고 도망쳤습니다.”
“신께 버림받을까 두렵습니다.”
“선지자시여. 전능하신 그분께서 무슨 말씀을 전하셨는지, 감히 여쭈어 봐도 되겠나이까.”
바로 그때였다.
묵묵히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만 있던 선지자, 아니 도플갱어가 입을 연 것은.
“멈추어라.”
단 한시도 쉬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던 흑의인들이 걸음을 멈추었다.
등에 업혀 이동하는 동안 소모되었던 힘을 회복한 도플갱어가 땅에 발을 디디며 중얼거렸다.
“드디어 도착했군.”
주위는 쓸쓸하고 황량했다.
한때 세계에서 두 번째로 컸다는 유전(油田)의 흔적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고, 풀 한 포기 나지 않은 땅에는 누구의 것인지 모를 백골이 굴러다녔다.
죽음의 땅.
그 광경을 본 순간 흑의인들의 뇌리를 스친 말이었다. 그중 하나가 용기를 내어 물었다.
“이곳이 어디입니까?”
흑의인들도 궁금하긴 매한가지였다. 한낱 종복에 불과한 그들은 그저 명령에 따라 움직였을 뿐, 위대한 선지자의 뜻을 감히 짐작하기 어려웠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귓가에 닿은 한 마디에, 모두의 눈이 부릅떠졌다.
“대격변이라 칭하는 환란의 시절. 잠시나마 그분께서 머무르셨던 땅이다.”
“……!”
“……!”
“나의 주인. 또한 만물의 주인이신 그분께서 말씀하셨다. 인간들에게 가라. 그곳에서 때를 기다려라.”
순간, 공기가 멈춘 듯했다.
넋 나간 눈빛으로 주위를 바라보던 흑의인들이 동시에 무릎을 꿇고 목청껏 부르짖었다.
“오오, 오오오……!”
“인샬라!”
“신은 위대하시다!”
그것은 당연한 반응이었다.
선지자가 모시는 주인은 단 한 분이며, 그분께서 임하셨던 이 땅이야말로 성지(聖地)라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었으니까.
그리고 납작 엎드린 채 신의 은총을 부르짖는 그들의 머리 위로, 한 줄기 음성이 이어졌다.
“신께 버림받을까 두렵다 하였느냐.”
어조는 부드러웠다. 보채는 아이를 달래듯.
“그분께서 무슨 말씀을 전하셨는지 듣고 싶다 하였더냐.”
마침내 성지에 이르러 엎드려 절하는 신도들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는 손길은 따뜻했다. 고통에 신음하는 환자의 아픈 상처를 보듬듯.
“그렇다면 알려 주마.”
하지만 그들을 굽어보는 시선은 부드럽지도, 따뜻하지도 않았다.
그것은 마치 사막의 햇빛이 북풍설한(北風雪寒)으로 변하는 것과 같은 변화였고, 뒤이어 들려온 목소리는 싸늘하게 얼어붙어 있었다.
“네놈들이 얼마나 하잘것없는 것들인지.”
그 순간.
퍼엉! 투두둑.
감격에 차 있던 흑의인들은 눈을 깜빡였다.
땅 깊숙이 묻고 있던 고개를 들자, 사방에 흩뿌려진 붉은 핏물과 살점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어……?”
누군가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넋 나간 목소리.
그것은 순수한 의문이었고, 받아들일 수 없는 현실이었다.
그리고 그 의문에 대한 답을 찾기도 전에, 흑의인들의 머리 위로 짙은 어둠이 드리워졌다.
쏴아아아악.
등골이 오싹했다. 의지를 벗어난 손발이 석상처럼 굳었다.
일평생 단련한 신체와 마나도, 허리춤에 찬 검도 지금만큼은 무용지물이었다.
아.
외마디 신음.
흑의인들은 난생처음 느끼는 거대한 공포와 충격에 휩싸인 채, 눈앞으로 닥쳐 오는 어둠을 바라보았다.
마치 거울 표면처럼 매끈한 어둠에는, 그들의 얼굴이 고스란히 내비치고 있었다.
‘이건…….’
더는 새어 나오지 않는 목소리. 굳어 버린 전신.
흑의인들은 비명조차 내지르지 못한 채 눈동자를 움직였다. 그들을 감싸 안는 어둠 위로 한 사람의 얼굴이 보였다.
모두를 약속의 땅으로 이끌 위대한 선지자.
아니, 선지자라고 믿었던 ‘그것’이 그들을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죽음도 무엇도 아닌, 끔찍한 심연 속 무저갱으로 인도하고 있었다.
“들어라, 이 어리석은 것들아. 나약하고 하찮은 인간들아.”
슈우우욱.
어둠이 싱그러운 생기(生氣)를 빨아들인다. 희끄무레한 수십의 영혼이 홀린 듯이 어둠 속 자신을 향해 흘러 들어갔다.
“이 세상에는 오직 한 분의 왕만이 계실 뿐.”
일곱 개의 구멍을 통해 흘러나온 핏물을, 어둠이 집어삼킨다. 팽팽하던 피부가 쪼그라들고 뼈가 바스라진다.
가까워진 죽음. 혹은 심연.
무저갱으로 곤두박질치는 시야 속에서, 그들은 악마의 마지막 음성을 들었다.
– 신은…….
이미 너희를 버렸다.
아스라이 울려 퍼지는 한 마디.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어둠이 드리워졌던 그곳에 남아 있는 것은 경배하듯 무릎 꿇고 있던 스무 구의 미라.
그리고 지난 수백 년간 그래 왔듯이 새로운 생명을 취한 어느 존재뿐이었다.
아니, 그럴 것이라 생각했다.
화아아악.
폐허 위의 허공에서 눈부신 빛줄기가 터져 나오기 전까지는.
그 아득한 섬광 속에서, 청백색의 불꽃이 넘실거리며 쏟아지기 전까지는.
콰아아아아!
강대한 화염이, 도플갱어의 눈동자를 푸르게 물들였다.